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프로이트 - 김정일
1장 진료실에서 쓴 프로이트 심리학
스트레스와 리비도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리비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적 자극이나 흥분을 유발하도록 조건짓는 어떤 물리적 이며 구체적인 힘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프로이트
"다음달 8일 개봉을 앞둔 진유영 감독의 (도둑과 시인)이 제작진과 배우 강문영 간에 가벼운 실갱이가 벌어져 화제. 문제의 발단은 강문영이 가수 이승철과 결혼 전 촬영한 분량 가운데 최재성과의 두 차례 뜨거운 정사 신을 가능한 한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 강문영은 '촬영 당시는 결혼하지 전이었으나 지금은 신혼중'이라며 편집 과정에서의 배려(?)를 요청. 그러나 진유영 감독과 제작자 석래명 감독은 '극중에서 도둑(최재성)이 작업(도둑질)을 하고 나면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정사를 나누기 때문에 이를 뺄 경우 영화 흐름이 매끄럽지 않다'며 난색을 표명..."
어느 신문에 난 기사이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정사를 나눈다는 말이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섹스를 한다는 것은 드러내 놓고 주장하거나 강조되지는 않지만 상식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고 있다. 스트레스에 짓눌린 청소년들이 포르노 테이프나 그림을 찾아 돌아다니고, 어떤 노총각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한두 달에 한 번씩 사창가를 찾아가곤 하니 말이다. 한 젊은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까지 남자와 잔 적은 없다. 그러나 마스터베이션은 많이 한다. 포르노도 보고 기구도 사용하는데, 그 이유는 마스터베이션을 하지 않으면 호르몬 배출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아 미용에도 안 좋고 정신건강에도 안 좋기 때문이다. 그 습관이 오래 되다 보니 나는 굳이 남자를 성적으로 밝힐 이유를 못 느낀다. 남자와 섹스해 봤자 어떤 의미에서는 마스터베이션만 못하고 여러 가지로 성가시기만 하다. 나는 남자하고 섹스는 하지 않고 그저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 이야기는 참 그럴 듯 하게 들렸다. 성욕을 풀지 못해 스트레스에, 욕구 불만에 찌들려 있는 여성들에 비하면 그녀는 훨씬 더 발랄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섹스는 스트레스를 푸는 데, 미용에, 정신건강에 좋다는 말인데 이러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불행히도 내가 받은 정신의학 교육에서는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의과대학 시절 정신과 강의를 받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의문을 갖고 있는 것이 있다.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성적 욕구가 적절히 충족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학설이 있지요. 히스테리(hystery)의 어원이 hystero(자궁)에서 비롯된 것같이 성욕의 적절한 배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히스테리는 발생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때는 마스터베이션 등의 방법으로 성욕을 배출하는 게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도 생각했지요.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강의가 끝나고 아직까지도 의문이 남는 것은 왜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교수님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덧붙인 것은 정말 말이 안 돼서라기보다는 공론화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으리라. 마스터베이션이 치료에 도움이 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정신과 의사는 아마도 우리 시대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학문적으로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성 에너지(리비도)의 사용 가능량은 한정되어 있다는 프로이트의 말에 따르면, 스트레스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정된 리비도 를 무한히 써버린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리비도를 무한하게 쓰는 것이 아니고 앞의 여자같이 적절하게 쓴다면 섹스가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적으로는 말도 안 되고, 그래서 아무도 섹스가 스트레스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하거나 가르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알아서 섹스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터득하는 것이 섹스이고 섹스의 효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스트레스와 섹스는 실제로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선 사람이 가장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는 때가 어떤 경우인지를 생각해 보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본능이 있다면 다름 아닌 생존과 번식의 본능이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소중히 해서 자기와 똑같은 생명을 창조해 후세에 남기려는 본능이 있다. 이 본능은 태고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사람의 모든 본능에 우선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큰 이유는 번식을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은 이 험난한 자연계에서 만물의 영장으로 지금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나는 3-5억 개의 정자들과 경쟁해 지긋지긋하게 달리면서 속으로 무수히 부르짖었을 것이다. '주여, 만일 저에게 생명을 주시기만 한다면 주의 뜻에 따라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열중하겠나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의 안에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는 것은 자식에 대한 생각이다. 자식이 휘험을 당할 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위험을 가로막은 부모들은, 다름 아닌 이 생명을 재탄생시키는 번식의 본능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번식에 대한 스트레스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욕에 시달리고 갈등을 하고, 심지어는 그 스트레스에 못 이겨 성범죄까지 저지르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공격을 당했을 때이다. 타인이 나만의 공간, 내가 편안하게 있는 공간을 인정하지 않고 공격했을 때 사람들은 분노에 사로잡히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때 사람은 자기도 남들에게 똑같을 공격을 퍼붓고 싶어진다. 이 또한 사람을 지금까지 생존시켜 준 죽음의 본능으로,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공간을 침범하는 타인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이 죽음의 본능은 극도로 제한받아 왔다. 아무리 상대가 나를 공격해 와도 내가 상대를 원시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를 상징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바로 섹스이다. 섹스의 행위 속에는 사랑 이외에도 상대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의미까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시 시대에서 다른 부족을 공격해서 승리를 얻었을 때 가장 먼저 취하는 것이 섹스였다. 아마도 사람들이 섹스를 통해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것은 섹스 속에 태고 때부터의 본능과 그 파생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결해 주는 기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섹스를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강조하지 못하는 것은, 현대 사회는 원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범성욕설
어느 날 지하철 역에 들어가니 존 듀이(실용주의의 창시자)와 젊은 기자가 주고받은 말이 벽에 붙어 있었다.
