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바위동물원에 울려퍼진 고래울음
그곳에 바위동물원이 있다?
동해로 흘러 나가는 태화강가 바위동물원에는 온갖 짐승들과 사람들이 어울려 살고 있었다. 사람들 숫자가 워낙 적어서 가히 동물들의 낙원으로 불릴 정도였다. 서 있는 남자는 '가운데 다리'를 비쭉 내밀어 '그것'만 두드러지게 보였다. 다른 남자들은 활을 든 사냥꾼이거나 고기잡이 배를 타고 있었다. 팔과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도 보였으며, 탈같이 생긴 얼굴도 보였다. 동물원의 주인공들은 하늘, 땅, 바다를 망라하였다. 정확한 숫자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당시 동물원을 지키던 사람들이 바위에 그림으로 기록한 숫자는 다음과 같다.
바다동물 : 고래 48마리, 물개(바다사자를 포함했을 것이다) 5마리, 바다거북 14마리, 물고기 14 마리, 기타 2마리. 뭍동물 : 사슴 41마리, 멧돼지 10마리, 호랑이(표범, 범, 스라소니, 삵을 포함한 것 같은) 14마리, 소(정말 소인지는 불분명하지만) 3마리, 족제비 2마리, 토끼 1마리, 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17마리. 하늘동물 : 새 1마리.
바위동물원을 언제 세웠는지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문자사회였기 때문에 말로 소통하거나 땅에 작대기로 그림 따위를 그려서 의사를 전달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점점 항구적인 기록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이 품은 생각을 오래도록 남겨둘 수 있을까. 그로부터 사람들은 바위에 무엇인가 그리기 시작하였다. 바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은 단단했고, 마땅한 쇠붙이가 없던 시절이라 바위면을 파내거나 선을 쪼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많은 동물들을 그리는 데만도 여러 세대가 흘렀다. 한 세대에 다 그리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세월은 자꾸 흘렀다. 사람들은 동물원 앞의 냇가에서 고기도 잡고 제사도 지내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대를 이어 살았다. 그러다가 이 바위동물원을 아끼던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가야 했다. 그들이 떠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대곡천을 떠날 때, 바위 위에 아무런 인사말도 써놓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들의 공격을 받고 황망히 떠났거나, 홍수가 밀려와서 높은 산으로 떠났거나, 이제 사냥은 그만두고 농사일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떠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들은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로부터 참으로 오랜 억겁의 세월이 흘렀다. 눈 오고 비 오고 꽃이 피길 수천 번. 바위동물원의 동물가족들은 참으로 외롭게 살아갔지만 수많은 역사의 굽이를 지켜보는 행운을 얻었다. 신라의 화랑들이 말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모습도 보았고, 어쩌면 김유신 장군이 동해로 출정하는 길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 긴 세월이었나. 20세기 접어들자 그만 지쳐버린 거대한 고래들부터 울기 시작했다. 아, 서기 1년부터만 따진다 하더라도 2천 년 청춘의 세월이 그만 그대로 지나가버렸구나! 이제는 안돼, 안되고 말고. 동물원에 갇혀 살기가 너무 힘들어, 어떻게든 나가야 돼...... 동물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렀고, 여러 차례 동물회의도 열었다. 그러나 바위동물원을 빠져나갈 방법은 막막하기만 했다. 동해로 나가는 강물이 차츰 줄어들고, 바위에 갇혀서 나갈 길은 잃은 고래들은 큰 몸짓으로 바다를 향해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슴들과 호랑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현대인들은 아무도 그 고래울음을 듣지 못했다. 어느 날 바위동물원은 탐욕스런 인간들의 댐건설로 물에 잠겨버렸다. 어쩌면 물에 잠긴 동안이 그런대로 행복했던 시절 같았다. 그러나 20세기는 더 이상 그들이 잠자코 침묵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물개와 바다거북, 멧돼지, 토끼, 족제비 그리고 선사 시대의 사냥꾼과 고래잡이꾼들이 모두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만 했다. 늘상 가뭄으로 물이 빠지면 자주 동물원의 사생활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사람들의 발길도 잦아졌다. 어느 날 사람들이 동물원에 들이닥쳐 동물들 얼굴과 몸에 먹물을 바르고 흰 종이를 발라서 '탁본'이라는 이름의 증명사진을 찍어 갔다. 고래, 물개, 거북, 사슴들의 모습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찍혀져서 사람 사는 세상에 공개되었다. 사람들은 아예 '국보 285호로 임명함' 따위의 엄숙한 선언문을 낭독하였고, 바위동물원의 가족들의 사생활은 여지없이 발가벗겨졌다. 나는 이쯤에서 바위동물원의 역사를 마치겠다. 그들의 현주소는 경상남도 울산시 언양면 대곡리, 일명 반구대라 부르는 깎아지른 암벽. 울산시를 가로지르는 태화강 지류, 대곡천을 거슬러 올라가면 돌병풍에 둘러싸인 절경이 나타난다. 그늘진 것이기는 하지만 전망이 뛰어나 인근에서 절승으로 소문났던 바위이다. 댐이 만들어져 수천 년 간직한 비밀은 영원히 그렇게 물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 바위동물원의 가족들은 낯선 현대인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다.
