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들의 풍류기 술. 멋. 맛 - 원융희
술 예찬론 - 고대편
하늘에서 귀향 온 주선 이백
이백은 한때 한림학자로서 당나라 현종을 측근에서 받들다가 그들의 부패상에 비위가 뒤틀려 간악한 무리를 뒤로하고는 홀연히 한평생을 아름다운 산천과 달에 심취해 방랑길에 오른 인물이다. 술을 사랑했던 그가 섬세한 필체로 창작해낸 싯구들은 지금도 동서고금의 만인에세 공감을 주고 있다. 분노한 바다나 폭포수같이 거칠고 억센 시를 쏟아내며 술에 만취한체 데카당스에 빠지기도 하고 잔잔한 호수를 백조가 거닐 듯 아늑한 면모와 아름답고 섬세한 시정을 함께 지닌 도가적 낭망주의 시선이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사랑했는지는 이백을 시선의 경지에 올려 놓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달아래 혼자 술든다 하늘이 술을 사랑 않았다면/하늘엔/술별 없었고/땅이 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땅에 술샘은 있지 않았으리라/하늘에 부끄럽지 않아라/ 청주는 성인에 비유하고/ 탁주는 현인과 같다하네/성인과 현인이 이미 술을 마셨거늘/ 굳이 내가 신선이 되길 원하랴/ 선작이면 대도에 통하고/ 한말이면 자연에 합치되도다/ 이는 오직 술꾼만이 취흥을 알 지니/ 아예 술도 못하는 맹숭에겐 전하지 말지어다
독작 꽃사이에 앉아/ 혼자 마시자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 됐다./ 달도 그림자도/ 술이야 못 마셔도/ 그들 더불어/ 이 봄밤 즐기리./ 내가 노래하면/ 달도 하늘을 서성거리고/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춘다./ 이리 함께 놀다가/ 취하면 서로 헤어진다.
그러면 술을 마시다가 불에 비치는 달을 잡으려고 강 속에 들어갔다가 빠져 죽은 시인 이태백의 주량은 어느 정도였을까? 하루에 300잔, 100세 까지 살면서 3만600일을 매일 그만큼 마실 마스터 플랜을 그는 '양양가'라는 시에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태백은 술을 1두 마시고 시를 백 편 썼다고 한다. 그때의 1두는 요즘의 한 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가 마신 술은 노주와 같은 독하지 않은 양조주 였다. 이웃 일본에서도 서민문화가 발달하면서 이태백을 주선으로 흠모하다 못해 17세기 이래 술 많이 마시는 경음대회를 열어 전국의 주당성들이 명예를 걸고 술실력을 겨루었다. 19세기초에도 도쿄에서 살고 있던 어느 돈 많은 상인의 장수를 축하하기 위해서 벌인 술 시합에서는, 석 잔에 나누어 청주7되 5홉을 단숨에 들이키고도 취태를 보이지 않은 사혜라는 사람이 우승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주왕시대의 고주
태평성대의 성군으로 요순임금을 친다면, 말세의 폭군으로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을 손꼽는다. '주지육림(술로 못, 고기로 숲을 만듦)'이란 말을 남김 바로 그 주왕인 것이다. 못을 파서 술을 담아 놓고 둘레에 여인들을 발가벗겨 숲을 이루어 놓고서, 그 사이를 누비며 술을 마셨다 한다. 그 주지의 위치가 황하변 위주현 서방23리에 있었던 것으로 고증되어 있으며, 배를 띄울 수 있을 정도의 큰 못이었다 하니 대단하다. 그 주지 인근 은나라 말기의 고분에서 3200년 전의 술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주왕이 배를 띄우고 퍼마셨던 그 주지가 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시대의 술이 그 인근에 묻혀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세계 최고의 술을 독일 슈파이야의 포도주 박물관에 있는 고대 로마의 술이다. 그런데 그보다 1000여년 더 묵은 은나라 술이 출토된 것이다. 표주박 모양의 청동 술병에 약 1kg 정도의 술이 담겨 있었으며, 알코올 기운이 거의 증발하고 없어서, 그 원료가 곡물인지 과실인지 단정할 수 없었다 한다. 은나라 고분에서 술병이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나, 술이 담긴 채 발굴된 것은 처음이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척 술을 좋아했음일까?
옛날의 왕이나 귀족들은 죽어서고 이승에서처럼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갖은 양식, 세간, 우마, 돈을 비롯해 남녀 종까지 순장 시켰던 것으로 미루어 술을 묻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술을 무척 좋아했던 조선조 성종 때 정승 손순효는 임종시 소주 한 병 더불어 묻어 달라고 유언하여 술을 묻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딸을 낳으면 여아주라 하여 술을 빚어 땅에 묻어두었다가 시집가는 날 잔치에 교합주로 쓰고, 명주라 하여 장가가는 날 신부가 입으로 씹어 빚은 술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죽으면 더불어 갖고 저승길 떠나게 하는 습성이 있었다. 아내가 입으로 씹어 빚은 술과 영원히 해로하는 명주는 한 편의 시다. 이번에 출토된 술이 바로 그 명주가 아닌가도 싶다.
이처럼 고대의 술이 여자가 입으로 씹어 빚은 구작주 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이술 역시 여인의 침으로 발효시킨 그런 술이 아닌가도 싶다. 고구려에 물길국에서도 '곡물을 입으로 씹어서 술을 빚는다'고 했고 선조때 문헌 '지봉유설'에는 이같이 처녀들이 입으로 씹어 만든 술을 '미인주'라 했다. 근년 까지도 류큐역사에서는 처녀들이 모여 사탕수수로 이를 닦고 바닷물로 입을 가셔낸 다음, 쌀을 씹어 미인주을 빚었다 한다.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주색, 곧 술과 여자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술의 기원이 미인주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바른말 한다 해서 기자를 감금하고, 혹형으로 숱한 생명들을 볶아 죽였으며, 천하의 요녀 달기의 치마폭에서 망국으로 몰아갔던 주왕시대의 술, 술은 묵을수록 좋다고 하지만, 이 세계 최고의 술맛만은 쓰디쓸 것이다. (자료:백년이웃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