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동성동본, 혼인과 불혼의 수수께끼
동성불혼은 역사가 오래?
'민법 제 809조.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을 하지 못한다.' 이 조항은 지금도 수많은 동성동본 혼인 희망자들을 울리고 있다. 참으로 논란 많은 법조항이다. 수많은 동성동본 연인들이 어쩌다 '잘못 만나서' 속앓이를 하게 만드는 법. 하지만 '법은 멀고 사랑은 가깝다' 법적. 사회적으로 고통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왜 '위험한 관계' 에 자신의 일생을 걸고 있는가.
모든 사회적 고통에는 원인이 있게 마련. 도대체 동성동본 불혼이라는 역사적 뿌리는 타당한 것인지 우리의 혼례사를 다시 점검해볼 시점이다. 동성불혼의 역사는 매우 오래 되었다. 중국에서는 주나라 때부터 동성불혼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동성불혼은 동종족, 즉 한 시조에서 유래한 혈족간에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예에, '동성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 고 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거론하고 있는 동성은 씨족 단위를 말할 뿐,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동성동본은 아니다. 오늘날의 동성불혼은 본관이 같은 동성동본간의 불혼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족외혼과 족내혼을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족외혼은 일정한 단위 집단 바깥에서 배우자를 구하여 집단간의 연계관계를 증진하고 상호 안전을 도모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반대로 족내혼은 단일사회의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에서 성립되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족외혼, 신라는 족내혼이 유행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라의 족내혼은 동성근친혼이 많았다. 신라에서는 사촌, 형제자매는 물론이고 이종, 고종들과의 혼례도 다반사였다. 가장 먼 촌수가 육촌간의 혼인이며, 가장 가까운 촌수는 삼촌간의 혼인이었다. 그래서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미추왕의 딸과 결혼한 내물 이사금에 대해 이러한 평을 남겼다.
장가를 드는 데 같은 성을 취하지 않는 것은 윤리를 철저히 밝히려는 것이다......
신라와 같은 경우는 같은 성과 혼인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소생과 고종, 이종 사촌누이들까지 데려다가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저마다 다르다 하더라도 중국 예절을 표준으로 이를 따진다면 아주 틀린 일이다. 흉노가 어미와 붙고 자식과 관계하는 것은 또 이보다도 심한 일이다. 동성혼인에 대해 유교측이 행한 최초의 본격적인 공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작 그가 살던 고려시대에도 근친혼은 일반적이었다. 예컨데 고려 4대조 광종과 그의 아내인 태목왕후는 태조의 배다른 형제로서 같은 왕씨 집안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훗날 조선 초기에 <고려사>를 집필한 유교사가들은 비판을 가했다(열전 권1).
태조가 옛 법을 본받고 풍속을 개화하려고 뜻을 두었으나 고유한 풍습에 젖어서 배다른 아들과 딸을 혼인하게 하고, 이를 꺼려서 딸로 하여금 이성을 칭하게 하였다. 그 자손들이 이것을 본받아 가법으로 삼아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애석한 일이다.
신라나 고려에서 왜 이같은 근친혼이 이루어졌을까. 신라의 경우, 골품제로 유지되던 신라 지배층의 특권 유지를 위한 방편이었다. 막말로 '끼리끼리 해먹는다' 고나 할까. 고려의 근친혼에 대해서는 이종휘의 <수산집>에 잘 나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왕씨는 원래 용의 종족으로 모두 그 겨드랑 밑에 하나의 비늘이 있었다. 태조는 이 종족을 타 씨족에게 전파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동종족간의 혈족 혼인을 장려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동성결혼은 비단 왕족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행해진 풍습이었으니, 가부장적 종법제도가 확립되기 시작한 15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야 동성혼인이 강력한 제재를 받게 되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태조 시기에도 풍습을 개변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멀리 신라시대의 사촌. 오촌지간의 친척과 혼인하던 것에서 유래되는 바, 이것이 수치스러운 줄 몰랐다' 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근친혼, 넓은 의미에서의 동성혼인이 이루어졌을 정도이다.
