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著 / 정성호 譯
제3장 사랑과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사랑의 해체
만일 사랑이 성숙하고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갖고 있는 능력이라면, 특정 문화 속에 살고 있는 개인에 있어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문화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달려 있다. 우리가 현대 서구 문화에서의 사랑에 관해 언급한다면, 우리는 서구 문명의 사회 구조와 거기서 야기된 정신이 사랑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묻는 것이 된다. 이 문제를 재기하는 것은 그것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서구의 생활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자들은 사랑(형제애, 모성애, 성애)이 상대적으로 회귀한 현상이 며,현실에서는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형태의 사이비 사랑이그 사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 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자유의 원리와 다른 한편으로 는모든 경제적, 사회적 관계의 규제자로서의 시장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 상품 시장은 상품이 교환되는 조건을 결정짓고, 노동 시장은 노동의획득과 판매를 규제한다. 유용한 물품과 유용한 인력.기술은 시장의 제 조건 아래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교환되는 상품으로 전환된다. 구두는 그것이 아무리 유용하고 필요한 물건일지라도 시장에서 그것에대한 수요가 없으면 아무런 경제적 가치 (교환 가치) 도 지니지 못한다. 인력과 기술도 현존하는 시장 조건 아래서 그것에 대한 수요가 없다면 교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자본가는 자기 자본이 유익한 투자가 될 수있도록 노동자를 사서 명령할 수 있다. 노동자는 굶어 죽지 않도록 현존 시장 조건 아래서 자본가에게 자기의 노동을 팔아야 한다. 이러한 경제 구조는 가치의 위계 속에 반영되어 있다.자본이 노동을 지배한다. 축적된 물품, 즉 죽어 있는 물품이 살아 있는 노동, 즉 인간의힘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작 이래로 그 근본적 구조가 되어왔다. 비록 그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특징이라 하더라도 많은 요인들이 변화되었 고, 그 요인들은 현대 자본주의에 특별한 성질을 부여하고 현대인의 성격구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본주의 발달의 결과로 우리는점증하는 자본의 중앙화와 집중화를 목격하게 된다. 규모에 있어서대기업은 끊임없이 커지고 작은 기업들은 점차 사라진다. 이러한 기업에투자된 자본의 소유권은 그 자본을 관리하는 기능으로 부터 점점 멀어져 간다. 수십만의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는 반면, 기업을 소유하지는 못하지만 높은 보수를 받는 경영 관리들이 기업을 경영한다. 이 관리층은 최대 이윤을 거두는 것보다도 기업과 자신들의 권력 확장에 더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점증하는 자본의 집중화와 강력한 경영 관리층의 출현은 노동 운동의 발달과 평행선을 이룬다. 노동자의 조직화를 통하여 개별 노동자는 노동시장에서 혼자의 힘으로 자신을 위해 흥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즉 노동자는 커다란 노동 조합에 결속되어 있고, 산업적 거상에 맞서서 자기를 대표하는 강력한 관료 기구에 의해 지도된다. 주도권은 좋든 싫든 간 에 노동의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자본의 분야에서도 개인으로부터 관료 조직으로 옮겨져 갔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독립적이길 포기하고 거대한 경제 제국의 경영인들에게 의존적으로 되어 간다. 이러한 자본의 집중으로 인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특징은 작업이 조직되는 독특한 양식이며, 이는 곧 현대자본주의의 특성이기도 하다. 노동이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광범위하게 집중된 기업은 개인이 자기의 개성을 잃고 기계의 톱니바퀴로 되는 방향으로 작업을 조직 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인간의 문제는 다음과 같이 공식화 될 수 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별 마찰 없이 많은 사람들과 협동하고 점점 더많이 소비하고자하며 기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을 받으며 예측될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또한 자기가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어떠한 권위나 원칙 또는 양심에 복종적이지 않다고 느끼지만, 기꺼이 명령에 복종하며 기대되는 일을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종하는사람을 필요로 한다. 즉 강제하지 않고도 인도될 수 있는, 지도자없이도 따라올 수 있는, 좋은 것을 만들어 내고 계속 움직이며 구실을 다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이 없어도 움직일 수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과 동료와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자신의 생명력을 현존하는 시장 조건 아래서 최대 이윤을 보장할 수 있는 투자로써 경험하게 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인형의 관계가 되고 자신의 안전을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서 찾게 되며, 따라서 사상이나 감정 또는행위에 있어서 차이점은 전혀 나타나지 않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가능한한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있고자 하지만, 인간의 분리감이 극복될 수 없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불확실성과 불안 그리고 죄책감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며, 전적으로 홀로 남게 된다.
