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솟대, 하늘로 비상하는 마을지킴이
레나 강가를 지키는 아홉 마리 물오리
높다란 장대 끝에 새가 앉아 있다. 바람은 늘 장대에 닿고, 가녀린 장대를 어루만지면서 잠든 새를 일깨운다. 이윽고 나무새가 하늘로 비상한다. 도대체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 새일까. 이들 새가 올라 앉은 내력을 정확히 아는 이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마을마다 장대나 돌기둥 위에 올라앉은 '나무새' 나 '돌새' 를 곳곳에서 볼 수 있으니, 이름하여 '솟대' 라고 불러왔다.
비행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호수는 늘 그림처럼 잔잔했다. 늙은 오윤(시베리아의 남자무당) 미트레비 부에곰. 스탈린 시절, 혹독했던 샤머니즘 청산을 피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시베리아 샤먼의 한 명. 시베리아 야쿠트 공화국 문화성의 도움으로 그를 간신히 찾아냈다. 그의 앙상한 손목이 우리를 호숫가의 소나무숲으로 잡아끈다. 그의 비밀스런 숲으로 들어가며 우리는 '신성', '성스러움' 따위를 떠올리고 숨을 죽였다. 나무가 나타났다. 천상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세계수. 신들과 저승사자들은 세계목을 타고 땅 아래로 내려온다. 산 자의 영혼들은 그 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우주의 가지는 세상 만물의 균형을 잡고 이로써 나무는 우주의 중심이 된다. 이들 세계수는 생명의 나무인 동시에 영원불멸의 나무다. 스스로 살아 있는 나무, 생명을 주는 나무. 오, 위대한 오윤의 나무, 캐리약스 마흐! 오윤의 나무는 가지를 하늘로 치켜올린 채 우리를 마중하였다. 위대한 신수앞에는 긴 소나무장대가 걸쳐져 있고, 그 위에 정교하게 깎은 물오리 아홉 마리가 하늘로 비상한다. 밑에서 위로 아홉 마리가 차례대로 앉아서 날개를 퍼득이며 솟구친다. 물오리 밑에는 에메겟(인형) 아홉이 두 손을 벌리고 있다. 하늘로 새를 날려 보내는 것이다. 샤먼은 무복을 갈아입었다. 시베리아 샤먼의 옷은 새. 순록. 양. 곰 모양의 세 가지가 있는데 그는 새 모양의 옷을 입었다. 새 모양은 가장 특별한 복장이었다. 샤먼들은 가능하면 무복을 새의 깃털에 가깝게 꾸미려 애썼다. 부에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태양을 향해 두팔을 벌려 고하였다.
태양이시여, 우리들의 어머니시여. 당신의 가슴으로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시고 양식을 주시고, 재앙은 물리쳐 주십시오.
1993년 여름, 모스크바를 떠난 에어로플로트 항공기는 한국의 역사민속학자 여럿을 싣고 우랄산맥을 넘었다. 엘리아데 같은 서양인 학자들의 눈과 글을 통해서만 접했던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실체를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먼질을 돌아갔다. 흡사 코사크 기병대가 우랄을 넘어 시베리아로 동진을 거듭한 것처럼 바이칼에서 발원한 레나 강이 북극으로 흘러들어가는 시베리아 대평원의 중심지 야쿠트 공화국(현재는 사하 공화국)을 향해. 시베리아 샤머니즘과 우리 문화의 친연성이 있다면, 그 실마리를 풀어줄 수 있는 가장 근접된 사례는 바로 '장대 위의 새'. 물오리 아홉 마리는 각각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닐거, 가가라, 위러, 드라크허, 곱더, 이그리에, 부리크흐, 직작즈하, 북작자하...... 이름만 다른 게 아니라 맡은 바 직무도 달랐다. 이들 오리들이 사는 곳에 따라 '숲의 수호신' 가가라, '호수의 수호신' 곱더 식이었다. 왜 하필이면 아홉 마리였을까. 북아시아 샤머니즘에서는 세계를 3층으로 나누고 있다. 각각의 층위는 상, 중, 하로 갈라지므로 아홉 마리의 새는 밑으로부터 하층, 중층, 상층을 상징한다. 천상, 지상, 지하의 세 구분이 그것이다. 우주를 이루는 세 개의 세계를 새들이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 원주민들은 결코 새를 죽이지 않는다. 새는 집을 지켜주는 가장이며, 망자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는 조상 영혼의 현신이며 천상과 지상을 이어주는 중개자이다. 샤먼들은 새를 조상신으로 섬긴다. 영하 6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북극 바람이 지나가고, 무려 8개월에 육박하는 겨울이 지나면 짧기만한 봄과 여름이 온다. 