동성동본 금혼의 내막
과연 동성동본이란 무엇일까. 성이 같고, 본(본관, 관향)이 같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성이 같으면 조상이 같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중간에 성을 내리는 사성이나 개성 따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사실에 비추어 같은 성씨를 가졌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는 증거는 없다. 국가에 의하여 성을 받은 결과, 성시는 다르지만 같은 혈족인 이성동본도 널리 존재했다. 그렇다면 왜 이같은 동성동본 불혼 풍습이 생겨났을까. 유교적 인륜법에 의한 것말고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동성끼리 결혼함으로써 생길 수 있는 불길함이 아니었을까. 동성동본끼리 결혼하여 출산이 어렵게 된다거나 기형아를 출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따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러한 불길한 예감이 동성동본 불혼을 주장하는 데 강력한 힘을 마련해주었을 터이다. 연변대학의 민속학자 박경휘 교수는 <조선민족 혼인사 연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친금혼은 고려 중기로부터 대두되었다. 그때로부터 고려사람들은 점차 근친혼의 결과가 인류생존의 경험으로 보아 자손의 번창에 유해하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근친혼 유해의 경험은 장구한 역사시기를 통하여 인간 의식을 형성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의식이 바로 근친혼이 나쁘다는 것을 인식한 그것이다. 실로 조선민족은 이 문제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장기간의 역사적 시기를 경유하였다. 중국의 종법가례의 영향에 의해서 동성동본 불혼이 강화된 것으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물론 중국의 주요한 원인이었겠지만 내재적인 원인도 중요했다는 견해다. 중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동성불혼의 영역이 지나치게 넓다는 데 있지 않을까. 조선시대에 이르면 동종혈족뿐 아니라 외척, 인척을 포함한 친척 불혼으로 넓게 확대되었다. 중국에서 수입된 동성불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외척, 인척까지 포괄하는 넓은 영역으로 점차 확대된 셈이다. 오히려 중국 본토에서는 동종혈족간의 혼인만을 금지하였을 뿐 외사촌, 고모사촌, 이모사촌을 포함한 이성 근친혼이 근대에까지도 존재했던 것과 대비된다.
모건과 엥겔스를 생각하며
잠시 눈길을 세계혼례사로 돌려보자. 아무래도 모건과 엥겔스의 저작물들을 중심으로 세계혼례사 일반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성을 느낀다. 진화론자 모건은 그 유명한 저서 <고대사회>(1877년)에서 군혼에서 일부일처제에 이르는 혼인의 변천사를 서술하였다. 모건은 진화론적 예증을 통해 인류의 초기에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에게, 또 모든 남자는 모든 여자에게 평등하게 속했었다는 난교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난교설에 대한 반발이 거셌으니, 반발의 원인은 '인류로 하여금 이러한 치욕을 면하도록 하자는 것' 이라고 엥겔스는 말하였다. 과연 난교는 난잡한 성관계였던가. 엥겔스는 난교에 대해 결코 뒤범벅된 난잡한 성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능한 한 난교라는 말을 피하고 '완전히 무제한적인 성교' 라든가 '규율없는 성교' 라는 표현을 썼다. 모건은 가족의 첫째 단계를 혈연가족으로 보았다. 부모와 자녀 간의 성교가 금지된 혼인집단으로서 진일보한 세대별 가족이었다. 제2의 진전은 형제와 자매간의 성교 금지였다. 한 어머니의 자녀들간의 성교가 허용될 수 없다는 관념이 생기자, 그것은 낡은 세대공동체의 분해와 새 세대공동체의 수립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푸랄루아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다음에는 '대우혼' 이 나타났다. 남자들은 많은 아내들 중에서도 본아내(애처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를 가지고 있었고, 또한 여자도 여러 남편들 중 본남편을 가졌다. 대우혼 관계는 씨족이 발전할수록 더욱 공고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인류의 혼인사는 일부일처제로 귀결되는데 이는 미개의 중간 단계와 높은 단계의 경계에서 '대우혼 가족' 으로부터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일부일처제 가족은 남편의 지배에 따르는 것으로서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자는 명확하게 가부장적 목적을 가진 것이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혼인에는 데체로 인류 발전의 3개의 주요단게에 상응하는 3개의 주요 형태가 있었다. 야만시대에는 군혼, 미개시대에는 대우혼, 문명시대에는 간음과 매음으로 보충되는 일부 일처제가 있었다. 미개의 높은 단계에서는 대우혼과 일부일처제 사이에 여자노예에 대한 남자의 지배와 일부다처제가 있었다.
동성동본 불혼을 논하는 이 자리에서 모건과 엥겔스의 견해를 길게 반복한 이유는 혼례사란 시대적 조건의 변천에 따라 늘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함이다. 동성동본 불혼의 역사도 우리나라 전체 혼례사의 맥락에서 점검해보면 그 위상이 명확할 것이 아닌가. 동성동본 불혼이 유난히 강조될 수밖에 없던 조선 후기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참으로 복잡다단한 양상을 보여주었던 우리의 혼례사로 거슬러올라가 보자.