우리의 문명은 이런 고독을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하는 많은 완화제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먼저 관료화된 기계적인 작업의 엄밀 한규격화로 인해 인간은 가장 근본적인 욕구, 즉 초월과 일치에 대한 동경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작업의 규격화만으로는 이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와 오락 산업이 제공하는 소리와 광경을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무의식적인 좌절감을 극복한다. 심지어는 새로운 물건을사고 그것을 서로 교환하는 가운데 만족을 얻게 된다. 현대인은 사실상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린 인간상과 비슷하다. 잘 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고 있지만, 자아가 없고 동료들과는 피상적 접촉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으며, 헉슬리가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나다낸 주장에 의해 인도된다. "인간이 감정을 가질 때 공동체는 흔들린다" 라든가 "오늘 즐길 수있는 오락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또는 가장 절정에 달한 표현으로써 "오늘날 모든 사람은 행복하다"와 같은 주장에 의해서 인도된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김'에 있다. 즐긴다는 것은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 소비되고 삼켜 버릴 수 있는 모든것들을 소비하고 취하는 만족에 있다. 세상은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대상이며, 큰 사과이고 커다란 병, 커다란 가슴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빨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며, 희망에 가득찬 자이고 영원히 좌절에 빠진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고 싸게 팔고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물질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교환과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랑에 있어서도 당연한 일이지만 이러한 상황은 위와 같은 현대인의 사회적 성격과 대응된다. 자동 인형은 사랑할 수 없다. 다만 자기의 '인간 상품'을 교환하고 공정한 거래가 되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소외된 구조 아래서 사랑, 특히 결혼의 가장 중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팀'이라는 개념이다. 행복한 결혼에 관한 많은 논문들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이상은 원활한 작용을 하는 팀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원활하게 작용하고 있는 고용인, 즉 '합리적으로 독립적'이며, 협동적이고 관대하며, 야심적인 동시에 공격적이어야 하는 고용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혼 상담자들은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고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남편은 아내의 새옷에 대해, 맛있는 요리에 대해 칭찬을 해야 한다. 또한 아내는 남편이지치고 시무룩해져 돌아왔을 때는 그를 이해해야 하며, 자기 사업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경청해야 하고 아내의 생일을 잊어 버렸다하더라도 화내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모든 관계는 전 생애동안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고, 결코 '핵심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한, 서로를 예의 바르게 대하고 기분 좋게 하고자 노력하는 두 사람 사이의원활한 관계이다. 이러한 사랑과 결혼 개념에서 강조점은 참을 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데 있다. 사랑을 통해서 인간은 드디어 고독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찾게 뵌다. 세상에 대항하는 두 사람만의 동맹을 결성하고 이러한 두 사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인된다. 팀의 정신과 상호 관용 등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최근에 발달 된것들이다. 이에 앞서 1차 대전 직후에는 상호간의 성적 만족이 만족스런 애정 관계, 특히 행복한 결혼의 기초라는 사랑의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결혼에 있어서 흔히 나타나는 불행의 원인은 결혼 당사자들이 올바른 '성적 적응'을 하지 못했다는 데서 찾아야한다고 믿어졌다. 이러한 잘못이 생기는 이유는 '올바른' 성행위에 대한 무지에서 한쪽, 또는 양쪽 당사자들의 잘못된 성적 기교에서 찾아볼 수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잘못을 치료하기 위해서 서로를 사랑할 수없었던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책들이 올바른 성행위 에 대한지도와 조언을 주었고, 은연 중에 혹은 공공연하게 행복과 사랑이 따를것이라고 약속해 주었다. 이러한 생각들의 밑바탕에 깔 려 있는 관념은사랑이란 성적 만족의 결과이며, 만일 두 사람이 서 로를 성적으로만족시킬 수 있다면 서로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은 올바른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공업 생산의 기술적 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환상에 일치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러한 가정과 정반대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무시했다.