툰드라의 들녘에도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난다. 그 여름 시베리아에서 만난 민들레꽃은 참으로 반가웠다. 원주민들은 봄이 오면 오롱코라 부르는 축제를 준비한다. 말젖으로 담근 술이 키위스를 가죽통에 담아서 말에 싣고 와, 들녘에서 축제를 벌인다. 아홉 마리의 새는 즐겁기만 한 봄의 축제에서도 상징물이 되어 비상의 날갯짓을 한다. 서툰 통역사의 통역을 새겨 듣고 있는데 백조와 흡사한 몸집이 유난히 큰 새들이 호숫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창공을 나는 일은 꿈, 그 자체였다. 서구 과학문명은 비행기로 그 꿈을 이루었으나, 스스로 비상하는 '환상적인 꿈' 을 상실하였다. 비록 비행기를 만들지는 못했으나 꿈을 간직하고 있는 시베리아 소수민족들의 새나 우리의 솟대에 올라탄 새의 비상이 더욱 인간 본연의 모습과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모든 문화현상이 그렇듯이, 독자적인 특수성과 대외적 보편성은 함께 존재한다. 시베리아의 새와 우리의 새가 똑같을 수 없고 문화적 성격에서도 분명 변별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을 넓게 동아시아 전체로 돌리면 우리의 솟대문화가 이들 동아시아 전역에 퍼진 새문화와 무관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새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알타이 특별전을 본 이들은 일명 '얼음공주' 미이라가 왔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산지 알타이 우코크에서 1993년 발굴된 파지리크 여사제의 복원된 머리에는 생명수를 상징하는 길다란 관과 그 위에 올라앉은 수많은 새들이 있었다.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 왕궁에도 은으로 된 나무가 있고 네 마리의 오리가 앉아 있다. 일본의 야요이 시대 이께가미 유적에서도 나무새가 발굴되었다. 동아시아 전체에 걸쳐 새는 샤머니즘의 상징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 민족도 선사시대부터 새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전통은 삼국시대로 이어졌다. 고구려 벽화의 태양을 상징하는 까마귀인 삼족오, 박혁거세를 위시하여 개국신화에 나타나는 무수한 '알' 도 바로 새의 상징이다. 심지어 혼레식에 올리는 닭도 새를 길운으로 보았던 상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새는 장대에 앉게 된다.
장대세우기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사를 제외하면 대략 고려시대부터 등장한다. <고려도경>을 들춰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옛부터 창기와 광대들이 사는 곳에는 장대를 세워 일반집과 구별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고 대개 그 풍속은 귀신을 섬기고 또한 기를 누르면서 기양을 위한 기구인 것 같다. 아무튼 문헌에는 대개 돌로 된 석장과 구리로 된 동장, 그리고 나무로 된 목장으로 구분될뿐더러 곳곳에 이들 장대들이 세워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솟대는 그러한 장대의 대표격이다. 솟대 못지않게 짐대나 오릿대로 부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솟대 집안의 족보에 끼일 만한 이름들을 쭉 나열해보자. 짐대, 솔대, 소주, 소줏대, 표줏대, 거릿대, 갯대, 수살이, 액맥이대, 방아솔대, 화표주, 심지어 일시적으로 세우는 장대인 볏가리, 풍간 등등. 왜 우리 민족은 솟대를 세웠을까? 몽촌토성을 복원할 때 나무로 깎은 새가 발굴되었다. 새 가운데에 장대를 끼운 구멍이 뚫려 있어 한눈에 솟대였음을 말해주었다. 울주의 천전리 암각화를 유심히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대 위의 새' 가 날카로운 철끝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무엇보다 대전 근교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의기에는 새 모양의 장대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한편에서는 따비로 농사짓고 한쪽에서는 두 마리의 새가 장대 위에 앉아 있다. 선사 및 고대사회에서의 솟대문화를 밝혀주는 유력한 증거물들이 아닐 수 없다.
