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제1부 무의식과 성이론
1. 무의식과 성
사장이 베푸는 파티에 참석한 어느 사원이 축배를 들고 사장의 건강과 회사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우리 모두 사장님을 위해 트림을 합시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프로이트는 이 트림이란 말이 우연히 튀어나온 게 아니라 사장을 존경하는 사원의 심중에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뒤틀림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트림'이라는 단어가 무엇에서 파생되었는지를 밝히면서 그는 인간의 말실수는 의식이 믿는 것을 가로막는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19세기 영국작가 찰스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가난한 고아 핍이 어느 날 부유한 해비샴의 대저택에서 아름답고 오만한 에스텔라를 만난다. 그녀로부터 모욕을 당했음에도 그는 그날 이후 줄곧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신분의 차이를 의식하기에 그녀를 무시하려 했지만 그녀에게 매료된 핍의 본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나타난다. 해비샴 저택을 '해비-텔라'라고 잘못 말해버린 것이다. 우리의 의식 밑에는 사회에서 금기하지만 본능이 원하는 소망을 묻어둔 거대한 창고가 있어서 의식의 빗장을 뚫고 틈틈이 솟아오르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말실수가 아닐까.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 거대한 본능의 저장고는 우리를 단순히 사회적 동물로만 만들지 않고 언제나 본능에 침해받는 갈등의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의 가설은 이 거대한 창고가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꿈은 현실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옛부터 꿈의 신비를 푸는 일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해왔다. 간밤의 꿈자리가 사나우면 그날의 일이 심난하게 느껴지고 돼지꿈을 꾸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는다. 아기를 갖은 후에 꾸는 신비한 꿈은 태몽이라 하여 한 인간의 미래를 점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꿈속에서 갈증이 나 물을 마시고 또 마셔도 해소되지 않을 때 우리는 현실에서 목이 마른 것을 깨닫는다. 또 실제로 소변이 마려울 때 화장실을 찾는 꿈을 꾼다든지 오줌을 싼 아이가 홍수가 난 꿈을 꾸는 것 등 육체적인 소망이 꿈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늘 의식 속에서 그리워하는 사람보다는 잊혀진 사람이 엉뚱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꿈은 현실에서 억압된 무엇인가가 있다는 증거이고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에둘러 이루는 소망충족의 길일는지 모른다. 프로이트에 게 꿈은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왕도였다.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애의 침상을 지키던 아버지가 잠깐 옆방으로 눈을 붙이러 간다. 그는 아들의 방에서 불길이 훨훨 치솟는 꿈을 꾼다. 아버지, 아버지, 내가 불에 타는 게 안 보이세요? 아들은 외쳤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아들의 방으로 달려갔다. 정말로 그 방에서는 불길 이 치솟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이 유명한 일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리 적인 현실이 꿈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아들이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소망이 꿈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이라는 프로이트의 작업의 첫획을 그은 책은 '꿈의 분석'이었다. 그의 나이 44세가 되던 1900년에 출간되어 첫판이 팔리는 데 수년이 걸렸지만 지금은 고전이 되었다. 그에게 꿈은 말실수와 함께 인간의 의식 저변에 묻힌 무의식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는 꿈이 재현되는 방식을 설명했고 그것은 소쉬르 언어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언어의 속성, 아니 비유체계의 속성을 설명한 선구적 작업이 된다. 현실에서 금지된 인간의 소망은 그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의식 밑에 잠재해 있다가 의식의 고리가 헐거워진 틈을 타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나 그대로 재현되지 못하고 시처럼 압축되고 무대 위의 배우처럼 다른 모습으로 위장한다. 꿈사상이라는 이야기를 몇 장면으로 압축하고 그래도 안심이 안 되어 옆의 것과 슬쩍 자리를 바꾼다.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isplacement) 이다. 이 두 단계를 통해 억압된 내밀한 욕망은 몇 개의 그림으로 재현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꿈작업은 훗날 야콥슨이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언어 의 속성을 압축(은유)과 전치(환유)로 푼 것과 같다. 모든 비유체계는 은유와 환유로 되어 있고 문학 역시 마찬가지라면 프로이트가 꿈을 해석한 방식은 바로 인간의 사상과 재현의 체계를 설명한 셈이 된다. 그러기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과학이었고 동시에 비 과학이었다. 언어 혹은 꿈 작업은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대체라는 절대가치와 옆의 것을 짚는 허구가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과학 속에 개입되는 이 허구 때문에 문학과 예술이 존재하고 프로이트의 이론 역시 해석되고 재해석되는 것은 아닐까.
