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숫자 '3'의 비밀
신화 속의 숫자 3
옛날 천하세계 임정국 대감과 지하세계 김진국 부인이 아기가 없다가 공을 들여 미모의 아기씨를 얻으니 자지맹왕 아기씨라 이름지었다. 아기씨의 나이 15세에 이르매, 부모가 벼슬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하늘 공사를 올라간 동안에 시주 나온 도승이 딸아이의 머리를 '세번' 쓸어 임신시켰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펄펄 뛰면서 아기씨를 쫓아냈다. 아기씨는 황금산으로 남편을 찾아갔으나 '중이 부부 살림하는 법이 없으니 불도땅에 가 살아라' 하면서 외면한다. 할수없이 아기씨 혼자서 불도땅에 가서 아들 세 쌍둥이를 낳게 되었으니, 9월 초여드레엔 '본명두', 열여드레엔 '신명두', 스무여드레엔 '삼명두'가 탄생하였다. '삼명두'는 애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구박 속에 갖은 고생을 다한다. 그러나 워낙 총기가 있어 서당의 '삼천선비'들이 늘 시기하였다. 삼형제는 과거를 보아 모두 장원급제 하였으나 중의 자식인 탓으로 과거에서 낙방시키려 한다. 그러나 활쏘기에서도 삼형제가 이기자 결국 모두 장원급제를 시키고 만다. 그러나 삼천선비들이 흉계를 꾸며 모친을 '삼천제석궁' 깊은 곳에 가두어버린다. 집에 돌아온 삼형제는 삼천선비들의 흉계를 알고, 어머니를 찾기 위해 황금산 도당땅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제주도 무당의 조상이 탄생하는 내력을 담은 <초공본풀이>는 삼명두가 삼천선비의 목을 처버리는 데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그리하여 삼명두는 제주도 무당의 조상신격이자 3대 무구인 '천문', '신칼', '산판'을 일컫게 된다. 상당히 민중적이다. 삼천선비의 목을 칠 정도라면 민중적이다 못해 가히 '혁명'적이어서 프랑스혁명 시기의 로베스피에르와 단두대를 연상케 한다. 그런 삼명두가 제주도 무당의 조상이 되고, 나중에는 천.지.인을 관장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야기하려는 주체는 이 신화의 민중성이 아니다. 앞의 인용글에서 따옴표를 붙인 숫자 '3' 의 비밀이다. 제주도 신화에서 3의 중요성은 삼성신화의 본거지인 삼성혈에서도 두드러진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인 삼성혈에서도 두드러진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인 삼성혈에 가면 탐라를 만들었다는 고.양.부 세 성씨가 나왔다는 '세 구멍' 이 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신인' 이 한라산 북녘 기슭의 모홍혈에서 솟아났다고 한다. 삼명두나 삼성혈은 모두 신화속의 존재다. 신화는 어쩌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화야말로 인간들의 무의식의 소산이자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환상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와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화는 인간에게 환경을 지배할 수 있는 좀더 많은 물리적인 힘을 가져다주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신화는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인간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환상을 통하여 인간은 우주를 이해합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렇지만 과학적인 사고관을 가진 우리는 우리가 매우 제한된 정신력을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신화에 담겨진 3의 의미를 지나치게 간과해왔다. 우리 민족의 탄생신화에조차 녹아 있는 3은 가장 환상적인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민족신화에 3이 수없이 등장하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형성기부터 3이 매우 중요했음을 암시한다. 단군신화는 또 어떠한가. 삼위태백, 천부인 3개, 무리 3,000명, 풍백. 우사. 운사, 360여 가지 일, 삼칠일간의 금기...... 모조리 3이다. 실상 환인, 환웅, 단군의 '3대'로 이루어지는 '삼신' 체계가 고대신화의 원형을 이룬다. 임재해 교수(안동대)는 그의 저서 <민족신화와 건국 영웅들>에서 단군신화의 인간상을 셋으로 나눈다. 