사랑은 적절한 성적 만족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성적 행복, 심지어 성적 기교에 대한 지식은 사랑의 결과이다. 만일 일상적인 관찰은 제쳐놓고 이러한 명제를 증명할 필요가 있다면, 그 증거는 광대한 양의정신 분석적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빈번한 성적 문제,즉 여성에있어서의 불감증과 남성에 있어서의 다소 심각한 형태의 심리적 성교불능에 대한 연구는 그 원인이 올바른 기교에 관한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억압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성애 대한 두려움이나 증오가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지 못하게 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지도 못하도록, 성의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도록하는 어려움들의 바탕에 깔려있다. 만일 성적으로 억압된 사람이 두려움이나 증오를 극복할 수 있다면, 따라서 사랑할 수 있게 되면, 그가 가진 성적인 문제들은 해결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성지식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 분석적 치료에 관한 자료에 의하면 올바른 성적 기교 에대한 지식이 성적인 행복과 사랑으로 이끌어 간다는 관념이 틀리다고 지적되는데, 사랑이란 상호간의 성적 만족에 부수적이라는 기본 가정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사랑은 기본적으로 성적 현상이었다. "성적 (생식적) 사랑은 엄청난 만족을 가져다 주고, 따라서 그러한 만족이 모든 행복의 전형이되었다는 사실을 체득한 사람은, 성적인 관계의 과정 속에서 더욱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생식적 이기주의를 자기 삶의 구심점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형제에의 경험은 프로이트에게 있어서는 성적욕망의 결과이고 성적 본능이 '억압된 목적' 을 지닌 충동으로 변형된것이다. 억압된 목적을 가진 사랑은 기본적으로 감각적 사랑으로 가득찬 것이고 인간의 무의식적인 마음속 에서는 여전히 그렇다." 신비적경험의 본질이며 다른 한 사람 또는 동료와의 가장 강렬한 일치감의바탕이 되는 융합감, 일체감(대양과 같은 감정)에 관해서 프로이트는 그것을 병리적 현상과 초기의 '무 한한 자아 도취' 상태로의 퇴행이라고해석했다. 한 걸음만 더 나가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사랑은 본질적으로불합리한 현상이 된다.
프로이트에게는 불합리한 사랑과 성숙한 인격체의 표현으로써의 사 랑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프로이트는 감정전이에대한 논문에서, 감정전이에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정상적인 현상과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항상 비정상 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언제나 현실에 대한 맹목성이 수반되며, 강압적인 것이고어린 시절의 사랑의 대상으로부터의 감정전이다. 합리적 현상과 절정에 달한 성숙한 완성으로서의 사랑을 프로이트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지않았다. 그러나 사랑이 성적 만족의 결과라든가 오히려 사랑은 의식적 감정에 반영된 성적 만족과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에 대한 프로이트 사상의 영향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과 관계는 다른 방향에서 유래된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부분적으로는 19세기의 정신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사상은 부분적으로 1차 대전이후의 수년간 지배적인 정신을 통해 유명하게 되었다. 일반적인 생각과 프로이트의 사상에 영향을 준 몇 가지 요인들 가운데 첫째는, 빅토리아시대의 엄격한 관습에 대한 반발이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영향을 준 둘째 요인은 자본주의의 구조에 근거한, 인간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개념에 있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에 대응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본래 경쟁적이며 적의에 가득 찬 주제라는 걸 증명해야 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그칠 줄모르는 욕구라는 표현을 통해 증명 했으며, 다윈론자들은 적자 생존이라는 생물학적 법칙을 통해 증명 해 보인 반면, 프로이트는 인간은 모든 여자를 성적으로 정복하려는 무한한 욕망에 의해 충동받으며, 오직사회의 억압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의 욕망에 따른 행동을 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는 가정을 세움으로써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로를 질투하며,이런 상호간의 시기와 경쟁은 그에대한 모든 사회적, 경제적 원인들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지속될 것이다.
