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들의 풍류기 술. 멋. 맛 - 원융희
동양의 술멋
김홍도의 그림을 보면 산속 개울가에서 양반들이 유녀를 데리고 흐드러지게 취흥에 젖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해반전만 해도 우리나라는 눈 닿는 것이 모두 산천이요, 개울이었다. 서울만 해도 삼청동과 자하문밖 세검정, 남산과 성북동, 관악산과 인왕산 등 4대문 안에도 자연과 벗할 수 있는 곳이 많았으며 기방에서도 가야금소리와 장고소리에 맞춰 간살맞은 비음과 한마당 창이 슬러 나왔다.
금술잔의 맛있는 술은/ 수많은 사람의 피요/ 옥으로 만든 술상의 안주는/ 만백성의 살./ 술판의 촛불이 눈물흘릴 때/ 모든 백성의 눈에는 피눈물나고/ 소리 소리 드높은 곳에/ 원성 또한 높아라. -춘향전에서-
춘향전에 나오는 이런 풍자는 어느 곳,어느 사회에나 없으란 법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술판은 소박하고 그런대로 멋이 있었다. 원래 술이란 인류의 시원부터 함께 온 것으로 수렵시대에 우연히 떨어져 썩어가는 과실이나, 벌꿀에서 발효된 자연의 일부였다.최초에는 원숭이가 술을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여하튼 유목시대와 농경시대를 거치면서 청주, 탁주, 과실주,에서 증류주인 소주, 고량주, 위스키, 브랜디, 럼, 보드카, 진 등으로 발전했다. 서양에서는 16세기에 위스키가 나왔지만 BC3000년경에 이집트에서는 맥주가 생산되고 유적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맥주제조법이 상세히 설명될 정도로 술의 역사는 길다. 중국에서는 노주, 화주, 청주, 소주가 누룩을 사영하여 양조 되었는데 6세기경 저술된 제인요술이란 책에는 이미 양조법이 과학적으로 정리되었다. 우리나라도 다른 문화와 함께 중국을 통해 술의 문화가 들어 왔는데 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주몽의 신화만 하더라도, 앞에서 논했던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연못가에서 하백의 세자매를 술로 취하게 한후 큰딸 유화를 취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할만큼 술의 역사는 길다.
자고로 우리나라 사람은 재주가 비상해서 술을 빚어내는 기술도 뛰어나 백제의 인번같은 이는 일본에다 한국의 양조술을 가르쳤다(일본 '고사기'증보리 형제는 일본 응신 천황때, 독특한 양조법을 전했다고 계림유사에는 적혀있다. ). 여하튼 우리가 오늘날 민간에서 흔하게 마셨던 막걸리, 약주, 소주는 수천년동안 우리 민족이 즐겨 찾고, 또 꾸준히 지속시킨 양조주였다. 이규보의 책에 나오는 이화주, 백주, 방문주, 춘주, 천일주, 화주, 녹파주,천금주,숙화주는 실상 양조술에 있어 전통적인 기법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재료와 발효기간, 그리고 증류와 혼합 때의 향기, 맛을 어떻게 첨가시켰는가에 따라 차이가 생겼을 뿐이다.
물론 술은 취하기 위해서 마신다. 그것은 인생이 살기 위해서 시간을 잘라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단순한 동물적 생명력을 지속시키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삶의 내용, 삶의 색깔을 중시하는 것처럼, 술을 마신다는 것도 단순히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예나 이제나, 그리고 서양이나 동양이나, 술이 마시는 과정은 생활의 멋과 깊은 관계가 있고, 곧이어 술을 마시는 행위가 곧 삶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인생철학의 표현이 된다고 하겠다. '멋'은 영어로는 elegance 인데 아치와 달리 단순한 풍치가 아니라 고아한 품격을 갖춘 기상이 겸비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점에선 서양사람들은 동양에 비해 술을 마시는 멋이 별로 없다. 기껏 '건배'를 하고 무희나 가희 를 통해 간접적으로 취향을돋구는데 그치는가 하면, 서로 어울려 춤추고, 주정부리고, 격투하고,고성방가하기가 일쑤다. 물론 서양사람들도 고급사교계에서는 술한잔 마시며 고담준론이나, 전담을 나누는 수가 있으나, 우리 동양에서처럼 스스로 취향에 젖어 시를 노래하고 철학과 인생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멋을 규정하는가에 따라 주도의 규범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술이 논리적인 형식을 배제한다고 본다면 -몇가지 금기를 제외한다면- 수많은 주법이 나옴직하다.
