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著 / 정성호 譯
제2장 사랑에 관한 이론
3. 사랑의 대상 (2/2)
ㅁ. 신(神)에 대한 사랑
사랑하려는 우리의 욕구의 바탕은 분리의 경험과 결과적으로 일치의 경험을 통해 분리로 인한 불안을 극복하려는 욕구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위에서 지적되었다. 신에 대한 사랑이라 불리는 종교적인 형식의 사랑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분리를 극복하고 일치를 이루려는 욕구에서 생겨난다. 사실 신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는 다른성질과 측 면을 많이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나타나는 차이도인간에 대한 사랑의 차이와 동일하다. 모든 유신론적 종교에서, 그것이 다신론이든 일신론이든, 신은최고의 가치와 가장 바람직한 선(善)을 상징한다. 따라서 신에 대한특별한 의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선이 무엇인가하는 데 기초한다. 그러므로 신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신을 숭배하는 인간의성격구조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인류의 발달은 자연과 어머니, 혈연과 지연에서의 탈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인간 역사의 시초에서 인간은 자연과의 원초적 일치로부터 벗어나 있었지만 여전히 그러한 근본적인 유대에 매달려 있다. 인간은 이러한 원초적 유대로 되돌아가거나 그에 매달림으로써 자기의 안전을 발견한다. 그는 여전히 동물과 식물의 세계와 일치감을 갖고 있으며, 자연 세계의 일원으로 남음으로써 일치를 찾으려 한다. 많은 원시 종교들은 이러한 발전 단계를 증명해 준다. 동물이 토템으로 전환되어, 가장 엄숙한 종교적 행위나 전쟁에서는 동물의 탈을 쓴다. 인간은 동물을 신으로 숭배한다. 발전의 후기단계에서 즉 인간의 기술이 장인과 예술가의 기술로 발달되었을 때, 인간이 자연의 선물 즉 그가 찾아낸 일과 그가 죽인 동물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은 그 손으로 만든 것을 신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것은 점토나 은, 금으로 만들 어진 우상을 숭배하는 단계이다. 인간은 자신의 힘과 기술을 그가 만든 사물에 투영하며 따라서 소외된 방식으로 자신의 솜씨와 소유물을 숭배 한다. 더욱 발달된 단계에서 인간은 자기가 만든 신에 인간의 모습을부여한 다. 이것은 오직 그가 자신을 더욱 인식하게 되고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신성한 것으로 발견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는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인간과 같은 형상을 한 신을 숭배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두가지 차원의 발전을 찾게 된다. 하나는 신의 본성이 남성적인가 여성적인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성취한 그리고 그가 만든신의 본성과 그 신에 대한 사랑의 본질을 결정하는 성숙도에 관한 것이다. 먼저 어머니 중심의 종교에서 아버지 중심의 종교로의 발전에대해 논의해 보자. 19세기 중엽의 바호펜(Bach-ofen)과 몰간(Morgan)의 위대하고 결정적인 발견에 따르면, 그들의 발견이 가장 학문적인분야에서 맞이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여러 문화에서 부계적종교에 앞서 모계적 종교가 있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모계적측면에서 볼 때 최고의 존재는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신이며 가족과 사회에서 권위를 갖는다. 모계적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성애에 관해 언급되었던 사실을 기억만 하면 된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모든 것을 보호하고 모든 것을 감싸준다. 모성애는 무조건적인 것이기때문에 그것은 통제될 수도, 습득될 수도 없다. 모성애의 현존은 사랑받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며, 모성애의 부재는 상실감과철저한 실망을 야기한다. 자녀들이 착하고 순종적이거나 어머니의 기대와 지시를 충족시키기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 자식을 사랑한다. 따라 서 어머니의 사랑은 평등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은 한 어머니의 자식들이며 모두 어머니인 대지의 자손이기 때문에 모든사람은 평등하다.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는 우리가 추론이나재구성애 의존하지 않고 지식을 통해 알고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부계적 국면이다. 이단계에서 어머니는 그 최고의 위치에서 밀려나며, 아버지가 사회에서는물론 종교에서도 최고의 존재가 된다. 부성애의 본질은 아버지는 명령하고 규칙과 법을 만들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의 지시에 따르는 순종에 달려 있다. 아버지는 자기를 가장 많이 닮고 가장 순종적이며, 자기 재산의 상속자로서 그의 계승자가 되기에 가장 적합한 아들을 가장 사랑한다(부계 사회의 발전은 사유 재산의 발달과 병행한다). 결과적으로 부계사회는 서열적이다. 형제들간의 평등은 경쟁과 상호 투쟁에 자리를 양보하고 만다. 우리가 인도나 이집트, 혹은그리스 문화나 유태 그리스도교, 혹은 이슬람 종교를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남성적인 신들이 있고 그 가운데 주요 신이 지배하거나 하나의 존재, 즉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신도 존재하지 않는 부계 세계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 에 대한 동경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을 주는 어머니의 상이 신전에서 전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태교에서는 신의 모성적 측면이 특히 신비주의의 다양한 조류속에 서 재도입되고 있다. 