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무당과 신내림 (1/2)
그대, 몸주신을 맞이하라
50년 만의 열대야 현상으로 한창 무더웠던 1994년도 말복 무렵. 생면부지의 여학생 한 명이 아는 분의 소개를 받았다면서 연구실을 찾아왔다. 모 미술대학 3학년에 다니는데 몸이 안 좋아 얼마 전에 휴학을 했노란다. 무슨 병인가 싶어 찬찬히 얼굴을 뜯어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눈에서 확실한 신기가 내비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점쟁이라도 된 것으로 착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신기 들린 사람을 한눈에 척 알아본다. 특별한 비결이랄 게 있는가. '서당개 삼 년에 뭐'라고 20여 년 가까이 수많은 무당을 만나러 다닌 덕분이다. '신의 자식들'(그들 자신은 그렇게 부른다)은 눈빛부터 다르다. 인간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럴까. 너무나 말라서 보기에도 안쓰러운 몸매, 쾡하니 풀린 눈망울, 굳게 다문 입, 철 지난 해수욕장에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그녀를 둘러싼 스산한 기운, 나는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휴학하고 백방으로 병원을 다녀보아도 병명은 알 수가 없었으며 끼니조차 거르면서 하루 종일 잠만 잔지 벌써 여러 달.
"꿈에 무엇이 보였다고?" "느닷없이 할아버지가 왔다 가요." "할아버지?" "수염 허연 할아버지요. 자정만 되면 나타나서 뚫어져라 날 바라보다가 사라져요. 그 눈빛이 무서워요. 깨고 보면 새벽이고요." "할아버지만 보이니?" "아뇨, 말 탄 장군님도 있어요. 마부도 데리고 나타나는데 붉은 말을 탔어요. 등에는 화살통을 메구요."
정황은 명백했다. 그 여학생은 무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니 병원에 가보아야 소용없는 일이 아닌가! 내림굿을 권했다. 여학생은 울면서 한사코 무당이 되기는 싫다고 했다. 어머니의 반대는 더욱 완강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난 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 무렵에 여학생은 모친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신의 길을 가겠노라고.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다가 체념한 듯이, 흡사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듯이'내림굿을 받고 '신의 자손'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 개인적으로 보면 참으로 안타깝지만, 달리 보면 신의 선택으로 '영광스러운 길'을 나서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가시밭길'일 수밖에 없는 그 길. 그래서 나는 늘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무당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큰무당에게 여학생을 데리고 갔다. 그이의 첫 마디.
"왜 이제 왔니!"
그렇다. 큰무당은 첫눈에 알아보고 도리어 늦게 왔음을 나무랐다. 그리고 내림굿을 서둘렀다. 날짜는 시월 상달 초닷새. "오곡이 풍성하고, 단풍이 새록새록 물들어 가고 있으니 단풍맞이 굿이 보기에도 좋지 않겠냐"면서 큰무당이 날을 잡았다. 큰무당을 만난 지 불과 10일만에 우이동 숲 속의 굿당에서 내림굿이 벌어졌다. 여학생은 굿이 시작되자마자 신기가 발동하여 날뛰기 시작하였다. 대개의 입신자들은 제 몸에 들어온 신을 이기지 못해 날뛰기 마련이다. 그 여학생도 입에 거품을 품고 나뒹굴더니 돌연 벌떡 일어나 단숨에 날카로운 작두 위로 성큼 올라섰다. 그것도 맨발로. 여학생의 모친은 작둣날을 올린 드럼통 주위에서 울고 있었고, 그 여학생을 따라온 친구 네댓은 넋이 나간 듯 자지러졌다. 도당 할아버지, 임경업 장군, 작두 대신, 군웅 대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에 실린 이름을 줄줄 외워댔다. 정작 본인은 그 동안 굿구경을 딱 한 번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큰무당의 점괘로 모친이 숨겼던 집안 내력이 나왔다. 외가 쪽 작은할아버지가 박수무당이었는데, 그 조상신이 여학생 몸으로 옮겨온 것이다. '신까머리(신기)'가 붙은 셈이다.
