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서낭당이냐 성황당이냐
아침에 판교원을 떠나 남으로 구성현 가는데 길 옆에 오래된 성황당 숲은 어이 그리 무성하뇨
예로부터 전하기를 저 숲에 귀신이 있다 하면서 오가는 길손들 저저마다 복받고자 하더라 지전을 나뭇가지에 시새워 걸어놓고 숲속 성황당 향해 정성으로 비는 말
앞길 가는데 만사형통 하옵시여 말은 부디 등창나지 말고 말발굽 탈도 전혀 없기를
조선시대 선조조와 광해군조에 살다간 석주 권필(1569 ~ 1612)의 시 <성황부>의 일부분이다. 그는 관념론과 숙명론에 반대한 유교적 지식인으로서 성황당에 대해서도 그 미신적 요소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임제의 시대에도 '성황당' 이 있어 길가는 길손들이 지킴이로 모셔졌음을 이 시에서 알게 된다. 길가에 위치했다는 사실, 숲으로 이루어졌으며 신목이 있고, 지전을 걸어두었으며, 오가는 길손들이 무언가 소원을 빌면서 모셨다는 사실 등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서낭당' 과 일치한다. 그러나 임제는 분명 '성황당' 이라 썼다. 조선 초기로 올라가 <시용향악보>에는 성황반이란 향악곡명이 등장한다. 민간신앙인 서낭신앙을 기반으로 한 무가였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노랫말도 '성황'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황의 본적은 중국
성황의 '호적초본' 을 떼어보면, 본적은 틀림없는 중국땅. 성황의 원뜻은 성 둘레에 파놓은 연못인 해자에서 비롯된다. 성지의 신을 성읍의 수호신으로 믿게 된 것이 성황이다. 원래 성황은 국가나 고을의 방어시설에 대한 단순한 명칭이었을 뿐이다. 중국의 성황신앙은 일찍이 고대에서부터 시작되어 당과 송을 거쳐 명나라에 와서는 국가적으로 널리 권장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문종조에 성황신앙이 전래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로부터 '성황사' 는 국조오례의의 중사로서 간주되어 국가의례로 모셔졌다.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이렇게 이른다(원년 임신 8월조). 모든 신묘 및 모든 군의 성황은 나라에서 제사드리며, 다만 모주, 모군의 성황신은 위판을 설치해서 각각 그곳 수령이 봄, 가을로 제사를 행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 성황사만 336개에 이를 정도였는데 이는 조선 전기 중앙집권 강화의 한 시책으로 재정비한 탓이다. 이런 이유로 각 지방마다 성황사가 보급되며, 인물을 봉인하기 시작했다. 가령, 전라도 순천지역의 <강남악부>에 수록된 성황은 그야말로 '성황신' 의 전형을 보여준다. 물론 유교적 가치관에 부합되는 성황신을 말하지만.
김별가는 뛰어난 사람이네. 살아서 평양의 군장이 되지는 못했어도 죽어서 성황신이 되었다네. 신의 음덕이 후손들에게 전해져 보살펴주시니, 대대로 문관과 무관에서 어진 신하가 많구나.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진례산이 높고 높아 오래도록 무너지지 않는 것을. 지금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드린다네.
한양은 물론이고 읍치마다 여단. 사직단. 성황사를 두었으니, 중앙정권과 지방 토호들과의 대립관게를 잘 암시해준다. 김갑동 교수(원광대)는 고려 초기에 각 지방의 성황사가 국가가 아닌 지방세력들에 의하여 건립된 것은 자신들의 조상을 성황신으로 배향함으로써 그 지역의 지배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성황신이 된 김별가도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성황당은 중국에서 들여와 우리나라의 중앙 및 지방권력이 체제 유지를 위해 보급한 관제적인 신앙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임제 권필이 노래했던 성황당은 민간에서 볼 수 있는 서낭당과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황당이라고 불렀다. 반면에 <강남악부>의 성황당은 전형적인 국가적 성황당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똑같이 성황당이라고 기술했지만 그 의미는 두 가지란 말인가. 사실이 그러했다. 하나는 국가적인 성황체계요, 다른 하나는 민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사' 라 부르던 것이다.
