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2 - 주강현
도깨비, 벽사상징의 원형질 - 천년유혼, 연년이 이어져온 원형질
민속미술 강의시간에 대학원생들에게 '우리 문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문양'을 한 개 꼽아 보라고 했더니 도깨비문양이 수위였다. 얼마 전, 모 어린이 신문에서 가장 많이 읽을 뿐더러 재미있는 옛이야기 베스트 10을 선정했을 때도 도깨비 이야기가 가장 많이 꼽혔다. 도대체 도깨비가 무엇이길래 천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으면서까지 인기를 누리고 있을까. 도깨비, 약간은 익살스러우면서도 뿔과 이빨을 드러낸 괴물. 이 도깨비는 물론 환상이고 상징이다. 선조들은 그러한 환상을 가지고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기왓장에조차 그려넣는 삶의 지혜를 즐겨왔다. 허구는 창작력을 북돋고, 창작력은 수많은 가변성을 낳기 때문인지 도깨비 가족들은 가지에 가지를 쳐서 늘어났다. 그럼 도깨비는 언제 어떻게 생겨난 존재일까. 도깨비의 정체를 탐구하려는 노력은 다각도로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명쾌한 답변에는 이르지 못하고 아직은 이러저러한 가설만 있을 뿐이다.
도깨비는 언제부터 있어 왔는가. 그 이름도 도채비, 돗가비, 독갑이, 도각귀, 귀것, 망량, 영감, 물참봉, 김서방, 허체, 허주 등 다양하다. 지역에 따른 방언도 많아 돛재비, 또개비, 토째비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름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 만큼 널리 알려졌다는 증거이고, 그만큼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깨비 박사인 김종대 박사(국립민속박물관 학예관)는 15세기부터 나타나는 '돗가비'라는 용어에 주목하면서 도깨비 문화가 조선 전기의 소산이라고 본다. <월인석보>에 '망량은 돗가비'라 하였고, <역어유해>는 '독갑이', <계축일기>에서도 '독갑이'라 하였다. '그것'이라고 표기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그렇다 해도 고대의 도상을 보면 이미 더 앞선 시기에 수많은 도깨비가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도깨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랜 옛날로 소급되지 않을까. 아직 논란이 많은 대목이기는 하다. 도깨비의 범주를 정하는 일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벽사적인 상징물을 모두 도깨비라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깨비를 극히 좁은 범위로만 규정짓기도 어려운 탓이다. 나는 도깨비의 역사를 "고대사회에서 출현하여 조선 시대에 다시금 꽃을 피웠다"고 정리하고 싶다.
자연을 극복하는 끝없는 싸움 속에서 사람들은 비, 바람, 구름, 번개, 천둥 따위를 관장하는 신을 창조하였고, 자연재해로부터 액운을 막아주는 수호신을 필요로 하였다. 환웅이 태백산으로 내려올 때도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와서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였다. 이들 각각의 직능신들은 훗날 민간신앙으로 귀착된다. 바람의 신인 영등신, 뇌성을 일으키는 벼락대신 따위가 그들이다. 도깨비 출생의 역사도 이 같은 직능신에서 출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 벽화에 도깨비에 가까운 문양이 선보인 점으로 미루어 고대 사회는 우리식 도깨비의 기초를 닦은 시기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과학보다는 초자연적인 미신에 의존하던 시절에 형성된 이 같은 관념들은 조선 시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성호 이익 같은 이는 자연의 영기가 모여서 도깨비를 만들었다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고대사회에 1차 완성을 보았던 도깨비는 조선 시대에 이르러 복잡하고 다양한 형식으로 변화, 발전한다. 허구와 상상을 넘나드는 다양한 이야기들로, 도깨비 동네를 채워 나간 것이다. 반면에 고대사회에서 형성된 도상들은 차츰 단순해지는 양상도 나타났다.
조선 시대의 풍부해진 도깨비 문화 속에서 민중은 분명히 도깨비를 나름의 어떤 상징으로 규정지었을 터이다. 그들의 관념 속에 형성된 그 무엇, 그것은 도깨비의 역사, 문화적 원형질일 것이다. 그 원형질을 찾는 일이야말로 도깨비의 정체를 밝히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원형질로 인정될 만한 분명한 것이 있다. 도깨비가 악귀를 쫓는 귀면 혹은 벽사수면상이라는 점이다. 나는 벽사상징으로서의 변하지 않는 원형질을 도깨비의 알파요, 오메가라 생각한다. 그 형태가 어떻든간에 중요한 것은 벽사상징이라는 원형질이 아닐까.
