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들의 풍류기 술. 멋. 맛 - 원융희
술을 따르면 금빛 물결이 찰랑찰랑
우리 속담에 '빛 좋은 개살구'란 말이 있으니, 이는 외양은 좋은데 내용이 나쁘다는 것이요, '뚝배기보다 장맛'은 외양은 보잘 것 없는데 내용은 충실하다는 말이요, '겉볼안'이란 말은 외양을 보면 내용까지 짐작해 알 수 있다 함이니, 이는 겉과 속이 일치한다는 견해다. 겉과 속의 일치 여부에 관한 논란은 간단히 결론 날 문제가 아니겠지만, 상업의 발달과 함께 삼품 포장이 주목을 받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같은 내용의 물건이라도 디자인과 포장을 탐나게 해서 몇배의 고가품으로 팔 수 있다든가, 포장에 속고나서 과대 포장을 분개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술과 용기의 관계을 보자. 두선 술을 담그는 양조용 그릇이 있고, 돤성된 술을 보관,운반하는 그릇이 있고, 술을 마실 때 담아 쓰는 그릇이 있다. 예컨대 술독,술병,술잔 같은 것이 그것이다. 본래 술이란 것이 안 먹으면 죽는 생존의 필수물이 아니라 기분에 민감한 기호품이기 때문에 식기 보다는 주기가 훨씬 미관을 중시하게 마련이다. 여기에서는 술잔을 소재로 삼은 옛 설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비록 술은 아니지만 음료와 그릇의 관계를 가장 절실하게 보여준 이야기 하나를 참고 삼아 하고자 한다.
신라 문무왕 원년, 원효와 의상 두 스님은 대망의 당나라 유학을 위해 서해안인 남양 부근에서 뱃길을 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래 묵은 무덤가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원효는 몹시 목이 말랐다. 그는 더듬거리며 마실 물을 찾아 나섯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물이 담긴 바가지를 발견하고 그 물을 맛있게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그것이 바가지는 바가지로되 해골바가지 였다. 그는 창자까지 뒤틀리는 격심한 구토 증세를 느꼈다. 그릇의 정체를 모르던 감밤에는 그토록 달게 마신 물이었는데 그릇의 실체를 보고 나니 이토록 역겨운 까닭이 무엇인가. 이 순간 그는 진리를 직관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마음 하나에 달렸음을 깨닫고 마침내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 술그릇을 한갓 허상일 뿐이다. 그러나 술꾼들이 어찌 수도승 같을수 있으랴. 가난한 백성들이야 바가지도 좋고 흙그릇도 가릴바 아니나, 부귀가의 술그릇에는 금,은,옥 등 귀금속이 총동원 된다. 더구나 궁궐에서 쓰던 술잔은 역시 보배로울 수 밖에 없을 터이다. 조선조 초기부터 궁내에서 전해지던 수정배 한 쌍이 있었는데, 하나는 모가 난 것이고 또 하나는 둥근 것으로 크기는 반되 들이였다고 한다. 이 잔의 모습을 김안로는 이렇게 묘사했다.
"술을 따르면 금빛 물결이 가늘게 일어 찰랑찰랑 그 가운데 찬다. 떨어져서 보면 맑기가 티끌하나 섞이지 않은 듯하고 은은하기로는 물빛과 달빛이 서로 비춰 하늘에 닿은 듯하다. 그 부어지는 모습은, 하늘에 노을이 일 듯하고 깨끗한 얼음처럼 투명하며 붉고 흰빛이 서로 엉켜 안팎이 환히 통하니,... "<용천담적기>
성종은 술을 꽤 즐겼던 모양이다. 임금이 애용하는 큰 술잔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옥으로 된 것이었다. 입급은 술이 거나해지면 이 술잔을 좌중에 돌렸다. 어떤 종실이 이 술잔에 술을 받아 마시고 나서 잔을 소매안에 넣고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그는 짐짓 땅에 엎어져 잔을 깨뜨렀다. 임금은 아깝기 이를 대 없었지만 그를 꾸짖지는 않았다. 왕의 과음을 풍간하려는 종실의 충정을 성종은 알았을까? 과음 예기가 나왔으니, 성종은 정작 당신을 과음하면서 신하의 과음은 굳이 말렸던 모양이다. 찬성벼슬을 하던 손순효가 술을 너무 좋아하여, 보다못한 왕이, "경은 이제부터 석잔 넘게는 마시지 않기로 약속하시오." 하니 순효도 별 수 없이 왕에게 다짐을 두었다. 그러던 어느날 임금이 순효를 불러 보니 마침 술에 만취해 있었다. 임금이 노해서 위약을 추궁하니 순효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저는 틀림없이 석 잔만 마셨습니다. 다만 그 잔이 밥주발이었지만 말씀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는 세종때에도 있었다. 윤회는 문장가로서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항상 술이 정도에 넘쳤다. 임금은 사랑하는 신하의 건강을 것정하여, "술을 마실 적에는 석잔을 넘지 말라." 엄명을 내렸다. 그러자 윤회는 술을 먹을 적마다 반드시 큰 그릇으로 석잔을 먹었고, 결국 그는 다른 이모다 갑절이나 더 먹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은 "내가 술을 조심시킨다는 것이 도리어 술을 많이 마시도록 권한 셈이로다."하고 탄식했다. 지엄한 왕명도 술꾼의 절주에는 별효과가 없었나 보다.