우리의 혼인풍습도 인류혼인사에서 예외가 아니다
동성동본 혼인이 '벼락' 을 맞는 그 시절,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혼인 형태가 존속하고 있었다. 일처다부제, 형수혼, 처자매혼 따위가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일부일처제 방식만이 존재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혼례사도 세계사적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여자가 다수의 남자를 거느리는 풍습인 일처다부제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잔재가 남아 있었다. 빈객이 오면, 여자를 방에 들여보내 접대하는 풍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풍습은 곧 사라졌다. 문제는 형수혼이었다. 20세기가 저물어가는 지금까지도 형수혼은 남아 있는 풍습이다. 멀리 진도 같은 남도땅의 바닷가에서는 으레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책임졌다. 이 관행은 하나의 미풍이었다. 생활력을 상실한 형수와 그 아이들, 즉 조카들의 양육을 동생이 책임지는 행위는 어찌보면 대단히 사회도덕적인 풍습이라 할 수 잇다. 형수혼은 동북아시아 제 종족들 사이에서도 널리 존재한 풍습이다. 형수혼의 본래 의미는 형제일처혼에서 유래한다. 인류학자들은 일처다부제와 형제일처혼을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형제일처혼을 일부일처제의 변형으로 간주, 일부일체저에 바탕을 둔 결혼에 불과하다고도 본다. 말리노프스키는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처다부제와 일부다처제는 합성적인 결혼이다. 즉 그것을 만들어낸 배우자 몇 명이 하나의 커다란 체계에 연결되어 있지만, 각각은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의 전형을 근거로 구성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 풍습도 조선사회에서 매를 맞아야 했을까. 이는 가부장적 장자상속이라는 유교 통치질서의 확립과 결부된다. 장자권리의 절대화 과정에서 형수혼이란 상속 질서를 무너뜨린 소지가 큰 것이니 용납될 리 만무였다. 반면에 처자매혼은 홀아비가 된 남자가 죽은 아내의 자매와 결혼하는 관행이다. 한 마디로 처제와의 결혼이다. 이 역시 세계혼레사적으로는 자매일부제에 해당한다. 가령, 칭기즈 칸은 두 자매를 아내로 맞이했다. 남자들이 여자를 여럿 거느리는 일부다처제는 문명국가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상대 여자들이 동일 혈통인가, 전혀 다른 남남인가 하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처자매혼은 '자매형 일부다처제' 에 해당된다. 모건은 이 혼례방식에서 '아득한 엣 조상들의 푸날루아혼 관습의 자취를 발견한다' 고 언급하였다. 인류학자 브론스키는 이를 '역연혼' 과 '순연혼' 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역연혼' 은 과부가 죽은 남편의 동생과 재혼해서 결혼하는 것을 말하고, '순연혼' 은 홀아비가 죽은 아내의 동생과 재혼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원래 각각 형제일처혼 또는 자매일부혼과 결합해서 발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 '역연혼' 과 '순연혼' 에도 형제일처혼과 자매일부혼에 작용했던 '연장순의 원칙' 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앉은가마혼, 누이바꿈, 삼혼이란 풍습이 있었다. 앉은가마혼(일명 대들이풍습)이란 과부가 된 여자가 개가할 때 남자집으로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남자가 여자집으로 오는 결혼이다. 과부집으로 들어온 남자는 이전 남편의 부모, 즉 여자의 시부모를 아버지, 어머니로 칭한다. 시부모들도 과부가 된 며느리가 맞아들인 남자를 자식처럼 대우하는 풍습이다. 일부일처제 풍습과는 모순되는 형식이면서도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을뿐더러 가족의 틀이 그대로 지속될 수 있다. 또 오랜 과거의 유습과도 이어진다. 고구려의 서류부가혼 풍습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를 드는' 모계사회적 흔적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면, 앉은가마혼 역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가는 모계사회적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누이바꿈은 가난한 집에서 혼례를 치를 만한 돈이 없으므로, 신랑. 신부집에서 서로 딸을 교환하여 혼례를 치르는 방식이다. 경제적 여유가 없던 집안끼리 널리 행해졌다. 삼혼은 누이바꿈이 고도로 발전한 형태인데, 갑이 을에게, 을은 병에게, 병은 갑에게 상호간에 딸을 바꾸는 다소 복잡하고 연쇄적인 혼례 관행이다.
이렇게 우리의 혼례사도 깊숙이 따지고 들어가면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이들 혼례풍습이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각각의 혼례방식은 모두 사회. 역사적인 산물로 세계 곳곳에서도 보여지는 것들이다. 동성동본 혼인과 동성동본 불혼의 변천에 관한 수수께끼도 그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해답을 구해야 옳지 않을까.