서낭당의 노래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어느 봄날, MBC의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를 찍기 위해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밭치리에 갔던 적이 있다. 밭치리(일명 전치곡)에는 장승과 솟대, 서낭당의 전형적인 모습이 남아 있다. 이 마을은 예전에 한양 가는 길목이었다. 마을 어귀에 서울 300리, 춘천 60리, 홍천 40리, 동산 15리와 같은 이정표가 씌어진 장승이 서 있고, 그 옆에는 따오기, 혹은 기러기라 부르는 솟대가 우뚝 솟아 있다. 마을 중심에는 작은 기와집이 하나 서 있으니 그것이 밭치리의 서낭당이다. 마을 뒷산을 가파르게 올라가면 지금은 죽은 나무지만 500년 되었다는 매우 큰 서낭나무가 있다. 즉 이 마을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길목을 장승과 솟대가 막고, 뒤쪽으로 빠지는 산길은 서낭목이 막으며, 마을 가운데의 서낭당이 마을전체를 관장하는 그런 형국이다. 밭치리에서는 온전히 '서낭당' 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 드러나듯, 서낭당은 주로 동구나 고갯길에 자리잡거나 돌무더기, 서낭목, 서낭당집 따위와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다. 또한 장승. 솟대. 수구맥이. 홍수맥이탑. 수살 같은 수호신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복합신앙적 양상도 보여준다.
서해안을 찾아가면 마을의 안녕과 어업의 풍요를 기원하는 서낭당이 있다. 충남 서천군 도둔리 각시당도 그중의 하나이다. 각시란 '각시서낭' 을 말하며 서낭이 좋아할 만한 화려한 물색(옷감), 바느질 도구, 심지어 화장품을 제물로 바친다. 시시때때로 새옷을 갈아입혀 단장해 주기도 한다. 앞에서 나왔던 삼척의 '해랑당' 도 서낭당이다. 이렇게 서낭당은 분명 성황당과 달랐다. 그런데 지역에 따라서는 민간의 서낭당을 성황당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강원도 삼척지방에 가면 묵은 해가 새해로 바뀌는 자정에 '성황당제' 를 올리고 있는데, 신체로는 철마로 된 '마서낭' 을 모시고 있다. 주민들 말로는 '성황' 님이 왔다가 그 말들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마을을 지켜준다는 것이다. 서낭과 성황이 혼용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성황당' 항목을 펼쳐보았다.
성황당 ->서낭당 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항목 '서낭당' 에서 찾으라는 말일 터이고, 양자는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서낭당과 성황당이 두루뭉수리 같이 쓰이고 있을까. 같은 마을신앙인데도 하나는 '서낭' 이고, 다른 하나는 '성황' 인 까닭은 무엇인가. 정비석의 소설 제목에는 '성황당' 이라 했고, 유행가 가사에는 '서낭당' 고갯목이라 한다. 이같은 혼선에는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강의시간마다 항상 이렇게 정리해준다. 성황은 두 가지 '기능' 을 지닌다. 하나는 국가적인 성황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는 민간적인 '음사' 를 의미한다. (둘은 이름은 같고, 의미는 다르다.) 민간에서 '음사' 는 두 가지 '이름' 을 지닌다. 하나는 성황이요, 다른 하나는 서낭이다. (둘은 이름이 다르고, 의미는 같다.) 이 글을 보면 대개 알쏭달쏭하게 생각한다. 위의 가로 부분을 유심히 읽어주길 부탁드린다. 그러나, 갸우뚱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양자는 너무도 자주 혼동하여 쓰여졌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성황당이야 분명히 설명이 되는데, 문제는 민간의 서낭당, 혹은 성황당이다.
성황과 서낭은 하나?