하늘로 향한 인간의 외경심은 대개 장대나 기둥, 당수나무와 연결된다. 단군신화에도 신단과 신수가 결합된 신단수가 있다. 즉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통로로서 나무가 기능하였다. 장대를 세워 신을 맞이하는 풍습은 후대의 문헌에도 자주 등장한다. <동국세시기> 2월조의, "제주도 풍속에 2월 초하룻날 귀덕, 금령 등지에서는 장대 열두 개를 세워놓고 신을 맞이해서 이에 제사를 지낸다" 는 기록도 이들 장대가 지닌 하늘과 땅의 통로 역할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들 문헌과 유물상의 새와 오늘날의 현존 솟대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까. 나의 답변은 이러하다.
우리 민족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새 상징' 이 이어져 솟대문화를 꽃피우다가, 조선 후기 마을공동체문화의 발흥과 더불어 새롭게 재생의 꽃을 피웠다. 솟대 전문가인 이필영 교수의 견해도 이와 같다. 넓은 개념으로 볼 때, 솟대나 소도나 독같은 입간(장대) 신앙이다. 실제로 선사 및 고대사회의 북아시아 솟대는 모두 발생기원과 그 기능상의 일치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솟대는 층위별로 계단이 나뉘어져 있고, 샤먼의 제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변별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솟대는 바로 마을공동체의 풍요를 기원하는 목적과 발생기원을 지닌 후대의 시대적 산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는 온갖 철새가 지나가는 징검다리다. 그들 철새가 마을로 날아들어 보금자리를 틀며 텃새가 되었다. 새는 선사 및 고대사회에서 마을 풍요의 상징물이다. 쌀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비를 몰아주는 농경의 수호신인 것이다. 우리나라 솟대의 새는 오리, 갈매기, 기러기, 따오기, 해오라기, 왜가리, 까마귀 등 여러 가지이다. 거의 대부분이 물새이자 철새다. 그 대표격은 오리다. 오리는 물을 상징한다. 농사짓는 데 물의 중요성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수경농업지대인 우리나라의 경우 물은 농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들 현존 솟대가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 쌀농사지대인 남부지역에 더욱 밀집되어 세워진 이유도 그 탓이다. 오리를 짐대에 올라앉게 하여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새는 솟대에서만 있는 것일까. 새는 늘 날아다녔다. 한민족의 생활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날아다니며 흔적을 남겼다. 하늘에서 새를 통하여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풍물패의 농기 끝에 매단 꿩장목을 무심코 지나친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곧 새의 흔적을 보게 된다. 풍물패는 농기를 돌면서 농기고사를 올려 농신을 받는다. 마을굿패가 들고 다니는 서낭기 장대 끝에도 꿩장목을 달았다. 은산별신제에서는 농기를 앞세우고 꿩장목에 방울을 달아 방울울림으로 신의 강림을 알린다. 새가 늘 신과 인간, 혹은 하늘과 땅의 중간 지점에 자리잡아 왔다는 증거물이다.