동아족의 고유한 도상
도깨비의 원형질 탐구라는 정말 '도깨비 같은' 과제와 씨름하면서 나는 문득 대학시절에 읽은 허버트 리드의 역저 <도상과 사상>을 떠올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지는 그것이 내가 일컫는 바 도상이라는 조형예술로 나타날 때, 인간의식의 발전에 있어, 그리고 그 의식에 따른 적절성과 기교성의 발전에 있어 사상보다 선행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 선생의 손을 통해 한국어판으로 나온 그 책은 구석기 시대 인류문화의 태동기부터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4백세기에 걸친 방대한 미술의 역사에서 도상이 의식을 선행함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내가 왜 도깨비 원형질 탐구에서 리드의 주장을 떠올렸을까. 도깨비의 신비를 밝혀주는 고대 문헌은 거의 없다. 반면에 우리들은 풍부한 도상으로 도깨비를 접할 수 있다. 도상의 규명은 도깨비 원형질 탐구의 첩경이 되어줄 것이다.
경주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 뒤편, 동해 쪽에 자리잡은 장항사터를 찾아간 적이 있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폐사지에 동, 서탑이 전한다. 손연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의 안내로 탑들을 친견하다가 우연히 자물쇠로 상징화된 도깨비 한 쌍을 발견하였다. 조선 후기 자물쇠에도 영낙없이 비슷한 것들이 다수 전해지니, 천여 년을 사이에 두고 도깨비의 벽사수호신으로서의 원형질이 변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도깨비 도상의 원형을 중국 사례에서 찾는 이들도 있다. 치우의 형상이 그것이다. 중국신화학의 대가 원가는 <중국고대신화>에서 치우가 인간에게는 악신으로 낙인 찍혀 있지만 사실은 용감무쌍한 거인족의 이름에 불과했다고 하였다. 그는 치우가 구리 머리에다 쇠 이마, 짐승 몸집이지만 사람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보았다. 사람의 몸집에 소의 발굽을 하고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으며, 어떤 전설에는 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나 있고 귀밑의 수염이 마치 창처럼 뻗어 있다고 했다. 이 밖에 여덟 개의 손과 다리를 갖고 있다는 전설도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치우는 신과 인간의 중간쯤에 속하는 존재였다. 치우는 분명히 고대 중국인들이 꿈꾸었던 벽사신으로 보인다. 혹자는 치우를 상, 주 시대에 유행했던 도철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여씨춘추>에서는 도철에 관하여 "주나라 솥에 도철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만 있고 몸이 없다."고 하였다. 북송 이래 중국의 금석학자들은 모두 이 설명에 근거하여 상주 시대 청동기에 흔히 보이는 괴상한 동물의 얼굴을 도철이라 불렀다.
나는 우리 도깨비 도상의 기원을 치우나 도철에서 찾는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중국 청동기 문양에 도깨비와 유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대 문화가 지니는 문화사적 유사성으로 보아야지 직접적 영향관계로 유추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비슷한 것만 나오면 중국의 영향 운운하는 주장은 또 다른 모화주의에 다름아니다. 하버드 대학 인류학과 장광식 교수가 <신화, 미술, 제사>에서 쓴 바에 따르면, 동물문양은 은상과 서주 초기의 청동장식예술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도철 문양은 그 중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하대는 기원전 2205-기원전 1766, 상대는 기원전 1766-기원전 1122, 주대는 기원전 1122-기원전 256으로 어림잡는다. 그렇다면 이 같은 하상주 시대의 문화가 그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 고대문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가설이 가능할까. 우선 우리의 삼국 시대와 중국의 하상주 시대는 시기부터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의 선조들은 벽사상징물로 도깨비를 창조했고, 그 도상이 성립되고 난 다음에야 도상에 따른 자세한 설명이 뒤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벽사를 위한 무서운 인물상을 만들다 보니, 그들 인물이 반인반수의 특질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중국 고대 신화, 지리서인 <산해경>을 보면 복잡한 괴수들이 보이거니와, 동물문양 같은 인물군은 고대문화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따라서 동북 아시아 고대 문명의 하나인 동이족의 문화에서 도깨비의 독자적 출현은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내가 서두에 허버트 리드를 들먹인 까닭도 거기에 있다. 그 예증을 더 찾아 볼 필요가 있다면 윤회의 바퀴를 나타낸 티벳의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8-19세기에 그린 생명의 바퀴라는 그림으로,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가 <시간-리듬과 휴지>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다. 그림 중앙의 돼지, 닭, 뱀의 세 마리 동물들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삼독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이 바퀴를 계속 돌게 한다. 오른쪽의 인물들은 지옥으로 하강하고 있으며, 악귀들에게 고문을 당한다. 왼쪽의 사람들은 승천하고 있는데, 꼭대기에는 승리의 깃발을 든 수행자가 있다. 그는 바퀴로부터 빠져나가 업보에 눌린 존재들의 세계를 영원히 떠나려고 하는 참이다. 바퀴 주위의 이 여섯 사람은 구원의 사명을 띤 관음 보살이 방문했던 중생의 여섯 가지 운명을 상징한다. 바퀴를 감싸안은 괴물은 모든 존재를 삼키는 아니티야타(무상)이다.