1971년도 다 저물어가는 크리스마스날, 일군의 울주지역 조사단은 동네사람들의 제보를 받고 태화강 가로 나간다. 이미 일년 전에 인근 천전리에서 기하학적 문양과 신라시대의 서각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년 있다가 반구대 바위동물원도 현대인들의 방문을 받게 된 것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기다렸던 보람의 있었던지 '선사 시대의 프라이버시'가 신문지상과 텔레비전에 통째로 공개되었다. 나는 늘 생각한다. 사람사회에서는 무조건 축하해야 할 만한 '발견'이 바위동물들에게도 행운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 모르겠다고 발견된 이래 이 바위동물원의 학술연구를 빙자한 탁본과 모형뜨기로 형체가 무참히 뭉개졌다. 그래서 나는 바위동물들의 편에서 본다면 불행이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차라리 발견되지 말고 그대로 좀더 있다가 훗날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었더라면 훨씬 좋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역사는 늘 그랬다. '발견'이란 이름으로 대량학살이 자행되었고, '발견'이란 이름으로 무참한 파괴가 이루어진 것이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반구대 바위그림]
반구대 바위그림의 귀신고래와 사슴뿔
학자들은 이 같은 선사 시대 바위들의 공식명칭을 암각화, 바위그림, 암벽화, 바위새긴그림 등으로 불렀다. 지명도 높은 명칭은 '암각화'와 '바위그림'이다. 나는 한문투의 암각화보다 바위그림이란 이름이 더 아름답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기에 늘 바위그림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이나 멕시코 등지에서는 안료로 직접 바위그림을 그렸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화가들이 야외에서 환경미술을 한다고 할까. 우리의 선조들은 안료를 써서 그리기보다는 선을 긋고 면을 쪼아서 암각했다. 안료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선사인들은 현대인과 똑같은 상상력과 표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표현방식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감수성은 놀라을 정도로 뛰어났다. 나는 돌을 쪼아 만든 이 바위그림들을 바라보면서 늘 경외심과 공포감을 함께 느낀다. 인간이 손도구를 사용하면서부터 생겨난 인간예지에 대한 경외감, 또한 손도구를 써서 '생산력 발전'이란 이름 아래 자연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에 대한 공포감이 그것이다. 러시아의 아동문학가이자 과학소설가인 미하일 일리인은 <인간은 어떻게 거인이 되었나>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돌과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이것은 그들을 전보다. 더욱 강하고 자유롭게 해주었다...... 우리들의 조상은 언제든지 먹을 것을 찾아서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숲에 서 저 숲으로 갈 수도, 온갖 숲의 법칙을 깨뜨리고 오랫동안 훤히 트인 평지에 머물러 있을 수도, 먹으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먹이를 다른 짐승에게서 빼앗아올 수도 있었다. 이리하여 모험에 넘치는 그런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부터 인간은 자연 속에 존재하는 법칙의 파괴자가 되었다. 그렇다. 바위그림은 무문자 사회에서 최초로 씌어진 역사기록이며, 더할나위없이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현장기록이다. 동시에 노동도구의 발달을 암시하는 사회경제사적인 유적이기도 하다. 인류와 자연의 대립이 시작되는 환경문화사적인 유적이기도 하다. 수많은 고래의 등장은 고래 울음소리가 들렸던 아름답기만한 울산 앞 바다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하며, 등시에 고래사냥의 찬미가 시작되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대곡리 바위그림의 동물들 중에서 고래와 사슴에게 특히 관심을 갖는다. 우리 선사문화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품고 있는 동물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 동해안에 자주 회유해오는 고래는 긴수염고래과(북극고래, 긴수염고래), 참고래과(브라이드고래, 밍크고래, 참고래, 보리고래, 돌고래, 흰긴수염고래), 향고래과(향유고래), 참돌고래과(흰옆돌고래, 돌고래, 참돌고래), 곱시기과(곱시기, 흑곱시기), 귀신고래과(귀신고래) 등이다. 