황해도에서는 이 같은 내림굿을 소슬굿이라고 부른다. 무병 걸린 이가 있으면 허첨굿으로 잡귀를 쫓아내고, 내림굿을 하여 신을 내리게 한 다음에 신이 완전히 솟아오르라고 소슬굿을 한다. 솟구쳐라, 솟구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죽으리라! 솟구치는 소슬굿으로 무당이 탄생하고, 솟구치지 못하면 그는 죽은 자와 다를 게 없다. 평범한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내리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어느 누구나 갑자기 무당이 될 수 있다. 무당 내력이 있는 집안의 사람은 누구보다 쉽게 신까머리가 붙는다. 스스로 무당이 되길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피하려 하지만 운명은 어김없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유난히 고통 받고 삶의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특히 여성들)에게 신내림이 많다. 억눌린 자가 거꾸로 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무당이 된다는 것은 마치 박해 받은 예수가 도리어 민중을 해방시켜 주는 것과도 같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어느 날 갑자기 환청이 들리거나 꿈에 조상 따위가 나타나는 일이 계속되거든 반드시 큰무당을 찾아갈 일이다.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을 어찌 범인인 우리가 만만하게 뿌리칠 수 있으리오!
샤머니즘? 무당이즘?
반드시 신내림을 해야 무당이 될까. 신이 내린 무당과 신이 내리지 않은 무당이 있으니, 세습무, 강신무라는 무당의 양대 산맥이 그것이다. 그럼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는가. 대개의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우리 나라 무당의 역사가 오래 되었으리라는 짐작과 '무당'과 '무속'을 오래 된 옛 말로 착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옛 기록에도 '무' 혹은 '무적'은 자주 등장하고 있으나 정작 무당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무당이 기도하는 장소를 '무당'이라 표기하는 경우는 있어도 무녀를 무당이라고 표기하지는 않았다. 남무와 여무를 통칭하는 무격이란 말 혹은 국무, 사무, 아무 따위는 자주 나오지만 오늘날 흔히 쓰는 '무당'이란 표현은 확인할 길이 없다. 무격이란 말은 기원전 4세기에 만든 중국의 <국어, 초어>에도 분명히 나온다. 옛날에는 사람과 귀신의 일이 어지럽게 혼동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 가운데 정명하고 변함이 없어 언제나 하나같이 공경스럽고 마음이 바르며, 그 지혜는 위아래의 마땅한 도리를 알고 그 통달됨은 멀리까지 밝게 깨달을 수 있으며, 그 명석함은 두루 빛을 비출 수가 있고, 그 총명함이 들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그러한 이에게 귀신이 강림하게 되는데 남자에게 임하면 격이라 했고, 여자에게 임하면 무라 하였다.
<청구영언>의 작자미상 노래에도, "덩덕꿍치는 무당년들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러나 '무당'이란 표현은 있었어도 '무당'이라 쓰지는 않았다. '무당'은 없어도 '무당'이란 표현은 더러 있다. 규장각에서 발견된 무당내력이란 그림(조선말로 추정)에는 감응청배, 제석거리, 별성거리, 대거리, 호구거리, 조상거리, 만신말명, 신장거리, 창부거리, 성조거리, 구릉, 뒷전 등의 굿거리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우리가 익히 쓰고 있는 '무속'이란 말도 원래는 전혀 없던 말이다. 그렇다면 최근세에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럼 왜 이런 표기상의 난맥상이 일어난 것일까.
추정컨대 한글로 '무당'이란 말은 민중의 구어로 옛부터 널리 쓰였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무당의 어원을 퉁구스의 여자 샤먼을 지칭하는 우다간 계통어로 파악한다. 그것이 한자로 무라 표현하다가 당과 결합되어 무당으로 고정된 것으로 본다. 러시아 민족학자 트로찬스키는 1902년에 몽고인, 브리야트인, 야쿠트인, 알타이인, 터키인, 키단인, 키르키스인이 여무를 각각 utagan, udagan, udagham 등으로 부르고, 타타르에서는 udage, 퉁구스에서는 utakan이라고 하듯이 우랄 알타이 민족간에 동일 어근을 갖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보기에는 끝음 '당'이 재미있는 것 같다. 우리가 신라왕을 이두식으로 표기했을 때 거서간, 마립간 등의 '간'이라 부른다. '간'은 몽골어 징기스칸 등의 '칸'과 같은 어근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끝음이 '당'과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음이 우다간처럼 '유'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무당의 '엠'으로 시작됨을 설명할 길이 없어 불완전한 이론이 되고 만다. 전라도 세습무인 단골을 단군 > 단굴 > 단골이라는 변천을 거쳐왔고, 화랭이는 화랑에서 나왔다는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어쨌든 아직은 무당의 어원문제가 미완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무당'과 '샤먼' 사이의 친연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의 논의를 아시아 전체로 옮겨보자. '무당 박사' 김태곤 교수는 1996년 겨울, 타계하기 직전에 쓴 미완의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필자는 한국 안에서는 한국어로 원어인 '무속'이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해왔고,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할 경우에 한해서만 '무속'과 가장 가까운 말을 선택한 것이 '샤머니즘'이라는 말이었다. '무속'을 '샤머니즘'이라 번역하는 경우에도 '무속'을 곧바로 '샤머니즘'이라 번역할 수 있겠느냐는 이견과, '무속'자체가 샤머니즘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풀어서 말하자면 한국의 무속은 아시아 전체의 샤머니즘과 어떤 변별성과 동질성을 갖는가 하는 점이다.