술잔의 크기를 가지고 말한다면야 단연 금매달 감이 있다. 옛날 한 재상이 남도에 안찰사로 갔는데 성격이 몹시 까다롭고 엄해서 관기들의 작은 실수도 용납지 않았다. 말하자면 모든 일에 원리원칙을 주장하여 예외라는 것이 없는 모범생이었던 모양이다. 마침 안동에 내로라하는 기녀가 있어 이 까탈스런 사또를 한 번 골탕먹이기로 작정하고 접근하였다. 우선 원앙금침에 무르녹는 사랑으로 영감태기를 헬렐레 하게 만들어 놓으니 남자는 갈증으로 술생각이 간절했다. "썩 맛 좋은 술이 한통 있긴 한데 마침 술잔이 없습니다. 밤이 깊어 그릇을 다 치워 놓았으니 정히 난감하오이다. 술잔을 꺼내오려면 아랫 것들을 다 깨워야 하니 번거롭고... "이쯤에서 뜸을 들인 뒤에, "그릇이라면 새로 사온 세숫대야가 탁자위에 있을 뿐이지... "하고 눈치를 모았다. 아니나 다를까 사또가 이제야 살았다는 듯이 말을 받는다. "질그릇에 탁주라는 말도 있는데, 이런 시골에서 놋대야 라면 질그릇 탁주보다 사치하며 오히려 풍미를 돋구지 않겠느냐!" 이리하여 세숫대야에 술을 따라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좋도다. 금잔,옥배보다 이 잔이 더 좋구나!" 이렇게 하고 보니 은근히 켕기는 구석이 없지도 않았던지, "얘야, 행여 이런 사연 남한테 누설치는 말아라."하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뭇 기생들이 개미떼같이 달라붙어 숨을 죽인 채 이 광경을 역력히 보고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았으랴.
술잔 크기와 주량이 비례한다고 까지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상관관계는 크다. 서거정의 '필원잡기'를 보면, 당시에 국빈을 대접하는 대객관은 각별한 주량을 필수요건으로 했던가 싶다. 유구국(현 오키나와) 사신이 조선을 다녀가서 한 말 중에, 그들이 조선에 돠서 경탄한 것 세가지를 지적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대객관의 주량이었다. "깊숙하고 커다란 술잔으로 셀 수 없이 주고 받아 가히 한섬 물을 마시겠더라." 요즈음 기업체에서 외국 바이어를 상대하는, 이른바 '술상무'라는 것이 이 전통의 계승일 터이다.
동서고금에 가장 희한한 술잔 이야기 하나 해보자. 문안공 이사철이 젊어서 여러벗들과 삼각산에서 소풍할 때, 술은 많으나 잔이 없어서 난처했다. 궁 하면 통 한다고, 마침 한 친구가 말가죽 신을 신고 있는 것을 보자 이사철의 며리에 기발한 착상이 떠올랐다. 그는 신 한짝을 벗겨 거기에 술을 담아 호기있게 쭉 들이켰다. 이를 시범삼아 나머지 친구들도 웃고 떠들며 가죽신 술잔으로 다투어 술을 마셨더란다. 원 세상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