반구대 바위그림의 고래를 연구해온 정동찬 국립과학관 연구실장은 바위그림에 그려진 커다란 고래를 귀신고래로 보았다. 우리 나라 연안에는 옛부터 귀신고래가 많아서 19세기 말 일본선단에 잡힌 고래의 태반이 귀신고래다. 세계 수십 종의 고래 가운데 우리 나라 학명이 붙은 고래는 귀신고래를 뜻하는 '한국 작은 고래' 뿐이다. 이 귀신고래는 일부 일처제로 금슬이 아주 좋아 암놈이 죽으면 숫놈이 암놈 곁을 떠나지 않아 결국 같이 잡힌다. 또 이동할 때도 가족 단위로 하는데 새끼가 먼저 작살을 맞으면 암수가 새끼 곁을 빙빙 돌다가 같이 잡힌단다. 그래서 나는 '천연 기념물 제126호'로 지정된 귀신고래를 보면 늘 안타까운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
우리 나라 동해 남부는 고래의 보고였다. 포경업이 국제적으로 금지되기까지 방생포는 고래잡이 전진기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 명성을 '악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선사 시대의 고래사냥을 마냥 나무랄 일은 아니다. 우리 나라의 포경업이란 것은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간혹 고래를 해변가로 몰아서 잡거나 떠내려온 놈을 생포하는 아주 소박한 수준에 불과했다. 동해를 '피바다'로 물들였던 광란의 역사는 무능한 조선 정부를 무시하고 몰려들었던 일본과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의 포경선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선사 시대에는 이곳 대곡천까지 고래가 왔을까. 반구대에서 바닷가까지는 직선거리로 20킬로미터. 지형이 변하기 전까지만 해도 불과 10킬로미터 근처까지 고래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태화강 가에 그려진 수많은 고래그림은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임에 분명하나 고래가 근처까지 왔다는 증거가 아닐까.
바위동물원에는 사슴도 여러 마리가 있다. 나는 사슴뿔을 볼 때마다 저 툰드라 벌판이나 몽고와 만주 벌판을 내달렸던 외로운 사냥꾼들을 생각한다. 사슴들은 때로는 외롭게 떨어져 있기도 하고,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달려 나가기도 한다. 사냥꾼이 따라붙기도 하고 그들 혼자서 조용히 풀을 뜯고 있기도 하다. 북아시아의 수많은 선사인들은 이들 사슴을 소재로 무수한 바위그림을 그려왔던 것이다. 우리 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남아 있는 바위그림이 적을 뿐, 사슴사냥의 역사는 우리 선조들의 출발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봄이 되면 사슴뿔이 의젓하게 솟아나온다. 사람들은 옛부터 그 뿔을 명약으로 쳐왔다. 사슴뿔을 자르면 붉은 피가 아니라 흰 피가 솟구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사슴의례라고 할 만한 제의적 공간이 바위그림에 엿보인다. 사슴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전령이었다. 그래서 알타이 문명의 다양한 장식품에도 사슴뿔이 등장한다. 신라 금관을 볼 때마다 이들 사슴뿔을 닮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신라를 개국한 사람들은 사슴을 주로 잡던 집단의 후계가 아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물 좋고 산 좋은 곳에서
선사인들은 왜 하필이면 반구대에 바위그림을 그렸을까. 학설이 구구하나 이곳은 지금 보아도 신성스런 분위기가 느껴진다. 화랑들이 놀았다는 전설도 전해지며, 실제로 인근 천전리에는 신라 시대의 옛 글씨도 새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울주는 감포 바닷가의 길목으로 물산이 집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뭍짐승과 바다짐승이 표현된 이유는 아직 명확하게 풀리지 않고 있다. 울산대학교 전호태 교수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대략 다음의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성역이자 제단(김원룡), 제의 교육의 터(정동찬), 동물수호신을 위한 굿터(김열규), 재생과 풍요를 위한 봄의 정기적 의례장소(임장혁) 등으로 보고 있다. 견해와 입장 사이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바위그림 유적이 신성한 존재가 강림하는 성역이자 이를 모시는 제사터(임세권)라면 그 주변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장명수)도 나오고 있다.