끝으로 프로이트의 사상은 19세기에 크게 유행한 전형적인 유물론 에의해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았다. 사람들은 모든 정신 현상의 근원은 생리학적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프로이트에의하면 사랑, 증오, 야망, 질투 등은 다양한 형태의 성적 본능의 결과로설명되었다. 프로이트는 근본적인 현실이 인간 존재의 전체성에, 무엇보다 먼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인간 상황과, 둘째로 특정 사회 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생활의 실천에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다(이러한 형태의 유물론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단계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서 취해졌다. 사적 유물론에서는 육체도, 음식이나 소유에 대한 욕구 같은 본능도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로써 사용되지 않으며,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과정, 즉 '삶의 실천'이 중요 개념으로 사용된다).프로이트에 의하면 모든 본능적 욕구의 완전하면서도 억압되지 않은 만족은 정신적 건강과 행복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러나 뚜렷한 임상적 사실에 따르면, 남자든 여자든 자신의 삶을 무제한의 성적 만족에 바친 사람들은 행복을 얻지 못하며, 매우 자주 심각한 신경증적 갈등이나증상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모든 본능적 욕구의 완전한 만족은 행복의 근원이 되지 못하며, 심지어 안전을 보장해 주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프로이트의 사상이 1차 대전 이후에 그렇게 유행한 것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일어난 변화 때문이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절약에 대한 강조에서 낭비의 강조로, 경제적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써의 자기억제에서 점차 확대되는 시장을 위한 바탕으로, 그리고 불안해 하고 자동 인형이 되어 버린 인간을 위한 주요만족으로써의 소비의 강조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어 떠한 욕구의 만족을 연기하지 않는 것이 모든 물질적 소비의 분야 에서 뿐만 아니라 성의 분야에서도 주요 경향이 되었다.
20세기 초반까지 파괴되지 않고 존재했던 자본주의 정신과 일치하는 프로이트의 개념들을, 가장 뛰어난 정신분석 학자인 고(故) H. S.설리반의 이론적 개념들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설리반의 정신 분석 체계에서는 프로이트와는 반대로 성욕과 사랑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 설리반의 개념에 있어서 사랑과 친밀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친밀감은 개인적 가치를 내포하는 모든 구성 요소의 타당성을 인정하는 두 사람을 포함하는 상황의 유형이다. 개인적 가치의 타당성은 소위 제휴라는 형태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제휴란 점진적으로 동일 해지는, 즉점점 더 유사해지는 상호간의 만족의 추구에 있어서 그리고 점진적으로 유사해져 가는 안전성 조작의 유지에 있어서, 상대 방이 표현한 욕구에 명백하게 공식화된 유형으로 자신의 행동을 적 응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설리반의 복잡한 표현에서 벗 어난다면, 사랑의 본질은 제휴의 상황 속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위신과 우월과 공적감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의 규칙에 따르고 있다.' 프로이트의 사랑에 관한 개념이 19세기 자본주의 관점에서의 가부장적인 남성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듯이, 설리반은 20세기의 소외된 시장형 인격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 즉 서로의 공통된 이해 관계를 갖고 적대적이며 소외된 세계에 함께 대응하는 두 사람에 관한 기술이다. 사실상 친밀감에 대한 설리반의 기술은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이 공통적인목표의 추구에 있어 서 상대방이 표명한 욕구에 자신의 행동을 적응시키는 어떠한 협동적 팀의 감정에 타당한 것이다(설리반이 여기서'표명된' 욕구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적어도 한 사람이 사랑에 대해 말할때 거기에는 두 사람 사이의 '표명되지 않은' 욕구를 내포하고 있다는것을 염두 에 두면 매우 주목할 만하다). 상호간의 성적 만족으로서의 사랑과 '팀 워크'로서의 그리고 고독으로부터의 피난처로서의 사랑은, 현대 서구사회에서의 사랑의 해체 를나타내는, 사회적으로 유형화된 사랑의 병리학의 두 가지 '정상 적'형태이다. 사랑의 병리학에는 여러 가지 개별화된 형태가 있지 만,그것들은 의식적인 괴로움을 초래하는 것이고, 정신과 의사뿐 아니라점차 늘어 가고 있는 비전문가들에 의해서도 그것은 신경증 적인 것으로여겨지고 있다. 그중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것을 다음 예에서 간단히설명해 보겠다.