나무솟대와 돌솟대, 공동체문화의 표징
조선 후기는 가히 봇물처럼 마을공동체문화가 꽃핀 시대이다. 솟대문화도 공동체문화의 하나로 재등장하였다. 솟대는 마을의 안녕과 수호, 그리고 풍농을 위하여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웠다. 그밖에도 배가 떠나가는 행주형 지세의 마을에 돝대를 나타내기 위하여 풍수상의 목적으로 세우거나, 장원급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우는 경우도 있다. 변산반도가 자리잡고 있는 전라북도 부안군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내요리 돌모산(석제리마을)에는 논바닥에 오리당산이 서 있다. 돌기둥 위에 서북쪽을 향한 오리가 올려져 있는 당산이다. 이를 마을에서는 진대하나씨(짐대)라고 부르는 바, 행주형 솟대의 대펴적 에이다. 솟대 중에는 심지어 불을 끄는 화재막이 솟대도 있다. 전라도 고창의 신림면 무림리 임리마을에 가면, 마을 입구 모정옆에 화재막이 솟대를 볼 수 있다. 마을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부안면의 화산봉으로부터 오는 재앙과 화재를 막기 위하여 오리를 깎아 솟대를 세웠다고 한다. 오리는 물을 상징하므로 물로 불을 예방하려는 수극금의 뜻에서이다. 대개 이지역에서 서쪽을 바라보느 ㄴ마을들은 화재막이 솟대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솟대는 마을 입구에 홀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장승, 선돌, 탑, 신목 등과 함께 세워져 마을의 하당신 또는 상당신이나 주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여타 신앙 대상물과 함께 나타나는 복합 양상을 보여주는데, 장승과 솟대가 같이 공존하는 경우가 가장 보편적이다. 대개 솟대는 하위신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만한 연구가 축적되는 데도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남창 선생의 개척자적인 연구가 있은 뒤로, 역사민속학자 이필영 같은 연구자들이 솟대문화의 성격을 속속 밝혀냈다.
대개의 솟대는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몇 해 지나면 스러진다. 그러한 탓에 조선 후기의 나무솟대는 증거물을 남기지 못했다. 또한 연대측정이 모호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결정적인 증거물을 하나 찾았다. 변산반도 부안에 가면 동문안과 서문안 당산이 있고 돌솟대가 서 있다. 서문안 돌솟대에는 숙종 15년(1689년)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돌솟대를 만들고 연대를 아로새겨준 장인에게 머리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명문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후기에 열풍처럼 불었던 '민중예술운동(?)' 의 산물로 보여진다. 서문안 당산의 명문은 현존 솟대이 조선후기설을 증명하는 데 결정적인 증거물이 아닐 수 없다. 돌솟대가 생성시기의 수수께끼를 풀어 준 셈이다. 새는 절에도 들어가 앉았으며, 거기에 또한 증거물을 남겼다. 고성땅 통일전망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대개 건봉산의 명찰 건봉사를 들렀다 왔으리라. 동부전선 휴전선 근처의 고즈넉한 건봉사를 찾아들면, 근세의 명화가 김규진의 글씨가 걸려 있는 불이문을 통과하게 된다. 불이문을 지나자마자 언덕배기에 사각진 돌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위에 새가 않아 있다. 불기 2955년 무진. 편년이 뚜렷하다. 옛 불기법으로 따져보니 1928년의 일이다. 숙종조에서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불과 200년 사이에 솟대문화가 정착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가 아닐까. 이 돌솟대는 민간에 널리 퍼진 솟대문화가 사찰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시켜 준다.
솟대가 조선 후기에 널리 퍼졌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물은 유랑예인집단인 솟대쟁이패다. 놀이판 한가운데에 솟대와 같은 큰 장대를 반듯이 세우고 줄을 늘어뜨려서 갖가지 재주를 부린 데서 솟대쟁이패란 이름이 붙었다. 이 패거리는 곡예를 위주로 했으니, 서커스의 원조격이다. 주요 레퍼토리인 솟대타기는 높은 장대에 매단 평행봉 넓이의 두 가닥 줄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두손걷기, 한손걷기, 고물묻히기 따위의, 묘기를 보이는 것이었다. 당시 대중의 사랑을 받던 예인집단 이름에 솟대가 붙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또한 조선 후기에 솟대가 보편적이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아닐까.