"평생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자가 묻자 존 듀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평생 산을 오르는 심정으로 살았지. 하나의 산봉우리에 오르면 바로 앞에 또 다른 산이 보였어. 그러면 나는 그 산에 오르겠다는 결심을 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곤 했지. 내가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네. 젊은이, 만일 눈앞에 더 이상 새로운 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하게!"
이 대답을 프로이트의 범성욕설(pansexualism; 인간의 모든 행동은 성적인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로 옮겨 보면 이러하다.
"평생 여자를 정복하는 심정으로 살았지. 한 여자를 정복하고 나면 바로 앞에 또 다른 여자가 보였어. 그러면 나는 그 여자를 정복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추스르곤 했지. 내가 쉬지 않고 바람피웠던 것은 그런 마음 때문이었네. 젊은이, 만일 눈앞에 더 이상 새로운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이라고 생각하게!"
존 듀이가 설마 이런 생각을 하지야 않았겠지만 이런 심정은 많은 남자, 아니 대부분의 남자들이 본능적으로 갖고 있을 것이다. 이런 본능이 특히 강해서 바람을 상습적으로 피우는 남자들은 보통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뻔뻔할 대로 뻔뻔해서 늙어 기운이 빠질 때까지 바람을 피우는 형이고, 두 번째는 순진하게 늦바람을 피우는 형이고, 세 번째는 홧김에 스트레스를 못 이겨 바람을 피우는 형이다. 첫 번째 유형은 선전적, 후전적으로 바람기가 발달한 사람일텐데, 그들의 특징은 아마도 왕성한 생명력을 갖고 있거나 감정적으로 지천한(shallow) 사람일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할 만큼 강한 생명력이 바람기에도 있었기 때문일 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으면서 계속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자기의 정돈되지 못한 미숙한 감정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현실감 없이 끌려다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로 순진하게 늦바람을 피우는 유형은 대개 젊었을 때는 순수를 주장하다가 뒤늦게 인생의 맛을 알고 바람을 피우는 형이다. 여자들이 이 남자만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 같아 선택을 했다가 뒤늦게 뒤통수 맞는 것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이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완전벽이 있는 성격으로 인생을 고지식하고 좁게 살다가, 뒤늦게 인생의 넓고 광활한 맛을 보게 되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늦바람에 매달리게 된다. 그들은 바람 속에서 온갖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기 때문에 바람이 가라앉아도 그 맛을 쉽게 잊지 못해 또다시 바람 속으로 뛰어들곤 한다. 세 번째, 홧김에 바람을 피우는 유형은 약한 사람이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이다. 얼마 전 TV (경찰청 사람들)을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온다. 휴가철 남편과 아내, 시어머니, 아이들이 피서를 떠난다... 피서지에서 아내는 아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요, 당신이 돈만 제대로 벌어와 봐요. ...아니 내가 어머니한테 뭐라 그랬어요."
남편은 주눅들어 눈치만 힐끔거렸는데 아마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꾹 참고 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어쩌면 밖에 다른 애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호랑이 같은 마누라에게 어쩔 수 없이 짓눌려 산다 해도 목숨까지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밖에서 바람을 통해 숨구멍을 틔워 놓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마누라의 스트레스 때문에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바람을 피우는 형이다.
이같이 바람은 선천적, 후천적, 상대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 바람을 태풍으로 맞을지 미풍으로 맞을지는 각자의 운명과 재수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 바람을 어떻게 맞을지는 각자의 평소 지헤와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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