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된장, 간장, 고추장의 삼각관계
백년 동안의 언어마술사에서 깨어나
나는 미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가 쓴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음식문화의 수수께끼>로 국내에 번역됨)를 읽으면서 몹시 화가 난 적이 있다. 문화유물론자인 그는 한 지역의 문화적 전통에 변화를 주는 가장 큰 힘은 고단백질을 섭취하는 생물학적 강제라고 주장하면서, 줄곧 동물성 단백질이 사회문화를 움직이는 동인이라고 주장한다. '동물성 단백질 신화'는 잘못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교육 받은, 동물성이 최고라는 그릇된 등식을 새삼 확인한다. 20세기로 접어든 이래 우리는 근 백년 동안 근육질, 고깃덩어리, 동물성 단백질 따위가 곧바로 힘, 정력, 에너지, 건강 같은 말을 뜻한다는 묘한 언어마술에 걸려왔다. 사람들은 동물성을 과도하게 섭취했을 때 비만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위태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백년 동안의 언어마술에서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는 못했다. 우리의 우수한 식문화를 포기하고 햄버거 따위에 매달리는 후진성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천년 세월을 누려온 우리의 장문화 역시 아직은 잠에서 덜 깨어난 듯싶다.
나는 동물성 단백질 신화에 빗대어 식물성 단백질 문화의 정수로서 장문화를 내세우고 싶다. 장문화에는 비단 단백질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은 콩단백질의 위대한 힘을 내세우고 싶다. 무엇이 콩을 그토록 위대하게 만들었을까. 일찍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의 대두론에서 이렇게 갈파하였다.
"콩은 오곡의 하나인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곡식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콩의 힘이 가장 크다. 후세 백성들은 잘사는 이는 적고 가난한 자가 많으므로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은 다 귀한 신분의 사람에게 돌아가버리고, 가난한 백성이 얻어먹고 목숨을 잇는 것은 오직 이 콩뿐이었다. 값을 따지면 콩이 쌀 때는 벼와 서로 맞먹는다. 그런데 벼 한 말을 찧으면 네 되의 쌀이 나오니, 이는 한 말 콩으로 네 되의 쌀과 바꾸는 셈이다. 벼 여섯 되를 더 얻는 것이니 콩이 훨씬 더 이익이다. 또한 맷돌로 갈아서 두부를 만들면 얼마든지 찌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끓여서 국을 만들면 구수한 맛이 먹음직하다. 또한 싹을 내서 콩나물로 만들면 몇 갑절이 더해진다. 가난한 자는 콩을 갈고 콩나물을 썰어 합쳐서 죽을 만들어 먹는데 족히 배를 채울 수 있다. 나는 시골에 살면서 이런 일들을 알기 때문에 대강 적어서 백성을 기르고 다스리는 자에게 보이고 깨닫도록 하고자 한다."
"콩의 힘이 가장 크다"고 명쾌하게 진술하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콩의 원산지는 만주 벌판이며 야생콩에서 비롯되었다. 만주라면 부여족의 옛 땅이니 콩은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왔음이 분명하다. 그 콩으로 장문화를 일으켰으니, 우리의 장문화에는 고구려의 숨결이 연면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곰팡이를 먹다니!
