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무당과 신내림 (2/2)
작두 위에서 춤출 수 있다?
무당과 관련하여 늘 풀리지 않는 또 다른 의문점의 하나가 작두타기다. 시퍼렇게 갈아놓은 작둣날, 무당은 버선을 벗고 맨발로 작둣날 위에 오른다. 설령 신발을 신고 올라선다고 하더라도 작둣날에 잘리지 않을까. 큰무당들에게 물어보지만 "신령님 덕분이다"라는 대답뿐이다. 그러나 그 답변 가지고야 시원한 설명이 되겠는가. 멍석 깔린 마당에 작두탑을 쌓는다. 장군탑, 장군단, 칠성단이라고도 부르는 작두탑은 무당이 작두를 탈 대를 말한다. 드럼통을 세우고 그 위에 떡을 치는 안반을 놓고 밥상, 물동이, 송판, 양푼 순으로 올린다. 드럼통이 없던 예전에는 절구통을 세웠고, 양푼에 쌀을 넣는 대신에 둥근 모말[대두]을 올렸다. 물동이 안에는 조기를 한 마리 넣어두기도 한다. 작두탑 양옆에는 승전기(혹은 장안기)를 세워서, 나중에 무당이 붙들고 중심을 잡게 한다. 굿에서 작두는 신성한 영물이다. 시퍼렇게 날이 서게 갈아 붉은 치마로 감싸서 부엌의 조왕에 모셔둔다. 조왕은 전통적으로 가정신이 자리잡은 곳이다. 무당은 조왕에게 제를 지낸 다음 작두를 둘러메고 나온다. 이때부터 '작두 어르기'가 시작된다. 치마를 걷고, 시퍼런 작둣날을 허벅지에 가져간다. 푸른 핏줄이 팽팽히 돋아난 살갗에 작두를 심하다 싶을 정도로 들이밀어도 살은 베이지 않는다. 팔은 물론이고 뺨과 혓바닥에도 날을 대본다. 두 개의 작둣날을 작두탑 위에 올려놓고 천으로 움직이지 않게끔 고정시킨다. 운이 나빠서 액땜을 하고 싶은 이들이 작둣날을 붙잡고 있으면 액이 사라진다고 하니, 누구에게나 작두의 영험은 강하게 작용하는 셈이다. 굿이 무르익어 장단이 거칠어져갈 무렵, 무당은 신명이 올라 춤을 추다가 순식간에 작두로 오른다. 작두 위에서 삼현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둘러싼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공수를 내린다. 무당이 인간이 아닌 신의 매개자가 되는 순간이다. 이때의 무당은 장군신으로 변신했으니 인간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작두타기에서 가장 높게 드러나고 기세등등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열두 굿거리의 클라이맥스라고나 할까.
실험을 해 보았다. 작둣날로 신문지를 베어보니 면도칼 이상으로 썩썩 베어진다. 놀라운 일이다. 오히려 날을 날카롭게 세워야 발을 베지 않는다? 무당들은 작두를 타는 순간에 발바닥이 뜨거워진다고 한다. 오히려 작둣날이 제대로 서지 않아 고르지 못하면 발을 벨 수도 있다. 여기서 하나의 단서가 잡힌다. 사람의 몸이 내리쏟는 무게중심은 발바닥으로 몰린다. 두 개의 작둣날과 발바닥은 일직선을 중심으로 만난다. 이때 작둣날은 반듯하고 날카롭게 그어져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날 위에 선 사람의 무게를 분산시킬 수 있다. 다음으로 몸이 최대한 가벼워져야 한다. 작둣날이 살을 벨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야 한다. 신명이 실리면 무당은 몸이 가벼워진다. 춤꾼이 신명나게 춤을 추면 몸이 가벼워져 날 듯이 춤판을 누비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신명이 중요하다. 하지만 몸무게가 내리누르는 중력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그래서 중력을 일직선의 칼날이 받을 정도로 힘의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작두를 타기 전에 '작두 어르기'를 통하여 무당은 다리와 팔, 뺨과 혓바닥에까지 작두를 들이민다. 이때 살은 팽팽하게 긴장하여 칼날을 물리친다. 신명이 실린 무당이 작두에 올랐을 때, 팽팽한 긴장이 발바닥과 칼날을 물리친다. 양자의 균형은 아주 팽팽하여, 만약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실패로 돌아간다. 어느 무당들이나 작두타기를 앞두면 긴장하게 마련이고 굿판의 주위 사람들도 모두 긴장감에 빠져든다. 