아무래도 논의를 앞으로 되돌려야만 할 것 같다. 앞에서 각 지방세력들이 성황사를 앞다투어 세웠다고 설명하였다. 각 지방의 성황사는 지방관아의 고유한 행사가 되어 '관민 합동' 으로 이루어졌다. <동국세시기> 12월조를 보자. 고성 풍속에 군의 사당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관에서 제사를 지낸다. 비단으로 신의 탈을 만들어 사당에 안치해 둔다. 12월 20일 이후에 그 신이 오른 읍 사람이 그 탈을 쓰고 춤추면서 관아의 안과 고을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논다. 그러면 집집에서는 그 신을 맞아서 즐긴다. 정월 보름전에 그 신을 사당에 돌려보낸다. 이 풍속이 해마다의 상례로 되었다. 이는 대체로 나례신의 종류이다. 이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오는데, 단오날 성황사에서 백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성의 경우, 지방관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음이 드러난다. 기록을 하나 더 들추어보자. <임영지> 풍속조에 이렇게 적혀져 있다.
읍에는 각기 성황당이 있어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강릉만은 제사를 지내는 일 외에 유달리 이상스런 일이 있다. 매년 4월 15일이면 이곳 강릉의 시임호장은 무격을 거느리고 대관령 위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신당이 한 칸 있다. 호장은 신당에 나아가 고유하고 무격으로 하여금 나무 사이에서 신령을 구하도록 한다. 나무 하나에 광풍이 불어 나뭇잎이 스스로 흔들리면 '신령이 내렸다' 고 하고 나뭇가지 한 개를 자른다. 호장은 건장한 이로 하여금 받들고 가게 하고, 이것을 일컬어 국사신의 행차라고 한다.
다시 설명할 것도 없이 강릉 단오제의 옛 기록이다. 읍마다 성황신을 모시면서 왜 국사신을 별도로 모셔올까. 민간에서 오랜 세월 모셔온 무속적인 국사신을 단오제에 모심으로써 민간신앙에 대한 국가적인 통제를 의도하였던 결과다. 아울러 민간에서 산신으로 모셔오던 대관렬의 국사신은 어느덧 국사성황으로 바뀌게 된다.
국가적으로 민간신앙을 통치수단의 일환으로 포섭하는 동안에 전혀 반대적인 현상도 일어난다. 대략 17 ~ 18세기가 되면서 성황당이 국가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민간적 성황사로 다수 바뀌었던 것이다. 서울시립박물관 정승모 전문위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토호세력이 주도하고 민간인이 참여함으로써 중앙사족들에 의해 음사로 몰린 성황사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재지사족이 향촌의 주도권을 잡은 17 ~ 18세기에 이르면 폐기되거나 유명무실해진다. 그 대신 이것은 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촌락이 성장. 확대되어 가면서 촌락 단위의 행사로 주변화되어 갔다.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의 잦은 재해, 특히 전염병의 발생은 이의 확산에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그는 읍성 밖으로 밀려난 외방성황을 예로 들고 있다. 나주의 성황당이 그 예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국가적 성황신앙이 밀려나면서 외방성황이 되어, 결과적으로 '성황사' 가 민간화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앞에서 임제 권필이 부른 '성황당' 은 '외방성황' 따위와는 무관하다. '민간화'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민간적' 이다. 이같은 혼선은 두가지로 추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서낭당이란 말을 한자로 쓰기가 불가능하므로 한자를 빌려와 편의상 성황으로 표기하였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민간에 보편적으로 서낭이란 말이 있었고 서낭신앙이 실제로 '성황신앙' 과 무관하게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즉, 서낭을 성황과 분리하였다. 명칭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참으로 다양하게 말하였다. 하나의 모음집으로 묶어보자.
- 조선후기 이옥의 소설 <최생원전> : 이른바 선왕이란 것은 성황의 그릇된 말이다. - 손진태 : 선왕당은 성황당의 화음인 것이 거의 명백하고, 한학에 소양이 있는 자 이외의 일반민중은 어느 것이나 선왕당이라고 한다. - 이능화의 <조선무속고> : 팔도의 고갯마루에 있는 선왕당은 성황의 잘못된 말이다. - 김태곤의 <한국무속연구> : 산신을 나타내는 산왕이 변화하여 산왕 -> 선왕 -> 서낭으로 변화되었다.