구한말에 우리 나라를 방문한 서양인들은 한결같이 메주에 엉겨붙은 하얀 곰팡이를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곰팡이를 먹다니! 그들은 손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지면에 애꿎게도 곰팡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서양인들의 눈에는 된장이 숙성되어 나가는 과정이 오로지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식문화로 비쳤을 뿐이다. 사람이 음식을 먹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을까. 크게 나누어 날로 먹기, 익혀서 먹기가 있고, 발효시켜 먹기를 더할 수 있다. 음식학자들은 서슴없이 발효음식을 가장 선진적인 식문화라고 말한다. 된장, 고추장, 간장, 개장, 청국장, 김치, 젓갈...... 우리 음식의 으뜸은 대부분 발효음식이다. 서양 발효음식의 으뜸이 요구르트, 치즈, 따위의 동물성이지만 우리의 발효음식은 젓갈 따위를 빼놓고는 식물성이 대부분이다. 발효음식의 으뜸인 장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장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헷갈리기 일쑤다. 장이란 말이 중국에서는 <주례>의 '장 12동'이란 표현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우리와 달리 콩이 아니라 고기로 장을 만들었다. 다산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장은 젓갈이다. 해는 '젓'이라고 말한다. 장은 종류가 여럿인데 시장(메주로 만든 장)이 그 첫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음에는 젓갈과 장을 구별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에서 왕충의 <논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콩장이 등장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젓갈을 장이라고 부르면 그들은 도리어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울러 우리 나라에서 콩장만 있는 줄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에도 그가 지적한 것은 유효하다. 우리들은 으레 콩으로 쑨 된장 따위만 장으로 알고 젓갈은 장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넓은 범주의 장문화에는 젓갈까지도 포함된다. 된장이 우리 나라 장문화의 으뜸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숭어.도미.홍합 같은 생선으로 만든 어육장도 널리 존재했다. 김장에 명태 같은 생선을 함께 넣어서 먹는 풍습도 장문화 범주에 넣어야 한다. 해는 소금으로 절인 생선으로 만든 음식을 말하고, 혜는 시큼한 초를 뜻한다. 식혜란 밥을 섞어서 만든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우리가 흔히 먹는 민족 음료이다. 흔히 '식혜'와 '식해'를 혼동하기는 하나 '식혜'라고 부르지 '식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것은 식혜가 자칫 쉬면 시큼한 초가 되어 술로 변하는 이치를 생각하면 간단히 이해할 수 있다. 1527년에 나온 <훈몽자회>를 보면 젓갈을 뜻하는 해도 장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 - 혜, 젓 - 해, 육장
본디 중국의 장은 '해'란 이름의 육장이고, 우리의 장은 시란 이름의 콩장이었다. 진대의 <박물지>에서 "외국에서 콩장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진.한대 이후에야 외국에서 콩장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콩의 원산지가 만주라는 사실과 중국에서는 콩장이 늦게 시작되었다는 문헌기록 따위는 우리 민족이 콩을 주원료로 한 장문화를 독창적으로 꽃피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자료가 아닐까. 우리 문헌에는 일찍부터 콩장이 등장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3년조를 보면 왕이 김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납채를 수레로 보내는데 그 목록에 쌀, 술 기름, 꿀, 포 등은 물론이고 장.시.혜 같은 것들도 눈에 띈다. 장.시.혜가 따로따로 나온다는 것은 각각을 명확히 구별하여 썼다는 증거다. 어쨌든 지금 장은 된장, 고추장, 간장, 김장 따위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 '김장김치'에서 보듯이 김장은 다른 장르로 떨어져 나갔고 된장, 고추장, 간장이 장문화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우리의 장은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의 장인 미소가 된다. 우리는 된장을 콩으로만 만들지만 일본에서는 콩과 쌀누룩으로 빚는다. 조선 시대 구황식품서인 <구황보유방>을 보면, 콩과 밀을 2:1로 섞어서 메주를 빚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콩 한 말을 무르게 삶고, 밀 다섯 되를 볶아 함께 섞어서 쑤고......"고 하였으니 일본 메주를 떠오르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된장을 콩으로만 빚는 것으로 알았는데,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일찍이 우리가 전해준 된장문화가 일본에서는 그대로 남아 있는데 우리 것이 변한 것이 아닐까. 장은 나라마다 이름이 다르다. 우리는 메주나 미주라고 하는데 만주에서는 미순, 일본에서는 미소라고 부른다. 음식학자 이우성 옹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내가 전화로 자문을 구했던 적이 있는데 그는 단호하게 이 말들이 같은 계열이라고 증언했다. 아무튼 고구려 땅에서 나서 중국 본토로 들어갔고, 일본으로 넘어간 장문화는 동양 삼국 식문화의 으뜸이 되었다. 비교문화사를 쓰는 데는 장문화 하나만 있어도 충분한 재료가 된다. 어떤 이는 아예 '곰팡이 문화권'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장의 기원을 유목문화에서 찾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쿠치족에게는 '씌'라는 장문화가 있다. 콩을 삶아 낙타 등에 실은 채 콩에서 하얀 실이 날 때까지 띄운다. 실이 난 콩을 암염 가루에 섞은 것이 씌인데 이것을 된장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수수께끼다.