프로이트가 그토록 무의식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신분석자로서 환자의 신경증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또 유대인으로서 박해받는 까닭을 짚어보고 싶어서다. 문명이 발달되는데도 우리는 왜 행복하지 못한가, 바로 그 존재의 불안을 해석하기 위해서다. 그는 환자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와 문명, 존재의 궁지를 분석하는 분석가였다. 우선 최면요법보다 자유연상법을 선호했던 그는 환자의 기억을 되살려 억압된 것이 무엇이고 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화산폭발로 무너진 폼페이의 잿더미 속에서 옛 도시의 모습을 재현해 내듯 그는 환자의 기억 속에 묻힌 상흔을 되살려내려 한다. 무너진 잿더미가 곧 무의식이고 그 속에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들을 되살려내 조각들을 맞추어 이야기 (서사, narrative)를 만들어내야 한다. 신경증의 원인이 되는 상흔, 사회와 현실이 금지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어떤 것을 캐어내야만 환지치 병이 치료되기 때문이다. 쾌감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은 타인과 어울려 살아야 되는 현실 속에 서 금지되고 억압된다. 무의식은 바로 이 만족과 충족을 원하는 본능이다. 그러므로 이기적이다. 그런데 이 본능은 사회가 억압해도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다른 모습으로 실현을 꿈꾼다. 프로이트는 본능을 중시한 당대의 자연주의 사상에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결합했다. 리비도라는 에너지는 형태를 달리할 망정 그 총화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꿈은 잠 속에 등장하는 리비도 충족의 한 형태다. 말실수에도 소망이 튀어나오고 기억을 되살리는 환자의 대화 속에도 소망이 깃들어 있다. 그러면 인간에게 최초로 억압된 가장 근원적인 상흔은 무엇일까. 가장 본능적인 리비도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인간은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세상에 태어난다. 마치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듯이 어머니는 대지요, 고향이다. 그의 첫 울음은 고향과의 이별, 대지와 분리되는 고통스러움의 표현이다. 그리고 한동안어머니의 품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자리가 젖으면 갈아주고 울면 먹여주고 씻겨주고 안아준다. 아무도 아이에게 명령하거나 야단치거나 금지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것이고 나는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나와 어머니 사이에 틈새가 없이 완전한 합일을 느낀다(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이 행복한 시기를 프로이트는 '유아기',혹은 '근원 적 나르시시즘' 이라 이름 붙이고 약 2세에서 4제 사이로 본다. 그 이후부터 금기와 억압이 일어난다. 아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연인인 것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라는 시기적인 구분은 이후 이론가 들에 의해 재해석되기도 한다. 라캉은 유아기를 '상상계'라 하여 생후18 개월까지로 보고 크리스테바는 유아기를 세분하여 여성이론을 만든다. 어쨌든 사회를 의식하고 현실 속에서 압박감을 느끼며 사는 인간에게 현 실을 모르던 시절은 지복의 시기였고 이 평화와 이기적인 충족에 대한 소 망은 억압될지라도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성인이 되어 거꾸로 추론한 가설의 산물이다. '꼬마 한스에 관한 분석' '후기'는 이것을 기막히게 잘 표현하고 있다. 한스의 아버지가 기록한 긴 보고서를 그대로 소개한 후 긴 세월이 지나 한스를 만난 프로이트. 한스는 그 속에 그려진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전 혀 낯설게 느낀다. 내가 아니라고. 억압된 것은 바다 저 밑에 깊숙이 가라앉은 타이타닉의 잔해와 같아 물위에 있는 나의 시선으로는 볼 수가 없다.