가톨릭에서 어머니는 교회와 성모 마리아로상징되고 있다. 심지어 개신교에서도 어머니 상은 비록 숨겨져 있다하더라도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았다. 루터는 인간이 하는 어떠한 일도 신의 사랑을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주요 원리로 설정했다. 신의 사랑은 은총이고, 종교적 태도는 이 은총을 신봉하고 자신을 작고 무기력한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어떠한 선행도 신에게 영향을 줄 수 없고, 가톨릭에서 말하듯이 하느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선행에 대한 가톨릭의 교리가 부계적 양상의 일부임을 알수 있다. 즉 나는 순종과 아버지의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 반면에 루터의 교리는 뚜렷하게 나타난 부계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모계적 성격을 지니고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획득될 수 없다. 그것은 거기에 있거나 혹은 거기에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마치 시편의 저자가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 의지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을 갖고 나 자신을 무력하고 의지할데 없는 어린이로 바꾸는 것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모습이 가강 명백한 양상에서 제거되고 아버지 모습에 의해 대치되었다는 것은 루터 신앙의 독득성이다. 즉 어머니의 사 랑을 받는다는 확실성 대신에,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희망과는 어긋나는 강한 의심이 최고의 특징이 되고 있다. 신에 대한 사랑이 지니는 성격은 종교 안에 담긴 모계적 측면과부계적 측연이 지닌 각각의 비중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종교에 있어서의 부계적 요소와 모계적 요소에 대해서 논의해야만 한다.
부계적 측면은 내가 신을 아버치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정의롭고 엄격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를 가장 사랑하는 아들로 선택 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마치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 처럼, 이삭(Isaac)이 야곱을 선택한 것처럼, 하느님이 그의 가장 사랑하는 백성을 선택한 것처럼 종교의 모계적 측면에서 나는 신을 매우 자상한 어머니로서 사랑한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신뢰하고 있고, 내가 가난하 고 무력하더라도, 내가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할 것이고, 다른 자녀들을 나보다 더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내게 무슨 일이 일어 난다 할지라도 어머니는 나를 구제해 주고 나를 구해 주고 나를 용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있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신에 대한 나의 사랑과 나에 대한 신의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신이 아버지라면 그는 나를 아들처럼 사랑할것이고 나 역시 그를 아버지처럼 사랑한다. 만일 신이 어머니라면 어머니의 사랑과 나 의 사랑은 그 사실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 그러나 신의 사랑에 대한 모성적 측면과 부성적 측면의 차이는 그 사랑의 본질을 결경하는 데 있어 하나의 요인에 불과하다. 다른요인은 개인에 의해 도달되는 성숙도로서, 따라서 그 개인의 신에 대한개념과 사랑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류의 진화가 종교뿐 아니라 사회에 있어서 어머니 중심적구조에서 아버지 중심적 구조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성숙해가는 사랑의 발달은 주로 부계적 종교의 발달 과정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발달의 초기에서 우리는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자기의 재산으로생각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인간에게 행하는, 전제적이고 질투심 많은 신을 찾아보게 된다. 이것은 인간으로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신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하느님이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하는 종교적 단계이다. 또한 이것은 가장 사랑하는아들인 노아를 제외하고는 인류 가운 데 아무도 하느님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홍수로 파멸시키겠다고 결정하는 단계이다. 이것은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죽임으로써, 즉 아브라함에게서 궁극적인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사랑을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하느님은 다시는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노라고 노아와 계약을 맺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제 약하는 계약이다. 하느님은 자신이 한 약속에 의해서제약받을 뿐 아니라, 자기의 원리인 정의에의해서도 제약받는다.
