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 구들
파란 눈의 외국인이 바라본 구들
북아시아에 관심을 지니고 있던 니콜라스 위트센(1641-1717년)이라는 사람이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출신인 위트센은 1667년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타르타리아(북아시아)에 관한 지리적인 식견을 넓혔다. 그는 <북과 동 타르타리아지>를 출간했는데 거기서 한국을 다루었다. 그는 1690년까지 유럽에 알려졌던 한국의 기록을 거의 섭렵한 듯하다. 특히 온돌에 관한 기록도 남겼다. 방을 만들 때는 마루 밑으로 1/2피트 정도의 구멍을 뚫고, 그 곳으로 문밖에 설치한 아궁이에서 연기를 피워 넣어서 방 안을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17세기 말엽, 외국인이 바라본 우리 나라의 구들에 관한 초기 기록이다. 우리 나라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구들에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의 카톨릭 전도사 달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우리 나라 사람이 처음으로 천주교와 인연을 맺은 1593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큰 박해가 끝나던 1871년까지 280여 년 간의 교회사를 <조선교회사>라는 책으로 정리하여 1874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했다. 교회사라고는 하지만 우리 나라의 풍물도 세세히 기록하였는데, 거기에 구들이 등장한다. 다소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이지만 뿌르띠에라는 사람의 편지를 발췌한 대목을 들어보자.
"중국.인도와 비교할 때 방바닥을 덮고 있는 자리가 꽤 보잘것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개 약간 두꺼운 짚으로 흙을 덮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종이로 흙벽을 바르고 유럽의 마루와 타일처럼 두꺼운 기름종이로 방바닥을 바릅니다...... 벽난로가 없는데 어떻게 자리 위에서 불을 피울까요? 벽난로를 대신할 것이 준비돼 있습니다. 집 바깥에 옆으로 부엌 아궁이가 있고, 방바닥 밑을 통과하는 여러 고랑이 아궁이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고랑이나 파이프는 커다란 돌로 덮여 있고, 그 틈새와 들쭉날쭉한 곳은 반죽한 흙으로 메워 놓았는데 그 바로 위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방고래를 지나서 집 반대쪽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와 열은 희한하게도 당신에게 온기를 전해주는데 그 열은 돌 두께로 말미암아 꽤 오랫동안 지속됩니다. 보시다시피 조선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전에 난방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연기가 방바닥 틈새로 뭉개뭉개 피어오르지만, 너무 까다롭게 굴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이 세상에서 결점 없는 것이 있나요?"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말투이기는 해도 구들에 대해 비교적 꼼꼼하게 적어놓았으며, 우리의 구들이 자기들 난방법보다 빨랐음을 실토하고 있다. 주한공사를 지냈던 알렌도 <조선견문기>에서 구들을 관찰하고 있다. "방바닥은 갈색 대리석처럼 보이는 호화로운 기름종이로 덮여 있다"고 상류계급의 온돌방을 묘사함으로써 당시 양반사회의 문화수준을 엿보게 해준다. 또한 소작인이나 품팔이 노동자의 오막살이에 있는 구들도 짙은 갈색의 기름종이로 덮여 있으며, 이 점이 일본이나 중국 같은 이웃나라보다 훌륭하다고 하였다. 그리피스는 1882년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구들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지방에 있는 주택에는 고래가 있다. 고래는 관으로 된 일종의 화덕으로서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는다. 서양사람들이 벽돌로 침대를 만들고 그 밑에 발을 따뜻하게 하는 난로를 설치한 것과 똑같다. 집의 한쪽 끝에 있는 아궁이로부터 다른쪽 끝의 굴뚝에 이르기까지 연관 위를 벽돌이나 구들로 덮는다. 그래서 부엌에서 주전자의 물을 끓이고 고기를 굽는 불은 저쪽 방 안에서 앉아 있거나 자고 있는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데 사용된다. 다만 불을 때지 않으면 방이 차갑게 식고 밑불을 죽이면 열을 지속시킬 수 없다는 애로가 있다.
