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 - 에리히 프롬 著 / 정성호 譯
제2장 사랑에 관한 이론
1. 사랑, 인간의 존재 문제에 대한 해답
사랑에 관한 이론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인간에 관한 이론으로부터, 즉 인간 존재에 관한 이론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동물에게서도 사랑이라든지 혹은 이와 비슷한 것을 찾아볼 수있지만, 동물의 애착이란 동물이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장치의 일부에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본능적 장치의 극히 일부만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은 인 간이동물 세계로부터, 본능적인 적응의 세계로부터 벗어났다는 사 실, 그리고인간이 자연을 결코 떠날 수 없고 비록 일부분일지라도 그 자연을초월해 있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지만 일단 자연과 결별 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즉 자연과의 원시 적 합일 상태인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아무리 돌아가려고 해도 불길이 훨훨 타오르는칼을 가진 케루빔 천사(아홉 천사 중 제2위 로, 지식을 맡은 천사)가돌아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인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잃어버린 전인간적인 조화 대신에 자신의 이성을 발달시키고 새로운 조화, 인간적인 조화를 찾음으로써만 앞 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이든 인류이든간에 인간은 일단 태어나게 되면, 본능처럼 철저하게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비결정적이고 불확실하며 개방적인 상황으로 추방된다. 확실한 것은 오직 과거에 대해서 뿐이고, 미래 에대해서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사실 뿐이다. 인간은 이성을 부여받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생명'이다. 그는 자신, 동료, 자기의 과거, 미래의 가능성을 알고 있다. 자신을 따로 떨어진 실체로 인식하고 자기의 생명이 매우 짧음을 알며,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과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보다 먼저, 또는 그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고독과 분리, 자연과 사회의 힘 앞에서는 자신이 무력하기 짝이 없다는 것에 대한 자각 등, 이 모든 것은 인 간의분리되고 분산된 존재를 참을 수 없는 감옥으로 만들어 버린 다. 그래서인간은 이 감옥으로부터 빠져 나와 자기를 타인이나 외 부 세계와 어떠한형태로든 결합하지 않으면 곧 미쳐 버리고 말 것 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경험은 불안감을 자아낸다. 확실히 그것은 모든 불안의 근원이다.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능력을 사용할 기회를 잃어버린 채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리되어 있다 는 것은무력함을 의미하며, 이 세계 즉 사물과 인간을 능동적으로 파악할수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대 해 반응하지못한 채 세계가 나를 침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분리는 격렬한 불안의 근원이다. 그것을 넘어서 분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을 유발시킨다. 분리된 상태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표현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즉 그들이 복종하지 않은 후에 (복종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면 선과 악도 없다), 자연과의 본래적인 동물적조화로부 터자신을 해방시켜 인간이 된 후에, 즉 인간으로서 탄생한 후에,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음'과 '부끄럽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오래 된 단순한 신화도 19세기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시치미 떼 는 도덕을 갖고있고,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하는 요점이 그들의 성기가 눈에띄게 된 데서 오는 당혹감이라고 생각할 수 있 을까? 결코 그렇지 않을것이다. 이 이야기를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 을 바탕으로 이해한다면,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빠뜨리게 된 다. 즉 남자와 여자가 자신과 서로를 인식하게 된 후에, 그들은 자신이 분리되어 있고 서로 다른 성(性)에 속해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여전히 타인으 로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아직 서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 했기때문이었다(이 점은 아담이 이브를 보호하려 하기보다는, 그녀 를꾸짖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한 사실에 의해서도 아주 뚜렷하 게드러난다). 인간이 사랑에 의해서 다시 결합되지 못한 채 분리되 어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수치심의 원인인 동시에 죄책감과 불안의근원이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자신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빠져 나오려는 욕구이다.이러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결정적으로' 실패한다는 것은 곧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 하면완전한 고립에 대한 공포감은 분리감이 사라져 버리도록 외부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물러남으로써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 게되면 인간이 분리되어 있는 그 외부 세계마저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한 가지의 동일한 문제의 해결에 직면해 왔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분리감을 극복하고 일치를 이룩하는가, 어떻게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는 동굴에서 사는 원시인에게도, 양 떼를 돌보는 유목민에게도, 이집트의 농부에게도, 페니키아의 상인에게도, 로마의 병정에게도, 중세의 수도사나 일본의 사무라이에게도, 현대의 사무원이나 공장 직공에게도 마찬가지로 동일하다. 즉 그 문제는 인간이 놓인 상황, 인간 존재의 조건이라는 동일한 근거에서 나오기 때문에 동일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해답은 다양 하다. 그 문제는 동물 숭배에 의해, 인간의 희생이나 군사적 정복에 의해,사치에의 탐닉에 의해, 금욕적인 포기에 의해, 강제 노동에 의해, 예술적 창조에 의해,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그리고 인간에 대 한 사랑에 의해 대답 될 수 있다. 많은 대답-이 대답의 기록이 곧 인간의 역사이다-이 있다고 해서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하게 않은 것은 아니다. 반대로, 중심이라기보다는 주변에 속하는 조그마한 차이를 무시해 버린다면 그 대답의 수는 극히 제한되어 있고, 인간이 살고 있는 다양한 문화 속에있는 인간에 의해서만 제시될 수 있었 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종교와 철학의 역사가 이러한 해답의 역사이며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는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다양해져 감을 보여주는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해답들은 어느 정도로는 개인이 도달한 개성화의 정도에 달려 있다. 유아기에는 '나'라는 개념이 발달되긴 하지만 아직도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유아는 여전히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 끼며어머니가 옆에 있는 한 분리감을 느끼지 못한다. 유아의 고독 감은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사실과 어머니의 가슴, 피부에 의해 어루만져진다. 어린이가 자신의 분리감과 개성을 발달시키는 정도에 따라서 어머니의 신체적 존재는 더 이상 충분한 치료 조건이 되지 못하며, 다른 방법을 통해 자신의 분리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인류는 유아기에는 자연과 일체감을 느낀다. 대지와 동물 그리고 식물은 여전히 인간의 세계이다. 인간은 자신을 동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은 동물의 머리 모양을 한 가면을 쓴다 거나, 토템으로 삼고 있는 동물이나 동물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표현 된다. 그러나 인류가 이러한 원시적인 유대 관계에서 벗어나면 벗어 날수록인류는 자신을 자연 세계와 분리시키게 되고, 분리를 피할 수 있는새로운 방법을 찾으려는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여러 종류의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가 있다. 이런 상태는 때로 마약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저절로 유발되는 황홀경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원시부족들의 종교예식의 대부분은 이러한 유형의 해결에 대한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황홀경으로 빠져 드는 상태에서 외부 세계는 사라지게 되며, 그와 더불어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마저도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의식들은 공동으로 행해지므로 집단과의 융합이라는 경험 이더 강화되어 이 해결 방식을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러 한 '진탕 마시고 떠드는' 해결책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때로는 그것과 혼합되는 것으로 성적인 경험이 있다. 성적인 극치감은 황홀 경에 의해 유발되거나 어떤 마약의 효과로 생겨나는 것과 유사한 상태를 자아낸다. 집단으로 행해지는 성적인 의식은 이러한 원시적인 예식의 한부분이었다. 황홀경을 경험한 후 얼마간은 인간은 자신이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 고통받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것으로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불안에 대한 긴장은 점차 고 조되며, 다시 그예식을 되풀이함으로써 감소되는 것이다.
