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들의 풍류기 술. 멋. 맛 - 원융희
술 예찬론 - 고대편
이원과 유관의 풍류
이원과 유관은 세종 임금 시절 정승을 지낸 사람으로 각기 '술대접 받은 얘기'와 '술대접 한 얘기' 중에 막걸리에 얽힌 일화가 있다. 이원이 일찍이 영남지방을 나가 살피는 안찰사가 되어 여러 고을을 순회하다가 동래에 이르렀을 적이었다. 이원이 어느날 공무를 마치고 나서 말을 타고 혼자 나섰다. 아전들이 감히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못하고 살며시 그 뒤를 밟아보니 어느덧 동백정에 이르었다. 그가 나무 밑에서 시를 읊고 휘파람을 불고 돌아갈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하다는 이름을 독차지 하다시피 한 동백정의 절경에 취한 것이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술두루미를 가지고 와서 꿇어앉았다.
"이 늙은 것은 정자 옆에 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옵건데, 정자 위에서 한 손님이 머뭇거리시는 모습이 대관인 듯 하옵기에 감히 촌 막걸리를 가지고 와서 올립니다."
마침내 '부어라' 하여 마시니, 참 맛있는 술이었다. 이원이 크게 기뻐하며 연달아 몇 잔을 들이켰다. 주위 몇 리에까지 모두 동백나무, 꽃향기에 어우러져 취흥이 도도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술에 얼큰해지고 또한 경치에 황홀하게 취해 있는데, 어부 두세 사람이 제각기 잡은 산 전복을 바쳐왔다. 필시 더 진한술의 청주를 곁들여 바쳤으리라. 정자 동남쪽에 큰 바다가 가로 놓여 뛰어난 절경은 비길 데가 없어 흥취를 더욱 돋우었다. 이윽고 한 백정이 노루 새끼를 안고 말을 타고 와서 인사를 했다.
"다행이 생육을 얻었사온데 대인께서 여기에 계시옵기에 감히 드리나이다."
이리하여 그 고기를 회치고 굽고 삶아서 더 진한 소주를 기울여 술잔을 주고 받으니 이번에는 인정에 사뭇 취하고 말았다. 이때 연락하는 이가 "아사(부지사 격인 도사)께서 행차하십니다."소 하자 이원이 벌떡 일어나 맞이하며, "촌 늙은이의 대접에 시달리다 보니 이토록 취했구려" 했다. 아사가 "현감도 왔으나 감히 뵈러 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하자 이원이 "어서 오라고 하시지, 이같은 들 자리에서 무슨 예절을 번거로이 차리시오" 했다. 현감이 들어서자 진수성찬으로 술상이 바뀌고, 풍악소리가 드높아졌다. 밤이 깊도록 즐겼는데, 사실 아까 늙은이들이 바친 술과 안주는 아사와 현감이 그렇게 시킨 것이었다. 이원이 처음에는 이 고을에서 대접받는 폐를 끼칠까봐 우정 몸을 마침내 술에 빠지고 말았다. 훗날 청백리가 된 청렴한 감사관을 이렇게 속여 대접한 것이었다. 유관은 정승을 지내고 나서도 손님이 와서 술대접을 할 적이면 늘 탁주 뿐이었다. 뜰에 막걸리 한 항아리를 갖다 놓고 늙은 여종을 시켜서 사발 하나로 술을 차리게 했다. 제각기 몇사발씩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그는 벼슬이 정승인데도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 제삿날에는 여러 생도에게 음복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자반 한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삼게 하고는 막걸리를 질항아리에 담아 내왔다. 먼저 이원이 한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한두순배 돌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도 잘 차린 안주에 좋은 술을 마시게 한 적이 있었으니, 함경도에서 북방을 지킬 적이었다. 함경도 감사격인 '길주도 안무절제사'가 되어 침입한 야인 과수를 죽이고 그 무리를 격퇴하자, 태종이 사신을 보내 술을 내리었다. 명령을 받들어 내린술이니까 향기로운 술에 좋은 안주를 곁들였음은 물론이겠다. 그가 우의정이 되었을 때 임금께 글을 올려 당나라 한유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를 인용하고 송태조가 대포하사하던 일을 아뢰었다. 곧 임금이 전 국민에게 주식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한 것이 고사 '대포'가 되었다. 이런 옛일을 본따 삼짓날(음력 3월3일)과 중양절(음력 9월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에게 경치 좋은 곳을 골라 놀며 즐기게 하여, 태평성대의 기상을 나타내도록 청했다. 세종이 이를 옳게 여기어 받아들여 시행하게 했으니, 태학생의 사기를 복돋우고, 하급관료들도 자연을 벗삼아 경치를 즐기게 하여 기상을 높이려 들었다.
유관이 청렴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 어느 때 장마가 져서 집에 비가 줄줄 새는 바람에 그가 일산(감사나 수령이 행차때 쓰는 자루 긴 양산)을 들고 비를 받으며 부인을 바라보고 "이런 일산도 없는 집은 어떻게 하겠소"하니 부인이 "다른 준비가 있지 않겠습니까" 해서 서로 웃었다는 말은 익히 아는 일이다. 그는 정승이 되어서도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이 누가 찾아와도 맨발로 짚신을 끌고 나와 맞이했고, 때로는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그가 사는 집은 초가 두어 칸으로 밖에는 울타리도 담장도 없었다. 태종이 선공감을 시켜서 밤중에 바자 울타리를 쳐주면서 그가 알지 못하게 하리만큼 그는 청렴결백했다. 집안은 돌보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베풀기를 즐겨했으니, 유관은 항상 민생을 도탄에서 건질 것을 마음에 두고 지냈으므로, 다리를 놓거나 원우를 지으려는 이가 있으면 돈과 배를 선뜻 내주었다.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으나,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얻으려하지 않았다.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이원과 유관은 고려말에 태어나 급제했다. 이원은 14세에 진사가 되고 18세에 급제를 하리 만큼 성장했다. 유관은 약관 25세에 급제를 하기 전인 19세 적에 공조총랑이 되었으니 얼마나 이른 벼슬이었는가. 이원은 태어난지 넉달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자형 권근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했다. 천하의 명문장 권근은 처남의 학문이 나로 진보하고 그 성취가 눈부신 것을 보고, "우리 장인이 돌아가지 않으셨다"고 했다. 명나라 사은사로 갔을 적에 이원의 모습이 하도 헌결하고 웅위하며 뭇 닭 속의 한 학처럼 우뚝하였으므로 영락제가 기이하게 여기어 칭찬하며 "누런 수염 재상은 다음에도 다시 사신으로 오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듯 그는 드레(사람의 됨됨이로서의 점잖음과 무게)가 있었다. 유관은 세살에 고아가 되어 숙부 하정이 자기 자식처럼 길렀다. 글읽기에 힘쓰게 하고 애써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마침내 성취하여 급제하게 하고는 재물과 종을 나눌 적에는 마치 형을 대하듯 조카를 생각하고 수량을 더 많게 주었다. 유관도 나중에 녹(봉급)을 받아서는 일가와 이웃에 골고루 나누어 먹었다. 그는 따뜻하고 어질며 돈독하고 두터운 성품을 타고났다. 세종 임금 시절에는 막걸리를 즐기며, 위엄은 있으되 조를 빼지(짐짓 겸손한 체하거나 위선적인)않는 정승도 많았다. (자료:진로,1994.봄) 국선생전-동국이상국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