반구대 바위그림에서 바다와 뭍동물 그림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하여 동물에만 관심을 두면 당대 사회가 수렵사회였다는 그릇된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바위그림을 만들었음직한 청동기사회는 분명히 정착농경사회다. 그렇다면 그들 그림에서 정착농경사회의 흔적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의문점도 제기된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지모신의 풍요다산과 관련된 남성 성기의 심벌, 동물을 사육하는 울타리의 정착생활 흔적 등을 새삼 강조하기도 한다. 바위그림을 생각하면서 늘 품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바위그림들은 물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것일까. 대곡리 바위그림은 태화강 상류 냇물과 닿은 절벽에 있다. 천전리 것도 개곡천 상류인 사연댐 최상부에 자리잡고 있다. 고령 양전리 알터바위는 고령읍 남동쪽의 낙동강 지류 가천과 서남쪽의 안림천이 합치는 회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고령 안화리 바위그림은 양전리 회천의 지류인 안림천 상류 냇가에 자리잡고 있다. 함안 도항리 바위그림은 남강지류인 함안천 유역의 낮은 구릉지대에 있다. 포항 인비리의 것은 포항시 기계면의 기계천 가에 있다. 경주 석장동 금장대 바위그림은 천하의 절경에 있다. 밑으로 형산강 상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높은 산정의 깎아지른 곳에 자리잡아 인근 일대가 훤히 굽어 보이는 전망대다. 영천 보성리 바위그림은 금호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영주 가흥동 바위그림은 영주시 내성천 지류인 서천이 굽이도는 지점에 외따로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여수 오림동의 것은 여수반도 연등천 지류인 개울이 흐르는 것에 있다. 남원 봉황대 바위그림은 섬진강 지류인 삼천의 분지에 있으며 서남쪽에 작은 개울을 끼고 있다. 안동 수곡리는 지금은 수몰되어 사라진 임동면 수곡동 한들마을에 있다. 금산 어풍대 앞에도 금강 상류인 봉황천이 흐른다. 포항 칠포리는 또 어떤가. 칠포 바위그림을 최초로 발견한 포철고 문화연구회의 한형철, 이하우 선생 등이 엮은 <칠포마을 바위그림>이란 책자에는 칠포를 소개하는 글이 나온다.
비학산 줄기가 흥해의 넓은 벌판을 열고, 이를 감싸듯 흐르는 지맥이 곤륜산으로 높이 솟아 있다. 곤륜산과 마주보는 오봉산 사이를 소동천 작은 개울이 흘러 이윽고 바다에 닿는 아담한 하구에 칠포마을과 포구를 연다. 이들 물가에서 발견된 이유는 하나가 아닐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물 좋고 산 좋은 곳을 사랑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지금 보기에도 절경 중의 절경인 반구대 같은 신성스런 곳에 바위그림을 새겨두었던 선사 시대인의 마음가짐은 우리 현대인에게 자연에 대한 외경심같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을까.
[고령 양전동 바위그림]
우리 나라 바위그림 해독의 열쇠는?