이러한 근거에서 하느님은 착한 사람이 10명이라도 된다면 소돔을 멸하지 말라는 아브라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발달이 이루어 질수록, 하느님은 전제적인 족장의 모습에서 자애로운 아버지로, 자기가 천명했던 원칙에 의해 스스로를 제약하는 아버지로 전환된다. 발전은 하느님이 아버지의 모습으로부터 자신의 원칙인 정의와 진실과 사랑의 상징으로 바뀌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발전과정 속에서 하느님은 인간이나 남자, 아버지이기를 그만둔다. 하느님은 다양한 현상들의 배후에 깔려 있는 일치의 원리의 상징이 되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정신적 근원에서 자라날 꽃의 상징이 된다. 하느님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이름은 항상 사물이나 사람 등, 유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느님이 인간이나 사물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름을가질 수 있겠는가? 이러한 변화의 가장 특징적인 사건은 모세에 대한 신의 계시가 나타난 성서 이야기에 있다. 만일 모세가 헤브라이인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들은 하느님이 자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모세가 하느 님께 말했을 때 (우상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이름을 갖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매자들이 이름없는 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양보한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기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라고말해 준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은 하느님은 무한하며 인간도 아니고'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문장을 가장 적절하게 옮긴다면"그들에게 '내 이름은 이름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라"가 될 것이다. 신에 대한 어 떠한 이미지를 지니거나 헛되이 그 이름을 말하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에 대한 금지는 똑같은 목적, 즉 하느님은 아버지며 인간이라는 생각을 인간에게서 지워 버리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이후의 신학적 발달 단계에서 이 사상은 인간은 신에대해 어떠한 긍정적 속성도 첨가해서는 안된다는 원리가 된다. 하느님은 현명하고 강하며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시금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나타내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은 무엇무엇이 '아니다'라고 말하는것, 소극적인 특성을 언급하는 것, 즉 하느님은 제한되어 있지 않고 불친절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고 가정하는 것이 고작이다. 나는 하느님이란 무엇무엇이 ' 아니다'라는 것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일신론의 성숙한 사상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오직 한가지 결론에 도달 하게 된다. 즉 신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어서는 안되며 신에 관한이야기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은 일신론에서는 궁극적인 존재, 즉 현상적 우주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모든 존재의기초인 일치를 가리킨 이름 없는 유일자, 표현할 수 없는 침묵자가된다. 하느님은 진리, 사랑, 정의가 되며 내가 인간인 한 하느님은 곧 나이다. 신인 동형설(神人同形說)에서 준수한 일신론적 원리로의 이러한 진화는 하느님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모든 차이를 자아낸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아브라함의 하느님은 아버지로서, 때로는 그의 용서와 분노가 지배적인 측면이 됨으로써 사랑받을 수도, 공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느님 이 아버지인한 나는 자식이다. 나는 전지전능에 대한 자폐적소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아직 인간으로서의 나의 한계와 무지와 무기력을 깨달을 수 있는 객관성을 얻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어린 아이 처럼 나를 구해 주고 돌보며 꾸짖는 아버지가 있다고, 내가 순종적이고 내가 찬미할 때 나를 좋아하고 순종치 않을 때 화를내는 아버지가있다고 주장한다. 분명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발달 과정 속에서 이런 유아 적인 단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서 신에 대한 믿음은 도움을 주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되는데, 이는 유치한 환상에 불과하다. 종교의 이런 개념이 인류의위대한 스승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인간들에게 있어 그것은 여전히 종교의 지배적 형식이 되고 있다.