논의를 샤머니즘으로 돌아가 보자. 로퍼는 <샤먼의 어원>(신종원 역)이란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들은 그 말을 러시안들로부터 받아들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7세기 후반에 동시베리아를 탐험하고 정복하여, 퉁구스족으로부터 그 용어를 듣고 기록한 러시아인(주로 코자크인)이었다. 그 말이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1692년부터 1695년 사이에 표토르 대제가 중국으로 보낸 러시아 대사와 동행했던 네덜란드인 이데스와 브란트에 의해서였다고 하면서 몇 개의 인용문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몇 마일 위쪽으로 가면 많은 퉁구스인이 사는데, 거기서도 역시 샤먼 혹은 마법사라고 불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로퍼는 퉁구스어인 saman, xaman 등과 터키어의 kam, xam 등은 북아시아의 토양에서 배양된 가깝고도 분리될 수 없는 동료들이다. 또한 샤머니즘 형태의 종교가 위대한 유산으로 살아 있는 증거라고 밝혔다. 샤먼은 본디 17세기 후반 러시아 탐험대가 바이칼 호수와 예니세이 강변에 거주하는 퉁구스족 주술사를 접촉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원래 샤먼이란 북아시아 특히 북중국과 만주, 몽고, 연해주 등지의 주술, 종교 직능자를 일컫는다. 서양으로 퍼지면서 샤머니즘은 전세계적인 용어가 되었다. 만약에 우리의 무당이 처음으로 외국에 소개되었다면 무당이즘이라 불렸을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학계에 제출된 견해를 종합하면, 어원상 우리 무속이 북아시아 전 지역에 넓게 퍼져 있는 샤머니즘의 한 갈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샤먼과 샤먼니즘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서구적인 해석 과정만 거쳤다. 이에 반하여 우리의 무속을 상대로 비교하는 일은 늦게야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시베리아 땅은 옛 소련령으로, 갈 수 없는 동토의 나라였다. 우리는 우리 무속의 기원문제를 풀기 위하여 직접 시베리아로 찾아가야만 했다.
에벤키족 샤먼과의 추억
무덥기만 하던 1993년 여름, 시베리아의 아름다운 레나 강가의 사하 공화국 수도 야쿠츠, 거기서 에벤키족 무당을 만났다. 그네들의 이름은 알렉세이에비치 바실리예프, 셰먼 스티파냐비치 바실리예프. 러시아 말을 전혀 모르는 우리는 전적으로 이들을 이끌고 온 통역자인 방송기자 유드 밀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하바로프스키에서 출생한 에벤스키인이다. 고아시아족인 에벤키족은 극소수가 살아 남았을 뿐이다. 할아버지에게서 굿을 배웠는데 그들은 소련말을 전혀 못했으며, 에벤키 말로 굿을 했다. 그때 쓴 민속학 답사노트를 그대로 옮겨본다.
새의 형상을 한 장중한 무복을 꺼내 입음. 그릇에 불을 켰고, 샤먼이 앉아서 북을 치며 노래. 일어나서 북을 치고 춤춘다. 무언가를 던져서 점도 친다. 다른 샤먼도 같이 뛰다가 앉아서 노래한다. 노래는 주고받는 화답식이다. 흡사 우리의 무당노래를 듣는 듯. 샤먼은 옷자락을 잡고서 끊임없이 앞으로 자연스럽게 흔들면서(가끔 땀도 씻고) 노래한다. 둘러앉은 가족들이 화답한다. 다시 일어나서 춤을 춘다. 이때 북을 치던 사람도 같이 일어나서 악기를 쳐준다(이때 같이 구경하던 김태곤 교수가 60-70년 전 소련에서 찍은 기록영화에는 혼자 뛰는 것으로 나오고, 화답도 하지 않는데 조금 변한 것 같다고 말을 거든다).
흡사 인디언 복장 같다. 머리에는 새털을 꽂고, 치마를 입었다. 다시 일어나서 춤을 춘다. 북군도 같이 춤을 춘다. 담배를 피운다. 보드카도 마신다. 트랜스(이입)에 들어가기 위함일까. 샤먼이 춤을 춘다. 뒤에서 2인이 샤먼 무복의 뒤끈을 잡아당긴다. 샤먼에 새가 되는 모양이다. 새가 날아가는 형상이다. 격렬한 춤. 새는 날아간다. 참으로 격렬한 동작. 다시 북을 치는 샤먼. 앉아서 북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을 쓰다듬고,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고 나서 북을 놓고 북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점을 치는 것이다(제주도의 심방들이 굿 도중에 점을 치듯이).
