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우리 민족은 왜 흰옷을 입었을까
비숍 여사가 목격한 흰옷 빨래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이었고, 1894년 겨울과 1897년 봄 사이에 네 차례나 우리나라를 다녀간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1898년에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Korea and Her Neighbours>을 출간하였다. 그 책에서 그녀는 한국식 빨래를 묘사하면서 흰옷을 이렇게 서술하였다.
한국 빨래의 흰색은 항상 나로 하여금 현성축일에 나타난 예수님의 옷에 대해 성 마가가 언급한 '세상의 어떤 빨랫집도 그것을 그토록 희게 할 수 없다'는 말을 기억하게 했다.
잿물에 담가두었다가 펄펄 끓여서 순전한 흰색을 내게 하는 흰옷 빨래법이 그녀에게는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비숍 여사 말고도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흰옷 풍습을 주목하였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은 흰옷 문제에도 여지없이 칼날을 들이댔다. 도리야마 키이치는 고려가 몽골족에 망하면서 조의를 표하기 위해 흰옷을 입기 시작했다고 멋대로 주장했다. 우리 예술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던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년)는 조선민족이 겪은 고통이 한으로 맺혀진 옷이라고 하였다. 도리야마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므로 논외로 치고 문제는 야나기 식의 주장이 지금껏 반복되는 데 있다. 그는 <조선의 미술>(신조, 1922년 1월호)이란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색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이 세상에는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다. 그렇지만 이처럼 기이한 현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역사가가 아니므로 이러한 의복이 어느 시대에 생겼는지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러나 흰옷은 언제나 상복이었다. 쓸쓸하고 조심성 많은 마음의 상징이었다. 아마 이 민족의 맛본 고통스럽고 의지할 곳 없는 역사적 경험이 이러한 의복을 입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어쨌거나 색이 빈약하다는 것은 생활에서 즐거움을 잃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흰옷이 상복이라니! 나는 야나기의 주장이 식민지적 한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본다. 민족사적 위기와 고단한 역사를 강조, 민족의 한을 읊조려줌으로써 식민통치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목적성이 있었다는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니라 사람들이 흰옷을 즐겨 입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 속의 흰옷 여행
중국사람들은 흰옷을 죽은 옷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검은옷을 즐겨 입었다. <주례>의 춘관 사복조에 이르길, 역질이나 기근이 크게 늘어나 홍수, 가뭄이 들면 임금이 흰옷을 입는다고 하였다. 흰옷을 성스럽게 생각하기는커녕 불길한 옷으로 여겼던 중국인의 색채관이 드러난다. 일본인들은 남색을 즐겨 입는다. 반면 서양에서는 검은옷이 죽은 옷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상복은 물런이고 일상복으로도 흰옷을 널리 입었다. 그리하여 우리 한민족을 '백의민족'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과연 우리가 백의민족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왜 당연한 것을 가지고 의문을 품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가 백의민족의 된 연유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고전 읽기'를 늘 주장하면서도 정작 고전을 읽지 않는 경우가 많듯이, 백의민족이란 의미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우리가 그렇듯 백의민족이라면, 왜 오늘날의 우리들은 흰옷보다 원색을 더 즐겨 입는가. 과연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흰옷을 원초적으로 더 선호하는가. 문제가 불분명할 때는 아무래도 역사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리라.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부여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북사>의 '열전 고구려조'를 보면 주몽이 도망치다가 세 사람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한 사람은 삼베옷을, 한 사람은 무명옷을, 그리고 한 사람은 부들로 짠 옷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이들이 입었던 옷들 모두 흰색에 가까운 소색이다. <북사>와 <수서>의 '신라조'에는 복색에서 흰빛을 숭상한다고 말하였다. <구당서> '고구려조'에는, 의상과 복식에서 왕만이 오채로 된 옷을 입을 수 있으며, 희 비단으로 만든 관과 흰 가죽으로 만든 소대를 쓴다고 하였다. 반면에 백성들은 갈을 입고 고깔을 쓴다고 하였다. 같은 책 '신라조'에는 풍속, 형법, 의복 등이 고구려, 백제와 대략 같으나, 조복은 흰빛을 숭상한다고 하였다. 불행하게도 이 시대를 기술한 우리들 스스로의 기록은 없다. 그러나 중국사람들의 기록을 통해서나마 고대사회에서 우리민족이 흰빛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귀족과 민중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왕은 오채(적, 황, 청, 백, 흑) 옷을 입어 민중들과 차별을 두었다. 민중들의 옷은 흰색에 가까운 소색인 삼베나 무명옷 이었던 반면 중국 복식을 받아들인 지배층은 채색옷을 입었던 것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흰옷 선호도는 바꾸지 않았다. 명나라 사람 동월은 <조선부>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옷은 흰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 또한 성글다."