풀리지 않는 의문은 천전리 바위그림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곧 드러난다. 천전리는 대곡리에서 불과 2킬로미터쯤 떨어진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다. 반구대 그림이 동물 위주라면 천전리의 것은 조금은 복잡하여 대략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사슴 같은 동물그림이 첫 번째요,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이 두 번째요, 역사시대로 접어들어 그려졌을 신라 시대의 글씨나 그림 등이 세 번째다. 문제는 두 번째의 기하학적 문양들이다.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는 천전리 바위그림의 목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기하무늬 : 마름모꼴(단독 마름모꼴, 종연속 마름모꼴, 횡연속 마름모꼴), 둥근무늬(홑둥근무늬, 연속홑둥근무늬, 포도송이꼴무늬, 겹둥근무늬, 연속겹둥근무늬, 타원형무늬), 굽은무늬, 가지무늬, 우렁무늬, 기타(화살무늬, 쌍십자무늬 등) 동물그림류 : 사슴, 호랑이, 새, 물고기, 기타 알 수 없는 환상동물 등 인물그림류 : 탈, 서 있는 인물, 기마행렬도, 기마인물도, 인물입상, 동물(말, 용, 새, 물고기), 배, 기타 등
[천전리 바위그림]
왜 반구대와 같은 물줄기에 위치한 천전리의 것에서는 기하무늬가 큰 비중을 차지할까. 이 기하무늬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 무늬야말로 우리 나라 바위그림의 수수께끼를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물이 아닐까. 기하무늬는 곳곳에서 속속 발견되었다. 가장 가까운 예로 고령 알터에 있는 동심원, 포항 칠포리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문양, 함안 도항리의 동심원 등이 그것이다. 기하무늬들은 신석기시대 무늬토기인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학자에 따라 견해가 사뭇 다르다. 청동기 시대 바위그림들이 후기에 오면서 기하학적 문양이나 단순한 풍요와 생산을 상징하는 성혈 등의 문양 등으로 그 형태와 대상물이 바뀌었다는 견해도 있다. 동심원만 하더라도 태양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주장에서부터 재생과 우주의 배꼽, 달이나 강물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선사고고학 개론서의 1장에서 반드시 빠지지 않는 유명한 몰타의 거석문화에도 동심원이 나타난다. 지중해의 몰타유적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더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적인 거석문화다. 특히 몰타섬의 타르시엔 유적은 복잡다단한 신전의 집합체로 이루어졌으며 기단벽면에 돌기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 문화와 친연성이 주목되는 시베리아 바위그림에도 잡다한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유럽과 시베리아의 선사문명에 모두 동심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문명의 원초성을 상징하는 것이 틀림 없을 것 같다.
마름모꼴은 여성을 상징하는 것 혹은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물결무늬는 물과 관련된 풍요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이 의문점을 풀려고 노력해왔으나 정확한 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반구대 이후에 추가로 발견된 바위그림의 대부분이 반구대의 것과 내용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새 유적들에서는 공통적으로 동심원, 패형 바위그림이 나타난다. 패형이라 부르는 것도 일부의 견해일 뿐, 바위그림 전문가 임세권 교수(안동대 사학과)는 사람 얼굴로 보고 있다. 방패형과 청동의기를 연결시키는 견해로부터 인면상징으로 보는 견해까지 다양하다.
그 동안 관심을 끌었던 대곡천 분포된 동물형 바위그림이 사실은 특수한 것이고, 이후에 발견된 바위그림을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 기하문양이 전국에 걸쳐 보편적인 것으로 보아 우리 나라 선사 시대 바위그림의 전형은 기하문양으로 상징화된다.
그렇다면 왜 반구대 바위그림에만 유별나게 많은 동물그림이 그려졌을까. 혹시 반구대 바위그림을 제작한 선사인들은 한반도로 진출한 어떤 별난 종족들이라도 되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우리 나라의 다른 곳에서는 반구대 형식의 그림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는 비슷한 동물그림 형식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그들 종족과 어떤 연관성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 자리에서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다. 이들 기하무늬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날, 우리 나라 바위그림의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전리 바위그림 앞에서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마다, "우리 나라 바위그림 암호 해독의 키는 기하무늬다"라고 단언하곤 한다.