다시 일어나서 칼을 던진다. 칼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우리의 무당들도 칼을던지며, 그 칼이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칼을 두 번 던져서 성공시킨다(우리의 무당들도 칼이 안쪽을 향하면 재차 시도하여 성공시킨다). 북으로 다른 여자를 씻어준다. 점을 치고, 칼을 다시 던지고 나서 콩 같은 검은 것을 꺼내서 집어던진다(이것은 알 수가 없군......).
다시 일어나서 춤추며, 북채를 던져 점을 치고, 지친 듯이 샤먼은 쓰러져버린다. 격렬한 운동, 무거운 무복, 장시간의 제의 끝에 그는 새가 되어 날아가려다 지친 듯 쓰러지고 말았다. 일어나 앉아서 불을 다시 켠다. 추운 시베리아. 불이 소중하기만 하다. 더운 듯, 무복을 벗는다. 굿은 끝났는가? 그날 밤 우리는 국영 스트로이텔 호텔 식당에 앉아 보드카를 앞에 두고 토론을 벌였다. 동학인 중앙대 박경하 교수를 비롯하여 단국대 고부자, 금성환경대 이수자, 숙대 강영경, 서울대 윤승용...... 그리고 시베리아 언어철학연구소의 종족음악학자 안나 라리오노바를 비롯한 시베리아 연구자 몇몇이 동석했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재미있는 의례를 즉석에서 연출했다. 접시에 보드카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우리가 중국 술인 배갈에 불을 붙이듯이 그들은 보드카에 불을 불을 모신다고 했다. 몹시 추운 북방지대임을 생각한다면, 불을 숭배하는 의식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지하 10센티미터만 파도 만년 얼음이 나오는 툰드라와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타이가가 있는 원시 종족사회의 샤먼과 온대 고밀집 지대의 개명한 민족국가에서 나온 무당의 차이를 논하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샤머니즘이 우리처럼 고도화된 서사문학과 더불어 복잡하고 다양한 제물차림, 춤과 악기연주같은 고난도의 의례에 도달한 경우가 있는가! 북방의 샤머니즘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서 내린 결론이었다. 물론 여러 면에서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우리의 무속이 한 뿌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샤머니즘이 입무 과정에서 갖는 이니티에이션을 통해 터득한 엑스터시를 자유롭게 반복하는 종교현상이다. 그렇다면 샤먼은 엑스터시의 기술자이며, 엑스터시 속에서 신령과 직접 교섭하여 자연과 초자연의 합일을 찾는 주술적 매개자라 지칭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무당도 예외가 아니란 결론이다. 다만 몇 가지 문제는 남는다. 야쿠티아의 샤먼들은 접신을 하면 오리, 백조, 물고기, 물방개, 커다란 땅벌레, 곰, 늑대 등의 영과 대화하며 접촉한다. 때로는 그들 동물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들의 샤머니즘은 시베리아의 숲과 호수, 산과 강에서의 원초적인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모든 신들이-해와 달, 물과 바람의 신조차도-인격신의 형상으로 표현된다. 또한 우리의 경우 무당을 표현하는 호칭도 시베리아 샤먼에 비해 유례없이 복잡하고 다양하며 의례도 복잡하게 이를 데 없다. 이는 우리의 무속이 바로 고도의 문명국가에서 성장해왔다는 역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당의 사회적인 기능이 폭넓었으며, 종교 혼합현상이 심했음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북아시아 전체의 세계적 보편성과 한반도 나름의 문명발달에 따른 민족적 특수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명국가에서 최고도로 정치하게 굿을 발달시켰고, 굿을 용도에 따라 섬세하게 분류하였고, 지역적 풍토에 따라 차별성이 분명한 다양한 굿거리를 만든 게 우리의 무당문화란 점에서 우리 문화의 발달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대도 무당이 될 수 있다
민속학 수업이나 대중강좌를 진행하다 보면 으레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신내림으로 무당이 된다면, 전라도 같은 지방에서 흔히 존재하는 세습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샤머니즘 이론이 신내리는 강신무에게는 적합한 이론인데, 신내림과 무관하게 대대손손 세습되는 세습무당에게는 적용되기 곤란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호남의 단골이나 영남의 무당은 대대손손 가계혈통으로 이어지는 단골형이다. 단골형은 신내림과는 무관하게 엄연히 가입을 세습으로 이어 나간다. 그렇다면 '북방식 신내림'과 '남방식 세습무'로 구별해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통용되는 갈래나눔은 북부지방의 강신무, 남부지방의 세습무인 단골무 그리고 제주도의 세습무인 심방형, 남도에 나타나지만 세습무는 아닌 명두형 무당의 네 가지이다. 단골무는 글자 그대로 '단골손님'을 갖는 무당이다. 늘 찾아오는 손임을 단골손님이라고 하였으니, 전라도 단골도 늘 찾아오는 단골손님의 무당이다. 단골들은 단골판이라고 하여 1백호, 2백호, 5백호 식으로 나름의 종교적인 관할구역을지니며 대대손손 이어간다. 천주교에서 일정한 교구권을 설정하여 영역을 침입하지 못하게 사제권을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신내림과는 애초부터 무관하다.