신격으로서의 환웅, 동물격인 곰녀, 그리고 인격인 단군이 3의 원형체계라는 것이다. 해모수가 동명왕으로 이어지고, 동명왕이 유리왕으로 이어지는 고대 부여족의 신화적 중심인물도 '3대'이기는 마찬가지다. 황해도 구월산에 가면 환인, 환웅, 단군의 '삼신'을 제사하는 '삼성사' 가 있다. 고려 말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아사달에 입산하여 산신이 되었다' 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삼성사는 오랜 세월 민족의 시조 단군의 본향으로 모셔져 왔음을 알 수 있다. 곳곳에 '삼신산' 이 퍼져 있는 것도 이 흔적이다. 이수자 교수(금성환경대)는, '고대 서사문학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3대로 이루어진 체계는 하나의 신화적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고 설명하고 있다. 심지어는 염상섭의 소설 <삼대>의 문학적 원형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삼대>는 한말 세대의 보수성, 개화기 세대의 정신적 파탄, 식민지 세대의 진보성으로 대표되는 조. 부. 손의 삼대를 상징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원형질로서 3이 현대소설에까지 집단무의식적으로 잠복된 사례라고 여겨진다.
삼신할매 점지받아
단군신화가 생성된 시대로부터 반만 년의 세월이 흘렀고, 우리는 신화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신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민족의 신화는 우리들 안방을 차고들어와 삼신신앙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산부인과가 드물었던 시대에는 아기를 받을 때, 난 그 뜻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훗날에야 그 듯을 알아차렸고, 그 분이 누군가 알고 싶었을 때 그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삼신할매를 모르는 이는 없다. 삼신이 안방을 점거하게 된 경로는 어땠을까. 나는 민족을 탄생시킨 삼신원형이 그대로 민족 구성원 개개인의 탄생으로 이어져서 아기 낳는 안방의 신이 되었다고 본다. 삼신할매가 '빨리 나가라'면서 아기 엉덩이를 차서 생긴 몽고반점을 우리들 대부분은 가지고 태어났다. 몽고반점이야말로 북아시아 종족들 사이에서 서로간의 공통점을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표정이 아닌가. 나는 학생들에게 가끔 농담을 던지곤 한다. 어릴 적, 몽고반점이 없었던 사람은 분명히 조상이 다른 계통일 것이니 선대의 핏줄을 조사해보라고.
예전에는 아기 낳으러 안방에 들어갈 대, 고무신을 거꾸로 벗어놓았다고 한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처럼 제왕절개를 해야만 아기를 낳을 수 잇는 산모는 모두 죽었을 운명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삼신은 바로 이런 여인들의 출산을 관장하는 신이다. 아기의 건강도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전에는 '아기 낳아 반타작' 이라는 말이 있었다. 아이를 열 명 낳아서 다섯 명 정도가 살아남으면 괜찮은 '수확'으로 보았다. 전염병, 굶주림 등으로 어린아이들이 죽는 경우도 많았던 당시에, 의학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어머니들은 삼신에게 기원하여 해결하려고 했다. 아기가 커서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도 삼신의 배려는 절대적이었다. 아기의 포태, 출산 뿐 아니라 15세 정도까지는 양육을 도맡아준다고 믿었다. 삼신은 삼신할매, 삼신바가지, 삼신할머니, 산신이라고도 부른다. 대개 태를 보호하는 신을 삼신이라고 하였다. 제주도의 <명진국 생불할망 본풀이>에서는 삼신 할멈의 탄생과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삼신할멈의 나이가 일곱 살 되던 해 정월 초하루 인시에, 옥황상제님이 불러서 '너는 인간세계에 가서 아기를 낳게 하는 삼신할멈이 되라' 고 명하였다. 그래서 삼신할멈은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고 내려오다가, 아기를 낳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낳게 해주었다. 삼신할멈은 은가위로 그 아이의 탯줄을 끊고 석자 실로 잡아맨 다음, 더운 물로 목욕시키고 유모를 불러 젖을 먹이는 한편, 미역국을 끓여 산모에게 먹였다. 그리고 사흘 후에 산모에게 쑥물로 목욕케 하고 태를 사르고 아기에게는 배내옷을 입혔다......