이러한 황홀경의 상태가 한 부족 내에서 공동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 그들은 불안이나 죄책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심지어 미덕으로까지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방법이며 무당이나 사제에 의해 인정되 고요구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가질 하등의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이, 공동으로 행해지는 행동 영역에서 배제된 문화 속에 있는 한 개인에 의해 선택되어질 때는 전혀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은 황홀경을 배제하는 문화권에 서선택되는 방법이다. 사회적으로 틀이 지어진 해결 방법에 참여하 는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알콜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들은 죄책감 과가책으로 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들은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복용함으로써 도피처를 찾아 분리감에서 빠져 나오려 하지만, 도취 상태가 끝나게 되면 자신이 더욱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게 되며 더 욱자주, 더욱 강하게 그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와는 조금 다른 것으로써 성적인 도취를 추구하는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분리감을 극복하는 자연적이고도 정상적인 형식이며, 고립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해결책이 된다. 다른 방법으로분리감을 제거하지 못한 개인에게 있어서 성적 극치감을 찾으려는 노력은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과 별로 다르지 않은 기 능을 떠맡게된다. 그것은 분리감에 의해 야기된 불안에서 탈출하려는 절망적인 노력이며, 결국 분리감은 점차 증가하기만 한다. 왜냐 하면 사랑이 없는 성행위는 순간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두 사람 사 이의 간격을 결코 메울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황홀경을 추구하는 모든 형태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그 강도가 매우 강렬하여 때로는 난폭하다는 것이며, 둘째로 전인격에 걸쳐서, 즉 몸과 마음 모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며, 세째 는일시적이며 주기적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되는 것이 과거 나현재에 있어서 가장 흔하게 선택되어지는 일치의 양식이다. 그것 은 집단,그 집단의 관습, 관행, 신념과의 동조에 바탕을 둔 일치이 다. 여기서우린 다시 상당한 발달을 보게 된다. 원시 사회 집단은 소규모이다. 그 집단은 혈연이나 지연을 바탕으 로하여 형성된다.
문화가 점차로 발달되어감에 따라서 집단도 확대 된다. 집단은 도시 국가의 시민,큰 국가의 시민, 교회의 성원으로 이루어진다.심지어는 보잘것없는 로마인도 "나는 로마인이다"라고 말 할 수 있었기에 긍지를 느꼈다. 로마와 그 제국은 그의 가족이며 집 이고 그의 세계였다. 또한 현대 서구 사회에서도 집단과의 일치는 분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의 자아가 대부분 사라지 고또한 그 목적이 군중에 소속되어 있는 일치이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고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하는 감정이나 생각을 갖고있지 않으며 관습, 의복, 사상 등을 집단의 유형에 동조한다면 나는구제된다. 즉 고독이라는 무시무시한 경험으로 부터 구제되는 것이다. 독재적인 체제는 이러한 동조를 이끌어내기 위해 위협과 공포를 사용하며 민주주의 국가는 암시와 신전을 사용한다. 물론 두 체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비동조는 존재할 수 있으며 사실상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극소수의 비범한 영웅이나 순교자들만이 복종하기를 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사회는 압도적인 일치도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일치의 추구에 대한 해답이 있어야만 하는데, 만일 더 좋은 방법이나 다른 방 법이 없다면, 군중에 동조하여 생기는 일치는 유력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분리되지 않으려는 욕구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타인과 다르다는 데서 생기는 공포, 군중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다는 공포의 힘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때때로 동조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공포는 동조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실제적인 위험에 대 한공포로써 합리화 된다. 하지만 실제로 적어도 서구 민주주의 사회 에서는사람들은 동조하기를 '강요받는' 정도보다 훨씬 더 동조하기 를 '원하고'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동조하려는 욕구를 인식하 지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의 생각과 기호에 따르고 있 고자기는 개인주의자이며, 스스로의 사고의 결과로 현재의 의견에 도달했으며 어쩌다 우연히 자기 생각이 대다수의 생각과 같아졌다 는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사람과의 의견 일치라고 하는 것은 자기생각이 옳다는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약간의 개인성을 느끼고자하는 욕구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한 욕구는 근소 한 차이점에 의해 충족된다. 즉 손가방이나 스웨터에 새겨진 첫머리 글자, 은행 출납 계원의 명찰, 공화당에 반대하고 민주당에 소속해 있다는 사실, 슈라이너 대 신에 엘크스에 속해 있다는 것 등이 개인차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이것은 다르다'라는 광고 문귀는 달라지고자 하는 애처로운 욕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차이를 없애려는 경향이 농후한 것은, 가장 발달된 산업 사회에서 발전하고 있는 평등의 개념과 경험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종교적인 맥락에서의 평등이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식이며 우리들은 모두 사람으로서 신성한 자질을 나누어 가졌으며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개인들간의 차이는 각기 존중받아야 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이지만 우리들 개개인은 독특한 실체이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조화로운 우주라는 사실도 의미하고 있다. 그러한 개인의 특이성에 대한 확신은 예를 들어 탈무드에도 표현되어 있다. "누구든지 한 생명을 구하는 사람은 전세계를 구하는 것과 같고, 한 생명을 파괴하는 사람은 전세계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개성 발달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평등은 또한 서구 계몽주의 철학의 평등 개념의 의미이기도 했다. 