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著 / 정성호 譯
제4장 사랑의 실천 (2/2)
사고와 판단은 합리적 신앙이 나타난 유일한 경험의 영역은 아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신앙은 의미 있는 우정이라든가 사랑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신념을 갖는다는 것' 은 그의 태도와 인격의 중심과 사랑에 대한 신뢰성과 불변성을 의미한다. 이는 사람이 자기의 의견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기본적인 동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애 대한 존경이 자기 자신의 일부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똑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신념을 갖고있다. 우리는 자아의 존재를, 의견이나 감정상의 특별한 변화와는 관계없이 여러 가지 다른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우리 생애를 통해 지속하는 인격의 중심성을 알고 있다. '나'라는 말의 배후에 있는 실재는 이러한 중심성이며, 우리의 정체에 대한 확신도 그 중심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자 아의 지속성에 대한 신념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체감은 위협받 게 되며 타인에 의존하게 되고, 그때는 다른 사람의 동의가 우리의 정체감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오직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성실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만이 미래에 있어서도 현재와 똑같은 것이며 따라서 지금의 기대처럼 느끼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신념은 약속할 수 있는 능력의 조건이 되며,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약속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규정될 수 있기 때문 에, 신념은 인간존재의 조건 가운데 하나가 된다. 사랑과 관련된 중요한것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족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 일으킬 수있는 능력과 그 신뢰성애 대한 신념이다.
사람에 대해 신념을 갖는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타인의 잠재력에 대한 신념과 관련된다. 이러한 신념이 존재하는 가장 초보적인 형태는 어머니가 자기의 갓난 아이에 대해 갖는 신념, 즉 그 아기가 자랄것이고 걷고 말을 하게 될 거라는 신념이다. 그러나 이런 면에서 볼때, 그 아기의 성장은 매우 규칙적이므로 그 발달을 기대하는 데는 특별한 신념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발달은 아이가 발달시키지 못할 잠재력 즉 사랑하고 행복해지며 이성이나 예술적재능과 같은 특이한 잠재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잠재력과는 다르다. 그런 잠재력들은 발달시킬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자라서 빛을 보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썩어 버릴 수 있는 씨앗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어린이의 생활에서 의미를 지니는 사람이 그들의 잠재력에 대해 신념을 갖는 것이다. 이러 한신념의 존재는 교육과 조작의 차이를 가져온다. 교육은 아이들로 하여금 자기의 잠재력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것과 같다. 교육에 반대되는 것이 조작인데, 그것은 잠재력의 성장에대한 신념의 부재에 근거하고 있고 어린이는 어른들이 바람직한 것은 주입시켜 주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억압할 때만 올바르게 될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로보트에 대해서는 신념을 가질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로보트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신념은 인류에 대한 신념에서 절정에 이른다. 서구 세계에서 이러한 신념은 유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용어로 표현되 었고,세속적 용어로는 지난 150년간의 인본주의적 정치와 사회 사상 속에 강하게 표현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신념과 마찬가지로 인류에 대한신념은 인간에게 적당한 조건이 주어진다면 평등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라는 원칙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 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은 아직까지 그러한 질서를구축하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신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모든 합리적 신념과 마찬가지 로 이것도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라, 인류의 과거 업적의 증거, 개인의 내면적 경험과 이성과 사랑에 대한 개인 자신의 경험에 근거 하고 있다. 비합리적 신념은 엄청나게 강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느껴지는 힘에 대한 복종과 자기 자신의 힘의 포기에 뿌리박고 있지만, 합리적 신념은 그와 반대되는 경험에 근거하고 있다. 합리적 신념은 우리의 관찰과 사고의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는 사상 속에 이러한 신념을 갖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잠재력의 성장과 자기 자신의 성장 이라는 현실, 그리고 자신의 사랑과 이성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경험한 정도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과 인류의 잠재력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다. 합리적 신념의 기초는 생산 성이다. 즉 신념을 갖고산다는 것은 생산적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 한다. 여기서(지배라는의미에서) 권력에 대한 믿음과 권력의 사용은 신념과는 반대라는 결과가 나온다. 존재하는 권력을 믿는 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잠재력의 성장을 불신하는 것과 같다. 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드러난 현재에 근거하고 있는 미래의 예측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오산이며 인간의 힘과 성장을 간과한 데서 오는 매우 비합리적인 오산임이 드러나고 있다. 권력에는 합리적 신념이 없다. 권력에는굴복이, 혹은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권력만이 모든 것 가운데가장 실제적인 것으로 보이지 만 인간의 역사는 그것이 인간의 모든 업적 가운데 가장 불안한 것 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왔다. 신념과 권력은 서로배타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본래 합리적 신념에 근거하여 세워졌던 모든 종교와 정치 체계들은 권력에 의존하거나 결탁하게 되어 부패하고 결국가졌 던 힘을 잃게 된다.