마지막 의문은 이들 바위그림이 왜 하필이면 경상도 지방에 집중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반구대나 천전리에서 바위그림이 발견된 이래로 더 많은 암각화가 발견됨으로써 상호 비교방식을 통한 문제의 실마리는 엿보인다. 남원 봉황대, 여수 오림동, 남해 평리, 고령 양전동, 안화리, 함안 도항리, 포항 칠포리와 인비리, 안동 수곡리, 영천 보성리, 영주 가흥동, 경주 금장대, 경주 상신리, 금산 어풍대등 남부지방에만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고, 지금도 속속 발견되고 있다. 대부분의 바위그림이 경북 내륙에 분포하는 것도 하나의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다. 그렇다고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바위그림을 연구조사한 역사가 워낙 일천하며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조사 결과만 놓고 본다면 영남지방이 중부기호지방이나 호남지방보다 바위그림이 밀집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그럴까?
민족이동 시절에 경상도 방면으로 진출한 일군의 세력이 바위그림 문화를 지닌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이 역시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여수, 남원 같은 전라도 지역에서도 부분적이나마 발견되고 있는 탓이다. 만약 김제, 무안, 목포 같은 지역에서도 새롭게 발견된다면 이 가설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보편적인 기하문양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지만 반구대 같은 동물그림이 집중적으로 발견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러한 탓에 아직은 '경상도 집중'이란 가설도 유효하다. 이 가설을 완전히 깰 만한 또 다른 바위그림이 우리 나라 어느 곳에선가 나타날 것이란 기대, 특히 북한지역의 어딘가에도 있으리란 기대를 하면서......
시베리아와 몽고, 만주와 중국으로 떠나는 사람들
1995년 겨울, 포항공대 정보통신연구소 중강당에는 방학중인데도 바위그림에 관심을 표명해온 일군의 학자들이 모두 모였다. 한국역사 민속학회와 포항제철고문화연구회에서 주최하고 포항공대에서 후원한 '한국 암각화의 세계' 심포지움이 그것이다. 필자가 2부 사회를 맡았다. 그때 포항 칠포리와 인비리, 경주 금장대까지 함께 공동답사를 하면서 각양각색의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새롭다. 참석자들은 바위그림에 관한 연구는 어느 일개 학문분야의 몫이 아니고 고고학, 역사학, 민속학, 인류학, 종교학, 신화학, 고생태학, 지질학, 천문학, 고생물학 등 인문사회과학, 자연과학 각 분야의 학제간 연구를 통하여 진척해야 할 분야라는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풀리지 않는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현재 바위그림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찾아 많은 학자들이 몽고와 만주, 시베리아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석호 같은 미술사가는 아예 몽고 벌판을 누비면서 러시아에서 바위그림을 탐구하고 있기도 하다. 동아시아적 보편성과 한국적 특수성의 가려진 비밀들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을 기대하면서, 동북아시아 전반의 연관성을 비교문화사적으로 추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저래 바위그림은 선사 시대인들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지니고서 지금도 속속 새롭게 발견되길 기다리는 중이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 선사인들이 남긴 바위그림들이야말로 가장 생생한 삶의 흔적이 아닐까. 바위그림의 문화사적 의미를 되새김질하면서 옹이 들려주는 다음의 절을 다시 한 번 음미해보려 한다. 신부이자 신학자이면서도 미국현대언어문학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인문학에 조예가 깊은 그는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1982, 한국어판 이기우, 임명건 번역)라는 그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차적인 구술문화-즉 전혀 쓰기를 알지 못하는 문화-와 쓰기에 깊이 영향을 받고 있는 문화 사이에는 지식을 다루는 방법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방법에 어떤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새로운 발견에는 놀라운 만한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즉 문학, 과학 등의 사고와 표현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던 많은 특징들, 그리고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 사이의 구술 담론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왔던 많은 특징들조차, 결코 인간에게 있어서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쓰기라는 기술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유용하도록 작용되는 여러 자질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수정해야 한다.
어쩌면 바위그림에 관하여 내가 쭉 늘어놓은 여러 해석상의 문제들도 결국 문자문화에 익숙한 사람의 한갖 '길들여진 자질' 때문에 생겨난 판단은 아닐까.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한 그림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듯이 문자 없이 단순한 그림으로만 표현하였던 바위그림문화 시대인들에게 문명의 원초성 따위를 배워야 만할 것 같다. 우리들이 잃어버린 원초성, 선사인들은 바로 그것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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