민간에서 삼신을 모시는 과정도 위와 같다. '삼줄(탯줄)' 을 끊고 나와 생명 탄생이 이루어지면, 밥과 국 '세 그릇' 을 바치며 '삼칠일' 간의 금기를 행한다. 신체는 안방의 아랫목 시렁 위에 모시며 '삼신바가지' 와 '삼신단지' 로 상징된다. 바가지에는 햇곡을 담아 한지로 봉하여 안방 아랫목 윗벽에 모셔두며, 단지의 경우에도 알곡을 담아 구석에 모신다. 지방에 따라서는 삼신자루(혹은 삼신주먼, 제석자루)라 하여 백지로 자루를 지어서 그 안에 백미 '3되 3홉'을 넣어 안방 아랫목 구석 높직이 매달아 놓기도 한다. 차제에 무속에 많이 등장하는 삼불제석의 성격도 보다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삼신신앙의 확대 과정에서 등장한 삼불제석도 아기를 점지해주고 병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신이 된다. 삼불의 '불'을 불가에서의 부처로 봄은 문제가 있을 성싶다. 원래는 근본을 뜻하는 순수 우리말인 '부리' 에서 나온 말이 후대에 불교와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삼신신앙은 직접 불교계에 침투하였다.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으나, 남아선호사상이 팽배하던 조선시대만 해도 여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곳이 사찰의 삼성각(혹은 삼신각)이었다. 산신과 칠성, 독성의 삼신을 모신 삼성각은 전래 토착신앙과 외래 종교였던 불교가 만나 융합한 것이다. 어느 나라의 사찰에 삼신신앙이 있던가. 이처럼 3은 신화시대 이래로 가장 원초적인 생명 탄생에서부터 심지어 불교의 토착화 과정에까지, 민족생활 전반에 걸쳐 뿌리내렸다.
3은 전 세계적인 절대수
동서양을 막론하고 '3'은 완성, 최고, 최대, 신성, 장기성, 종합성 따위로 인식되고 있으니, 우리만 3을 중시한다고 볼 수는 없다. 엔드레스는 <수의 신비와 마법>에서 3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라이문트 뮐러는 1903년 논문에서 설화와 문학, 그리고 미술에 나타난 3이라는 수의 중요성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는 자연을 유심히 관찰하면 3으로 이루어진 구조를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물과 공기와 흙을 보고 세 가지 형태의 세게가 존재한다는 사고를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인간은 물체의 세 가지 상태(고체. 엑체. 기체)와 피조물의 세가지 집단(과일. 식물. 동물)을 발견했다. 인간은 식물에서는 뿌리와 줄기와 꽃을, 과실에서는 껍질과 과육과 씨앗을 밝혀냈다. 또한 태양은 아침, 정오, 저녁에 각각 다른 모습을 갖는다고 여겼다. 실제로 모든 경험은 길이와 높이와 넓이라는 공간 좌표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3차원이다. 일체의 삶은 생성과 존재와 소멸로 표상될 수 있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라는 세 국면으로 진행되며, 완전한 전체는 정립과 반정립, 그리고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색체의 혼합은 삼원색인 빨강, 파랑, 노랑에서 비롯한다.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러한 자연현상 속의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이다. 다만 이를 인식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서구의 3개념이 가장 절대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역시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등장, 후에 정립된 완벽의 개념이다. 