칸트에 의해 매우 명확하게 설명 된 그 평등 개념은 인간은 타인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은 그들이 목적인한 동등하며 오직 목적으로서, 서로에게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계몽 철학의 사상을 따라, 다양한 학파의 사회주의 사상가들은 평등을 착취의 폐지, 즉 그이용이 잔인한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간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이용을 폐지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평등의 의미는 계속 변화되어 왔다. 이 사회에서 말하는 평등이란 자동 인형의 평등, 즉 자신의 개성을 상실해 버린 사람들의 평등을 의미한다. 오늘날 평등은 '일체성'보 다는'동일성'을 의미한다. 즉 평등은 추상적인 동일성, 곧 똑같은 일을하고 똑같은 오락을 즐기며 똑같은 신문을 읽고 똑같은 느낌, 똑같은생각을 갖는 사람들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시대의 진보의 징표라고 찬양되어지는 몇 가지 업적들, 예 를 들면 남녀평등 같은 것들에 대해 약간의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 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내가 남녀 평등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듯 평등을 얻으려는 경향에 긍정적인 측면으로 인해 기만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차이를 없애고자 하는 경향의 일부이다. 여자는 이제 더 이상 다르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다는 것,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남녀 평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신에는 성 (性)이 없다'는 계몽 철학의 명제는 이제 일반적인 관습이 되었다. 성의 양극성은 사라지고 그 양극성에 바탕을 둔 성 적인사랑도 그것과 함께 사라지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서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는 개성화 되지 않은 평등의 이상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는 인간으로 하여금 대집단 속에서 자기의 기능을 원활하게, 아무런 마찰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그것도 그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있다고 확신하며 모두 똑같은 명령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의 대량 생산 을 위해서는 상품의 표준화가필요한 것처럼, 사회적 과정은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있고 이 표준화가 '평등'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조에 의한 일치는 강렬하지도 않고 난폭하지도 않다. 그것은 평온하며 일상적인 생활 양식에 의해 지배된다.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가끔 분리감으로 인한 불안을 진정시키기에 부족할 때도 있다. 현대 서구사회에 있어서 알콜 중독이나 마약 중독, 강박적인 성애 중시 와자살등은 군중에의 동조에 상대적으로 실패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증상들이다. 게다가 동조에 의한 일치는 주로 육체가 아니 라 정신에 관계되기 때문에 황홀경에 빠지는 해결책과 비교해 볼 때 부족한 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대중에의 동조에는 오직 한 가지의 이점이 있을뿐이다. 그것은 발작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이 라는 것이다. 개인은 세살 내지 네 살 때 동조의 유형을 처음 알게 되고 따라서 대중과의 접촉도 끊이지 않게 된다. 심지어 인생의 마지막 일로써 생각되는 장래식마저도 그 유형에 철저히 동조하게 된다. 분리감으로부터 생기는 불안을 떨쳐 버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동조와 더불어 현대 생활의 또 다른 요소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노동과 일상적인 오락의 역할이다. 오늘날 인간은 일정하게 규정된 시간에만 일을 하고 노동력의 일부이며, 혹은 사무원이나 경영자라는 관료적 힘의 일부이다. 인간은 거의 진취적인 기상을 갖고 있지못하고, 그의 일은 작업 조직에 의해 이미 규정되어 있다. 고 급 관리나말단 관리나 별차이가 없다. 그들은 조직의 전체 구조에 의해 규정된 일을 규정된 속도와 규정 된태도로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느끼는 감정마저도 명랑, 인내,신뢰성, 야망, 다른 사람과 마찰 없이 잘 지낼 수 있는 능력 등으로규정되어 있다. 오락도 그리 격렬한 방법은 아니지만 비슷하 게일상화되어 있다. 책은 독서 클럽에서 선택되어지고 영화는 영화 사나극장 소유주에 의해서 선택된다. 그 밖의 나머지는 모두 동일 하다.일요일에 자동차로 드라이브하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카드 놀 이를하거나 사교파티에 참석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월요일부 터 다음월요일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활동들은 규격화되고 미리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일상의 그물에 매인 인간이 자기는 독특한 개인이며 희망과 실망, 슬픔과 공포, 사랑에 대한 동경과 무(無)에 대한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살아 갈 기회밖에는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잊지 않겠는가? 일치를 얻는 세 번째 방법은 '창조적인 활동' 이다. 비록 그것이 예술가의 활동이든 숙련된 장인(匠人)의 활동이 든 어떤 종류의 창조적 활동이든 간에 창조적인 사람은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를나타내는 재료와 자기를 일치시킨다. 목수가 탁자를 만들든지 금세공인이 보석을 다듬든지 농부가 곡식을 기르든지 화가가 그림을 그리든지 간에, 모든 형태의 창조적 작업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 대상은 하나가 되며 인간은 창조 과정 속에서 자신을 세계와 일치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생산적인 작업에만 적용 된다. 즉 내가 계획하고 내 작업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무원의 작업 과정에서는 작업의 이러한 일치적 성격은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일하는 사람은 기계 혹은 관료 조직의 부속물이 되어 있다. 그는 이제 자기임을 그만두었고 따라서 동조에 의한 수준을넘는 일치는 일어나지 않는다. 생산적인 작업에서 이루어진 일치는 인간 상호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황홀경 속에서 이루어진 일치는 일시적이며 동조에 의한 일치는 사이비 일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존재의 문제에 대해서는부분적인 해답에 불과하다. 완전한 해답은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타인과의 융합, 즉 '사랑'의 성취인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융합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갈망이다.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며, 인류와 집단, 가족,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은 발광이나 파괴 (자신의 파괴 혹은 타인의 파괴)를 의미한다.