동성과 동본을 다시 생각하며
우리가 한문식의 성씨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원시씨족공동체 단계에서 이루어진 족외혼은 어디까지나 같은 씨족끼리 혼인을 피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원시 씨족공동체의 붕괴와 함께 씨족명은 성으로 옮겨졌다. 애초에 성은 권력층에게만 부여되었다. 성씨의 부여는 일종의 신분적 특권이었다. 귀족들에게는 성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성이 없이 이름만 주어졌다. 씨의 설정은 성의 양적 증가에 따르는 동족의 지역적 확대를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밀양 손씨, 안동 권씨, 해주 최씨 같이 씨칭이 지명을 취하고 있음은 그것이 지역적으로 분화된 동족의 계통임을 드러낸다. 14 ~ 15세기 이후에는 인구 증가에 따라 동족 성원의 양적 확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본관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본관의 사용은 대략 14세기 말부터였다. 그리하여 본관 수가 김씨는 500가지, 이씨는 470가지를 헤아렸다. 동일한 본관도 동족 수 증가에 따라 다시금 파로 나뉘었으니, 전주 이씨의 경우에는 무려 100여 파로 갈라졌다. 이쯤 따지고 보면, 성이 같다는 것만으로 혈연의 근본을 따짐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족보상에서 성씨와 본관만 가지고 혈족의 이동을 분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성씨를 바꾸는 변성 등으로 혈통 분간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정동유는 <주영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안동의 권씨와 김씨는 분명히 같은 조상으로 김씨가 권씨로 성이 바뀌었을 뿐인데도 근래에 양쪽이 혼인함을 꺼리지 않음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수광는 <지봉유설>에서, '본관이 다르면 성이 같아도 혼인하니 이 때문에 중국인에게 조소를 당한 것이다' 라고 이본동성혼을 비방하였다. 민법의 예규에는 남양 홍씨는 토홍과 당홍이 있으나 조상이 같으므로 혼인신고를 받아주지 않는다. 반대로 성은 다른데 본은 같은 동본이성, 예컨대 기씨, 한씨, 선우씨는 성은 다르나 소위 기자의 같은 자손이라서 혈통이 같다 하여 서로 결혼하지 않았다. 안동 김씨와 안동 권씨도 이성동본이면서 같은 혈족에 속한다. 차제에 족보 문제도 점검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종휘는 <수산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대저 우리나라에는 문헌이 적어서 오늘날 족보를 가진 가문도 십수 대 위는 모르므로 동성끼리도 그저 관향만 다르면 다 통혼한다.
다산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서, '우리나라의 김. 이씨는 대성으로 본관만 다르면 다 동성혼인을 하니 크게 예에 어긋난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광무 7년(1903년)에 마지막으로 나온 <형법대전>은 혼인조에서 성씨와 본관이 동일한 사람이 결혼하는 일을 100대의 매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성과 동본, 이성과 이본과의 관계는 '칼로 두부 베듯이' 명료한 것이 아니다. 친인척간의 결혼을 금지시킴으로써 우생학적으로 훌륭한 자손을 이어가고자 했던 선조들의 입장은 대단히 과학적인 판단이었고, 후대에 근친혼을 배제한 태도 역시 인륜을 옳게 세우려는 훌륭한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도 그것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하나의 도그마가 된다면 인간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려던 관습이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도구로 둔갑한다.
동성불혼의 역사적 뿌리를 재평가해야
동성동본 불혼에 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강한가는 북한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북한에서는 동성동본 결혼을 허용하는 개방형태를 취하고 있다. 북한의 민속학자 전장석은 이미 1950년대 후반에 동성동본 혼인이 가능한 이유를 논문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법조문과는 달리 동성동본끼리의 결혼을 금기시하는 전통과 풍습이 철저히 지켜진다는 보고가 있다. 남한사회는 법적 장치과 현실론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절충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10년에 1번 꼴로 1년간 유예기간을 두어 사실혼관게에 있는 동성동본 부부에게 특별법으로 혼인신고를 허락하고 있다. 일제 당국도 식민지 헌법에서 동성동본 불혼을 명시했다. 정작 자신들은 동성동본 불혼 관습이 애초에 없으면서도 식민 백성들의 민감한 관습문제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이다. 이웃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누구나 쉽게 본관을 창설할 수 잇는 탓이다. 근친혼 금지를 논할 때면 흔히 중국의 예를 인용하곤 하는데, 정작 중국 본토보다 우리가 더욱더 강하게 금지되어 있으니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모든 혼례의 역사가 증명해주듯 사회의 규칙 속에는 나름의 합법칙적인 연원이 있고 마땅히 어떤 풍습이 강조되어야 할 사회적 이유가 존속해야 관습은 유지되는 법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라도 동성동본 불혼의 역사적 뿌리부터 재평가하면서 출발해야 옳을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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