사람을 굽는다? 하긴 뜨거운 장판은 사람도 구울 정도로 고온이니 이런 표현이 나옴직하다. 서양인들이 우리의 구들문화를 모두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무엇이 그들에게 그토록 관심을 갖게 만들었을까. 그만큼 우리의 구들문화가 돋보였다는 증거가 아닐까. 너무도 흔하면 귀한 줄 모르는 법일까. 정작 온돌의 주인공인 우리들은 무덤덤하게 지낼 뿐, 온돌문화에 대한 가치판단을 포기하고 있다. 연탄이 사라지고 아파트에서 보일러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그나마 아궁이마저 사라져서 온돌은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온돌보다는 구들을
나는 이 글에서 온돌을 피하고 애써 구들이란 말을 쓰고 있다. 온돌이 한자말이라면 구들은 '구운 돌'이라는 뜻의 순수 우리말이다. 보편적으로 온돌이라고 쓰는 것을 나무랄 일이 아니겠지만 데워서 난방한다는 그 뜻이 좋아서 나는 구들이란 말을 굳이 쓰고 있다. 구들에 관한 말 가운데 사라진 것들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유형에 따라 구분하는 선자구들.쇠구들.토판구들, 불아궁 안쪽에서 연료가 타는 불목, 부뚜막이 없이 불만 피우는 함실아궁, 불기가 빠져나가는 구들고래, 고래 옆에 쌓아 구들장을 받치는 두둑, 편편하게 덮은 구들장, 굴뚝이 있는 벽과 평행으로 깊게 파내어 연기가 굴뚝으로 잘 빠져나가도록 파낸 개자리, 구들고래가 개자리에 접속되는 곳인 바람막이...... 이 모든 것이 거의 사라진 구들문화의 토속어들이 아닌가! 구들은 가장 원초적인 문화유산이면서도 희소성이 없기에 '화끈하게'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구들만큼 민족생활양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문화유산이 또 있을까.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이 물었다. "우리 나라 의.식.주 풍습에서 무엇을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 꼽습니까?" 나는 늘 똑같은 답변을 한다. 의생활에서는 백의풍습, 식생활에서는 된장 같은 장풍습, 주생활에서는 구들을 꼽는다. 백의, 된장, 구들이야말로 우리 민족 의식주 생활의 첫머리를 장식하지 않을까. 흰옷이 원색문화에 떠밀려 차츰 사라지고, 된장도 입맛 까다로운 어린 아이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지만 구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구들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전통적인 의식주 생활풍습 가운데서 현대까지 적응력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데 있다. 즉 구들의 힘은 그 '장기지속성'에 있다. 수천 년 세월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왔으며, 초현대적 생활과 어울려 21세기로 온전히 넘어가고 있는 풍습이 또 있을까? 땔감용구들, 연탄구들, 보일러와 전기를 쓰는 개량구들을 거쳐서 '온돌침대'마저 등장할 정도로 전통의 지속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탓에 왠지 한문투의 온돌보다는 구들이란 말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싶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
펄펄 끓는 아랫목에서 산모가 몸을 푸는 곳, 추운 겨울날 할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입을 통하여 자식에게 대를 이어가면서 구전의 역사가 펼쳐졌던 '씌어지지 아니한 역사'가 저술되던 '구술문화'의 현장 그리고 사람이 마지막 운명을 다할 때 자손들의 손을 마지막으로 쥐던 곳...... 그러한즉 구들을 '우리 민족의 영원한 탯자리'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최초로 지은 집은 신석기 시대에 땅을 파고 만든 움집이었다. 움집의 갖춤새는 매우 단순하였다. 자갈이나 모래, 진흙 등을 깐 맨바닥이었다. 그 움바닥 중심부에는 예외없이 화덕을 설치하였다. 대체로 바닥을 일정한 깊이로 파고 그 주위에 강돌이나 진흙으로 둥글게 테두리를 만든 것이었다. 화덕을 방 안에 설치한 탓으로 연기를 뽑기 위해 천장에는 구멍도 뚫었을 것이다. 이때는 아직 구들이 출현하지 않았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읍루조에도 이르기를, "기후가 추워서 사람들은 땅을 파고 그 안에서 사는데 깊을수록 귀하고 큰 집은 아홉 계단이나 내려간다"고 하였다. 추위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기에 움집은 후대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지상으로 솟아오른 집다운 집이 출현한다. 움집에서 화덕 따위로 난방을 하던 수준으로는 지상가옥의 난방을 감당할 재간이 없다. 더욱이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는 만주 벌판에서 나라를 건설해가던 선조들은 다양한 구들을 개발하게 된다. 북한 고고학계는 북한의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평북 영변군 세죽리, 평남 북창군 대평리 등지에서 구들의 초기 형태를 다수 발견했다(<고고민속> 1966년 4호). 판돌을 세워서 이어 대고 그 위에 판돌을 덮은 좁고 긴 구들이었다. 전체를 데우지 못하고 방바닥 한구석에 작게 독립적으로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평리 유적 3호 집자리의 구들은 고래 너비가 다른 고래보다 근 3배나 되어 구들이 제법 넓게 발전하였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문헌상으로 구들을 처음으로 암시한 <신당서>와 <구당서>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긴 갱을 만들어 따뜻하게 난방한다"고 하였다. 갱은 무엇일까.