선왕이란 말은 어디까지나 성황을 잘못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다만 김태곤 교수만 음운 변화로 유추한 서낭의 기원에 대한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표현상의 차별로 보아 '성황' 과 '성왕' 의 구별이 모호하지만 '성황 -> 선왕 -> 서낭' 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우리 고유의 생활과 풍습을 중국의 것에 기초해서만 바라보려는 모화적인 시각이 배어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민중들 특유의 생존방식으로 국가에서 강조하는 성황이란 이름을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 민중들은 음사로 비판되는 서낭당을 수호하기 위한 나름의 방책으로 명칭과 내용을 구별하지 않았을까. 성황당이란 명칭은 빌려오되, 제의 자체에서 무속적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한 셈이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서낭제에는 무속적인 양식이 기본으로 되어 있으면서 반면에 유교적 양식이 가미되어 나타난다. 하나의 타협책인 것인데, 다른 민간의 마을굿들이 걸어온 길을 서낭당도 예외없이 거쳐온 것이다. 나는, 서낭은 이전부터 별도로 존속하여 왔던 신앙 풍습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성황에서 취음을 하였을 뿐이다. 원래는 순수 민간신앙이었던 대관령 국사신앙이 후대의 성황으로 바뀐 것에서 하나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결정적 이유를 또 하나 들라하면, 서낭당의 친족이 매우 많다는 점이다. 오늘날까지 서낭당은 복잡한 양식으로 전해져 왔다. 앞에서의 마서낭과 각시서낭당이 그렇고 다른 신앙과 결합된 국사서낭당, 사신서낭당, 짐대서낭당, 골매기서낭당 등이 그렇다.
동해안을 제외하고 남해안과 서해안에 가면 곳곳에 배서낭을 모신다. 배를 새로 만들어 나루에 내리는 진수식을 행할 때나 당제. 출어시에 배에 제물을 차려놓고 뱃고사를 올린다. 배서낭은 당나무나 돌무더기와 관련이 없다. 또한 '배성황' 이란 말도 없다. 굳이 한문식으로 풀자면 '배의 왕' 이란 뜻인 선왕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있다. 어쟀거나 배서낭은 서낭이 매우 원초적이며 뿌리 깊은 이름으로서 성황과 무관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존재양상이 복잡하다는 것은 그만큼 이들 민간의 서낭당이야말로 원래 토속인 것임을 역설적으로 설명해준다. 그것들은 '서낭' 이든 '성황' 이든 그 이름과 관계없이 내용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양자는 변별성을 상실하여 부르는 이에 따라서 편의대로 불리웠다. 그러다 보니 성황과 서낭이 혼선되어 쓰였던 것이다. 이렇듯, 성황과 서낭 두 가지 말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서낭의 돌멩이는 전투용?
그렇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문헌에 나타나는 '서낭당' 훨씬 이전 시기에 돌을 쌓아 경계를 표한다거나 마을의 길목에 돌을 쌓아두어 전투용으로 대비하였을 돌무더기들이 신앙적 존재로 모셔지기까지의 기원에 관한 문제다. 서낭당은 주로 고갯목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강원도의 경우에는 마을의 주신이 되어 마을 복판을 차지하는 경우도 많지만, 고갯목에 자리잡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가 서낭당고개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왜 하필 서낭당고개일까. 여기서도 하나의 추론이 필요하다. 고갯목은 널리 시야가 펼쳐지는 전망 좋은 곳이다. 유사시에 돌을 쌓아두었다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려 했던 데서 서낭당고개의 전통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굳이 행주치마 전설을 들지 않더라도, 돌멩이는 민중들의 결정적인 무기였다. 고구려시대에는 아예 국왕이 친히 참석하여 돌싸움을 독려하였다. 평상시의 돌싸움 연습이 유사시의 실제적인 돌싸움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아예 척석꾼이라고 하여 돌팔매를 잘 하는 장정을 뽑아 별도의 특수부대를 조직하기도 했을 정도다. 나중에 석전이 민간화되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돌싸움으로 변화하였고, 20세기 초반까지도 널리 이어졌다. 서낭당의 돌무더기는 마을을 지켜주는 결정적인 무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사연을 지녔기 때문에 신성시된 것이 아닐까. 