우리나라의 종교관이 3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유사성이 보인다. 전 세계적으로도 3과 종교는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시인들의 숫자 이해도를 조사한 인류학 보고서에 따르면 1, 2, 3을 가장 쉽게 이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숫자 3이 작은 숫자라는 데서도 비롯된다. 0과 1과 2를 거치면 바로 3이 나온다. 아기들이 숫자 개념을 배워나갈 때도 하나, 둘, 셋...... 이쯤에서 멈춘다. 셋 정도를 다 배우고 나서 다섯 손가락 범주인 5, 그 다음엔 두 손을 가지고 하는 열 손가락 범주의 10까지 배운다. 3이 어떤 숫자보다도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무의식중에 각인된 흔적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중국에서도 3이 두루 쓰였다. 중국 청동기문화의 대표적인 제사도구들은 대개 세 개의 다리로 되어 있으니 제기를 뜻하는 정이란 글자도 다리 셋을 형상화한 것이다. 고대 동방의 삼재설은 천. 지. 인 관념을 3에 투영한 것으로 널리 쓰여져 왔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한자문화권에 편입되면서 한문식의 3개념이 강화되었다. '주자가례'가 강화되면서 귀착된 삼강오륜, 삼강행실도, 삼일장, 삼배, 삼색실과, 삼탕등이 그것이다. 삼황, 삼도, 삼족, 삼계도 들어온 것들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한자를 풀어서 '--' 과 '==' 를 합한 것을 '한자 3' 으로 보았다. '한자 3' 을 거꾸로 세우면 '내 천' 자가 되어 '셋' 과 '샘' 은 어원도 같고 무궁무진함을 뜻하기도 한다. 문자가 생성되던 상고시대부터 3은 늘 완벽의 상징이었다.
불교에서는 조금 어려운 말로 삼성이라고 하여 일체의 세간법을 그 본질 면에서 선, 악, 무기의 셋으로 보는 교설이 있다. 이 삼성의 입장에서 관조된 세계는 공(없음)일 뿐만 아니라 진실한 유(있음)가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세상의 있고 없음이 모두 삼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말이다. 불보. 법보. 승보를 의미하는 삼보, 삼보에 귀의하는 삼귀의, 순수한 집붕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지는 상태인 삼매, 중생들의 세게를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누는 삼계등은 모두 불교에서 전래된 것이다.
순수 조선 혈통의 3계보를 찾아서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우리들의 원초적인 '조선식' 3일까. 아무래도 한민족의 기원과 더불어 시작된 3 선호도를 규명하자면 앞에서 예시된 신화시대, 혹은 신화의 전승체인 무속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그 원초적 모습이 모일 것이다. 소주를 마실 때, 술을 조금 뿌리는 행위가 있다. 누군가 이를 보고 이렇게 농담을 던진 기억이 난다.
"소주회사에서 술을 조금 버리는 풍습을 일부러 만들어냈다. 2홉짜리 한 병이야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수천만 병으로 따지면 얼마나 이들이 되겠느냐."
소주회사가 정말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실은 오래 된 '고시레' 풍습에서 비롯된 관습이다. 가을 상달고사를 끝내고 떡을 조금씩 떼어내어 멀리 던지면서 '고시레' 를 외친다. 고시레는 3번을 하게 되어 있다. 2번이나 4번은 안 된다. 왜 3번을 해야 하는가는 알 수 없다. 조상 대대로 그렇게 해온 탓이다. 조상 대대로 해왔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따로 숫자 3의 현실태가 드러나고 있다.
