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들의 풍류기 술. 멋. 맛 - 원융희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고려말에 발생한 시조는 조선조에 와서 성하여 위로는 군왕으로부터 아래로는 무명의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았거니와, 술좌석에서고 즉흥적으로 부르고 화답할 수 있는 양식적 특성 때문에 술을 소재로 하거나 취락을 주제로 한 시조의 작품은 유난히도 많다.
대추볼 붉은 밤은 어이 듯들으며/벼 벤 그루에게는 어이 나리는고/술 익자 체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리. -황희-
가을이 무르익으니 대추, 밤이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 햇대추,햇밤 알을 안주 삼아 국화주를 마심도 운치 있는 일일 터이어니와 논바닥에 게가 몰려오니 이야말로 안주 감으로는 십상이다. 이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체장사가 동네 들어와 "체 사시오!"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다닌다. 체는 술 거를 때 쓰는 도구다. 하기야 옛날 주당들은 가양주를 담가 놓고 체가 없으면 베두건으로도 걸러 먹었다 하니 체 없어 술을 못 먹으랴만 시기를 맞춘 체장사 출현이 한층 구미를 보태는 것이다. 정작 술꾼은 안주도 가리잖고 청탁도 불문이다. 그저 술이란 이름만 붙었으면 술술 잘 넘어간다.
주객이 청탁을 가리랴 다나 쓰나 마구 걸러/ 잡거니 권하거니 양대로 먹으리라. / 취하고 초당 밝은 달에 누웠은들 어떠리. -실명씨-
그러다 보니 술꾼이 술을 못 구해 안달하는 모습은 애연가가 버려진 꽁초 찾느라 쓰레기통 뒤지는 만큼이나 가긍하다. 시성 두보는 처자가 굶은 판국에 피난지에서 받은 구호미를 팔아 술을 사 먹었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뒷집에 술쌀을 꾸니 거친 보리 말 못 찬다./ 즈는 것 마구 찧어 쥐빌어 괴어내니/ 여러 날 주렸던 입이니 다나 쓰나 어이리. -김광욱-
이렇게 마셔대니 제 정신이 아니다. 시간 관념이 없으니 날짜 가는 걸 알 턱이 없고 어디서 먹었는지 공간 관념조차 없다.
날이 언제런지 어제런지 그제런지/ 월파정 밝은 달 아래 뉘 집 술에 취하였던지/ 진실로 먹음도 먹었을새 먹은 집을 몰라라. -실명씨-
그러나 술이라 하면 말 물켜듯(사설시조) 하는 이런 이들은 폭주가일지언정 애주가는 아닐 성싶다. 주흥을 제대로 즐기고자 하는 이들은 좀 까다로운 장식이 필요하다.
꽃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 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니/ 언제면 꽃 아래 벗데리고 완월장취하리오. -이정보-
꽃과 술, 달과 벗 이 넷을 사미라 했다. 꽃 그늘 아래서 달구경하며 마음 맞는 벗과 주거니 받거니 마시는 술, 그래서 밤 깊도록 마시고 마셔도 주흥은 더욱 도도해지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서는 '거문고 가진 벗'이라고 했으니 풍악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이렇게 고루 조건을 갖추는 일이 흔치 않았던지라 이 미만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마냥 행복하겠단다.
술 얻으면 벗이 없고, 벗 얻으면 술이 없다. 오늘은 무슨 날고? 술 있고 벗 있다. 두어라 이난병이니 종일취하리라. -실명씨-
'두어라' 는 더 이상 바라지 않겠다는 안분에서 나온 슬기로운 체념이다. 그러나 벗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은 주객들만의 예기가 아닐 것이다. 소월이 "벗은 설움에서 반갑고/ 님은 사랑에서 좋아라/ ... 그대여 부르라 나는 마시리." '님과 벗' 하면서 벗과 술 외에 놓치지 않았던 '님'말이다.
금준에 술을 부어 옥수로 상권하니/ 술맛도 좋거니와 권하는 임 더욱 좋다./ 아마도 미주미행은/ 너뿐인가(하노라.). -실명씨-
강릉가면 흔히 듣는 말이 '경포대에는 달이 6개' 라는 것이다. 하늘에 하나, 바다에 하나, 호수에 하나, 그리고 술잔 속에 하나, 나머지들은 님의 두 눈동자에 각각 하나씩이란다. 님과 벗이 각기 상보적 매력과 가치를 가진다 해도 굳이 고르라면 주우쪽보다는 아무래도 주색쪽이 승할 듯 싶다. 다음과 같은호색한의 시조 맛을 보라.
금준에 주적성과 옥녀의 해군성과/ 옥내의 해군성이/ 양성지중에 어느 소리 더 좋으냐?/ 아마도 월침삼경에 해군성이 더 좋아라. -실명씨-
금동이에 술 따르는 소리도 좋지만 더 좋은 건 미인이 치마 벗는 소리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