솟대를 우리의 상징물로
이들 솟대는 어떻게 세워질까. 솟대는 신성한 것이기에 솟대를 깎을 때 뽑힌 제관은 목욕제계하고 미리 점지해 둔 나무 중에서 잘 선정하여 베어낸다. 제관은 나무를 자르기 전에 간단한 제사를 지낸다. 나무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입조심을 해야 하며 일단 마당으로 옮겨놓고도 정성을 다해 깎아야 한다. 껍질을 벗기고 그냥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먹으로 무늬를 그리기도 한다. 새를 깎는 방식도 가지가지라서 정확하게 새 모양을 내기도 하고 비슷하게 생긴 나뭇가지로 흉내만 내기도 한다. 대나무를 잘게 갈라서 깃털로 달아주기도 한다. 때로는 입에 물고기 조각을 물게 하여 풍농을 기원하기도 한다. 새를 조각하는 소박한 손길은 그 자체가 단순 질박한 농민적 조형예술의 세계를 잘 보여주는 셈이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 사람들은 금기를 행하고 짚을 추렴한다. 줄을 꼬아 암줄과 숫줄로 만든다. 암줄이 이기면 풍년이 든다는 믿음은 동일하다. 그리고 줄다리기가 끝난 줄로 깎아 세운 솟대를 겹겹이 감아둔다. '솟대에 옷 입힌다' 라고 하는 이 의례는 설빔에 해당한다. 이밖에도 솟대는 다양하게 모셔진다. 강원도 강릉시 안목에는 진또배기 서낭이 서 있다. 성황님 예단이라고 하여 흰 종이를 접어서 실로 매어둔다. 진도군 군내면 세등리에는 솟대의 정상부에 소의 턱뼈를 걸어두며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에서는 솟대 밑에 돼지 아가리뼈를 묻어두기도 한다. 몇 해 전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연구자들에게 설문지를 돌린 일이 있다. '우리나라의 상징물로 무엇을 꼽겠는가?' 장승, 솟대, 초가, 한복, 떡문화...... 백가쟁명으로 견해가 제출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솟대를 우리나라의 상징물로 꼽자고 동그라미를 쳤다.
상징물이 되자면 보편성이 있어야 하는데, 위에서 예로 든 것들은 대체로 보편성에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너무 지나치게 종류가 복잡해도 조형물로 상징화하기 어렵다. 장승이 그렇다. 말이 장승이지 돌하루방, 벅수 등 지역적인 특성도 존재하고, 돌장승과 나무장승의 차별성도 있다. 그런 면에서 솟대는 긴 장대에 새가 올라 앉은 상징성 하나만으로 단순화가 가능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소견일 뿐이지만. 어떤 것이 우리의 상징물로 되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조금은 북방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훨훨 새가 날아서 만주벌판 광개토대왕비 위에도 앉고, 연해주의 옛 발해땅까지 날아가서 '발해를 꿈꾸며' 노래를 불렀으면 좋겠다. 분단의 철조망이 가로막힌 처지에 멀리 나는 새의 비상을 통해서라도 비원의 꿈을 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북방새 찌르레기를 통해서나마 남북의 아버지와 아들이 만났던 원병오(조류학자) 선생의 집안 이야기처럼 말이다.
지금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늘 꿋꿋하게 마을을 지켜주는 솟대. 해가 바뀌면 새로운 솟대가 세워져 임무를 교대한다. 일 년 동안의 고단한 짐을 내려놓고 멀리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렸을 적, 문설주에 기대 서서 저녁노을을 수놓으면서 이동하는 철새떼를 구경하던 추억이 새롭다. 저 새들은 어디로 갔다가, 언제 돌아오는 것일까. 바로 그 새떼들이 우리의 나무장대 위에 올라앉았다. 그 새들에게서 민족의 삶을 배우려는 우리들의 화두풀이가 얼마나 신명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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