사랑이 없이 인간성은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인간 상호간의 합일의 성취를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융합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성취 될 수있으며 그 방식들 사이의 차이점은 사랑의 제양식의 공통점 만큼이나중요하다. 그러한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혹은'사랑'이란 말을 오직 특별한 형태의 일치, 즉 지난 4천년 동 안 동양과 서양의 역사에서 나타난 모든 위대한 인본주의적 종교와 철학 체계에서 이상적인 덕으로 여겨졌던 일치에만 사용하여야 하는가? 어의상의 어려움 때문에 해답은 어차피 임의적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언급할 때 어떤 종류의 일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인간존재의 문제에 관한 성숙한 해답으로써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소위 '공서적(共棲的) 일치'라고 불리는 미성숙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앞으로 나는 전자의 경우만 을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후자의 경우에 대해 토 론해 보고자 한다.
'공서적 일치'는 임신한 어머니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그 생물학적 유형을 찾아볼 수있다. 그들은 둘이지만 하나이다. 어머니와 태아는 공서, 즉 함께 살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태아는 어머니의 일부이고 필요한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서 받는다. 어머니는 태아의 세계인 것 이다.어머니는 태아를 먹이고 보호하지만 어머니 자신의 생명도 태아에 의해서 강화된다. '정신적'인 공서적 일치에 있어서의 두 신체 는 독립적이지만심리적으로는 똑같은 종류의 애착이 존재한다. 공서적 일치의 '수동적'인 유형은 복종, 또는 임상적인 용어로 '피학대 음란증'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인도하며 보호해 주는 타인의 일부가 됨으로써 견디기 힘든 고독감과 분리감으로부터 도피한다. 인간이 복종하고 있는 사람의 힘은, 그것이 인간이든 신이든 간에 팽창된다. 그는 모든 것이며 내가 그의 일부 인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한 부분으로서 나는 위대성과 힘과 확실성의 일부이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결정을 할 필요도, 위험을 무릅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는 결코 외롭지 않다. 하지만 독립한 상태도 아니다. 그는 통합성을 갖지 못하며 아직 완전히 탄생한 것도 아니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숭배의 대상은 우상이라고 불린다. 피학대 음란증적 애정관계라는 세속적 맥락에서도 기본적인 과정, 즉 우상 숭배의 과정은동일하다. 피학대 음란증적 관계는 육체적, 성적인 욕구와 혼합될수도 있다. 그런 경우의 복종은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까지도 관계되는복종이다. 또한 피학대 음란증적 복종에는 운명과 병에 대 한, 율동적인음악과 마약이나 최면에 의해 야기된 도취상태에 대한 복종도 있을 수있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개인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을자기 외부의 사람이나 사물의 도구로 만든다. 그는 생산적인 활동을 통해삶의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공서적 융합의 '능동적'인 형태는 지배 또는 피학대 음란증에 대응하는 심리학적 용어로는 '가학성 음란증'이다.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타인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고독감에서, 갇혀 있다는 감정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는 자기를 숭배하는 사람을 흡수함으로 써 자신을팽창시키고 강화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이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에 의존하듯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도 복종적인 사람에게 의존한다. 양자는 한쪽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차이는 오직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하고 착취하며 상처를 입히고 모욕을 가하지만,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명령받고 착취당하며 상처를 입고 모욕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의미에서는 상당한 차이지만 좀더 깊은 감정적인 차원에 서의 그 차이는 양자가 공유하는 것, 즉 함성이 없는 융합만큼 그리 크지않다. 만약 이 점을 이해한다면 일반적으로 인간이 가학성 음 란증적방식과 피학대 음란증적 방식의 두 가지에 의해 서로 다른 대상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히틀러는 우선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학성 음란증적 방식으로 대응했지만 운명과 역사와 자연의 '보다 큰 힘'에 대해서는 피학대 음란증적 방식으로 반응했다. 전반적인 파멸에 직면하여 자살한 그의 최후는 전체적인 지배라는 그의 목표만큼 특징적이다.
공서적 일치와 대비하여, 성숙한 사랑은 '개인의 통합성' 즉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어서의 일치'이다.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능동적인 힘이다.' 즉 인간을 타인과 분리시키는 벽을 허물어 버리고 타인과일치시키는 힘이다. 사랑은 고독감과 분리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며 동시에 각자에게 자기의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에 있어서는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동시에 따로따로 남는다는 모순이 성립한다. 만일 우리가 사랑을 활동 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활동'이란 말이 지니고 있는 모호성 때문에 생기는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활동'이란 말은 현대적인 의미에 서 에너지를 사용하여 기존의 상황에 변화를 가져오는 행위를 의미 한다. 따라서 사업을 하거나 의학을 공부하거나 작업장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거나 탁자를 만들거나 스포츠에 종사하는 사람은 활동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 모든 활동에 공통되는 것은 그들이 성취 해야 하는 외부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되지 않는 것은 활동의 '동기'이다. 깊은 불안감과 고독감에의해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 혹은 야망에의해, 돈에대한 욕심에 의해 일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경우에 있어서 그 사람은 열정의 노예이며 그의 활동은 쫓기고 있는 것이기에 실제적으로는 '수동적'이다. 그는 '행위자'가 아니라 수난자이다. 반면에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세계와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것 외에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 없이 그냥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사람 은'수동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기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집중적 명상은 최고의 활동이며 내적자유와 독립의 상황에서만 행할 수 있는 영혼의 활동 이다.