서울 근교인 구리시 갈매동에서는 격년마다 봄이 오면 도당굿을 성대하게 지낸다. 이 굿에는 2월 1일에 삼화주를 뽑으며 하는 부정풀이가 있다. 제관을 뽑고 나면 집집마다 무당이 들어가서 부정을 씻어주는데 주인네가 상을 내놓는다. 상에는 막걸리 3 잔, 밥 3 그릇, 무나물 3 그릇을 올린다. 어느 집이나 한결같이 3 그릇씩 9 그릇을 내놓는다. 이 마을말고도 여러 마을굿의 제물 차림에서도 하필이면 '3말 3되 3홉'을 고집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또한 마을의 신당에 금줄을 치고 황토흙을 좌우에 세 무더기씩 놓는 것이 원칙이다. 이 역시 토속적인 3관념에 속한다. 언뜻 보기에 한문식 표현으로 들어온 수관념이라 여겨지는 것들 중에서도 순수 조선식 3관념이 있다. 고려시대의 삼소가 그것이다. 수도였던 개경에 땅기운을 빌어 국가의 번성을 기원하고자 삼소라는 것을 두었다. 좌소. 우소. 북소라고 하여 좌우와 북쪽에 소를 두었는데, 소는 소리. 솔. 솟을 의미하며 무언가 솟구치는 것을 뜻한다. 3이 솟으면 무언가 국가의 흥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묘청이 말한대로 국풍의 소산이라고나 할까.
민족 고유의 3과 관련,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하나 이야기하겠다. 최근 한국국제교류제단에서 주관하고 세계적인 한국학 연구자 30여 명이 참여한 현지답사 프로그램에 강사로 나간 일이 있었다. 그때 베트남의 한 연구원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나라의 유수기업들 이름이 지니는 문화적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난감했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배경과 관련된 기업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삼성이라는 이름이 번뜩 뇌리에 스쳤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별의 위치에 따라 하늘을 크게 삼원과 28숙으로 나눴다. 삼태성을 중심으로 28숙의 별자리가 우주의 3대축인 3원을 이루니 숫자 3은 별자리와 우주에서도 관철되는 셈이었다. 그러니 삼성그룹은 우리 고유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자신의 이름에 사용한 것이 아닌가! 대략 이런뜻으로 설명을 하니 그는 수긍하는 눈치였고 나는 위기를 숫자 3으로 넘긴 셈이다. 하지만 고 이병철 회장이 처음 삼성을 세울 때 그런 민족문화까지 고려하여 지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삼성은 내재적으로 민족적 별자리의 운기를 타서 그런지 국내 최고의 그룹으로 부각되고 있지 않은가. 삼성의 이런 모습이 작명 덕분인지 조상들의 음덕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적인 기업으로 커가고 있는 걸 보면 어쩐지 창업자의 마음속에 무언가 영감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고대 동방의 삼재설의 천. 지. 인 수관념은 그대로 한글 창제원리로도 작용하였다. 홀소리 글자의 기본을 셋으로 정하여 '.' 는 하늘, 'ㅡ' 는 땅, 'ㅣ' 는 사람이 서 있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세상은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으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를 제압하고 고려 개국을 기념하여 옛 백제땅에 세운 논산군 연산의 개태산에 가면, 누구나 단군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앞마당의 건물들이 나란히 '3동' 으로 붙어 있는 특이함울 관찰할 수 있다. 이 역시 단군신앙에 내포된 3의 형상화로 보인다. 8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고대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 속에서 이들 삼성의 위상은 늘 주목 받고 있다. 오늘날 북한에서는 대대적으로 단군릉을 건설하는 등, 단군신화의 현실성은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순수 조선혈통의 숫자 3' 이 아직 그 임무를 끝내지 않았다고나 할까. 우리의 3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로 음악에서의 삼박자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삼박자는 풍물굿의 삼채장단, 세마치에서도 두드러진다. 우리나라 시문학에서의 3이 지니는 음률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향악에서도 삼분손익법이 있어 음의 길이를 3등분하는 법칙이 존재한다.