갱은 중국사람들이 캉이라 부르는 난방시설이다. 한국 민속학사의 앞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역사민속학자 남창 손진태 선생은 그의 '온돌고'에서 캉과 구들의 기원이 같다고 하였다. 구들이 바닥 전부를 데운다면 캉은 실내의 한쪽에 벽돌을 쌓아 일부분만 데운다. 구들이 전면적인 방바닥 난방이라면, 캉은 벽 일부만 난방하는 형식이므로 페치카와 구들의 중간 성격을 띤다고 할까. 남창 선생은 간단한 부뚜막에서 실내 일면 캉으로, 일면 캉에서 삼면 캉으로, 삼면 캉에서 전면 구들로 발달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캉이 중국 북부 만주에서 발생하였다고 하였다. 구들의 고구려 기원설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고구려의구들이 궁금하거들랑 고구려 벽화무덤 속으로 들어가보라. 고국원왕릉과 약수리 벽화무덤에는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부엌과 긴 고래온돌을 그린 그림에는 한 여인이 부뚜막에 시루를 올려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으며, 다른 여인은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아궁이에서 지핀 불길은 긴 고래구들을 따라 굴뚝으로 빠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굴뚝도 예전에는 없던 풍습이다.
그런데 고구려 벽화를 보다 보면 주인공들이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 중국식의 입식문화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회는 입식문화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고구려 사회는 입식문화단계였던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건축학자 강영환 교수(울산대)는 의자에 앉는 입식문화, 책상다리로 앉는 구들문화가 혼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구들은 있으되 본격적으로 발전한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벽화무덤의 주인공들인 귀족들과 달리 고구려의 민중은 '돈이 덜 드는 난방방식'인 구들을 선택하였음이 분명하다. <신당서>와 <구당서> 기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구들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귀족문화는 '신발 신는' 입식과 '신발 벗는' 좌식생활이 병존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본격적인 구들문화의 창시자를 '고구려의 민중'이라고 결론 맺고자 한다. 우리들이 누워 잠자는 구들에는 바로 고구려 민중의 강골차면서도 따스한 숨결이 서려 있는 셈이다.
백제나 신라 쪽은 어떠했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875-886년)대에는 서라벌에 기와집이 줄줄이 있고 숯으로 밥을 해먹었다. 그을음을 피하려고 숯으로 난방을 한 것은 구들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남쪽의 백제와 신라는 고상식 주거양식으로서 마루가 중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내려와 고려 시대의 구들문화를 살펴봄으로써 하나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다.
구들과 마루가 움직이다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1123년)에 이르기를, 귀족들은 중국과 비슷하게 낮은 평상생활을 하여 아무 불편이 없었으며 전혀 외국에 온 느낌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반면에 일반 서민들은 대부분 흙침상으로,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고 하였다. 여전히 구들이 민중의 전유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자의 <보한집>을 보면 흥미를 끄는 기사가 나온다. 고려의 고승으로 이인로.이규보 등과 교류하였으며 <해동고승전>을 편찬한 각훈에 관한 대목인데 구들풍습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행자가 일찍이 겨울에 자리 하나를 펴고 앉아 승복 한 벌을 갖추어 입고 있었는데 그 옷자락 속에는 서캐라곤 없었다. 얼음장 같은 구들방에 앉아 있어도 추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며 도를 배우고자 하는 후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의심나는 것을 물으면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곡진하게 일러주었다. 한때는 날씨가 추워 얼어죽을까 염려해서 그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방자를 보내어 급히 불을 지펴 방을 따뜻하게 했다. 밖에 나갔던 행자가 들어와서 방 안을 들여다보고는 기뻐하거나 성내는 기색없이 천천히 방을 나가 자갈을 주워서는 아궁이를 막아버리고 회를 이겨서 틈을 바르고는 다시 자리 위에 앉아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다시는 사람을 보내어 방을 데우게 하지 않았다.