신념을 가지려면 "용기" 즉 위험을 무릅쓸 수 있는 능력과 고통과 실망을 감내하려는 준비성이 필요하다. 누구든 삶의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안전과 안정을 주장하는 사람은 신념을 가질 수 없다. 누구든 격리와 소유만이 안전의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방어의 체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사람은 자신을 죄수로 만드는 것이다. 사랑 받고 사랑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며, 그것도 궁극적 관심으로서 가치를 판단하고 이러한 가치에 따라 도약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용기는 저 유명한 허풍선이인 뭇솔리니가 "위험하게 살라"는 슬로건을 사용했을 때의 용기와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가 말하는 용기는 허무주의의 용기이 다. 그것은 삶에 대한 파괴적인 태도에, 삶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 에 내던져 버리려는 의도에 뿌리박고 있다. 권력에의 신념이 삶에 대한 신념에 정반대되는 것처럼, 절망의 용기는 사랑의 용기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신념과 용기에 대해서는 어떤 것을 연습해야 하는가? 참으로 신념은 매 순간마다 연습할 수 있다.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신념을 가져야하고, 잠들기 위해서도 신념을 가져야 하며,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도 신념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런 종류의 신념에 익숙해 있다. 신념을 갖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자식에 대한 지나친 걱정과 불면증,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능력으 로 인해 고통받는다. 혹은 의심이 많아 어떤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데 제한을 받으며만성병에 걸린 것같거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여론이나 예측하지 못한 사실이 자신의 판단을 무효화하더라도 어떤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고수하려면, 확신이 그리 흔하지 않더라도 그 확신을 고수하려면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여러 가지 난점과 좌절과 슬픔을'우리'에게 일어나서는 안될 불공평한 처벌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극복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강하게 해 주는 도전으로 받아들이려면 역시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념과 용기의 실천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부터 시작한다. 첫째 단계는 자기가 언제 어디서 신념을 잃는가를 살피고, 이러한 신념의 상실을 감싸는 데 사용되는 합리화 장치를 검토하고, 어디서 비겁하게 행동하고 어떻게 그것을 합리화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신념을 배반하는 것이 우리를 약하게 만들고 점증하는 약점이 또 다시 새로운 배반을 초래하여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식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지만 진정한 공포는, 의식하고 있다하더라도, 사랑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것'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며, 우리의 사랑이 사랑받는 사람 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내던 지는 것이다. 사랑은 신념의 행위이며 누구든 신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신념의 실천에 대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더 말할는지도 모른다. 내가 시인이거나 목사라면 나는 더 말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념의 실천에 대해더 말할 수는 없지만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린애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신념을 갖는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사랑의 기술의 실천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한 가지 태도는 지금까 지위에서 은연중에 언급했던 것이지만 사랑의 실천을 위해 기본이 되는것이므로 분명히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은 '활동'이다. 나는 앞에서 활동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활동, 즉 자기 힘의 생산적 활용을 뜻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활동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나는 사랑받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상태에 있다. 만일 내가 게으르거나 끊임없는 주의와 인식과 활동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나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과 적극적으로 관련시킬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잠자는 것은 비활동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황이다. 반면에 깨어 있는 상태는 게으름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 수많 은사람들이 겪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은 깨어 있을 때도 반쯤 잠들어 있고 자고 있을 때나 자고 싶을 때도 반쯤 깨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은 지루해지거나 지루하게 하지 않기 위한 조건이며, 지루해지거나 지루하게 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한 중요한 조건 가운데 하나이다. 수용적 형태로든 축적적 형태로 든아니면 단순히 시간을 낭비하는 형태로든, 하루 종일 눈과 귀를 사용하여 생각하고 느끼는 데 적극적으로 되고 내면의 게으름을 피하는 것은 사랑의 기술의 실천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사랑의 측면에서는 생산적이고 그 밖의 측면에서는 비생산적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생산성은 그런 식의 분업을 허락하지않는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긴장과 각성과 고양된 생명력의 상태를 필요로 하며, 그것들은 삶의 모든 차원에서 생산 적이고 적극적인방향을 취할 때만 생겨날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비생산적이라면사랑에서도 생산적이지 못하다. 사랑의 기술에 대 한 논의는 여기에 기술된 특징과 태도의 습득과 발전이라는 개인적인 영역에만 국한 될 수없다. 그것은 사회적인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만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라면, 사랑이 성격 특질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가 족과 친구뿐만 아니라 일이나 사무 혹은 직업에서 접촉하는 사람들 과의 관계 속에도 존재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랑에 대한 사랑 사이의 '분업'따위는없다. 반대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한 조건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것이다. 이러한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사회 관계에 있어서 전통적인 것으로부터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종교적인 이상을 입으로는 열심히 떠들지만, 우리의 관계는 기껏해야 사실상 ' 공정성'의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도 상품과 서비스의 교환이 나 감정의 교환에 있어서 속임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것을 나타내 는 공정성이다. 사랑에 있어서뿐아니라 물질적인 상품에있어서 " 네가 내게 준만큼 나도 네게 준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널리 퍼져 있는 윤리적 격언이다. 공정성 윤리의 발달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별한 윤리적 기여라고 말하여지기도 한다. 이 사실에 대한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에 있다.