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풍물굿 1799-1999
내가 서태지의 팬이 된 이유
어느 날 문득, 나는 서태지의 팬이 되었다. 그네들의 두 번째 앨범에 실린 '하여가'가 인연의 끈이다. 그들이 은퇴한 지금에도 나는 즐겨 '하여가'를 듣곤 한다. 어느 날 문득 학교 앞 카페에서 날라리의 신명 돋우는 음정으로 시작되는 '하여가'를 들었다. 그때의 반가움이란! 대뜸 무릎을 치면서 "바로 저것이다!"라고 외쳤다.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 그들이 꿈꾸는 바를 이해할 것도 같았지만, 정작 결정적인 것은 '하여가'의 풍물소리였다. '하여가'가 날라리까지 포함한 풍물굿으로 시작된다는 단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내가 서태지를 좋아해야 할 필요충분조건은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개의 젊은 음악인들이 민족음악을 포기, 무시, 박대하면서 서풍만 흉내내고 있을 때, 그들은 과감히 풍물굿을 받아들였다. 그 바람에 풍물굿은 가장 인기 있는 대중음악계 진출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서태지는 나같이 대중음악에 둔감하면서도 풍물굿을 즐기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데도 '성공'하였다. 풍물굿은 뉴욕에서 열린 '해방과 유엔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에도 '주연배우'로 출연하였다. 불과 네 명으로 구성된 사물놀이패는 1980년대 이래로 전 세계를 돌면서 우리 음악의 대명사가 되었다. 심지어 어느 나라 사전에는 아예 '사물놀이'란 명사가 올랐다고 한다.
우리 문화가 사라지고, 우리 문화에 애정이 없다는 식의 한탄이 습관처럼 오르내리는 시대에서도 풍물굿은 가히 압승을 거두고 있다. 대학교에 풍물패가 꾸려졌고, 노동조합에도 빠짐없이 풍물패가 있다. 그것은 풍물굿이 전통적이되 아주 현대적이란 증거이다. 그렇다면 풍물굿은 어떤 '근대성'이 깊숙이 내재된 것은 아닐까.
얼마 전에 한겨레신문사 통일문화재단에서 후원하는 신명축제예술단의 통일염원대동굿 '뚫으세 뚫으세 물구녕을 뚫으세'를 보면서 <한겨레 21>에 다음과 같이 다소 '흥분'된 글을 쓴 일이 있다.
오랜만의 벅찬 감동!
공연 하나를 보고서 왜 그런 '포괄적'인 감동을 느껴야만 했을까. 여기에는 필연적인 하나의 사연이 있으니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몇 대학에 이른바 '농악패'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풍물굿 논의가 무성해지면서, 아울러 '축제에서 대동제로' 같은 화두가 던져졌다. 농악이란 말에 대한 반성이 풍물굿으로 개념을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대동굿이 대학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시대적 분위기가 짐짓 해체주의로 흐르자 이내 대동굿은 사라졌고, 풍물굿의 음악성만 강조하는 분위기로 치닫게 되었다. 풍물굿을 음악으로만 파악하려는 의도가 공연의 기동성 확보라는 점에서는 타당할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전술에 불과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제 우리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전략이 아닌가. "사물놀이가 하나의 전술이라면, 풍물굿은 전략이다"는 것이 내가 주장하는 바다. 전술은 기동성과 공격성이 뛰어남을 자랑한다. 사물놀이패 네 사람이 전 세계를 누비며 풍물굿의 음악성을 세계에 드러냈을 때, 전 세계가 놀랐고, 우리의 음악이 세계성을 인정받았다는 데서 우리들 스스로 놀랐다. 그러나 사물놀이는 우리들 시대가 거둔 중요한 전리품이기는 하되, 하나의 전술일 따름이다.
그러면 풍물굿이라는 전략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대동성이 아닐까. 노래, 춤, 신앙, 노동, 전투 따위가 모두 망라된 대동놀이야말로 풍물굿의 알파요, 오메가다. 놀이는 음악보다 넓은 개념이다. 20세기의 부르크하르트라고 일컬어지는 문화사가 호이징가는 '놀이하는 인간'을 다룬 <호모 루덴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음악은 놀이의 영역 안에 포함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음악을 만든다는 것의 발단부터가 놀이 고유의 형식적 특징을 모두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풍물굿은 그 대동성으로 말미암아 '토탈 아트'에 이르게 된다. 그러면 풍물굿은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 것일까. 우리는 그 이유를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풍물굿의 흘러온 역사 속에서 오늘을 다시금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악이냐 풍물굿이냐
풍물굿의 역사를 논하기 이전에, 우선 "풍물굿이냐 농악이냐"라는 오랜 논쟁부터 재정리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라면, 나는 '풍물굿' 쪽이다. 심포지움에서 만난 선학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농악이나 풍물굿이나 다 똑같은 말 아니오?" 물론 맞는 말이다. 학자들이 쓴 보고서를 보면, 한결같이 농악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1970년대 이래로 풍물굿에 관심을 기울인 수많은 '굿쟁이'들은 모두 풍물굿이란 말을 고집한다. 어째서 이런 구분법이 생겼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농악이라고 표현하는 사람과 풍물굿이라고 표현하는 사람의 생각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조선 시대 양반들의 문자에는 '쟁고, 금고' 따위가 등장한다. 그러나 민중이 실제로 그렇게 불렀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민중은 '풍물굿, 지신밟기, 뜰밟이, 매귀, 매구, 풍장, 두레, 걸궁, 걸군, 글입' 따위의 다양한 명칭들을 필요에 따라 수시로 바꾸어 불렀을 것이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돈이나 쌀을 거두는 걸립, 마당을 밟아주는 뜰밟이(지신밟기), 두레의 들풍장, 마을당산에서 치는 당산굿...... 각기 자기 쓰임새에 따라 다른 이름을 지녔다.