평북 삭주지역의 이야기인 것으로 보아 북부지역은 지금 보는 온돌과 거의 같은 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 고려 시대의 중부지역은 어땠을까. 문경의 원터 유적은 구들 남하과정을 아는 중요한 단서이다. 일군의 학자들이 1977년 문경 새재의 제1관문 안에 있는 원터를 발굴하다가 구들고래를 발견했다. 알맞은 크기의 산돌과 개울돌로 쌓은 고래가 고려 시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것으로 구들이 이미 소백산맥의 남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신영훈 선생은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어 사용했는지, 아니면 제주도처럼 서울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관아 건물에만 설치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확정적인 견해표명은 유보하였다. 고려 시대에도 구들문화는 여전히 북쪽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구들은 조선 전기에 들어와 서서히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15세기 말엽, 고득종의 <홍화각중수기>에는 "구들을 서쪽 방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의 <동국여지승람>에는 "백성들은 아궁이와 구들 없이 맨바닥에서 잔다"고 하였다. 구들이 조금씩 퍼져 나가던 과도기 양상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도 사정은 비슷했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이르도록 구들이 없는 곳이 여전히 많았다. 17세기 후반, 숙종조에 제주목사를 역임했던 이형상의 <남환박물지>에 따르면 제주도 살림집에는 그때까지도 구들이 없었다. <숙종실록>권12(숙종 7년 9월)를 보면, 구들이 비로소 한양에서 유행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경연사 벼슬을 하던 이단하가 왕에게 올린 내용이다.
근년에는 대내의 여러 방실을 판방으로 한 것이 많았는데, 지금은 온돌이 점점 많아져 기인(나무를 공물로 제공하는 자)이 공물로 바치는 땔감과 숯으로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근년까지 마룻방이 많았다"는 이야기는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전국이 본격적인 구들문화권에 들어서지 못하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18세기 실학자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넓은 집에 구들이 두어 칸뿐이고 나머지는 판자를 깔았다고 하였을 정도다. 심지어 구한말 제정 러시아가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할 때 자료로 쓰기 위하여 1900년 페테르부르그에서 발간한 <한국지>에도 맨땅에서 살고 있는 민중의 생활상이 드러나 있다.
땅이 그대로 방바닥을 대신하는데 가끔 짚을 깐 경우도 있다. 바닥이 나무인 경우에는 짚으로 엮은 깔개가 바닥에 덮여 있다.
여러 문헌과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북방에서 시작된 구들문화가 남하하고 있었고, 남방에서 시작된 마루문화가 북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양자의 만남은 우리의 주거생활을 통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구려식 생활과 백제나 신라식 생활이 통일되는 형식이 바로 마루와 구들의 조화가 아니었을까.
마루는 끊임없이 북상을 모색하였다. 마루는 북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서울.경기 지역의 대청마루로 완벽하게 진출했다. 서울 양반집의 널찍한 대청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무더운 여름철에도 대청마루에 누워서 시원한 매미소리를 듣노라면 땀방울은 금세 사라져 버린다. 대청마루에서 밤 늦도록 들리는 다듬이질 소리의 낭만은 또 어떤가. 한편 구들은 '호시탐탐' 남하를 꿈꾸었다. 애초에 구들은 부뚜막과 방이 구분되지 않은 미분화 상태였다. 선조들은 화덕을 개량하여 구들로 발전시켜 나갔다. 부뚜막은 구들이 발전하는 단서가 되었다. 추운 평안도나 함경도에서는 근년까지도 부엌과 방의 경계가 아예 없었다. 부뚜막의 열기가 벽을 거치지 않고 방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양통집'이라 불리는 집 안에는 외양간까지 있었다. 그러나 남하를 거듭한 구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함경도같이 추운 날씨가 아니었기에 방과 부엌의 경계가 필요하게 되었다. 밑에서 올라온 마루도 중부지역에서 만났기 때문에 마루방으로 향하는 불기운을 정확히 차단시켜야 했다. 구들과 마루의 만남은 구중 궁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국가에서도 구들을 본격적으로 차용하였다. 구들과 마루의 만남은 우리식 살림집의 정형을 창조하였다. 깔끔하게 지은 조선 시대 살림집을 생각해 보자. 시원스럽게 뻗은 대청마루와 적절하게 배치된 구들, 이 두 문화가 균형을 이루게 된 역사적 만남이 드디어 실생활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고구려 시대 이래로 발전해온 민중의 문화가 궁궐에까지 침투해 들어간 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덕수궁이나 창덕궁에서도 구들과 굴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민중의 저력이 민족생활사를 이끌어왔다는 결정적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앉은문화, 접촉문화, 굴뚝문화