되는 집안은 장맛도 달다
나는 메주의 하얀 곰팡이를 '아름다운 꽃'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칙칙한 검정색의 독버섯 같은 꽃이 피면 안된다. 순진무구하고 깨끗한 하얀 꽃이 피어나야 한다. 꽃이 핀다는 사실은 박테리아가 살 만큼 영양분이 충분하다는 증거이다. 메주는 꽃을 피움으로써 새롭게 변신한다. 사람들은 "메주같이 못생겼다"고 나무라지만, 나는 하얀 꽃이 핀 메주에게서 매혹적인 체취를 맡곤 한다. 앞으로는 "메주같이 아름답게 생겼다"고 쓸 일이다. 장맛은 곰팡이가 결정한다. 집집마다, 지방마다 독특한 종류의 곰팡이가 메주덩이에서 번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낙들은 장을 담금 때 여간 신경 쓰는 게 아니다. <증보산림경제>에서는 장의 중요성을 아예 이렇게 일렀다. 장은 모든 맛의 으뜸이요, 인가의 장맛이 좋지 않으면 비록 좋은 채소나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없다.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을 수 없을지라도 맛좋은 장이 여러 가지가 있으면 반찬 걱정이 없다. 간장은 우선장 담그기에 유의하고 오래 묵혀 좋은 장을 얻게 함이 좋은 도리다. 친구와 장과 술은 오래 묵을수록 좋다도 하던가. 집집마다 대를 물려서 먹는 장맛은 그 집안의 살림솜씨를 재는 기준이기도 했다. "광 속에서 인심나고 장독에서 맛난다", "장맛 보고 딸 준다", "장은 장이다", "고을 정치는 술맛으로 알고, 집안 일은 장맛으로 안다", "아이 가질 때 담근 장, 그 아이 결혼할 때 국수 말아준다" 등등등.
김명자 교수(안동대)가 몇 년 전에 책을 한 권 냈다. <되는 집안은 장맛도 달다>는 책이었다. 전통의 멋과 슬기를 잘 압축하고 있는 제목이 아닌가. 조선 시대에도 장 담그기는 중요한 연중행사일 수 밖에 없었다. 정다산의 형인 정학유(1834-1849년)가 쓴 <농가월령가>를 보면 선인들이 얼마나 장 담그기를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의 요긴한 일 장 담는 정사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고추장 두부장도 맛맛으로 갖추하소(삼월령) 장독을 살펴보아 제 맛을 잃지 마소 맑은 장 따로 모아 익는 족족 떠 내어라 비 오면 덮겠은즉 독전을 정히하소(유월령) 부녀야 네 할 일이 메주 쓸 일이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두소(십일월령)
장을 담그기 전에는 고사를 올리기도 했고 장독대에 금줄을 치거나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놓았다. 장맛을 망치는 잡신이 집 안으로 들어오다가 거꾸로 붙은 버선본을 보고 놀라서 도망을 친다는 속설도 있기 때문이다. 장을 담그는 동안 주부는 외출을 금하였고 여성의 음기가 닿지 않도록 입을 떼지 않고 일하기도 했다. 장을 담근 지 21일 동안에는 아기를 낳았을 때처럼 초상집도 가지 말고 달거리 있는 여자나 낯선 사람을 집으로 들이지 말라고까지 했을 정도다. 조선 후기에 나온 <규합총서> 같은 생활지침서에는 장 담그는 법, 장 담그기 좋은 날, 피해야 할 날, 장 담그는 물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일단 메주를 띄우고 나면 고추와 숯도 함께 띄운다. 살균과 흡착효과도 있겠지만 주술적 효과도 기대한다. 고추의 독한 맛과 일종의 필터작용을 하는 숯이 어우러져서 잡신을 쫓아낸다는 믿음이다. 장독대는 신성한 공간으로 존재한다. 어머니들이 칠성님 앞에서 손 모아 비는 칠성단이 바로 장독대다. 마을풍물패는 집굿을 치면서 으레 장독대로 몰려와 '철륭 철륭 좌철륭 우철륭' 하면서 철륭굿을 쳐준다. 말할 것도 없이 철륭신은 장맛을 지켜주는 신이다. 집안신으로 어엿하게 자리를 잡을 만큼 장은 위엄과 격조가 있었다.
된장 할아버지, 간장아들, 손자고추장
어린이들에게 된장, 고추장, 간장의 관계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 장문화의 족보를 쉽게 풀면 된장은 할아버지, 간장은 아들, 고추장은 손자뻘로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젓갈은 작은할아버지, 청국장은 동생뻘쯤 되지 않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애초에 된장이 있었다. 된장할아버지가 소금물과 만나면서 간장이 탄생하였다. 예전에는 소금물로만 먹던 사람들이 메주를 띄운 소금물이 더욱 좋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후기에 고추가 들어오자 사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사람들은 된장을 담그듯이 고추장을 담그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메주를 쑬 때, 아랫목에 덤으로 불린 콩을 짚에 싸두었다가 청국장을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청국장은 동생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젓갈 같은 장은 콩장과 무관하지만 장문화의 원조격이 분명하므로 작은 할아버지뻘이다. 이들은 모두 친족관계이며, 간장처럼 된장이 없으면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부자관계도 성립한다.