수천 명의 대학생들이 전수를 받고 갔을 정도로 소문난 풍물굿 마을인 전북 임실군 필봉마을에서도 '굿친다'고 하지 농악이라 하지 않는다. 굿, 바로 그것이 정답이다. 농악이란 말이 처음으로 공식화된 시기는 일제 시대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 시대까지는 '농민, 농촌'이란 말도 없었다. '향곡에 살고 있는 민' 같은 표현으로 농촌과 농민을 나타냈다. 조선 시대의 농악 운운하는 표현은 문헌상으로나 민중의 현장 용어로나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인 학자에서 시작된 이후 학계에서는 일사분란하게 농악이란 말을 써왔고, 아직까지도 그렇다. 중앙대 정병호 교수 같은 이는 정작 <농악>이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농악 명칭은 우리 나라 예능을 한자로 정리할 때 나온 어휘라고 추측된다. 국악은 정악과 속악으로 나누는데, 속악 중에서도 '농촌의 음악'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농악이라는 말이 문헌상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부락제>라는 책에서였다. 따라서 농악이라는 말은 일제 시대에 생긴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농악은 문자 그대로 '농촌의 음악'이란 뜻이 아닌가. 하지만 풍물굿이 음악이기만 하던가. 1985년도에 김봉준 화백, 종교연구가 진철승 선생 등과 함께 민족굿회를 창설한 뒤에 나 자신이 편집하여 1987년에 발간한 <민족과 굿>이란 책에서 풍물꾼 김원호는 이렇게까지 쓰고 있다.
풍물굿에 대한 시각 중에서 가장 저해한 시각이 풍물굿을 가락 중심으로 바라보는 점이다. 음악성이 아주 높다는 둥, 리듬음악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탁월하다는 둥 음악이라는 장르만으로 풍물굿 정신을 찢어발기고 있다. 이 여파는 상당해서 풍물굿의 현재 모습이 음악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일제 때 제국주의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던 농악이라는 말이 보편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에 '농촌의 악'이라서 농악이라면, 현재 도시민이 치는 악은 '시악', 공장에서 치는 악은 '공악', 학생들이 치면 '학악'이 되어야 하는가. 이쯤 설명하면, 풍물굿이 농악보다는 한결 포괄적이고 정확한 표현일 뿐더러 역사적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풍물굿'에서 '굿'을 떼어내고 '풍물'이란 말을 자주 쓰는데, '풍물'은 실상 악기를 뜻함을 감안한다면 잘못된 용례라는 지적이다. 백번 옳은 지적이니 앞으로는 집단적인 굿을 뜻하는 풍물굿과 악기를 뜻하는 풍물만큼은 가려서 쓸 일이다.
18세기 마지막 해에 이옥이 저녁밥을 지으며
풍물의 기원을 언제부터일까. 선사 시대의 사슴가죽북, 삼국 시대 사찰의 징, 고려 시대 청자에 그린 장구...... 이들 악기의 유물로만 보면 선사, 고대로 올라간다. 그러나 오늘날의 풍물굿 원형에 접근한 문헌기록은 아무래도 후대로 내려온다는 게 학계의 일치된 견해이다. 조선 전기인 16세기 초반(1952년), 경주에서 출판된 <용제총화> 성현의 진술을 몇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섣달 그믐날 밤에 관상감에서는 어린애 수십 명을 모아 궁중에 들여보내 북과 피리를 갖추고 새벽이 되면 방상씨를 쫓아내던 풍습이 있었고, 이를 민간에서 모방하여 북과 방울을 울렸으니 방매귀라 불렀다. 방매귀는 악귀쫓기로 보이니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지신밟기, 뜰밟이를 행해주는 매귀굿의 원초형이 아닐까. 섣달 그믐에 행하던 나례에서 매굿 등이 시작되었고 이것이 풍물굿의 모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로부터 1세기 뒤인 17세기 중엽(1684년), 김육이 쓴 <송도지>를 보면, 사태가 분명해진다. 거기에는 12월 하순에 북을 치면서 동리를 돌아다니며 쌀을 얻고 복을 빌어주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날의 걸립굿과 기능은 유사한데, 정월 대보름이 아니라 12월 하순에 행해졌고 꽹과리, 장구, 징 등에 대한 언급이 없이 북을 치면서 돌아다녔다는 차이는 있다. 사실 걸립의 역사는 이미 고려 시대에도 확인된다. 광대, 재인, 수척 따위의 예인들도 걸립을 놀았음이 분명하고,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도 걸립, 걸양 등이 확인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이 완성된 형태의 걸립 풍습은 풍물굿이 좀더 세련되고 화려해진 후대가 아닐까.