굿판의 공동체적 긴장감이 작두탑에 쏠릴 때, 명실공히 굿판의 주역이 된 무당은 신명의 신바람에 팽팽한 긴장감을 실어 작두로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불충분하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유리겔라가 어떻게 눈빛만으로 숟가락으로 숟가락을 구부리며, 차력사의 배 위로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가를 결부시켜 볼 수 있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기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당의 신명은 신기라고도 하거니와, 신기는 기의 신명적 표출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기는 과학적으로 해명이 가능할까. 내 생각에는 이렇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받아들인 과학적 명제들은 데카르트와 뉴턴 이래의 근대 자연과학의 분석적, 기계적 환원주의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들 과학적 사실은 부분에서는 전적으로 옳지만 전체적으로는 중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생체 에너지의 문제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하다. 기는 서구에서 말하는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면 작둣날에 가해지는 인체의 힘으로 당연히 발을 베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작두타기에서 무당의 발은 전혀 탈이 나지 않는다. 결국 기의 규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간의 의식과 생명과 물질을 통합적으로 연구하는 총체적인 방식이 아니고서는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오늘날 신과학운동이 말하는 인간의 초능력과 생체 에너지에 대한 규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작두타기는 어디까지나 우리 나라에만 있는 접신 현상이다. 따라서 '작두타기'라는 특수한 무당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농경문화와 굿거리의 발전과정에서 나온 신과 기의 결합현상이라고 본다. 작두는 원래 소 같은 가축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다. 이런 작두가 무당의 굿거리 마당에 쓰이면서 무당의 권위를 높이는 도구로 변용된 셈이다. 섬뜩한 작둣날 위에서 춤을 춘다고 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감탄할 것이고 그에 따라 무당의 권위도 올라갈 게 아닌가.
무당신으로 모셔진 예수님
무당을 이야기하다 보면, "그건 미신이 아닌가요" 하는 질문도 꼭 나오게 마련이다. 그렇듯 단정적으로 묻는 그들에게 앞에서 설명한 시베리아 샤머니즘이 어떻고, 시로코고로프의 명저 <퉁구스의 기원>을 읽어 보라든지, 신내림은 비단 북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 널리 퍼진 현상으로, 조금만 공부해 보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따위의 설명은 해줄 겨를도 없다. '굿은 미신'이라는 질문에는 보다 세밀하게 '굿 - 무당 - 샤머니즘 - 미신 - 미신타파'라는 일련의 연상이 내포되어 있다. 즉 '굿 - 미신타파'로 귀결된다. 굿은 부정적 양상이 많았고 역사진보에 역기능을 초래한 면이 많았기 때문에 철저히 박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무당은 늘 미신을 퍼뜨리는 주범으로 조준사격을 받아왔다. 고려시대 이규보(1168-1241년)는 장시 노무편에서 기꺼이 '무당 저격병'의 선두로 나섰다.
내가 사는 가까운 동린에 노무가 있어 날마다 사녀가 모이고 음가괴설이 귀에 들려와 심히 언짢았다. 국가가 칙을 내려 무당들을 멀리 이사시키고 개경에는 오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비단 동쪽의 음탕함이 씻은 듯 적연해짐을 기뻐함만 아니라, 다시는 서울 안에 다시 음사가 없이 세상 백성이 질박 순후하여 장차 태고의 풍이 복구될 것을 축하하여 시를 짓는 것이다. ......