인간의 원초적 행복은 어머니와 한 몸이었을 때이고 원초적 상흔은 어머니와의 헤어짐이다. 아버지 때문에, 아우 때문에 어머니를 빼앗길 때 그는 그 방해물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 물론 그 증오는 억압되지 만. 어머니는 프로이트의 가설에서 쾌감원칙의 대상이요, 영원한 애인이며 삶의 목표요, 죽음으로 완성되는 최후의 목적지이다. 프로이트의 글, '세 바구니의 주제'(The Theme of the Three Caskets, 1913)를 보면 정신 분석에서 어머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신화와 문학에서 되풀이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는 세 번째 여신, 탄생 과 죽음의 여신이다. 아름답고 옳고 말이 없는 '리어왕'의 셋째 딸 코딜 리어를 비롯해 많은 작품들이 세 번째 것에 의미를 둔다. 마지막 선택으로 "바로 그것"인 세 번째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욕망을 드러낸다. 그는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성장하면 어머니를 닮은 연인의 품에서 사랑 받기를 소망한다. 이제나이가 들면 아무도 그를 사랑해주지 않기에 대지의 품안에 안길 것을 소망한다. 흙은 세 번째 연인이요, 마지막 선택으로 어머니의 또다른 모습이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근원적 대상으로서 어머니는 은유요, 연인과 대지는 어머니가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환유이다. 은유는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어머니이고 환유는 늘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잃어버린 어머니다.
억압된 것이 있고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된다는 프로이트의 가설은 그의 글 전체에서 다르게 되풀이되는 무의식이요, 타자이다. 이 리비도 불변의 법칙은 오늘날 푸코의 '성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데리다나 라캉등의 현대 '해체론'의 기원이 되고있다. 이성이 억압해온 감성은 제거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늘 다른 모습으로 돌아오고 중심이 억압한 주변, 제국이 억압한 야만인은 타자로서 중심 속에, 제국 속에 자리잡고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이나 미학, 그리고 탈 식민주의 이론들은 모두 이 타자가 있음을 보여주어 중심주의나 객관재현의 독재가 허구임을 드러낸다. 역사의 타자로서 여성들이 프로이트 이론에서 저항의 근거를 찾을 때 끌어내는 부분이 바로 이 무의식과 타자이다. 프로이트의 글, '가족 로맨스'(Family Romances, 1909)에서 무의식이라는 타자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어릴 적에 아이는 자신의 부모를 절대적이고 완벽한 최고의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현실에 눈을 뜨면 아이는 부모를 타인과 비교하게 되고 그들의 왜소함에 실망을 느낀다. 게다가 동생이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빼앗기게 되면 질투를 느끼고 증오마저 경험한다. 아버지의 권위를 벗어나 독립하려는 아들의 노력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낳고 아들은 그 불만을 백일몽이나 공상으로 해소하려 한다. 공상 속에서 아들은 왕이나 멋진 기사, 우아한 황태자를 꿈꾸며 부모에 대한 실망을 위로 받는다. 가족 로맨스의 두 번째 단계에는 성이 개입된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늘 불확실한 존재이다. 