활동에 대한 한 가지 개념, 즉 근대적 개념은 외부의 목적 달성을 위한 에너지의 사용을 강조한다. 또 다른 활동에 대한 개념은, 외부의 변화가 일어났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인간의 내재적인 힘의 사용을 강조한다. 이 개념은 스피노자에 의해 거의 분명하게 형성되었 다. 그는 감정을 능동적인 감정과 수동적인 감정 즉 '행위'와 '열정' 으로구분한다. 능동적인 감정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유롭고 자기 감정의 지배자이다. 반면에 수동적인 감정이 나타날 때 인간은 충동을 느끼며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동기에 좌우되는 대상이 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덕과 힘은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명제에 도달한다. 시기와 질투와 야망 등 모든 종류의 욕심은 열정이다. 반면 사랑은 행위이며 오직 자유로운 상황에서만 행해질 수있고 억압의 결과로는 결코 나타날수 없는 인간의 힘의 행사이다.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빠져 드는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랑의 능동적 인특징을 나타낸다면, '사랑은 기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주는 것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단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모호하고 복잡한 것이다.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잘못된 생각은, 주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과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격이 받아들이고 착취하고 저장하려는 지향의 단계를 넘어설 만큼 발달하지 못한 사람은 준다는 행위를 이런식으로 경험한다. 시장형의 성격은 오직 받는 것에대한 교환으로서만 주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받지 않고 주는 것은 사기 당하는 것이다. 성격의 주요 경향이 비생산적인 사람은 준다는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 대부분은 주기를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희생이라는 의미에서 주는 것을 덕으로 삼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기때문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덕은 희생을감수한다는 행위에 존재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낫다는 규범은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보다 박 탈당하는 것을 참아내는것이 더 낫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준다는 것은 잠재성의 최고의 표현이다. 준다는 바로 그 행 위를통해서 나는 나의 힘과 부와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 된 생명력 과잠재력을 경험하는 것은 나를 희열로 가득 채워 준다. 나는 자신 을,충만되어 있고 소비하고 살아 있는, 따라서 즐거워하는 자로 경 험한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왜냐하면 주는 것은 박탈이 아니라 주는 행위를 통해서 나의 생동감을 나타낼 수 있기 때 문이다. 이것을 몇 가지 특수한 상황에 적용시켜 보면 이 원리가 타당하다 는것을 곧 알게 된다. 가장 기본적인 예를 성적 측면에서 볼 수 있다. 남성의 성기능의 절정은 주는 데 있다.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을, 자신의성기를 준다. 극치감을 느끼는 순간 남자는 여자에게 자기의 정액을 준다. 만약 그가 능력이 있다면 정액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줄 수 없다면 그는 성불능자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그 과정은 비록 조금 더 복잡하긴 하지만 그리 다르진 않다. 여자 역시 자기 자신을 준다. 여자는 자기 중심을 향해 문을 연다. 여자는 받는 행위를 통해 주는 것이다. 만약 여자가 이러한 주는 행위를 할 수 없 고 받기만한다면 그녀는 불감증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주는 행위는 애인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의 기능에서 다시 나타난다. 어머니는 자기안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에게 자신을 내어 주며 유아에게 젖을 먹이고 체온을 준다. 주지 않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물질적인 영역에서는 주는 것은 부유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사람이 부자이다. 어떤 것을 잃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가 얼마나 많이 가졌든지간에 가난한 사람이며, 가난해진 사람이다. 누구든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하다. 그는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경험한다. 오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필수품마저도 상실한 사람만이 물질적인 것을 주는 행위를 즐길 수 없 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인 경험으로 보면 사람이 최소한의 필수품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가 실제로 갖고 있는 것보다는 그의 성격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더 기꺼이 주려 한다 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선 가난은 주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 가난이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고통때문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서 주는 기쁨을 빼앗기 때문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주는 것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물질적인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히 인간적인 영역에 있다.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과 그가 지닌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것, 즉 그의 생명을 준다. 물론 이 말은 반드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기 안에 살아있는 것을 준다는뜻이다. 그는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지식, 자신의유머, 슬픔을 준다. 이것들은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것의 표현이며 명시이다. 따라서 그는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부유하게 하며, 자신의 생동감을 강화함으로써 타인의 생동감을 강화한다. 그는 받기 위해 주는 것이 아니다.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기쁨이다. 하지만 주는 것을 통해서 그는 타인의 삶에 무엇인 가를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렇게 가져온 것은 그에게 되돌아 온다.진실로 주게 될 때 그는 그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는 것은 타인을 역시 주는 사람으로 만들게 되며, 그들은 서로의 삶에 가져온 것을 함께 즐기게 된다. 주는 행위 속에서 무엇인가 탄생하며 관계 된 두사람은 새로 태어난 생명에 감사하게 된다. 특히 이를 사랑과 관련지어 보면 사랑은 사랑을 낳는 힘이라 는 것을 알게된다. 즉 무능력은 사랑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러한 생각은 특별히 마르크스에 의해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간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인간적인 것으로서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랑을 사랑으로써만, 신뢰를 신뢰로써만 바꾸게 될 것이다. 만약 예술을 즐기려 한다면 예술적으로 훈련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타인에 대해 진실로 자극을 주고 발전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관계는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진실되고 개인적인삶의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 한다. 