이런 측면이 사실인 한, 프로이트에 의해 표현된 것처럼, 그의 신의 관념에 대한 비판은 매우 옳은것이다. 그렇지만 잘못은 프로이트가 일신교의 또 다른 측면과 그 진실한 핵심, 즉 위와 같은 신의 개념에 대한 부정으 로 이끌어가는 논리를 무시했다는 점에 있다. 진실로 종교적인 사람은, 만일 그가 일신교적 관념을 따른다면, 어떤 것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고 신으로부터 무엇을 받고자기대하지 않는다. 그는 아이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는 식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기가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식할 정도로 자기의 한계를 감지할 수있는 겸손을 갖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인간이 초기 진화 단계에서 갈구한 것, 즉 정신 세계 영역의 천체성을, 사랑과 진실과 정의의 전체성을 표현한 상징이 된다. 그는 '하느님'이 나타내고 있는 원리를 믿는다. 그는 진리를 생각하고 사랑과 정의에 따라서 살며, 중요하면서 유일한실재로서, '궁극적 관심'의 유일한 대상으로서의 자신의 인간적인 힘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때만 자기의 전 인생을 가치 있는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는 신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심지어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도 않는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굳이 이 말을 사용하고자 한다면,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의 획득을, 신이 상징하는 것의 실현을 갈구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일신교 사상의 논리적 결과는 모든 신학,즉 모든 신에 대한 지식의 부정이다. 그렇지만 급진적인 비신학적 견해와 초기 불교나 도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무신톤 체계 사이의 차이가남아 있다. 모든 유신론 체계에서, 심지어 비신학적, 신비적 체계에서도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정신적 힘과 구원과 내적 탄생을 갈구하는 것에 대해 의미와 타당성을 부여하는 정신적 영역의 현실을 가정하고있다. 무신론 체계에서는 인간 밖에 있거나 인간을 초월하는 정신적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과 이성 그리고 정의의 영역은 실재로서존재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화 과정을 통해서 자신 안에 이러한 힘을 발전시킬 수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를 제외하고는 인생에 대한 아무런 의미도 존재하지않는다. 인간은 타인을 돕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혼자이다.
이제까지 신에 대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했지만, 나는 나 자신이 유신론적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과 내게 있어서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자기보다 높은 힘의 경험과 주어진 역사적 시대에서의 진리와 일치에 대한 회망을 표현한, 오직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개념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엄격한 일신론의 결론과 정신 세계에 관한 무신론의 궁극적 관심은, 비록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서로 싸울 필요가 없는 두가지 견해라 믿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 관련 된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논의되어야한다. 나는 동양(중국과 인도)과 서양 사이의 종교적 태도에 관한차이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 차이는 논리적인 개념들을 통해 표현할 수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구 세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논리적 원리를 추종해 왔다. 이 논리학은, A는 A라는 동일률과 A는 비A가 아니라는 모순률, 그리 고 A는 A이면서 비A가 될 수 없고 A도 아니고 비A도 아닐 수 없다는 배중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매우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동일한 것이 동시에 동일한 사물에 동일한 관계로 속하고 동시에속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 가 변증법적 반대에 대처하기 위해 어떤 차원을 부가하더라도 그러한 구별은 첨가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모든 원리들 가운데 가장 확실하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공리는 우리의 사고 습관 속에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느껴지며, 한편으 로 X는 A이지만 A가 아니라는 명제는 넌센스처럼 생각된다(물론 이 명 제는 일정한 시점에서의 주개념 X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며, 지금의 X와 이후의 X' 혹은 다른측면에 대립한 것으로서의 X의 한 측면에 대해 언 급하는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대립하는 것으로서 소위 '역설논리학'이 있 다. 그것은 A와 비A는 X의 술어로서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 역설 논리학은 중국과 인도의 사상,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며, 다시 변증법이라는 명목아래서 그것은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이 되었다. 