성현의 시대로부터 150여 년 뒤인 18세기의 마지막 해(1799년), 이옥의 <봉성문여>를 보면 사태가 보다 분명해진다. 12월 29일에는 매귀희를 하고, 정월 12일에는 화반을 하였다고 씌어 있다. 조선 전기에도 행해지던 섣달 그믐날의 악귀 쫓던 전통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초에 걸립이 출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름 또한 매귀희, 화반으로 나타난다. 꽹과리 3인, 징 2인, 소고 7인이 종이꽃을 꽂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는데 쌀을 문 밖에 내놓아서 화반이라고 하였다. 쌀과 돈을 얻으러 다니는 것은 걸공이라고 불렀다. 매귀희는 매귀굿, 종이꽃은 고깔, 화반은 꽃반, 걸공은 오늘날의 대보름 걸립이 아닌가. 이옥이 누구인가. 이옥 연구가 김균태 교수(한남대)는 그의 업적을 '탈모화적 민족문학', '조선적 문학', '고유문화 옹호'로 압축한다. 실제로 그는 시정잡배들의 생활, 사당이나 영등굿, 걸립굿 따위의 서민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표했으니, 나는 그를 '한국민속학사'의 머리를 장식했던 주체적 인물군에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18세기 후반의 연암그룹이나 다산그룹과는 그 문학세계가 판이했던 김려그룹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김려는 순조 1년(1801년)에 천주교를 신봉하여 진해로 유배되었던 인물로, 글재주가 뛰어났다. <가수재전> <삭낭자전> <장생전>등의 소설이 전해지고 있다. 김려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이옥 역시 소설에 능하였다.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연암처럼 '불순한' 소설 따위를 쓰면 불우한 처지가 되는 게 당시의 실정이었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이었던 33세 때, 그는 소설문체로 과거에 응시하여 논란을 일으킨다. <봉성문여>의 '추기남정시말'에 따르면, 그의 나이 36세 때 정조는 문체가 괴이하다고 하여 삼가현(지금의 구례)의 군적으로 편입시켜 쫓아보낸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40세 되던 해, 삼가현에서 재차 소환을 받아 그해 10월에 내려간다. 삼가현 서문 밖에서 남의 방을 빌어 기거하며 밥조차 사먹으면서 지낸다. 그때 보고들은 인정과 풍물을 기록하였으니 <봉성문여>가 그것이다. 18세기의 마지막 황혼이 저물어갈 때, 저녁밥 짓는 냄새를 맡으면서 기록을 남겼으리라. 그의 나이 41세 때, 2월 18일에 귀경하였으니 삼가현에 머물렀던 기간은 1799년 10월 18일부터 만 118일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이옥은 풍물굿에 대한 소상한 기록을 남긴다. 물론 이옥의 시대인 18세기 말기 이전에도 풍물굿은 있었을 것이다. 그 태동의 역사는 <송도지>의 매귀희 기록이 17세기 중엽인 것으로 보아 1600년대 중반기까지 소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다 완벽한 형태의 풍물굿이 완성되기까지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음 기록을 보면 이옥이 살던 당시에 걸립굿이 막 시작되었다는 정황이 그대로 드러난다. 매귀희가 유행하는 촌락에서는 쌀과 돈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름하여 걸공이라고 한다.
위 기사로 미루어볼 때, 아직 '유행하지 않은' 촌락도 많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간 막연히 매귀희로 표현하거나, 소박한 개념의 금쟁, 고 따위로 표현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봉성문여>에 이르면 아주 구체적으로 매귀희, 화반, 걸공 등이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풍물굿의 걸립, 꽃반, 걸립 따위가 18세기 말에는 완전히 정착단계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김육이 <송도지>를 쓴 1648년은 병자호란이 끝나고 사회가 새롭게 재편되던 조선 후기의 첫머리다. 이옥이 <봉성문여>를 남긴 기대는 18세기를 마감하고 19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임란 이후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는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민중의 성장이 이루어진 때이다. 따라서 평안도농민전쟁, 임술농민항쟁, 동학농민전쟁 등 변혁의 시대였던 19세기가 시작되는 바로 그 즈음에 민중은 자신의 분출되는 힘에 가장 알맞은 풍물굿이라는 표현양식을 찾고 발전시켰다.
1799년, 저물어가는 18세기의 저녁 무렵 한사 이옥이 서문 밖에서 밥을 사먹으면서 풍물굿이 시작되던 당대의 정황을 정확히 그렸던 때로부터 2세, 우리들은 20세기의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