나라에 무풍이 사라지지 않아 여자는 무당, 남자는 박수가 되네 자칭 몸에 신이 내렸다고 하지만 내가 들을 땐 우습고 서글플 뿐이네 굴 속에 든 천 년 묵은 쥐가 아니라면 틀림없이 숲 속의 꼬리가 아홉 되는 여우일레
여기서 '태고의 풍'은 '공자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후대로 내려와서 민중 신앙에 대한 지배집단의 비판적 입장을 가장 강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례로, 제주도의 신당을 파괴하여 변방지역 제주에 유교적 봉건체제를 확립하려 하였던 조선 시대 이형상 제주목사가 있었다. 숙종 28년(1702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그는 삼읍(제주, 정의, 대정)의 음사와 불사 130여 개소를 파괴하고, 무격 4백여 명을 귀농시켰다고 한다. 무당은 예나 지금이나 정당한 평가에서 제외되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팔천의 무리로 하대 받았고, 음사를 일삼는다고 공격 받았다. 장희빈이 왕비 민씨를 저주하기 위해 화상을 그려놓고 화살을 쏘는 식의 흑주술도 무당의 부정적 측면을 더욱 부각시키게 만든 요인이었다. 근대로 들어와서는 기독교 신앙의 대척점인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늘 음지에서만 존재하였다. 고대사회에서도 미신으로 공격 받았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청동기 출토품에 팔주령 같은 방울 모양의 제의 도구가 보이거니와 제정일치 시대의 흔적을 알려준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적자인 남해차차웅에 대해 김대문이 이르길, "방언으로 무당이라 불렀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으로써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지냈다"고 <삼국사기>에 기술하고 있다. 중세사회로 접어들면서 무당의 지위는 하락한다. 유교적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구한말의 선교사 헐버트는 1903년 <코리아 리뷰>라는 영문판 잡지에, 무당의 무란 '속이기 위함'이고, 당이란 '무리'를 뜻한다고 썼다. 무당이 과연 속이는 사람일까. 종교적 편견이나 잘못된 개화주의,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이 오늘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무당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많은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당과 기독교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서양인 선교사가 평안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당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무당을 만나자마자 성경을 꺼내들고 예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인가를 잔뜩 설교하였다. 그러자 무당 왈, "그렇게 좋은 분이라면 오늘부터 당장 신단에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날로 예수님 사진을 받아서 굿당에 걸었음은 물론이고 아침 저녁으로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말하자면 예수굿을 해준 셈이다. 그 무당에게는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관우장군, 백마장군, 칠성신장, 도당할아버지 모두가 만신의 대열이었을 뿐이다. 우리의 전통적 신관은 다신교적인 만신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당을 만신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1996년 여름, 세계적인 신학자 하비 콕스가 모처럼 우리나라에 왔다. 나 역시 <세속도시>, <바보제> 같이 널리 알려진 그의 책을 두어 권 읽은 터라 그의 방한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신문을 들추어보니, 그는 "한국 기독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경에 샤머니즘이 깔려 있다"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가 샤머니즘적이란 주장은 처음 나온 것이 아니지만 교계에서는 공식적으로 접수하기를 꺼리는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신도들이 트랜스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대화한다고 믿는 방언, 신도들의 영혼이 천상계로 올라간다고 믿는 입신따위가 북아시아 샤마니즘의 트랜스 형식과 흡사하다. 평양의 무당이 예루살렘의 예수님을 '만신'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이나, 한국 기독교에서 샤머니즘의 기복족 요소를 도입한 것이나 그 맥락은 같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이 주장에 대해 반론이 있을 법하지만, 그 반론에 대한 답을 미리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 선생은 중국인인 송천성의 신학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국 사람의 '한'을 모르고 어찌 한국 사람에게 복음을 전달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송천성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중국과 아시아에 있어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도들의 신은 대체로 우상과 잡귀를 몰아내는 푸닥거리의 신이었다. 선교사들은 중국사람들에게서 그 잡귀 잡신을 몰아내주려고 중국에 온 것이다. 중국 초대 교인들은 새 신앙의 힘으로 악귀만이 아니라 중국문화까지 몰아내는, 말하자면 푸닥거리의 사역을 위해 임직된 셈이었다...... 아시아에서 그 토착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공포증은 용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와 토착문화의 관계에 있어서 유럽에서는 그렇지 아니했다. 그 한 예로 크리스마스 축제행사를 보라. 그것은 시리아, 로마의 태양신 숭배제의에서 유래한 그리스도 탄생축제가 아닌가. 위 중국의 경우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기독교는 민족문화를 몰아내는 푸닥거리 역할을 충분히 해낸 셈이 아닐까. 무당이 단순한 미신으로 내몰리게 되기까지 근 백년의 역사는 바로 이 '푸닥거리'의 역사였던 탓이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 자신이 '예루살렘의 큰무당'이었다고 나는 늘 믿고 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문제는 무당 자신에게도 있다. 진정한 무당이 되려면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강신무이거나 세습무이거나, 무업에 들어선 사람은 누구나 큰무당을 만나서 굿을 배워야 한다. 무가를 외우고, 제물차림을 배우고, 굿거리마다 옷을 차려 입을 줄 알고, 춤을 배우고 온갖 의례를 격식에 맞게 배우고, 단골을 조직 관리하는 방법을 알고...... 적게는 몇 년, 많게는 평생 배워도 부족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러한 배움을 제대로 한 무당다운 무당이 얼마나 있을까. 일제 시대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큰무당 이야기가 황해도 무당들 사이에서 전설같이 전해온다. 그이는 큰 굿이 끝나면 항상 수많은 제물을 배고픈 이웃들에게 돌렸고 늘 함께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독립운동 뒷자금도 대었다. 굿은 곧 '나눔의 잔치'임을 몸으로 실천한 이다.
