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 권택영
1. 에로스의 슬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들의 심리 속에 억압된 상흔을 밝혀야만 했다. 최면보다 대화를 선호했던 그는 환자의 의식이 억압한 어떤 것을 밝혀내기 위해 꿈을 분석했다. 꿈이란 의식의 빗장이 느슨해진 순간에 억압된 소망이 에둘러서 충족되는 길이다. 그 소망은 물론 사회에서 금기된 것으로 빗장이 느슨해도 안심이 안 되어 위장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꿈의 내용을 짧게 압축하고 그 옆의 것과 자리를 바꾸고 몇몇 장면으로 나타난다. 분석자는 이 짧은 도해에서 자리바꿈과 압축을 거쳐 긴 이야기를 풀어낸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환자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의식이 억압한 거대한 무의식이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이것이 그가 환자를 치료하고 세상과 삶을 설명해낸 많은 글들의 원리였다. 무의식이란 무엇일까. 사회가 금기한 어떤 것이라면 가장 원초적인 욕망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본능이다. 에로스야말로 현실이 아무리 금지해도 단념치 못하고 평생토록 충족되기를 꿈꾸는 삶의 에너지다. 그렇다면 현실에 눈뜨기 전,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의식하기 이전 어떤 시기까지 인간은 이 에로스를 충만히 누렸을 것이다. 억압된 것이 있다는 가설은 그것이 억압되기 이전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니까. 아이에게 억압이 일어나는 최초의 상흔은 무엇이고 언제일까. 아마도 어머니의 몸에서 떨어져나와 한동안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세상에서 오직 나와 어머니만이 있다고 믿는 시기. 젖을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그녀의 얼굴이 그가 볼 수 있는 전부였던 시절. 아이는 그녀에게 전부요, 그녀는 아이에게 전부인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시기가 있었으리라. 어머니의 사랑에 가득 찬 입맞춤과 온몸을 닦아주는 씻김에서 아이가 느끼는 아늑한 지복만큼 더 충만한 에로스가 어디 있을까. 프로이트는 이 시기를 유아기 성이라 하여 약 3,4세 정도까지로 잡고, 라캉은 조금 좁혀 생후 18개월까지로 잡는다.
물론 이 시기는 무의식이 언제부터 시작되는가를 거슬러 추정한 가설이다. 그런 충만과 지복은 그리 오래 누릴 수 없다. 어머니와 아이만의 겹쳐진 얼굴 사이로 아버지가 들어오고 새로 태어나는 동생이 들어온다. 자신과 어머니 단 둘뿐이라고 믿었던 세상 속으로 타인이 들어오면서 아이에게 억압이 시작된다. 현실을 의식하면서 아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것임을 알게 되고 사랑은 삼각관계로 발전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단념할 수 없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어져주기를 바란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그러던 아이는 어느 날 어머니와 여자아이에게 남근이 없음 을보고 거세의 공포를 느낀다. 어머니를 단념하지 않으면 자신도 그리된다는 두려움으로 그는 아버지같이 되어 어머니 같은 연인을 얻으리라 마음먹는다. 성장한 아이는 사춘기에 이르고 대상을 향해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부터 방황과 좌절과 동경과 기대와 복잡한 청춘이 시작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문학작품들은 우리가 지상에서 낙원을 되찾는 것만큼 진정한 사랑을 되찾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준다. 눈이 먼 에로스는 금촉 화살과 납촉 화살을 동시에 가지고 다닌다. 눈이 멀었으니 제대로 맞출 리가 없고 사랑의 금빛 환상 속에는 잿빛 증오와 슬픔이 들어 있다. 왜 낙원을 되찾지 못하고 사랑에는 증오가 깃드는가. 왜 결혼 전에는 연인에게 금빛 왕관을 씌우다가도 결혼 후에는 구릿빛 왕관도 아까워하고, 고귀한 아내를 둔 지체 높은 양반은 천박한 첩에게서 지복을 찾고 고귀한 백작은 천한 정부에게서 성적인 만족을 누리는가. 프로이트는 이 모든 사회 현상을 설명해낸다. 그는 정상인과 신경증 환자의 차이란 게 억압을 요구하는 현실에 얼마만큼 잘 적응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있어온 대량학살이나 폭정은 정상보다 더 정상에서 시작한 신경증보다 더 위험한 신경증이었던 것이다.
2. 나르시시즘에의 향수
어머니의 품안을 떠나야 하는 아이는 아버지의 법인 사회 속으로 들어서지만 달콤한 품안에서의 기억을 잊지 못한다. 내가 그녀요 그녀가 나였던 너와 나만의 세상에는 타자가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를 바라보기 만할 뿐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는 것을 모른다. 그녀의 얼굴이 곧 내 얼굴이라고 믿는 이 오인의 단계를 프로이트는 "원초적 나르시시즘"이라고 불렀고 라캉은 '거울단계' 라고 말했다. 나르시스가 물위에 비친 청년을 사랑할 때 그는 바로 자신을 사랑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어머니가 자신만을 보살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아기 성은 억압되지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현실 속에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돌아온다. 억압된 소망이 꿈으로 나타나듯이 원초적 나르시시즘은 주체형성에서 뿌리이다. 아이는 거세의 위협을 느끼며 사회화되지만 결코 어린 시절에 누린 지복의 순간을 잊지 못하며 그것이라고 믿는 대상을 향해 다 가서고 그것이라고 믿는 대상을 위해 일한다.