그 금기란 첫째, 남을 괴롭히지 않아야 할 것. 둘째, 사회적인 엔트로피를 낮춰야 할 것. 셋째, 재생산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델포이 신전의 에스타시나, 코카사스와 스페인과 헝가리, 남미의 축제에서 보여주는 광난은 사회적인 긴장이 해소되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에스프리가 축적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농사를 지으며 어쩐 긴장의 순간에 농주를 마시고, 농악을 즐기면서 긴장을 해소하는 과정은 낭비가 아니라 재생산투자이다. 우리의 서민적인 술은 대개가 곡주이며, 그 과정 역시 경건하였다. 깨끗이 씻은 밀을 띄워 누룩을 만든 후, 그 누룩의 중앙부분이 제대로 곰팡이가 슬면 곱게 말려 가루로 만든다. 굵은 체로 쳐서 함지에 담아 놓은 후 찹쌀로 고두밥을 찐다. 고두밥은 시루에 찌는데 너무 익어도 안되고 너누 설익어도 안된다. 다된 고두밥은 큰 돗자리에 널어 말린 후 항아리에 버무려 넣는다. 항아리에 넣기 전에 목욕재개하고, 항아리 안에 꿀로 불을 피워 말린후, 정안수로 버무린 고두밥과 누룩을 항아리에 넣는다. 옛날에는 멍석으로 항아리를 싸고, 땅 속에 파묻었는데 조기숙성하기 위해서 요즘은 인공적으로 항아리를 따뜻하게 한다. 술은 발효의 기간이 매우 중요한데 외국의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몇 십 년 몇 백 년은 못돼도 약주가 오랜 숙성기간을 거쳐 높은 향기와 입맛을 돋우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대나무로 엮은 용수를 술독에 넣고 첫술을 떠내는데 진국이라고 하는 이 술은 옛날에는 일정한 절차를 거쳐 떠내었다. 아직 숙성하기 전의 술은 달고 술의 알코올도수가 낮은데, 대개 첫 번째 퍼낸후, 다시 물을 붓고 섞어서 재탕을 한다. 다 걸른 뒤 재강(술)은 가난했던 시절 요기로 이용했다. 어린 아이들이 술재강을 먹고 비틀거리고, 집안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술재강을 먹고 술에 취해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술재강을 얻어다 설탕을 넣고 집에서 많이 끓여 먹었다. 술은 술 마시는 사람들의 신분을 갈라 놓는데, 그것은 생활의 여유와도 관계가 깊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시는 서양사람들에 비해 동양, 특히 한국사람들의 술은 허기를 메꾸는 역할까지도 겸하도록한 텁텁한 막걸 리가 제격이었다. 서양사람들은 육식을 많이 하기 때문에 독한 술이 소화될 수 있고, 위장에 기름이 끼어 있어서 알코올이나 커피가 들어가도 견뎌낼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한 우리로서는 하다 못해 김치 조각이라도 안주로 먹어야 한다. 예부터 우리 서민들의 안주라야 두부찌개가 고작이고, 그 속에 들어가는 종류에 따라 술 마시는 멋도 달라진다. 두부찌개에 돼지비게라도 띄우면 요즘도 훌륭한 안주가 되고, 좀 괜찮은 사람들은 해물이다. 쇠고기를 썰어 넣기도 한다. 배부른 사람들이야 정종에 생선회를 먹거나. 양주에 마른 안주 혹은 샐러드, 미트볼 등을 안주로 하겠지만 논두렁이나, 포장마차, 혹은 구멍가게 노점에서 바시는 사람들이야 쓰디 쓴 소주에 오징어, 쥐포 아니면 과자부스러기로 안주를 삼는다.
물론 술은 머리에서 꽝소리가 나도록 마셔야 마신 것 같지만, 요즘 세상이 약아져서 적당히 얼큰하면 그걸로 족한다. 얼큰한 취흥으로 사람을 대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웬만한 시름은 우습게 보이고, 그 엄청나게 위압하던 돈이나 권력의 위압도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아 기고만장해 진다. 유머로 회자되는 쥐새끼의 술주정처럼, 간이 커져 고양이에게 대드는 만용까지는 몰라도, 허접스러기 세상사를 초개같이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다든가,단절된 자기세계에서 명상에 잠길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른다.
'정성스런 어짐과 깊고 깊은 심오함과 넓고 넓은 하늘같은 지혜'를 스스로 간직한 도인의 경지를 찾고자하여 이 땅의 어른들은 술의 왼팔에 매달렸다.(자료:이창학, 198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