만일 사랑을 불러일으키 지 않는 사랑을 한다면, 즉 사랑을 낳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만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능력이요 불행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랑에서만 주는 것이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배울 수있고, 배우는 관객에 의해 자극받으며, 정신 분석가는 그의 환자에 의해 치료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지 않고, 서로가 진실하고 생산적으로 연관 되어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주는 행위로서의 사랑하는 능력은 개인의 성격 발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성격이 생산적 인방향으로 발달되어 간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 속에서 개인은 의존성,자아 도취적 전능, 타인을 착취하고픈 욕망, 축적하고싶은 욕구를 극복해 왔으며,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 즉 목 적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자기의 능력에 의존할 수 있는 용기를 획 득해 왔다. 이러한자질이 결여되어 있는 정도에 따라 인간도 자신을 주는 것을, 따라서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준다는 요소 이외에도 사랑의 적극적인 성격은, 사랑이 모든 형태 의사랑에 공통되는 기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보살핌과 책임, 존경과 지식이다. 사랑이 보살핌을 포함한다는 것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만약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거나, 목욕시키고 먹이고 신체적인 안락을 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을 본다면, 아무도 그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어머니가 자식을 소중히 보살피는 것을 본다면,그 어머니의사랑에 감명을 받게 된다. 그것은 동물이나 꽃에 대한 사랑에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만일 한 여자가 자기는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였는데, 꽃에 물을 주는 것을 잊고 있다면, 우리는 그 여자가 꽃을 사랑한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존재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적극적인 관심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부족한 곳에는 사랑도 없다. 사랑의 이 요소는 성경의 요나서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하느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가서, 그곳 사람들이 그들의 악습을 고치지 않으면 벌을 받게 될 것임을경고하라고 말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후회하고 하느님이 그들을 용서하지나 않을까 하여 자기의 임무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는 명령과 율법에 대해서는 강렬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사랑과 단결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고립과 폐쇄의 상태를 상징하는 고래 뱃속에 갇히게 된다. 하느님은 그를 용서하고, 요나는 니느웨로 향한다. 그는 그곳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가르쳐 준 대로 설법하는데, 그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다. 니느웨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습관을 바꾸어, 마침내 하느님은 그들을 용서하고, 도시를 파괴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요나는 몹시 화가 나고 실망한다. 요나는 자비가 아니라 '정의'가 행해지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침내 요나는 하느님이 그를 위해햇빛으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자라게 해놓은 나무 그늘 아래서 위안을 느낀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 나무를 시들게 하자, 요나는 상심하여 하느님에 대해 불평을 하게 된다. 하느님이 대답한다. "너는 이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그것이 하루사이에 자랐다가 밤사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토록 아까와 하느냐? 이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12만이나 되고, 가축도많이 있다. 내가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에 대한하느님의 대답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요나에게사랑의 본질은 무엇 인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인가를 자라게 하는 것'이고, 사 랑과 노동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설명해준다. 인간은 자 기의 노동의 대상을 사랑하며,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위해 일한다.
보살핌과 관심은 사랑의 또 다른 측면, 즉 책임을 함축하고 있다. 오늘날 책임은 흔히 의무나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생각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위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그것이 표현되었건, 그렇 지않건 간에-에 대한 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 할 수있고,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나는 니느웨사람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카인처럼 "내가 내 동생의보호자입니까?"라고 물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응답한다. 형제의 삶은 형제의 일일뿐 아니라 자신의 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처럼 동료에 대해서도 책임을 진다. 어머니와 아기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책임은 주로 신체적인 욕구에대한 보살핌을 말한다. 성인들 사이의 사랑에 있어서 책임은 상대방의심리적 욕구와 관련된다. 책임은 사랑의 세 번째 요소인 존경이 없다면 쉽게 지배와 소유로 전락할 수 있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존경이란 어원(respicere=바라보다)과 관련지어볼 때,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 그의 독특한 개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바라는 관심이 며, 착취가 없는 상태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성장하기를 바라며 자신을 위해서, 나에게 봉사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 의방식대로 발전하기를 바란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면, 나는 그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목적을 위한대상으로서 필요로 하는 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와 일체감을 느낄 것이다. 존경은 내가 독립성을 획득한 경우에만, 즉 내가 꼿꼿이 서서 목발의 도움 없이 걸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지배 하거나 착취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존경은 오직 자유를 바탕으로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프랑스의 옛 노래 가사 에서 나타나듯이 사랑은 자유의 자식이지 지배의 자식이 결코 아니다.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그를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 보살핌과 책임은 지식에 의해 인도 되지 않으면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다. 지식은 관심에 의해 유발되지 않으면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지식에도 많은 층이 있다. 사랑의 한 측면이 되는 지식은, 주변에 머무르지 않고 중심을 꿰뚫는 지식이다. 그러한 지식은 내가 나에 대한 관심을 초월하여 다른 사람을 그의 입장에서 볼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분노를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 더라도 그가 화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그를 알 수도 있다. 그때, 나는 그가 불안해 하고 있고 근심에 쌓여 있으며, 고독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나는 그의 분노가 더 깊은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안해하고 당황하는 사람으로서, 즉 성난 사람이 라기보다는 괴로워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된다.