조선시대의 흰옷 선호도는 그대로 구한말까지 이어졌다. 남연군묘를 도굴하러 왔던 오페르트는 그가 남긴 <조선 기행>에서 남자나 여자 모두 옷빛깔이 희다고 하였다. 일제시대에도 흰옷을 즐겨 입었음은 당대에 찍은 빛 바랜 사진첩에서도 두루 확인된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흰옷을 즐겨 입었음은 쉽게 확인되었는데 왜 흰옷을 즐겨 입었는가는 불분명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태양과 백마, 백두와 백설기
아무래도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적극적인 주장을 내놓은 사람은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조선상식문답>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대개 조선민족은 옛날에 태양을 하느님으로 알고 자기네들은 이 하느님의 자손이라고 믿었는데 태양의 광명을 표시하는 의미로 흰빛을 신성하게 알아서 흰옷을 자랑삼아 입다가 나중에는 온 민족의 풍속을 이루고 만 것입니다. 그는 덧붙여서, 조선뿐 아니라 세계 어디서고 태양을 숭배하는 민족은 모두 흰빛을 신성하게 알고 또 흰옷 입기를 좋아하니 이를테면 이집트와 바빌론의 풍속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밝(아래아)사상' 을 흰옷 숭배에 적용한 것이다. 태양과 흰색 숭배, 고대사회의 제례의식이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나름의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복식 이외에 흰색을 숭상하는 생활기풍은 없었을까.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긴 하지만, 북애자가 썼다는 <규원사화>를 보면 흰색을 영험스럽게 대하던 태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흰 소를 잡아가지고 태백산록에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 예전의 법에 하늘에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먼저 좋은 날을 정하고 흰 소를 골라 잘 기럴서 제사 지낼 때가 되면 그 소를 잡아 머리를 산천에 제물로 드리니 백두란 쇠머리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대개 하늘에 제사 지내고 조상에게 보답하는 예식은 단군에게서 비롯되었다. 흰 머리를 뜻하는 백두의 연원이 그럴듯하게 설명된다. 흰 동물을 숭배하는 민족정서는 백마, 백록, 배호 따위에서도 두드러진다. 백마는 늘 행운의 상징이었고, 한라산 꼭대기가 백록담이 된 것도 길조와 관련된다. 좌청룡 우백호에서 백호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것 또한 흰색에 대한 민족정서를 잘 대변한 것이라 하겠다. 백마 숭배는 동북아시아 유목민문화의 보편적인 풍습이었다. 전통적으로 시베리아를 위시하여 몽골, 만주, 우리나라 같은 몽골리언 계통에서는 백마를 숭상한다. 천신에게 백마를 제물로 드리는 풍습은 매우 오랜 전통으로 보이는데, 백마의 희귀성 때문에 영물로 여겼던 탓이다.
나는 아무래도 우리 민족의 흰색 선호가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을 백설기에서 찾고 싶다. 나 자신도 어렸을 적부터 백설기를 참 좋아했다. 떡고물이나 속의 내용물에 따라서 먹기 싫은 떡이 있음에 반하여, 백설기는 담백한 맛 때문에 누구나 좋아한다. 민족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 민족신앙일 것이고 신앙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가 제물을 올리는 것인데, 우리 생활에서 떡은 매우 중요한 제례음식이다. 제례에 쓰는 떡은 떡문화의 다양성만큼이나 복잡하나, 막상 가장 신성한 제사를 올릴 때는 순수 무색의 백설기를 올린다. 백설기는 쌀가루를 그대로 찧어낸 '원초적이 떡'이다. 칠석날 소찬으로 깨끗한 제를 올릴 때, 산에 가서 산신에게 간소하면서도 엄정한 제를 올릴 때, 백설기는 필수품이다. 돌덕으로 백설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농경 정착이 이루어진 이래로 쌀은 그 자체가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흰쌀의 순수한 결정으로 빚은 백설기는 그래서 농경민족의 상징적인 제물이 된다. 혹자는 우리 민족의 흰색 선호가 숭배의식 이외에 다른 이유도 있다고 본다. 염료기술의 미발달이 자연 그대로 짠 옷감을 입게 하였으리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삼베나 마 같은 옷감을 그대로 입을 수밖에 없는 낮은 수준의 염료기술 땜누에 흰옷 선호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에는 어느 정도의 사회, 역사적 진실이 담겨 있다. 고대 및 중세사회에서는 염료기술이 제한적으로 보급된 탓에 색감에 따라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감이 비싸서 사용이 어려웠다면 하다못해 먹물이라도 들여 입었을 것이 아닌가. 중국사람들이 검정옷을 즐겨 입은 것과 비교해 흰옷을 선호한 것은 민족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초적 본능, 흰옷 선호