모든 사랑이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완벽한 경험을 되돌리려 하는 것이 기에 사랑에는 근본적으로 이기심이 깔려 있다. 연인을 사랑하지만 사실은 그녀의 얼굴 속에서도 나만을 보고 있다. 사춘기에 이른 청년은 연인 을 갈망하는데 이때 그녀는 잃어버린 어머니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형이기에 자아 이상(ego-ideal)이다. 그러기에 그녀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자존심이 서서 살맛이 나고 그녀로부터 거절당하면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그녀를 미워하게 된다. 사랑이 쉽게 증오로 바뀌는 이유다. 또 상처를 받은 만큼 대상에게 상처를 주러 하는데 이것이 심해지면 가학증과 피학증이라는 병적인 증세를 나타낸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남도 사랑하지 못한다는 말은 이런 병적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쓰이는 말이다. 사랑이 근본적으로 이기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사랑한다는 사실보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실했으나 결코 단념하지 못하는 어머니는 늘 그리워하는 잃어버린 고향과 같다. 인간은 어릴 적에 누린 어머니의 아늑한 품속을 성인이 되면 연인에게서 찾는다. 그리고 노인이 되면 안아줄 연인이 없기에 대지의 품을 그리워한다. 프로이트에게 '성' 이란 흔히 생각하는 남녀간의 섹스만이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넓고 포근한 평화요, 대지의 품과 같은 아늑한 기쁨이다. 원래의 성은 남녀의 차이도 없었고 부위도 제한을 받지 않아 유아에게는 온몸이 성감대였다. 그런데 문명은 노동력을 생산해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 성을 남녀 사이의 것으로 또 생식기로 제한하고 그 외의 성을 도착이라고 금기했다. 동성애나 성인들의 전회는 유아기 성이 남아 있는 흔적이다. 문명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려고 애써왔는데 왜 성도착이 늘어나고 신경증 환자가 늘어나는가를 곰곰이 생각한 프로이트는 사회가 억압한 무의식이 있다는 가설을 만들었다. 모든 철학자들처럼 그도 인간이 왜 불행한가 그 원인을 더듬는 데서 사유를 시작했던 것이다.
문명화된 성이란 이처럼 축소되었고 인간이 사회를 받아들이면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지만 아무도 잃어버린 평화를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다만 타협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연인을 금으로 보다가 결혼 후에는 구리로 보는 것도 억압된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대상을 향해갈 때는 그것이 잃어버린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상을 일단 손에 넣고 보면 그런 어머니는, 그런 안락함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에 대한 향수는 끈질기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또 대상을 향해간다. 어머니가 억압되었기에 그는 고귀한 연인을 아내로 맞으려 애쓴다. 그러나 그녀에게보다 천한 여자에게서 더 성적 만족을 얻는다. 거세에 대한 공포, 어머니를 금지하는 사회의 법이 어찌나 깊이 뇌리에 박혔는지 그는 아내에게는 자유로운 유아기 성을 열지 못한다. 아내는 자식을 낳고 가정을 꾸미기 위한 문명화된 성만을 실천하는 대상이라고 교육 받아왔기 때문이다.
원초적 나르시시즘이 억압되었다는 가설로 프로이트는 본능과 현실 사이에서 양가적인 삶을 살아야 되는 삶의 궁경과 근원적 허무를 설명해낸다. 죽음만이 우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삶의 목적을 추구해야 하는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연인도, 그 어떤 대상도 잃어버린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다면 삶이란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이고 그 과정이 정당해야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것이 우 리가 누릴 수 있는 생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과학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19세기 말, 문학에서는 자연주의 사상이 퍼지던 때 유대인이기에 의대 교수가 되지 못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로 개업하며 인간의 심리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삶과 문명 속에 내재한 불만의 원인을 억압된 무의식이 있다는 가설로 설명해낸 그는 문명이 아무리 금지해도 본능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변형된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변형될지라도 에너지의 총합은 같다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서 리비도 불변의 법칙을 끌어낸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지만 무의식이 분명히 있다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초기에는 혁신적인 글을 썼다. 성의 문제에서도 억압된 동성애를 암시하고 문명에 대해서도 불만스런 시선을 던진다. 그러나 후기의 글들에서는 초자아를 설정하여 자아가 어떻게 본능의 요구를 사치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게 조절해 나가느냐에 초점을 둔다. 후기의 글에서 제시하는 강박적인 '반복충동'도 자아가 어머니 없는 현실을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에 관심을 둔 발견이었다.
성에 관한 이론도 초기의 '도라 분석'과 같은 혁명적인 글에서, 후기에는 성차가 존재하던 당시 상황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다보니 남근선망이니 거세 콤플렉스를 조금도 의심치 않고 사용하게 된다.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여성성을 설명하여 성차를 고착시켰다고 여성들이 비난한 것은 이런 연유였다. 그의 이론이 무(nothing)라는 실존적인 삶의 본질을 설명할 때는 그리도 타당해 보이지만 성이 사회화될 때 남녀가 갈라서야 되는 부분은 시대에 따라 많은 논란을 야기하게 된다. 삶에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부분과 변치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에로스는 변치 않지만 권력의 문제는 이동한다. 또한 나르시시즘에의 향수는 우리의 삶을 양가적이 되게 하여 실재에 관한 논의를 끊임없이 야기하는 철학의 문제와 연결된다. 정신분석이 성, 문화, 예술, 그리고 사회이론으로 계속 논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