3은 민간의 주술적 기복과도 결합되었다. '삼재수' 가 그것이다. <동국세기>에서는 삼재 막는 삼재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 유. 축이 든 해에 출생한 사람은 해. 자. 축이 되는 해에 갑. 자. 진이 든 해에 출생한 사람은 인. 묘. 진이 되는 해에, 해. 묘. 미가 든해에 출생한 사람은 사. 오. 미가 되는 해에, 인, 오. 무가 든 해에 출생한 사람은 갑. 유. 인이 되는 해에, 각각 삼재가 든다. 세속에서는 이같은 복설을 믿고 세 마리의 매를 그려 액을 막는다. 생년으로부터 9년 만에 삼재가 들기 때문에 이 삼재의 해에 해당하는 3년간은 남을 범해도 안 되고 모든 일에 꺼리고 삼가는 일이 많다. 위 삼재법을 오늘날은 개인적 액막이 정도로만 축소 해석하는 경향이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개인적인 액막이 이외에도 '큰 삼재'라고 하여 국토를 손상시키는 화재. 수재. 풍재를 꼽았고, '작은삼재' 라고 하여 사람을 손상시키는 도병재. 역병재. 기근재 따위를 꼽았다. 막말로 비행기 떨어지고, 철도가 이탈하고, 가뭄과 홍수가 거듭되고, 다리와 지하철이 무너지고, 백화점도 무너지는 식의 재해를 어떻게 개인적인 액막이로 막겠는가. 옛 사람들은 자연재해와 인위적 재해를 삼재로 보아 보다 큰 차원에서 액막이 장치를 했는데, 오늘날은 순전히 개인적인 재해만을 점쟁이에게 가서 액땜하고 오는 식으로 바뀌었다.
'삼재' 를 당한 사람은 단순하게 '세 마리' 의 매를 그려 문설주에 붙인 게 아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역동적인 삼두일족응 부적을 만들어 부착했다.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가렴주구로 시달리던 민중들에게 세 개의 대가리를 가진 매는 강력한 힘에의 열망 자체다. 세 개의 대가리가 먹이를 쪼아보는 매서운 눈매를 통해 민중은 자신의 힘을 보이고자 했다. 민중의 항거를 담은 황해도 장산곶의 장수매설화도 그같은 염원을 담은 것이다. 3의 역동성을 찾자면 멀리 만주 벌판으로도 떠나야 한다. 집안의 고구려 무덤 각저총을 찾아가면 고구려의 상징물 삼족오를 만나게 된다. 어두운 무덤 안에서 다리가 셋이고 머리가 하나인 까마귀가 날고 있다. 삼족오의 비밀은 바로 천제 해모수에게 있으니, <삼국유사> 권1에서는 이렇게 할애하고 있다.
천제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홀승골성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라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로써 성을 삼았다. 그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옮기게 되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부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 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라 일컬었다.
왜 해모수라고 했을까. 해모수의 '해'는 풀이할 해로 표현되었을 뿐, 우리가 구음으로 부르는 '해' 를 한자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태양신 그 자체를 일컫는다. 이런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는 고대사회의 태양관을 드러내주는 결정적인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삼족오가 비단 고구려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유의해야 한다. 신라에서도 까마귀는 태양신이었다. 중국의 <시경>에 하늘나라 임금이 보낸 현조가 나오는데 이 역시 까마귀를 뜻한다. 현조는 여느 까마귀가 아니라 태양을 상징한 까마귀다. 까마귀는 비단 중국뿐 아니라 일본, 심지어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까마귀는 어쩌면 신화시대의 '만국 공통의 태양새' 였는지도 모른다. 북유럽의 '시경' 이라고 할 수 잇는 <에다>에서도 태양의 상징인 까마귀가 등장한다. 박시인은 그의 책 <알타이 신화>에서 까마귀가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 이란, 그리고 성경에도 있었다고 하면서 알타이 신화가 이동한 것으로 확대 해석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고구려시대에 삼족오를 무덤에 그릴 정도로 까마귀를 확실하게 숭배했다는 증거물을 갖고 있다. 태양신을 상징하는 삼족오, 오랜 세월 뒤에 제작된 조선시대 서민들의 삼두일족응은 똑같이 3에 기초한 제의적 상징물이다. 하나는 머리가 셋에 다리가 하나, 다른 하나는 다리가 셋에 머리가 하나다. 상징이 암시하는 바가 뒤바뀌었을 뿐, 고구려시대부터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3은 민족사에서 결코 적극적인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나는 이들이야말로 '조선적인 3' 의 가장 두드러지는 미술적 상징으로 내세우고 싶다. 시야를 넓혀 동북아시아 전체로 확대하면, 시베리아의 3 관념이 우리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천상. 지상. 지하로 세상을 3분하는 관념을 꼽을 수 있고, 아예 우주를 9로 나누기도 한다. 그들 9단계의 우주는 다시금 상. 중. 하로 각각 3단계 구분이 이루어진다. 3. 3. 3으로 이루어진 각각의 세계는 시베리아인들이 꿈꾸던 원초적인 우주관이다. 우리의 선조들 역시 이런 사고를 지녔을 것이다.