나는 우리 민족의 흔옷 선호가 민족 형성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원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싶다. 흰옷 선호를 하게 된 배격 설명을 위하여 두 가지 사실을 들어본다. 먼저 몽골과의 비교문화사적인 접근을 통해서 흰색 숭배의 '원초성'을 규명할 수 있다. 몽골인의 속담에 '흰색에서 시작하여 흰색으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몽골비사>에는 원나라에서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홍제와 백제로 나눈다고 하였다. 백제는 몽골족이 좋아하는 젖으로 만든 흰 술을 올리는 의례다. 왕족뿐 아니라 민간의 서민들도 모두 백색을 즐겨서 백색음식, 백색옷, 백색의 집이 즐비하다. 칭기즈 칸을 모신 탑도 흰색이다. 민속학회의 1990년 공동조사보고서인 <몽골민속>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몽골족은 백색 속에 충만한 희망이 깃든다고 믿었고, 급기야 백색신앙으로까지 번져 순결과 결백의 상징, 복록의 상징, 지고무상의 신앙적 색깔로 굳어지게 되었다.
아무래도 몽골사람들이 흰색을 숭배하는 풍습은 같은 몽골리언 계통인 우리와 무관할 것 같지가 않다. 민족 형성과정에서도 그 영향이 미치지 않았을까.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흰색 숭배는 흰색 자체의 순수성을 즐기던 민족성에서도 비롯되었다고 본다. 섹계적인 색체연구 권위자 파버 비렌은 <색체심리>에서, '흰색은 완전한 균형을 이룬 색이며, 그 색체가 주는 느낌도 깨끗하고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흰색은 정서적으로 중립적인 색이라고도 했다. 같은 책에서 색체연구가 판코스트가 기술한 다음의 말을 상기하자.
흰색은 가장 순수한 본체다... 흰색은 활동의 균형, 즉 건전한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색이다.
색체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 민족이 흰색을 선호했음은 '빛의 가장 순수한 본체'를 사랑했다는 말이 된다. 흰색은 완전한 균형을 이룬 색이라는 지적에서 우리의 흰옷이 지니는 색체학적 위상이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흰옷에 담긴 역사적 의미
흰옷은 역사적으로 보면 민중들의 투쟁의 산물이기도 한다. 고대사회의 지배층은 자신들과 민중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색깔을 통제했다. 지배층은 흰색 이외의 다양한 색상을 택함으로써 민중들과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한 예로 <신당서>를 보면, 백제에서는 지배층이 붉은색 계통을 입으면서도 민중들에게는 금지시켰다고 밝힌다. 그렇다면 당대의 지배층은 흰옷을 거의 입지 않았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지배층도 흰옷을 즐겨 입었는데 다만 관복으로 채색옷감을 택하였고, 자신들의 특권을 차별화시키기 위해 민중들은 채색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고려시대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도경>을 남긴 서긍은 '고려의 평복은 백저포로서 농상민에서 도사에 이르기까지 두루 흰옷을 입었을뿐더러 왕 자신도 백저포를 입는다'로 하였다. 민중들과 지배층 모두 흰옷을 즐기는 가운데, 채색옷만은 민중들이 마구잡이로 입지 못하게 하여 신분질서의 유지에 활용한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배층의 색깔 통제 때문에 우리 민족이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 시각이다. 고려시대 모화적인 복식정책이 개입된면서 흰옷을 입는 행위가 흡사 '민중운동'을 방불케 하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사건의 발단은 오행사상을 비주체적으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말 충렬왕 때(1275년), 오행사상으로 고려는 동이므로 목이 되고, 목은 청이니 흰옷을 금지시키고 푸른옷을 입어야 한다고 영이 내려졌다. 하지만 민중들의 반발이 거세 고려 말기에는 흰색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국가가 권하는 푸른옷도 널리 입었다. 기왕의 신분적 색깔 통제에다가 사대주의적 태도가 결합된 복식정책은 그대로 조선시대에까지 이어졌다. 태조, 세종, 연산군, 인조, 현종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푸른옷을 권장하였으며, 심지어 숙종대왕은 아예 푸른옷의 착용을 국명으로 내렷다. 민중들은 모두 청색으로 통일시키려는 신분사회다운 발상이었다. 민중들이 이런 청색옷 권장을 순순히 따랐을까. 지배층의 의도는 늘 빗나갔다. 때가 쉽게 타므로 빨래품이 많이 드는 '비경제적 색깔'임에도 불구하고 흰색 선호는 영 사라지지 않았다. <속대전>에는 청의 착용이 규정될 정도로 법령강화도 이루어졌으나 효과가 신통치 않았다.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흰옷을 버리고 어정쩡하게 푸른옷을 택할 리 없었다. 흰옷을 못 입게 한 양반들조차 흰색의 사촌쯤 되는 옥색 따위로 면피하는 상황이었다. 국가적으로 자주 흰옷 금지령을 내렸으나 흰옷을 사랑함에 있어서는 양반과 상놈이 따로 없었다. 국가적인 시책을 어기면서까지 지속된 흰옷 사랑은 조선사람 전체의 자주적 민족의식이었던 셈이다.