지금도 나그네가 서낭당고개를 지나치다가 돌을 던져놓고 가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는데 거기에는 선조들의 그런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우리의 마을신앙에는 탑신앙이 상당히 많거니와, 돌을 쌓아두는 풍습은 보편적인 민간신앙일 뿐이라는 반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서낭당의 돌맹이는 차곡차곡 쌓아올린 돌탑의 비교적 큰 돌과는 다르다. 이른바 '짱돌' 이라고 부르는 던지기에 알맞은 돌이다. 민중의 전투적인 풍습에서 유래하였다가 전투의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단순한 서낭 풍습으로 잔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돌무더기를 굳이 몽골의 오보에 견주는 견해도 다수 있다. 그러나 서낭당이 몽골의 오보에서 영향을 받은 전래품이라는 견해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망망대해같이 펼쳐진 초원에서 오보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나그네는 오보를 목표물 삼아 방향을 잡았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돌을 쌓아두었다가 나중에는 깃발도 세우게 되었다. 물론 깃발에는 오색천을 내걸었다. 즉 몽골의 오보는 경계표시의 상징물인지라 우리의 서낭과는 많이 다르다. 다만, 인정해야 할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몽골. 시베리아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돌무더기 풍습이 지금까지 전승되어 왔다는 문화의 상대적 친연성일 것이다.
문화적 친연성이 돋보이는 것은 단연 물색이 아닐까. 물색이란 나무에 갖가지 천을 걸어두는 풍습이다. 시베리아나 몽골, 알타이 지방에 가면 나무에 천을 걸어둔다. 우리의 경우에도 서낭당에 천을 걸어 둔다. 그런데, 육지부에서 당산나무에 천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낭당에는 천을 거는데, 당산나무에는 천을 걸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도에 가면 그 의문은 풀린다. 제주도의 신목에는 늘 물색을 바친다. 그것도 매우 화려한 물색을 엄청난 양으로 걸어둔다. 서낭목이 아닌 경우에도 물색을 걸어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주변의 나무에 물색을 걸어주던 풍습이 서낭당이나 제주도의 물색에 잔존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물론, 시베리아에 가면 '아마리우스' 라고 하여 거대한 나무에 주렁주렁 물색을 걸어둔다. 어쨌든, 서낭당에 바치는 화려한 물색은 동북아시아 지역과의 문화적 친연성을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동탁 조지훈 시인을 생각하며
나는 '서낭' 만 또올리면 늘 동탁 조지훈 시인이 생각난다.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그 분이 왜 훗날 시인말고 민족문화 연구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을까. 그의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 어렸을 적 한학을 공부했고 혜화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학원 강사를 지냈고 불경과 당시를 탐독하였다. 1947년 고려대 문과대 교수가 되었고, 만년에는 시쓰기보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소장으로 '한국문화대계' 를 기획하기도 했다.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한국민속학자료집성', '한국민속학개설', '한국민속학사전' 등의 발간을 추진하였으나 1968년 사망으로 말미암아 미완의 사업으로 남았다. 그는 역사학과 민속학을 자신의 학문적 기둥으로 삼았다. 그 역시 서낭당을 주목하였다. <서낭 간고>, <주석단. 신수. 당집신앙연구>따위를 썼음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는 <한국사상사의 기저>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민중들은 서낭당이라 부르지 성황당이라곤 하지 않는다. 성황은 송나라 성지의 신으로 그 수호신적 의의가 서낭당과 상통되어 후세에 부회되었을 따름이다.
성황과 서낭이 혼재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동탁 조지훈 시인의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면서 우리 문화사에서 이같이 뛰어난 시인이 민족문화에 깊은 애정을 보여준 데 대하여 늘 감사드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서낭이냐 성황이냐는 질문법에는 단순한 용어 차이를 벗어나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존재하여 그 기원과 변천과정에 관한,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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