지식은 사랑의 문제에 대해 또 하나의, 게다가 더욱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고립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과 융합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는 또 다른, 특별히 인간적인 욕망, 즉 '인간의 비밀'을알고자 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생명은 단순히 생물학적측면에서 볼 때는 하나의 기적이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은그 자신과 그의 동료에게 있어서 풀지 못할 비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우리 는자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동료를 알지만, 그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나 우리의 동료 모두는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존재의 내면으로, 타인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 록, 인식의 목표는 더욱 더 멀어지기만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 영혼의 비밀을 향해, '인간'이라는 내면의 핵을 향해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망을 저버릴 수가 없다.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필사적인 방법이 한 가지 있다.그것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힘, 즉 그로 하여금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게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느끼게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생각 하게하며, 그리고 그를 사물로, 우리의 것으로, 우리의 소유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이러한 시도의 궁극적인 단계는 극단적인 가학성 음란증, 즉 인간을 괴롭히고 고문하여 고통속에서 자신의 비 밀을 털어놓도록 강요하는 욕망과 능력이다. 이렇듯 인간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갈망속에는 깊고도 강렬한 잔인성과 파괴욕이라는 기본적인 동기가 내재해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작 바벨에 의하여 매우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는 러시아 내란 때 자신의 전 주인에게 죽음의 낙인을 찍은 동료사관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인용하고 있다. "총살로써는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총살로써는 당신은 그 녀석을 처치해 버릴 뿐이다 .......총살로써는 당신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드러나는 지도 모르는 그 사람의 영혼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수차 한 시간 이상 적을 짓밟은 적이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생명이 진정 무엇인지, 생명이 어떻게우리의 방식에 따라 소멸되어 가는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어린이들에게서 우리는 지식으로 가는 이 길을 매우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어린이는 어떤 물건에 대해 알기 위해 그것을 분해하거나 부수어버린다. 혹은 동물을 해부하기도 하며, 나비의 날개를 잔인하게 떼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잔인성은 더 깊은 어떤 것, 즉 사물과 생명의비밀을 알고자 하는 희망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다. '그 비밀'을 알 수 있는 다른 길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 그것을 통해 알고자 하는 나의 욕구는 일치에 의해 충족된다. 융합의 행위 속에서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며 모든 사람을 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가 제공할 수 있는 어떤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일치의 경험을 통해서만, 나는 인간에 대해 살아 있는 지식을 얻을 수있다는 것을 안다. 가학성 음란증은 그 비밀을 알고 자학은 동기에 의해 유발되지만, 나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 히 무지한 채로 남아 있다. 나는 다른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지 만,내가 행한 것이라곤 그를파괴한 것뿐이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 는 유일한 방법이며, 일치의 행위속에서 사랑은 내 질문에 대답한다. 사랑하고 내 자신을 내주며, 다른사람에게 침투해 들어감으로 써 나는 나 자신을 찾고, 나를 발견하며, 우리 두 사람을 찾아내고,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 동료를 알고자하는 바람은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심리학의 주요 원천이다. 하지만 이 욕망이 인간의 모든 것, 즉 내면의 비밀을 알려는 것이라면, 그 욕망은 사고에 의한 지식 따위의 흔한 종류의 지식으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천배나 더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결코 그 바닥까지 도달하 지 못할 것이다.우리의 동료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듯, 우리도 우리자신에게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완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의 '행위'에 있다. 이 행위는 사고를 초월하며,언어를 초월한다. 그것은 일치의 경험으로 과감하 게 뛰어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고를 통한 지식,즉 심리학적인 지식은 사랑의 행위를 통해완전한 지식에 이르는 필요 조건이 된다. 다 른 사람의 현실을 보기위해서, 즉 내가 그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이나 비이성적으로 왜곡된인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와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알아야 한다. 오직 내가 인간 존재를 객관적으로 알아야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그의 궁극적인 본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안다는 문제는 신을 안다는 종교적인 문제와 병행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서양 신학에서는 사고에 의해서 신을 알고 신에 대해 진술하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이 신학은 사고에 의해서 신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 (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유일신 사상의 결과인 신비주의에서는 사고에 의해 신을 알려는 시도를 포기한다. 그대신 신에 대한 지식을 구할 여지가 없는 신과의 일치를 경험하고자 한다. 인간과의 일치, 종교적으로는 신과의 일치를 경험하는 것은 결코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엘버트 슈바이처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은 합리주의의 결과이며 그리고 가장 과감하고 근본적인 결과 이다. 그 경험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우리 지식의 한계에 근거하고있다. 즉 우리는 인간과 우주의 비밀을 결코 '파악'하지 못하지만 사랑의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는 지식이다.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학의 논리적 결과가 신비주의인 것처럼 심리학의 궁극적 귀결은 사랑이다.
보살핌과 책임, 존경, 지식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 네가지는 성숙한 인간, 즉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계발하고 스스로 일한 결과만을 갖고자 하며, 전지 전능이라는 자아 도취적 망상을 포기하고, 오직 진실로 생산적인 활동만이 제공할 수 있는 내적 힘에 바탕을 둔 겸손을 획득한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태도이다. 지금까지 나는 사랑을 인간의 분리상태를 극복하고 일치를 바라는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치를 향한 보편적이고 실존적 욕구위에 더 특별한 생물학적 욕구, 즉 남성과 여성이라는 양극사이의 결합을 향한 욕구가 제기된다. 이러한 양극화의 개념은, 본래 남자와 여자는 하나였는데 두 몸으로 갈라져서 그때 이후로 모든 남자는 다시 여자와 한몸이 되기 위해 자신의 잃어버린 한쪽을 찾으려 한다는 신화 속에 잘 나타나 있다(양성이 원래는 일체였다는 사상은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성서이야기에도 나타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가부장제의 정신에 입각한것으로,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 신화의 의미는 매우 명확하다. 성적인 양극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특별한 방법, 즉 반대성과의 일치를 추구하게 한다. 남자와 여성 사이의 양극성은 또한 모든 남자와 여자 개인 '내부'에도 존재한다. 생리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모두 반대 성의 호르몬을 갖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심리학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양성적이다. 남자와 여자는그들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요소와 침투하는 요소,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자신의 여성적인 극과 남성적인 극이 일치를 이룰 때만 자기 내부에서의 일치를 발견할 수있다. 이러한 양극성은 모든 창조의 바탕이 기도 하다. 남녀의 양극성은 또한 인간 상호간의 창조의 바탕이기도 하다. 이 는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 어린애를 탄생시키는 기초 라는사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순전히 정신적인 영역에 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즉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모두 새로 태어난다(동성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양극화된 결합의 성취에 실패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 분리로 인해 고통 받는다. 또한 이 점은 이성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간의 이러한 양극성은 자연에도 존재한다. 즉 동물이나 식물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두 가지 기본적인 기능, 다시 말하면 받아들이는 기능과 침투하는 기능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지구와 비지구, 강과 바다. 밤과 낮, 어둠과 빛, 물질과 정신의 양극성이다. 이러한 생각은 위대한 회교시인이며 신비주의자인 루미(Rumi)에 의해서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사랑하는 자가 사랑받는 자를 찾는 것은 진정 사랑받는 자가 그를 찾을 때이다. 사랑의 불꽃이 '이' 가슴에서 타오를 때 '저' 가슴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 신에 대한 사랑이 네 마음 속에서 커갈 때, 정녕 신도 너를 사랑하리니. 한 손으로는 손뼉을 칠 수 없을 것이리라. 신의 지혜는 운명이요, 그 지혜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명하느니라. 그 정해진 운명 때문에 세상의 모든 부분은 그 짝과 하나를 이루리라. 현자의 눈에 하늘은 남자요, 땅은 여자이다. 땅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을 키운다. 땅에 열기가 부족하면, 하늘은 열을 보낸다. 땅이 그 신선함과 습기를 잃으면, 하늘은 또 그것을 보내어 주리라. 하늘은 아내를 위해 식량을 찾아 돌아다니는 남편처럼 땅 위를 돌고,땅은 아내처럼 매우 바쁘고, 자식을 낳아 젖을 먹여 기르리라. 하늘과 땅은 지능을 가진 존재가 하는 일을 행하니, 그들을 지능을 부여받은 것으로 생각하라, 하늘과 땅이 서로에게서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면, 왜 연인들처럼 함께 얽혀져 있겠는가? 땅이 없다면 꽃들과 나무들은 어떻게 열매를 맺을 것인가? 그리고 하늘이 보내 주는 물과 열기는 무엇을 낳게 하는가?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세계를 그들의 결합으로 보존해야 한다 는욕망을 마지막까지 가져다 준 것처럼, 하느님은 모든 존재 속에 그반신(半身)을 찾으려는 욕망을 심어 놓았느니라. 밤과 낮은 겉으로는 적이지만, 양자 모두 한가지 목적을 위해 일하나니, 그들은 서로의 일을 완성시키기 위해 상대방과 사랑에 빠지고, 밤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할 것이요, 따라서 낮이 소비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게 될 것이리라.