역설 논리학의일반원리는 노자에 의해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엄밀하게 진실인 말들은 역설적인 것 같다." 그리고 장자는 "1은 1이다. 1이 아닌 것도 또한1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역설논리학의 공식은 긍정적이다. '그것은 이것도 저것도 아나다'라는공식은 부정적이다. 전자와 같은 사고의 표현은 도교의 사상과 헤라클레이토스, 그리고 헤겔 변증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후자의 공식은 인도 철학에서 흔히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역설논리학의 차이를 좀더 상세히 다루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원리를 이해할수 있도 록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서구 사상에 있어서 역설논리학은 해라클레이토스의 철학에서 최초로 철학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는 상반된 것들의 갈등이 모든 존재의 기초라고가정한다. 그는 "그 자체로서 갈등하고 있는 전일자(全一者)는 그자체와 같다는 것, 즉 활이나 수금에서처럼 '갈등상태의 조화'를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혹은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들어간다. 그러나 똑같은 물속에 있지는 않다. 그것은 우리이지만 우리가 아니다." 혹은 "1 이면서 동일 한 것은 살아 있으면서 죽은 것으로, 걸어가면서 잠자는 것으로, 어리면 서 늙은 것으로서 사물 속에 그 자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노자의 철학에서는 똑같은 사상이 좀더 시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도교의 역설적 사고의 특징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명제이다. "무게는 가벼움의 뿌리 이고, 정지는 운동의 지배자이다." 혹은 "정상적인 과정에 있는 도(道)는 아무것도 하지않고, 따라서 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은 "내 말 은 매우 이해하기 쉽고, 또한 실천하기도 쉽다. 그렇지만 내 말을 알아듣 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인도사상이나 소크라테스의 사고처럼 도교에서도 사고가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단계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알지만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고의 각성이고,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질병이다." 최고의 신에게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은 이 철학의 귀결에 불과하다. 궁극적인 실재, 궁극적인 일자(一者)는 말이나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 노자가 지적한 것처럼, "밟고 걸어갈 수 있는 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도가아니다. 명명될 수 있는 이틈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혹은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보지못하고 그것 을 '평온한 것'이라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그것에 귀를기울이려 하지만 듣지 못하고 '들을 수 없는 것'이라 명명한다. 우리는그것을 잡으려하지만 잡지 못하고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라 부른다. 이러한 세 가지 성질은 서술의 주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한데 섞어 일자 (一者)를 얻는다." 똑같은 사상을 달리표현하면, "도를 아는 사람은 그것 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에 대해 말하려 하는 사람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브라만 철학은 (현상의) 다양성과 통일성 (브라만)의 관계에 대해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역설적 철학은 인도에서나 중국에서나 '이원적'관점 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조화(일치)는 갈등하는 입장에 있고,거기서부터 조화가 이루어진다. "브라만의 사고는 처음부터 동시적인대립관계, 그렇지만 현상 세계의 명백한 힘과 형식의 동일성에집중되었다........" 인간에 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주에 있어서궁극적인 힘은 개념적 영역과 감 각적 영역을 초월한다. 따라서 그것은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러나 짐머 (Zimmer)가 언급했듯이, "이렇듯 엄격하게 비이원적인 현실에서는 '실재적인 것과 비실재적인 것' 사이의 대립 관계는 없다." 다양성 뒤에 숨 어 있는 통일성을 찾는 과정에서브라만의 사상가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지각된 것은 사물의 본성이 아니라 지각하는 정신의 본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각하는 사고가 참된 실재를 얻으려면, 그 자신을 초월해야 한다. 상반은 실재의 요소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한 범주이다.리그베다(Rig-veda)에는 이 원리가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나는 둘이다. 즉 생명의 힘과 생명의 자료로서 동시에 둘이다." 사고는 오직 모순을 통해서만 지각할 수 사상있다는 관념의 궁극적 귀결은 다음과 같은 베다의에서 극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즉 사상, 모든 미묘한차이를 가진 사상은 "무지의 더욱 정교한 지평선이고, 사실 마야의 모든 교묘한 책략 가운데 가장 정교한 것이다"라고 베다는 가정하고 있다.