전라도 단골을 생각해 보자. 단골들은 평소에는 호미를 쥐고 논밭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집안에 궂은 일이 생긴 사람이 있으면 호미를 집어던지고 땀 흘린 베적삼을 입은 채 굿을 행하였다. 그들은 굿판에서 직접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두 번 쌀과 보리로 '연봉' 비슷한 것을 받았을 뿐이다. 그들 자신이 민중임과 동시에 종교적인 사제였다. 시베리아 샤먼들도 결코 제의를 행하고 돈을 받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의 굿을 더욱 중시하였다는 보고서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무당을 보고서 이 같은 민중의 무당을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으리오!
강증산도 자신을 '큰무당'이라고 했다. 강증산은 "후천개벽을 하는 데 무당을 따라가야 한다", "광대와 무당이 바로 큰 개벽장이다"라고 하였다. 김지하 시인의 해석으로는, 이때의 무당은 '만신'을 뜻하는 무당이자 동시에 '없을 무'자, '무리 당'자 무당, 즉 어떤 당파에도 가담하지 않은 '무당파'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김 시인은 그의 이야기 모음집 <밥>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이른바 친지공사, 즉 후천개벽을 실질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집행하는 그의 천지공사는 모두 이와 같이 우리 나라 농민들의 농업노동의 가락과 장단 및 전통적인 굿의 형태로서 진행되었으며, 스스로 천지 생명을 낳고 키우고 살피는 '한울님'일 뿐만 아니라, '무당'이요 '천지농사꾼'이라고 자기 자신을 비유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제까지 이야기해 온 후천개벽과 '몸에 대한 틈'의 선포로서의 큰굿, 대동굿, 일과 춤, 두레와 대동놀이, 노동과 문화 사이의 통일적인 상관관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증산 자신이 실제로 후천개벽 공사를, 그의 천지공사를 바로 '천하굿'이라고 불렀고 바로 '무당공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쯤 되면, 강증산같이 근세의 풍운아가 생각하던 무당과 굿의 개념은 상당히 폭넓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큰무당은 사라지고 선무당만 설치는 격은 아닐까. 그들에게만 이 모든 책임을 물을 수야 없지만, 오늘의 무당들에게는 타산지석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무당의 긍, 부정을 떠나서 오늘날도 여전히 무당이 속출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무당들의 조직인 경신회에서 추정한 바에 따르면 '신의 자식'들이 무려 10여만 명에 육박한단다. 더구나 요즈음은 저학력자에서 고학력자로 옮겨가는 추세이며, 대학을 나온 무당도 만만치 않은 숫자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 양산되는 무당들을 사회적 문제로 진지하게 대처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무당들의 복지', '무당들의 사회교육' 따위를 주장한다면 제도종교만을 주무르는 종교문화 정책입안자들 중에서 웃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일찍이 유럽이나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근 2백여 년이나 연구해온 샤머니즘의 내용에 수준 높은 우리의 무속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또 이능화의 <조선무속고>(1927년)가 출간된 이래로 이미 7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후의 성과는 미미하기만 하다. 얼마 전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출간한 <대륙을 넘어서>란 책을 보니, 몽골리언들의 베링 해협을 건너서 북미로 이동해 간 파란만장한 역사와 그들의 샤머니즘이 너무나 쉽고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도대체 우리는 귀중한 자료를 쌓아두고도 왜 이런 성과물조차 없는 것인가. 우리 무당의 온전한 연구는 전 세계적 차원의 샤머니즘 연구, 종교현상연구 그리고 우리 민족의 종족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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