된장 가운데데는 순전히 된장만을 먹기 위해서 담그는 막장도 있지만 단기간에 숙성시키는 청국장.빠개장.가루장.빰장.보리장 같은 '즉석된장'도 있다. 그러나 된장에게 부여된 임무 가운데 가장 절대적인 것은 간장을 만드는 일이다. 호적을 된장에 둔 간장은 곰팡이 꽃이 핀 메주와 소금물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소금물에 띄운 메주는 늘 뚜껑을 열어놓아 햇볕을 쬐야 한다. 따사로운 햇볕은 간장의 숙성을 촉진시키는 주역인 것이다. 간장은 어떤 맛일까. 짜기만 할까. 현대인들은 간장이 짜기만 하다고 잘못 알고 있다. 그런데 정작 맛을 보면 짠맛은 물론이고 단맛과 감칠맛이 함께 난다. 오묘한 맛이다. 무조건 짜기만한 간장은 간장이기를 포기한 놈이다. 정정당당한 간장은 열 가지 맛을 내야 마땅하다. 그래야만 양념으로 들어갔을 때, 열 가지 맛을 내면서 음식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간장 맛을 잃어버린 20세기 후반의 우리 식생활은 '설탕문화'에 압사당하였다. 설탕은 확실히 달다. 단맛이 너무 강해 입맛을 죽여버린다. 심지어 설탕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단 '사카린' 같은 '메가톤급' 당로가 위세를 떨치기도 한다. 설탕문화는 우리들의 입맛과 건강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아닐 수 없다. 선조들은 간장을 농도에 따라 진간장, 중간장, 묽은간장으로 나누었고 각각 용도를 달리했다. 담근 지 얼마 되지 않는 묽은간장은 국물을 낼 때 가볍게 사용하나, 5년 이상 오래 묵은 진간장은 약밥 따위의 '진한 음식'을 만들 때 썼다. 그래서 큰집의 독마다에는 담근 연도가 다른 간장이 담겨져 있었으며 쓰임새에 따라 손놀림이 달랐다. 프랑스인들이 포도수의 연도를 따지면서 식도락의 묘미를 음미한다면 우리는 간장의 연도를 따지며 음식의 묘미를 즐겼다고나 할까. 족보를 따졌을 때 된장과 간장의 역사가 깊다면 고추장은 조선 후기에 탄생한 신출내기다. 그렇지만 고추장은 담백한 우리 식문화에 화끈하다 못해 뜨거운 맛을 선사하였다. 고추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김치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혁명이란 말에 걸맞을 정도로 김치혁명은 우리의 밥상문화를 바꾸어놓았다. 그 동안 침채 같은 김치에 천초 따위의 향신료에 의존해 왔는데 고추는 매운 맛과 붉은 색소로 입맛의 혁명을 예고했던 것이다.
고추는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고추에는 독이 있다. 일본에서 비로소 건너온 것이기에 왜겨자라 한다"고 하였다. 고추의 캡사이신은 기름의 산패를 막아주고 젖산균의 발육을 돕는 성분이다. 이런 고추가 된장과 결합하여 고추장이 되었다. 된장에서 모범을 배우고서 독자적인 고추장 노선을 걷게 되었다. 조선 후기 <증보산림경제>를 보면, 가루로 만든 메주 한 말에 고춧가루 3홉, 찹쌀가루 1되를 놓고 좋은 간장으로 개어서 고추장을 담근다고 하였다. 분량을 따져보면, 맵기는커녕 막장에 가까운 고추장이 아니었을까. 애초에는 된장을 응용한 상태에서 고추장이 탄생되었음직하다. 그러다가 <규합총서>에 이르면 사태가 조금 달라진다. 삶은 콩 한말과 쌀 두 되로 흰무리를 쪄 함께 찧어 메주를 만든 다음에 소금 넉 되, 고춧가루 5-7홉을 넣었다고 하니 고추 양이 늘어난 셈이다. 그러다가 차츰차츰 매운 고추장으로 변화해갔다. 조선 후기에 고추와 함께 들어온 담배가 차츰 중독성을 띠면서 널리 퍼지듯이 고추장도 일종의 중독성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외국인들이 늘 놀라듯이 '매운 고추를 매운 고추장에 찍어 먹는' 독특한 풍습이 생겨났다. 얼큰하고 뜨거워서 더욱 더 매운 찌개를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 표현할 정도다. 서양의 '핫' 음식이 매운 맛만 있다면, 우리 고추음식은 얼큰하면서도 시원하고 단 음식으로 발전하였다. 일단 발걸음을 뗀 고추장은 보리고추장, 무거리고추장, 판고추장, 수수고추장, 약고추장, 고구마고추장 따위로 발전했다. 순창고추장처럼 지역적인 명물도 탄생했다.