역설 논리학은 신의 개념과 중요한 관련을 갖고 있다. 신이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한, 인간의 정신이 모순속에서만실재를 지각하는 한, 신에 대해서는 어떠한 긍정적인 명제도 이루어질수가 없다. 베다에서 전지 전능한 신이라는 관념은 무지의 궁극적 형태로여겨지고 있다.우리는 여기서 도(道)의 무명성 (無名性)과 모세에게자기를 드러 낸 신의 무명성, 즉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 있어서의 절대무와의 관련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은 궁극적 실재의 부정적 측면을 제외하고는, 그 긍정적 측면을 알지 못한다. "비록 인간이 무엇이 신이아닌가를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무엇이 신인가는 알 수 없다......따라서 무에 만족하더라도 정신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선한 것을 요구한다." 마이스터 에크하 르트에게 있어서 "신성한 일자(一者)는 부정의 부정이고 거부의 거부이 다.......모든 괴조물은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은 그것이 다른 것이라 는 것을 부정하고있다." 이 결론을 한층 더 진전시키면, 카발라(Kabalah) 에 있어서 궁극적실재는 '엔소프(En Sof), 즉 무한한 일자인 것처럼 신은 마이스터에크하르트에게 '절대무'가 된다. 나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개념에 나타나있는 중요한 차이점의 근거를 밝히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과 역설논리학의 차이점을 살펴보고자한다. 역설 논리학의 스승들은, 인간은 오직 모순을 통해서만 실재를 지각할 수 있고 사고를 통해서는 궁극적 실재의 통일성, 즉 일자 자체를 지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은 사고를 통해 해답을 찾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사고는 우리에게 궁극적인 해답을 줄 수 없다는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뿐이다. 사고의 세계는역설에 사로잡혀 있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사고에 있지 아니하고 행동에, 즉 일체성의 경험에 있다. 따라서 역설논리학은, 신에 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해 신을 아는 것도 아니요, 신에대한 자신의 사랑에 관한 사상도 아니며, 다만 신과의 일치를 경험하는행위의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이런 사상은 올바른 생활 방식을 강조하게 된다. 전생애, 모든 보잘것 없는 행위와 모든 의미 있는 행위는 신에 관한 지식에 바치나, 올바른 사고가 아닌 올바른 행위에 의한 지식에 봉헌된다. 이것은 동양의 종교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브라만교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서도 종교 의 궁극적 목표는 올바른 믿음이 아니라 올바른행위이다. 우리는 유태교 에서도 뜩같은 강조점을 찾아볼 수 있다. 유태전통에서 신앙에 대한 분열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간의 차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예외는 두 대립적인 사회 계급의차이였다). 유태교는 특히 우리 기원의 시초로부터 올바른 생활 방식,즉 할라카(이 말은 실제로 도와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를 강조해 왔다.
현대 역사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의 사상 속에 표현되어 있다. 스피노자의 철학에서는 강조점이올바른 믿음에서 삶의 올바른 행위로 옮겨진다. 마르크스는 똑같은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그러나 철학자의 임무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다."프로이트는 역설 논리학을 통해 정신 분석 요법, 즉 자아의 심층적경험을 얻어 낸다. 역설 논리학의 관점에서는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강조를 둔다. 이러한 태도는 몇 가지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그 태도는 인도나 중국 의 종교적 발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용'을 가져왔다. 만일 올바른 사고가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고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아니라면,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싸울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다. 이러한 관용은 어둠 속에서 코끼리를 묘사하라는 요구를 받은 몇 사람의 이야기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첫번째 사람은 코끼리의 코를만지면서, "이 짐승은 수도관 같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은 귀를만지더니, "이 동물은 부채 같다" 고 말했다. 다리를 만지던 사람은 그동물을 기둥 같다고 표현했다. 두 번째 역설적 관점은 한펀으로는 교의,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발달 보다는 인간 개조에 대한 강조를 가져왔다. 인도나 중국, 그리고신비적 인 관점에서 볼때, 인간의 종교적 사명은 올바로 생각하는 것이아니라 올바로 행동하는 것, 그리고 집중된 명상을 통해 일자(一者)와하나가 되 는 것이다. 서양 사상의 주류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것이 진리로 여겨졌다. 올바른 사고를 통해서만 궁극적 진리를 찾을 수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올바른 행위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주된 강조는 사고에 있었다. 종교적 발전과정에서 이것은 교의의 형성, 교의의 형식화에관한 끝없는 논쟁, 비신자나 이교도에 대한 비관용을 자아냈다. 그것은더 나아가 종교적 태도의 주요 목표로서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물론 올바로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비록 신의 뜻에따라 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의 뜻에 따라 살지만 신을 믿지 않는사람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 했다.