이러한 남녀 양극성의 문제는 사랑과 성에 대해 더욱 많이 논의하도록 이끌어 간다. 나는 전에도, 성적인 욕구를 사랑과 일치를 바라 는욕구의 한 가지 표현으로 인식하지 않고 단지 성적 본능의 표현 또는 승화로 보아 넘긴 프로이트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 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잘못은 더욱 깊어만 간다. 그의 심리학적 유물론과도 일치하는데, 그는 성적 본능을, 고통받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육체안에서 화학적으로 야기된 긴장의 결과로 보고 있다. 성욕의 목적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긴장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며, 성적 만족은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견해는, 유기체가 영양 부족상태에 있을 때 굶주림과 갈증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욕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타당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개념에서 볼 때, 성욕은 갈망이고 성적 만족은 이 갈망의 해소이다. 사실 이러한 성욕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자위 행위는 이상적인 성적만족이 될 것이다. 상당히 역설적이지만, 프로이트가 무시한 것은성욕의 심리적 생물학적 측면과 남녀의 양극성, 그리고 이러한 양극성을 일치에 의해 연결지으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기이한 잘못은 아마 프로이트의 극단적인 가부장주의에 의해서 촉진되었을 것이다.그의 가부장주의에 대한 신념은 그로 하여금 성욕은 그 자체가 남성적인것이라는 가정을 지니게 하였고, 여성의 독특한 성욕을 무시하게만들었다. 프로이트는 '성의 이론에 대한 세 가지 기여'라는 저서에서 성욕은 그것이 남자에게 있는 것이든 여자에게 있는 것이든, 기본적으로 '남성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사상을 나타내 었다.
그와 똑같은 사상이, 어린 소년은 여자를 거세된 남성으로서 경험하고,여자 자신은 남성 성기의 상실을 보상받을 길을 찾는다는 프로이트의 이론 속에 합리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여성은 거세된 남성이 아니며, 특히 여자의 성욕은 '남성적인 본질'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다. 양성간의 성적 매력은 긴장 제거의 필요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만 자극되어진다. 그것은 주로 반대 성과의 결함을 추구하려는 욕구이다. 사실 색정적인 매력은 결코 성적 매력에 의해서만 표현되지는 않는다. '성적 기능'에서 뿐만 아니라 '성격'에서도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있다. 남자다운 성격은 침투, 지도, 활동성, 훈련과 모험심을 갖는 것으로 정의되며, 여성적인 성격은 생산적인 수용, 보호, 현실주의, 인내, 어머니다움 등의 자질에 의해 정의된다(모든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 성격 특질이 모두 섞여 있지 만'남성' 혹은 '여성'의 성에 관련된 것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항상염두에 두어야한다).만일 남성이 정서적으로 유아 상태에 머물 러 있어서그의 남성적 성격 특질이 약화된다면, 그는 흔히 이러한 약화된 성격을'성'에 있어서의 남성의 역할에 대한 배타적인 강조로써 보상하려 할것이다. 그 결과는, 성격학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남성다움을 불신하기 때문 에성에 있어서 자신의 남성적인 용기를 입증해야 하는 동 쥐앙 (DonJuan)적인 기질이다. 남성다움의 마비가 극단적일 때, 가학성 음란증내지 폭력의 사용은 남성다움을 대치하는 주요한 수단이 된 다. 또 만약 여성의 성욕이 약화되거나 제 길을 벗어나게 되면, 곧 피학대음란증이나 소유 의식으로 전환된다. 프로이트는 그가 성을 과대 평가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이러한 비판은 프로이트의 이론 체계에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비판과 적의를불러 일으켰던 요소를 제거하려는 희망에 의해 가속되었다. 프 로이트는 이러한 희망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었고, 바로 그것 때문 에 자신의 성이론을 변화시키려는 어떤 시도에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사실 그가 살던 시대만 해도, 프로이트의 이론은 도전적이 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1900년경에 진실로 여겨졌던 것이라 해서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진실로 여겨져야 한다는 법은 없다.
성적 관습은 그 동안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에, 오늘날 프로이트의 이론은 서구 중산층에게 더 이상 충격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오늘날 정통적인 심리 분석가들이 아직도 프로이트의 성 이론을 방어하는 것이 용감하고 급진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돈키호테식 급진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그들 심리 분석가들은 순응주의자에 불과하며, 현대 사회 비판까지도 할 수 있는 심리학적 인문제를 제기하려 들지도 않는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은 그가 성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을 더 깊이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상호간의 열정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발견하였다. 그의 철학적 전제에 상응하여 그는 그 열정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하였다. 더욱 발전된 심리분석에서는 프로이트의 통찰력을 생리학적인 것에서부터 생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전환시킴으로써 프로이트의 개 념을 수정하고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