아니티야타를 유심히 보면, 우리의 도깨비와 다를 바가 없음을 금세 알게 된다. 특히나 사찰에 있는 도깨비 도상과 일치한다. 그렇다면 도깨비는 인도에서 왔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불교 전래 훨씬 이전에 이미 고구려 벽화에 도깨비가 등장한 사실을 보면 무관한 게 분명하다. 이제 하나의 작은 결론이 나온다. 우리의 도깨비는 우리 민족 고유의 독자적인 노선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우리 도깨비는 동이족 고유의 벽사상징으로서의 원형질을 그 문화적 근거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깨비의 전형적인 도상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일까. 도깨비의 영역을 넓게 잡아 그들 친인척까지 끌어들여 다양한 석수들도 포함시킨다면 벽사신으로서 도깨비의 성격이 보다 분명해진다.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도깨비 범위를 너무 넓게 잡다 보면 귀면 모두를 도깨비로 몰아가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도깨비의 도상 범위는 어디서 어디까지라고 그 누가 정확하게 그을 수 있겠으며, 그렇게 단정적으로 경계선을 그을 수 있는 근거가 있겠는가. 도깨비는 어차피 관념문화의 소산이므로 영역을 정하는 것도 관념적이고 극히 상징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괄적인 범위로 설정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도깨비로서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대개 기왓장이다. 집을 세우고 지붕을 덮을 때 끝에 있는 망와에 도깨비문양을 그려넣는다. 망와란 망을 보는 기와라는 뜻이다. 무서운 도깨비가 망와에 그려져 있으면 집안에 들어오려던 악귀가 물러간다는 믿음에서 도깨비가 등장하였다. 와당의 도깨비 모양은 워낙 많기 때문에 사가들은 도깨비와당, 이른바 귀면와에서 어떤 도상적 기준치를 찾는다. 물론 연구자에 따라서 귀면와는 도깨비가 아니란 주장도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해동잡록> 에는 귀면와가 곧바로 도깨비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이 전해진다.
창손이란 사람은 정승 벼슬을 20년이나 한 사람으로 지금은 90세가 되었다. 어느 날 자기 집에 갑자기 요귀가 출몰했다. 어디선지 모르나 대낮에 돌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지는 권세가인 창손의 집인데 감히 누가 이런 짓을 하겠는가 하고 그는 재빨리 지붕에 올라가 귀와를 불에 태웠다. 그러자 요귀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도깨비가 기와가 만나는 전통은 상당히 오래 전으로 소급된다. 고구려 붉은 와당의 약간은 우스꽝스런 도깨비, 백제 와당의 복잡하면서도 단순 소박한 도깨비, 통일 신라의 대단히 정교하면서 뚜렷한 형태의 도깨비 등 도깨비 기와의 전통은 삼국 시대까지 소급된다. 와당을 보면 도깨비의 기원이 악귀 쫓는 벽사의례의 관념적 소산이라는 것도 분명해진다. 절이나 궁궐의 석수, 문살문양에도 도깨비가 등장한다. 청도 운문사, 부안 내소사, 경주 불국사 등의 대웅전 문이나 단청 가운데도 도깨비문양이 그려져 있다. 절은 수호한다는 상징이다. 여천 흥국사, 범어사, 창덕궁 금천교 등에도 도깨비 형상의 석수가 자리잡아 절이나 궁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나타난다. 범어사의 석수는 껄껄 웃는 도깨비 얼굴에 네발 동물이 두 발만을 살짝 드러낸 형상이다. 대흥사 도깨비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점잖은 장수상으로서, 도깨비라기보다는 도깨비들을 부리는 장수의 모습이다. 통도사 감로탱화 가운데는 박쥐처럼 생긴 뇌공이 북채를 들고서 8방의 북을 두드리면서 휘돌아다니는 그림이 등장한다. 벽사수호의 문배그림처럼 문짝에 그려넣은 사찰 도깨비들도 상당수 있다.
이 외에도 도깨비 도상은 대단히 많다. 그러나 역시 가장 오래 되기는 고구려 벽화에 등장하는 도깨비 도상일 것이다.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으로 의인화된 도깨비가 부릅뜬 눈으로 악귀를 쫓는 형상이다. 이들 도깨비는 한결같이 무서운 표정이다. 그렇지만 잘 뜯어보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무서우면서도 우스꽝스런 표정은 바로 장승의 표정과도 일치된다. 외경심과 해학성이 고루 섞여 있다고나 할까. 바로 도깨비 자체의 양면성이 도상에 반영된 결과다. 실상 도깨비 도상에 관해서는 이론이 구구하다. 악귀를 쫓는 여타 다른 귀면들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도 생긴다. 몽당빗자루 도깨비, 차일 도깨비, 등불 도깨비, 강아지 도깨비 등 여러 가지 도깨비도 전설로는 전해지나 실체는 불분명하다.
도깨비의 전신을 설명한다면 다리가 하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도깨비와 씨름을 하다가 한쪽 다리가 없는 도깨비인지라 무사히 이겨내고 살아 왔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도깨비의 모습이 이렇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 모습이 다양할 뿐더러 혼재되어 있고, 도깨비 자체가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상징물인 탓이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그 존재를 믿어온 것을 보면 도깨비가 악귀를 쫓는 민중적 믿음의 대상으로, 민중의 삶 속에 전해져 왔음이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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