사고에 대한 강조는 또 다른 그리고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사고를 통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관념은 교의뿐만아니라 과학으로도 이끌었다. 과학적 사고에 있어서 올바른 사고는 지적 정직성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실천에의 적용, 즉기술에 응용하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간단히 말해서, 역설 논리학은 관용과 자기 변혁을 향한 노력을 가져왔 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고의와 과학, 즉 가톨릭 교회와 원자 에너 지의 발견을 초래했던 것이다. 신의 사랑의 문제에 관한 두 입장의 이러한 차이점이 가져오는 결과는 이미 암시적으로 설명되었으므로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겠다. 지배적인 서구 종교 체계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근본적으로하느님에 대한 믿음, 즉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의 정의, 하느님의 사랑에대한 믿음과 같은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기본적으로 사고의 경험이다. 동양의 종교와 신비주의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강렬한 일치성의 경험이며 삶의 모든 행위 속에서 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과 전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이러한 목표를 가장 철저하게 공 식화했다. "따라서 내가 신으로 변하고 신이 나를 그와 하나로 만든다면, 살아 있는 신에 의해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게된다.......어떤 사람들 은 그들이 신을 보려 한다고, 마치 저기 서 있는것처럼 신을 보고자 한 다고 상상하지만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하나이다. 신을 앎으로써 나는 신을 내게로 데려온다. 신을 사랑함으로써나는 신에게 침투한다." 여기서 부모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사이의 중요한 평행 관계로 되돌아 올 수 있다. 아이는 '전존재의 근거'로서의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무력하다고 느끼며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어머니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는 자기애정의 새로운 중심으로써 아버지로 전환하며, 아버지는 사고와 행위의지도 원리가 된다. 이 단계에서 어린 아이는 아버지의 칭찬을 듣고 아버지의 불쾌감을 피하려는 욕구에 의해 자극된다. 완전히 성숙한단계에서 그는 자신을 보호하고 명령하는 힘으로서의 어머니라는 사람과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벗어난다. 그는 자신 안에 모성적 원리와 부성적원리를 형성시켜 놓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되고 자신의 어머니가된다. 그는 아버지며 어머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똑같은 발달을 본다.-예측할 수도 있다. 어머니인 여신에 대한 무기력한 애착으로서의 신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부성적 신에 대한 순종적애착을 거쳐, 신이 외부에 존재하는 힘이기를 그만두며 인간이 자신 안에 사랑과 정의의 원리를 흡수하고 신과의 일체가 되는 단계 에 이르고, 마침내는 시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서만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고찰에서 볼 때, 신에 대한 사랑과 부모에 대한 사랑은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머니나 씨족, 민족에 대한 근친에적인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벌을 주고 칭찬을 해주는 아버지나 혹은 다른 권위에 대하여 유아기적 의존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그는 좀더 성숙한 신에 대한 사랑을 발달시킬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종교는 신이 모든 것을 보호해 주는 어머니나 별을 주고 상을 주는 아버지로서 경험되는 초기 단계의 종교에 불과하다.
현대 종교에서, 우리는 최초의 그리고 가장 원시적인 형태에서가장 발 달된 형태까지의 모든 국면을 찾아볼 수있다. '신'이란 말은'절대무'뿐만 아니라 부족장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각 개인은 자기 안에,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의 무의식 안에 무기력한 유아에서부터 모든 단계를 지니고 있다. 문재는 그가 어디까지성장하는가 하는 것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신에 대한 사랑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본질과 상응하며, 나아가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랑이 무엇인가에관한 더욱 성숙한 사고에 의해 가려지고 합리화되기 때문에 흔히 의식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에 대한 사랑도 직접적으로는 가족과의 관계에 담겨겨 있지만, 최근의 분석에 따르면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만일 사회 구조가 권위, 즉 드러난 권위이거나 시장과 여론 등의익명적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그 안에 살고 있는사람들의 신 에 대한 개념은 유아기적이고, 성숙한 개념에 훨씬 미치지못하게 될 것 이다. 그리고 그 성숙한 개념의 씨앗은 일신교의 역사속에서 발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