외국여행을 하다가 몸에 한기라도 들면, "아, 구들방이 그립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몸이 찌뿌둥하면 아랫목에 '몸을 지져야' 거뜬해진다고 말하는 사람은 영낙없는 '조선사람'이다. 침대문화가 들어왔어도 안방바닥은 여전히 장판지다. 이렇듯 동양 삼국에서도 유독 우리만 구들을 발전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정확한 답변은 어렵지만, 삼한사온이 분명한 기후 조건 때문인 듯하다. 겨울의 뜨듯한 방바닥과 여름의 시원한 방바닥을 상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구들은 천천히 데워지고 서서히 식는다. 우리의 속성인 '은근과 끈기'도 바로 구들의 속성에서 나온 것 같다. 그리하여 구들은 '구들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야 말았다. 구들은 바람과 기후 조건을 잘 따져서 아궁이와 고래구멍, 굴뚝을 배치해 연기가 나지 않고 난방이 잘 되었다. 아랫목은 낮고 윗목은 높게 구들장을 놓고, 아랫목은 두껍게 흙을 바르고 윗목은 얇게 발라 열전도율의 균형을 맞추었으니 선조들의 열관리 지식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들의 등장.발달은 굴뚝과 부엌의 발달을 의미하였다. 굴뚝을 잘 뽑아야 연기가 잘 빠져나가고, 구들이 골고루 데워졌다. 그러나 유목민들처럼 연기가 나지 않는 말똥을 태웠던 제주도에서는 굴뚝 없는 독특한 구들도 존재했다. 벽과 분리된 부엌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생활공간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엌의 부뚜막에 모신 조왕신은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모시는 가장 강력한 신이 되었다. 구들의 윗목에는 조상신이 자리잡고, 아랫목에는 아기를 돌보는 삼신이 자리잡았다.
일본은 습기를 피하여 다다미를 깔고 살며 방 가운데에 화덕을 둔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중국 북부 사람들은 캉을 설치한다. 우리 구들이 신발을 벗는 좌식생활임에 반하여 캉은 입식생활이다. 따라서 구들은 우리 민족만이 창조해낸 독자적 '앉은문화'인 것이다. 우리의 가구배치, 활동반경, 방의 쓰임새 등은 모두 앉은문화에 알맞게 이루어졌다. 침대와 소파가 들어왔지만 여전히 대다수 민중은 앉은문화를 선호한다. 앉은문화는 청결을 보증한다. 반짝반짝하게 콩기름 먹인 장판을 닦고 또 닦아서 윤기가 흐르도록 청결을 유지했던 우리네 살림살이였다. 먼지가 풀풀 나는 카펫문화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구들은 '앉은문화'와 '선문화'의 양대문화권을 구분하게 만들었으니, 오늘날의 우리는 두 가지를 모두 쓰는 문화로 볼 수 있겠다. 어느 책에선가 구들을 '접촉문화'라고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겨울철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고, 여름철 시원한 구들장에 배를 대는 식의 접촉문화가 우리의 구들문화이다.
전기밥솥이 탄생하기 전만 해도 늦게 들어오는 아버지를 위하여 주발에 담은 밥을 아랫목에 넣어 구들과 접촉하게 했다. 그리하여 구들과 똑같은 온도의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인생의 2/3 이상을 바로 접촉문화의 끈끈한 정서 속에서 살아온 셈이 아닌가. 앉은문화, 접촉문화, 구들문화는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들문화를 논할 때 굴뚝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우리 건축미에서 굴뚝의 아름다움에 홀딱 빠진 사람이다. 전세계 어느 민족도 이처럼 굴뚝을 아름답게 꾸민 경우는 없었다. 굴뚝의 원조도 역시 고구려벽화에서 찾을 수 있다. 안악 3호분을 보면 부엌일 하는 아낙네 옆에 굴뚝그림이 선명하다. 우리의 선조들은 굴뚝을 실용적인 용도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에서는 처마에 잇대어 소박한 굴뚝을 매다는 데 그쳤지만, 사찰이나 대갓집에서는 멀찍이 굴뚝을 설치하여 나름의 멋을 냈다. 실용적인 물건에서조차 멋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여유가 있으면 경복궁 아미산의 육각형 굴뚝(보물 811호)을 찾아가 보라. 원래 교태전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자경전 뒤뜰의 십장생무늬 굴뚝(보물 810호)과 더불어 굴뚝의 정상을 차지한다.