이에 비해 어머니는 확고한 존재로 아이의 환상 속에 로맨스의 주인공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를 라이벌로 느끼고 아버지 에 대한 실망까지 곁들여 어머니를 사랑하며 내밀한 각본을 꾸민다. 자 신을 제외한 형제 자매를 모두 서자라고 믿고 그러기 때문에 누이들 가운 데 성적으로 끌리는 대상이 있으면 근친상간도 꿈꾼다. 프로이트는 이 글의 말미에서, 이런 각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끔찍한가 나무라겠지만 지극히 자연스럽게 시작된다고 말한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애정 밑에 숨은 강한 증오심, 지나간 어린 시절에 대한 비대해진 그리움은 그런 사 악한 그림을 그려낸다. 인간은 그렇게 명료한 이성의 존재만이 아니요, 억압된 동물적 본성은 틈틈이 의식을 뚫고 솟아오른다. 프로이트는 이 글에서 억압된 무의식이 어떻게 돌아오는지 보여주고 그것이 성과문명의 이해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암시한다. 문명과 문화사란 아들이 아버지를 배반하며 독립해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배반과 독립의 밑바탕에는 강렬한 애정과 실망에서 오는 증오가 깔려 있다. 가족 로맨스는 아이가 성장한 후에도 늘 그리게 되는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로서 환상 속의 고귀한 남녀는 모두 어릴 적에 흠모했던 부모의 잔상이다. 그러므로 문명이 아무리 성본능을 억압해도 다른 모습으로 되풀이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성인이 된 남성은 현실원칙과 쾌감원칙을 융통성 있게 수용한다. 만약 이때 결벽증과 죄의식으로 쾌감원칙이 돌아오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면 신경증 환자가 되고 지나치게 수용하면 도착증 환자가 된다. 여성에게 신경증 환자가 더 많은 것은 결벽증 때문이다.
무의식과 타자의 귀환을 흔한 일상에서 찾는 프로이트는 성의 대상을 선택하는 흔한 예로 어머니에 대한 어릴 적 사랑이 어떻게 달리 나타나는지 보여준다. 고귀한 신분의 남자가 그에 걸맞은 여성을 아내로 맞은 뒤 그녀에게 애정을 전혀 못 느끼고 비천한 신분의 여자를 평생 동안 숨겨놓고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은 아주 흔해서 동양에서는 양반이 기생집에 드나들거나 소실을 맞는 게 당연시되었고 서양에서도 귀족이 비천한 계급의 정부를 두는 일이 흔하다. 아니 더 흔하게는 오늘날에도 결혼 후 곧 불감증에 빠지거나 같은 대상을 바꾸고픈 욕망은 사랑의 속성에 속할 정도다. 술꾼은 늘 같은 술을 마셔도 싫증이 나지 않는데 왜 사랑은 같은 대상에 싫증을 내는가. 성본능 그 자체 속에는 이미 완벽한 충족의 실현을 싫어하는 무언가가 들어 있지는 않을까. 맨 처음에는 그저 전화로 음성만 들어도 좋았다. 그 다음에는 만나서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고 그 다음에는 손길만 스쳐도 짜릿했으나 그 다음에는 손목을 잡고 입술을 찾고‥‥‥ 이렇게 사랑은 완벽한 충족을 모르는 욕망 그 자체다. 그래서 욕망은 욕망을 욕망 한다. 성본능과 현실이 타협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간의 주체를 욕망 하는 주체로 보았을 때 이 부분은 좀 더 명료해진다. 욕망의 본질은 바로 죽음 외에는 아무 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핍'(lack)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인간은 욕망을 욕망하고 동물은 대상을 욕망 한다고 했을 때, 또 라캉이 인간 주체에 상상계라는 거울단계를 상정할 때 이들은 모두 성본능 속에 있는 결핍을 암시했다.