고추장이 탄생하자 우리 장문화는 명실상부한 삼총사가 된 셈이다. 그러나 된장, 간장, 고추장 삼총사의 임무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찌개, 무침, 볶음, 구이 등 다양한 음식문화에 침투하여 상호 결합하면서 엄청난 효과를 나타냈다. 우리 음식문화 대표적인 특징을 '국물 음식'이라고 압축한다면, 이들 삼총사는 국물을 종횡무진하면서 음식의 가짓수와 입맛을 확대발전시킨 셈이다. 또한 장아찌를 보라. 된장에 묻어둔 장아찌, 간장에 묻어둔 장아찌, 고추장에 묻어둔 장아찌...... 보릿고개 시절, 변변한 부식물도 없던 시절에 장은 밥상을 지켜준 유리한 밑천이었다. 심지어 된장떡까지 만들어 먹지 않았는가.
'빨리빨리 문화'를 탓하며
<동의보감>에서는 장의 위력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장은 모든 어육.채소.버섯의 독을 지우고, 또 열상과 화독을 다스린다. 또한 장은 흔히 콩과 밀로도 만들지만 그 약효가 콩장에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육장과 어장은 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약에 넣어서는 안된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시판중인 간장이 유해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없다를 놓고 이따금 시비를 벌인다. 발암물질 디클로로크로판을과 불임 유발물질이 다량 들어 있다는 유해성 논쟁이 그것이다. 요즈음은 양조간장과 화학간장 두 종류가 팔린다. 양조간장은 전통적인 방법을 가미하여, 누룩곰팡이를 이용해 발효시킨다. 아무리 빨라도 3-6개월은 족히 걸린다. '빨리빨리'를 '효율과 경영'이란 구두선으로 외치는 시대에 수지타산이 맞는 것은 아무래도 화학간장이리라. 화학간장은 콩을 염산으로 가수분해하여 아미노산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여기에 간장 맛을 내기 위해 맛, 향, 색깔을 합성시키는데 우리가 왜간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일본은 전체 국민의 8할 이상이 양조간장을 쓰고 일부분만 화학간장을 쓰고 있는데, 우리 현실은 이와 정반대다. 늘 제기되어 온 '간장파동'은 맥없이 끝나곤 했다. 미국의 권위 있는 기관에 의뢰한 결과, 아무 이상이 없다는 식의 결론이 되풀이되었다. 우리의 장문화까지 미국에 가서 판정을 받아 와야 하다니! 이쯤되면 우리 '장문화의 우수성' 운운하는 주장도 할 수가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라는 독특한 생활 조건, 여성의 가사노동을 줄여야 한다는 점에서 장문화의 산업화는 필연적이겠지만 화학적 공법의 '빨리빨리'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들의 장문화에도 완벽하게 또아리를 튼 '빨리빨리' 정신은 정말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할 항목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참으로 '빨리빨리' 아파트로 이사하였으며, 거추장스런 애물단지가 된 장독대를 '빨리빨리' 부수고 베란다 문화로 옮겨갔다. 아낙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장독대가 부서지고 칠성님도 사라지는 그 순간, 우리들이 장문화는 마지막 라운드의 기진맥진한 권투선수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된장, 간장 따위를 'Doenjang' . 'Ganjang' 같은 고유상표로 등록시켜 세계로 진출해야 할 때가 왔다. '김치'가 일본식의 '기무치'로 사전에 오르는 비극을 또다시 겪는 못난이 짓을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를 이어오는 간장과 프랑스의 백포도주, 양자가 다를 게 무엇인가. 그럼에도 백포도주의 수백 년 전통은 힘껏 존경하면서도 우리들의 간장 대물림은 왜 무시하는가! 나는 요즘처럼 스트레스가 많고 온갖 현대병이 판을 치는 세상일수록 된장 같은 것을 듬뿍 먹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전에는 고기조차 된장을 발라서 구워먹었다는 기록이 흔하다. 된장을 식문화의 중심에 두고 간장과 고추장을 좌청룡, 우백호처럼 거느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