신경증적 사랑의 근본적 제약은 '애인' 중의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 부모의 인상에 집착한 채로 남아있고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일 찌기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느낌과 기대, 그리고 두려움 따위를상대방에게 전이시키는 것이다. 이에 관련된 사람은 유아적 관계의유형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성인이 된 후에도 애정적 욕구에서 이러한 유형을 추구한다.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 사람은 지능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그의 생활 연령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애정에 있어서는 두 살이나 다섯 살, 혹은 열두 살 어린이의 수준에 지나지않는다. 좀더 심한 경우에는 이러한 정서적 미성숙은 사회적 유능성에있어서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보다 덜 심각한 경 우에 갈등은 친밀한개인적 관계의 영역에 국한된다. 앞에서 어머니 중심적 인격과 아버지 중심적 인격에 대해 언급했지만, 오늘날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신경증적 애정 관계의 예는 정서적 발달 과정에서 어머니에 대한 유아적 애착에 머물러 있는 남자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말하자면 아직도 어 머니의 젖을떼지 못한 남자들이다. 이 남자들은 아직도 어린이처럼 느낀다. 그들은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과 온화함, 보살핌과 칭찬을 원하며, 그냥필요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머니의 자식이고 무력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원한다. 그런 남자들은 흔히 자기를 사랑하도록 여자를 유혹할 때, 심지어 이에 성공한 뒤에도 매우매력적이며 정감 있다. 그러나 여자에 대한(실상 모든 타인에 대한)그들의 관계는 피상적이며 무책임하다. 그들의 목적은 사랑받는 것이지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유형의 남자에게는 보통 상당한 허영심이있으며 다소 가려져 있는 과장된 생각이 있다.
만일 그들이 적당한 여자를 찾아 낸다면, 그들은 안전하다고 느낄 것이고 이 세계의 정상에 섰다고 생각하며 상당한 애정과 매력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들이 매우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여자가 그들의 환상적인 기대에 맞춰 살지 않게 되면 갈등과 원 망이생기기 시작한다. 만일 여자가 항상 그들을 칭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인생을 살겠다고 주장하며, 자기도 사랑받고 싶고 보호받고 싶다고 말하며, 극단적인 경우에 그와 다른 여자와의 애정 행각 을 용서하려하지 않으면(심지어 그러한 관계를 관심을 갖고 바라 보지 않으면), 그남자는 심하게 상처받고 실망했다고 생각하며, 보통은 여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이기적이며 지배한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관념을 합리화한다. 귀여운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조금이라도부족하게 되면 그것은 곧 사랑의 부족을 나타내 는 증거로 여겨진다. 이러한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애정 행위, 쾌락을 얻으려는소망과 진실한 사랑을 혼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자기들이 불공평하게 취급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매우 뛰어난 연인이라고 상상하며 자신의 사랑의 상대자가 배은 망덕에 대해 몹시불평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