이제 프로이트의 글에서 이 부분을 짚어보자. 그의 글 전체가 이것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랑이 지닌 보편적인 대상천시의 경향'(On the Universal Tendency to Debasement in the Sphere of Love, 1912) 은 특히 이런 성본능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왜 성본능은 장애물이 있어야만 더 증진되는가. 남성이 여성과 사랑에 빠질 때는 그녀를 과대평가 하다가 소유하고 난 후에는 과소평가 한다면 여성은 얼마나 불리한 입장에 서는가. 결혼 전까지 순결을 강요한 성이 결혼 후에 불감증에 빠진다면 그런 도덕이란 인간에게 이익만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성이론의 고전으로 불리는 '성이론에 대한 세 글'에서 암시된 것들을 이 글에서 다르게 되풀이하면서 무의식이 얼마나 일상에 끈질기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사랑은 두 가지 성향을 갖는다. 애정성향(the affectionate current)과 관능성향(the sensual current)이다. 전자는 유아기의 주로 2세에서 4세 사이에 가장 강하게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다. 자신을 보살펴주는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육체적 접촉과 정신적 평안이 완전히 일치하는 단계로 이 시기의 리비도를 자아보존 본능, 혹은 에고 본능이라 이름 붙인 다. 4세가 지난 후 아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여러 가지 금지를 당하거나 부모로부터 꾸지람을 듣는다. 또 형제가 태어나 사랑을 빼앗긴다. 아 이는 이제 어머니로부터 받던 사랑을 포기하거나 억압한다. 유아기의 무한한 애정본능은 차츰 축소되고 사춘기에 이르면 남녀의 성차가 육체에 나타나면서 관능성향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사라지지 않고 타자로 나타난다.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원초적인 것이고 그것에 대한 금기는 너무도 강렬하여 이후의 많은 대체물들은 금기가 있어야 욕망이 가능하거나 증폭된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에서 벗어나 지 못하고 고착되거나 어릴 적 부모의 성행위에서 우연히 받은 나쁜 인상 이 남아 있으면 주체는 막연히 내부에서 사랑의 행위를 억제하거나 막는 성향을 갖는다.
사춘기란 어릴 적의 나르시스적 에고본능이 억압되고 차츰 성본능으로 바뀌며 자기애에서 대상으로 애정이 옮아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남녀는 결혼을 통해 그 동안 억압되어온 성본능을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현실원칙에 종속시킨다. 자식을 낳아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도덕적인 임무다. 그러기에 성본능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만족을 얻기 어렵고, 오직 억압된 애정성향과 새롭게 태어난 관능성향을 잘 조화시켜야만 정상적인 성생활이 가능하게 된다. 무의식 속에 억압된 어머니에 대한 소망이 그토록 강한데 사회가 금지령을 내릴 때 성인이 된 남성은 어머니와 닮지 않은 여성을 찾으려 애를 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여인은 어머니와 어딘지 닮아 있다. 에고 본능이 가치 있게 평가한 대상, 즉 존경하는 여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제 어머니를 천한 창녀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애정의 대상을 관능의 대상으로 바꿔치는 것이다. 천한 여성에게만 성적 만족을 느끼는 남성은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하고 현실에서 만족을 못하기 때문이다. 금기가 있을 때만 성욕이 강해지는 것도 남성이 사랑에 빠진 여성 을 과대평가 하다가 소유하고 난 후에 과소평가 하는 것도, 어릴 적에 경험한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고 나타나는 데 있다.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서 무의식은 이토록 강렬하고 끈질긴 타자이다. 그것은 리비도요, 원초적 상흔으로 깊이 잠재하면서도, 신경증환자는 물론 정상인의 일상에도 표층에 흔적을 드러낸다. 그러면 이런 성이론들 은 여성이론가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프로이트 자신이 남성이었는데 그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알 것인가. 그러나 프로이트가 분석한 히스테리 환자들은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증상은 사회가 금기한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환자의 기억을 통해 무의식을 더듬으며 가부장제 사회가 억압한 여성의 원초적 소망과 경험을 읽게 된다. 그가 남긴 기록들은 인간 심리를 과학적으로 탐색하려 애쓴 흔적이다. 늘 불확실한 여운을 남기면서... 그러면 이제 프로이트의 성이론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떻게 혁명적이고 어떻게 보수적인지 알아본다. 혁신은 여성이론가들이 끌어내는 부분이고 보수적인 측면은 그들이 비판하는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