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은 직접적인 강제나 전통, 혹은 개인적인 애정관계나 우정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요소는 시장에서의 교환이다. 우리가 상품시장을 다루든 노동시장을 다루든 아니면 용역시장을 다루든, 개인은 판매하려는 것을 사기나 강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 아래서 구입하고 싶은 물건과 교환한다. 공정성 윤리는 그 자체로서 황금률의 윤리와 혼돈을 가져온다.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격언은 다른 사람과의 교환에있어서 공정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격언은 원래 "네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성서 귀절보다 더 대중적인 표현이었다. 참으로 형제애에 대한 유태 그리스도교의 규범은 공정성 윤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 즉 이웃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고 일체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지만, 공정성 윤리는 책임감이나 일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분리감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황금률이 가장 보편적인 종교적 격언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것은 공정성 윤리로 해석될 수 있기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종교적 격언이 된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실천은 공정성과 사랑의 차이를 인식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의 모든 사회 경제조직이 자기 이익을 구가하는 개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그것이 공정성이라는 윤리적 원칙에 의해서만 조절되는 이기주의의 원리에 의해지배된다면, 기존사회 체계 안에서 어떻게 활동과 사랑의 실천을동시에 할 수 있겠는가? 사랑의 실천은 자신의 모든 세속적 관심을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나누는 걸 포함하지 않는가? 이질문은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들과 톨스토이, 알버트 슈바이처, 그리고 시몬느베이유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해답 되어져 왔다. 우리사회 안에서 사랑과 정상적인 세속적 생활 사이의 기본적인 양립 불가능성에 공감하는 다른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오늘날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기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는 결론에도달한다. 그들은 오직 순교자나 미친 사람만이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랑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사랑에 관 한 모든 논의는 설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매우 존경할 만한 이런 관점은 쉽게 냉소를 합리화한다. 사실상 그러한 주장은 '나는 선량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진지하게 이렇게 실행한다면 나는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생각하는 평범한 사람 들에 의해 은연중에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급진주의'는 도덕적 허무주의를 초래한다. 급진적 사상가나 평범한 사람 모두 사랑하지 못하는 자동 인형이고 그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급진적 사상가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고 그것의 역사적 필연성을인식하고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사랑과 정상적 생활이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추상적인 의미에서만 옳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바닥에 깔려있는 원칙과 사랑의 원칙은 양립 불가능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보이는 현대 사회는 복잡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쓸모 없는 상품을파는 세일즈맨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경제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숙련된 노동자나 화학자, 혹은 의사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경제적으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농부와 노동자와 교사,그리고 많은 형태의 사업가들은 경제적인 기능의 수행을 그만두지않고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비록 자본주의의 원리와 사랑의 원리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복잡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불 일치나 개인적 자유를허락하는 구조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가운데 나는 우리의 현존 사회 체계가 끊임없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것을 포함시키고 싶지 않으며 동시에 형제에대한 사랑의 이상 실현을 갈구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현존하는 체계 아래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예외다.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주변적인 현상이다. 많은 직업들이 사랑하는 태도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생산 지향적이며, 상품에 탐욕스러운 사회의 정신은 오직 순응하지 않는 자만이 그에 맞서자신을 방어할 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으로서 사랑에 진지하게 관 심을 두는 사람들은 사랑이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주변적인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이되려면 우리의 사회 구조 내에 중요하고도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의 범위 안에서는 그런 변화의 방향에 대해서는 단지 암시할 수 있을 뿐이 다. 우리 사회는 경영관료와 전문 정치인들에 의해 운영된다. 사 람들은 대중적 암시에 의해동기를 얻으며, 그 목표는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며,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렸다. 모든 활동은 경제적 목표에 종속되어 있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 버렸으며, 인간은 잘 먹고 잘 입고 자기의 독특한 인간적 자질이나 기능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동 인형이다. 만일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되려면 그는 최고의 위치에 놓여져야 한다. 인간이 기계에 봉사한다기보다는 기계가 인간에 봉사해야 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이익을나누는 것보다는 경험을 나누고 작업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사회는, 인간의 사회적이고 사랑하는 본성이 그의 사회적 존재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내가 밝히려고 애썼던 것처럼 사랑이 인간 존재 문제에 관한 오직 하나의 건전하고 만족스러운 해답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상대적이 지만 사랑의 발전을 배제하는 사회는 모두 인간 본성의 기본적 필연성과 모순을 일으켜 결국 멸망해야만 한다.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모든 인간 존재의 궁극적이고도 실제적인 욕구를 말하는 것이기때문이다. 이러한 욕구가 가려졌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사랑이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고, 이렇게 만든 데 책임이 있는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예외적인 개인적 현상뿐 아니라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해 신념을 갖는 것 은 인간의본성에 대한 통찰에 기초하고 있는 합리적 신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