세습 단골무당들은 어려서부터 굿판에서 자라난다. 그들은 늘 신명이 그득한 장단과 노랫가락, 제물차림과 단골접대를 보면서 자라난다. 더욱이 '천하의 불쌍놈'인 팔천(사노비, 중,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의 여덟 천민) 신분으로서 무업 이외에는 살아 나갈 방도가 없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기에 천직으로 알고서 무업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무업과 가까이서 생활하다가 굿판을 주재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이미 신내림 받은 것과 같지 않을까. 그들의 굿거리 형식, 받아들이는 신격, 무당의 사제적 역할, 신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직적 세계관 따위를 놓고 보면 그들 역시 샤먼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북아시아 전체의 무당들과 비교해 볼 때, 한반도의 무당들은 세습무건 강습무건간에 본질적으로 샤먼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북방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시베리아나 만주처럼 자연적인 상태에서 신내리는 샤먼과 달리 우리는 고도의 문명국가라는 틀 안에서 나름의 자기 분화과정을 거듭한 결과 세습무로 정착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경기도 구리시에 가면 2년에 한 번씩 복사꽃 필 무렵 갈매도 도당굿이 열린다. 이 마을에는 도당굿을 주관하는 단골무당인 일명 '복뎅이'네가 있다. 갈매동 단골은 마을민중에서 어느 날 갑자기 도당의 신들이 내려서 무당이 된다. 그런데 도당산신은 어김없이 복뎅이네만 내려서, 복뎅이네는 현재 4대째 무업을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딸들에게만 신이 내림으로 모계승계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전라도 단골처럼 모계승계가 이루어지면서도 반드시 신내림이라는 과정을 거침으로써 세습과 신내림의 이중구조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강신무와 세습무의 중간지점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주도에서 세습무인 심방이 신점도 치는 강신무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음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통계에 따르면 제주도 심방에는 세습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려 무당이 되는 경우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동안 무속연구에서 지나치게 간과되어 온 존재가 충청도 법사가 아닐까. 충청도굿은 여타 지역의 '선굿'과 대비되는 '앉은굿'이다. 법사는 앉아서 천수경, 옥추경 같은 경을 읽어 집안을 평안하게 해주는 세습무다. 오랜 학습을 거쳐야만 법사가 될 수 있다. 또한 장님으로서 생계를 위해 무속에 뛰어든 사람은 판수라고 별도로 구별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충청도에도 선무당이 지배적이고 앉은굿은 차차 사라지고 있다. 이 같은 현재까지의 연구를 고려하면 세습무는 남쪽, 강신무는 북쪽이란 식의 획일적인 구분은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사실상 '신내림'의 의미부터 엄밀히 재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백제의 옛 땅, 부여의 은산에 가면 은산 별신제가 열린다. 별신굿에서 압권은 무당들의 굿이 아니라 은산의 제관들이 대를 잡아 신을 받는 과정이다. 꿩의 장목(꽁지깃)을 매단긴 대나무장대에 농기를 매달고 방울을 달았는데, 신이 내리면 방울이 울리게 되어 있다. 부정을 타면 신이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제관은 다시 은산천으로 가서 얼굴과 손을 씻어 부정을 가려야만 한다.
신내림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사람도 일단 제관으로 뽑혀서 대를 잡으면 공동체의 신명으로 신내림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신내림이라는 형식 자체가 '무병, 신기'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다. 즉 신내림은 신내림 받은 특수한 신분계층인 무당에게만 가능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신내림이라는 특이한 현상 자체도 여러 형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세습무를 포함하여, 누구나 본질적으로는 '신내림'이라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무병을 앓느냐 그렇지 않느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도 신이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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