숫자 '3' 의 복권을 꿈꾸며
3은 저 홀로 쓰여지는 것만도 아니다. 3이 3번 반복되어 9를 이루면서 강한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마을굿에서는 서말. 서되. 서홉으로 쌀을 준비하여 신성의 의미가 한결 강해진다. 아홉수라고 하여 29살에 결혼을 피하는 관념 속에는 이미 '삼재' 라고 하는 액이 3번 반복된 마지막 해라는 계산법이 숨겨져 있다. 아기를 낳고 금줄을 치면서 몸조리를 하게 되는 삼칠일(21일간)에도 7이 3번 반복된 의미가 담겨 있다. 삼현육각. 삼정승 육판서처럼 3과 3의 배수인 6이 결합하여 강조되기도 한다. 무언가 잘못을 하고서 부지런히 도망을 칠 때, 우리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고 말한다. 3이 열두번이나 반복되었으니 대단한 속도감을 뜻한다. 여기서 열두 번은 대단히 많다는 속뜻을 지니고 있다. 반복은 좋은 것을 더욱 좋게 만든다. 우리는 늘 홀수가 두 번 겹친것을 선호했다. 1월 1일의 설날은 말할 것도 없고, 3월 3일의 삼짇날, 5월 5일의 단오, 7월 7일의 칠석, 9월 9일의 중구절을 중시했다. 어느 누가 2월 2일, 4월 4일, 6월 6일, 8월 8일, 10월 10일을 중시하는가. 3은 양수이고 길한 숫자인 탓으로 양수가 겹쳐진 삼월 삼짇날(3.3) 따위를 길일로 친 것도 반복의 원리다. 삼월 삼짇날은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풀리며 냇가의 버들강아지도 눈을 트고 모처럼 기지개를 펴게 되는 길일이다. 중국사람들 최대 명절인 9. 9절도 바로 3. 3이 반복된 결과다. 이날은 양기가 그득하여 천지만물이 힘을 얻게 된다고 믿어왔다.
3을 좋아하는 수관념은 짝수보다도 홀수를 선호했던 수관념과도 관계있다. 우스갯소리로, 술집에서 맥주를 시킬 때 '1. 3. 5. 7. 9' 를 고집하는 것도 무의식중에 이러한 수관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지난 학기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민속학 강좌를 듣는 학생들 100여명을 상대로 '한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선호도 조사를 해보았다. 내심 '3' 이 단연 우위를 차지할 것으로 알았는데, 결과는 의외였다. 많은 학생들이 '7' 을 꼽고 난 다음에야 '3' 에 표를 던졌다. 사실 칠석. 칠성 따위를 보면 선조들이 '7' 을 좋아했음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젊은이들이 칠석 때문에 7을 선호한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서양식의 '럭키세븐', '세븐스타' 영향탓이 아닐까.
우리 민족의 신화와 풍습 속에 항상 자리잡았던 3. 나는 숫자 3과 우리 민족의 수의식을 생각할 때마다 3이 지닌 상징체계야 말로 원초적인 문화임을 거듭 느낀다. 다른 어떤 숫자보다 3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 더 늦기 전에 민족 고유의 숫자관을 다룬 '인문학적 숫자론' 이라도 나오길 바라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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