황토에서 올라오는 기
지리산 반야봉 남쪽의 칠불암 아자방. 칠불암은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왕자가 수행하였다는 절이며,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화상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신비의 선방이다. 아자방은 구들을 한 번 지피면 45일간 뜨겁고, 따스한 온기는 무려 백일이 간다는 불가사의한 구들이다. 전쟁통에 타버린 구들을 1982년에 다시 복원하였는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다. 우선 아자방은 토질에서 부근과 차이가 났다. 또한 구들 밑에는 15-20센티미터 정도의 강회다짐이 있어 일종의 보온층을 형성했다. 부채살 모양으로 시작된 구들은 다시금 부채살로 모아져서 굴뚝까지 연결되었다. 지금도 봄 가을에는 일주일 정도 온기를 유지하며, 영하 10도가 넘는 한겨울에도 사나흘은 따뜻하다고 한다. 장작을 지필 때는 일곱 짐이나 되는 땔감을 세 개의 아궁이에 한꺼번에 넣고 땐다고 한다. 이 글을 쓰면서 아자방을 다시 다녀왔다. 아자방을 다녀온 이유는 우리 구들문화의 앞날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아자방을 신비롭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선조들의 뛰어난 '노하우'를 계승.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구들은 국학의 연구사 초기부터 주목을 받은 주제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 50여 년이 지나도록 열축적에서 뛰어난 강점을 지닌 구들을 개량 발전시켜 세계에 내놓을 문화유산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족적 생활양식을 잘 보존한 것도 아니다. 살쾡이 우는 깊은 겨울 밤, 따스한 윗목에서 화롯불 주위에 둘러앉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이야기를 듣던 '전설의 고향'도 우리는 잃어버렸다. 1927년 정인섭 선생이 설화집 <온돌야화>를 펴냈을 당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구전 문학의 현장마저 텔레비전이 가로채버렸다.
바닥에 깐 돌 사이에 우수 파이프를 통하여 난방을 하는 외국의 최신식 패널히팅이 바로 우리의 구들문화와 같은 뿌리임을 볼 때, 자괴감도 느껴진다. 지그문트 그루페 같은 독일 기업은 아예 우리의 옛 구들 형식을 이용한 온수순환 난방(에어코노미)을 보급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전기구들을 전세계에 수출하고 있다. 김치는 '기무치'로 빼앗기고, 온돌은 '온도루'로 빼앗기는 식이다. 육군 공병장교 출신으로 구들 연구에 혼신을 쏟는 최영택이란 분이 있다. <구들>이라는 독특한 책을 낸 구들연구자인데, 구들학회를 만들었고 아예 겹구들을 놓는 '현대전자구들' 주식회사를 차렸다. 그 역시 '구들인생'의 목표를 구들의 다변화와 국제화에 두고 있다. 그는 온수순환식 구들을 '멍텅구리 구들'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멍텅구리를 구들의 전부인 양 알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한심한 느낌을 감추지 않는다.
요즈음 웬만한 집들은 대개 침대를 들여놓는다. 이제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고까지 선언하고 있다. 우리들은 구들문화가 지니는 복합적인 장점을 포기하고 그저 침대만이 선진 생활양식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서구에서조차 우리식 접촉문화, 구들문화를 새롭게 차용하는 추세인데 정작 구들의 본고장에 사는 우리들은 대단한 착각 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구들문화의 법고창신과 변법자강을 꿈꾸어야만 할 것 같다. 식혜가 깡통을 만나 개벽을 이루었듯이 구들도 법고창신하고 변법자강하여 마침내 개벽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21세기 문화전략상품으로 국제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고 싶다. 나 역시 아파트의 '멍텅구리 구들'에 살면서 늘상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우리 모두 구들의 황토에서 올라오는 기를 받자!
보물 제811호 : 경복궁아미산의굴뚝(景福宮峨嵋山의굴뚝)
보물 제810호 : 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景福宮慈慶殿十長生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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