1895년의 갑오개혁에서 검은옷을 착용하라는 칙령을 내렸고, 1909년 광무개혁에서는 아예정식으로 백의 착용을 금하였다. 장터에서 먹물을 뿌려 흰옷 입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발령과 더불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선 의병대열은 모두 흰옷 일색이었다. 3.1운동 때, 그날은 고종의 인산일이기도 하여 전국이 흰옷의 무리로 뒤덮였다. 결국 흰옷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옷이었고, 지배계층의 색깔 차별정책에 맞선 흰옷 지키기 투쟁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옷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흰옷에 숨어 있는 몇가지 문제
백의민족을 생각하면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남성들과 여성들은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일단 시집을 가서 가정을 꾸리면, 미미한 색깔이나마 물을 들여 입는 것이 예외였다. '소복 입은 여인'이란 말처럼 과부나 특수한 경우에만 흰옷을 입었다. 남편이 버젓이 살아 있는데 소복을 입는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백의문화라는 관념 속에는 어느 정도 남성 중심적인 사고도 개입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여성들이 백의를 싫어했다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평복과 상복을 적당히 구분하던 상례 풍습이 강화되면서 생긴 변화일 뿐이다. 또 하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백의의 개념 문제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본다면 백의라는 색깔 개념도 엄정한 점검을 요한다. 잿물로 하얗게 표백해서 흰색을 내기야 했지만, 지금의 색 개념으로 보면 자연 섬유색인 소색을 넓게 흰색으로 보았다. 같은 백의라고 해도 신분이나 옷감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났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어느 답사모임에 강의를 나갔다가 선물로 '돌실나이'라는 상표가 아로새겨진 개량한복 한 벌을 선물받았다. 색감이 천연색 그대로인 소개이라고 할 수 잇는 옷감이었다. 요즈음 개량한복이라고 불리우는 옷들이 다양한 색감을 연출하고 있는 터라 이렇게 물었다.
"색깔이 이렇게 점잖아 가지고 장사 되겠어요." "원래, 우리옷은 색깔이 강하지 않잖아요? 색깔이 강한 옷차림은 많은 염료를 썼다는 증거고, 그만큼 환경오염의 주범인 셈이죠."
아뿔싸! 원색문화의 거센 물결이 환경오염의 주범이란 그녀의 말은 미처 잊고 있던 진실을 하나 일깨워주었다. 제3세계로 수출된 대표적인 공해산업인 염색업을 생각하면, 흰옷문화는 결국 복식에서조차 자연적인 삶의 전형을 찾으려 했던 선조들의 '깊은 뜻'이 담긴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지나친 견강부회라 탓하지는 마시라! 나는 흰옷 문제만 나오면 늘 북으로 간 김용준이 떠오른다. 해방 공간에서 활동하던 김용준은 북한으로 가서 1950년대에 미술사가로서도 활동했다. 그는 1958년 조중문화교류협정에 의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남경박물원에서 뜻밖에 백제 복식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하나 발견한다. 백제국사와 왜국사 등이 있는 두루마리였다. 1950년 북한에서 발간한 격월간지 <문화유산>의 <백제복식에 관한 자료>라는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 복식에서 전혀 볼 수 없으며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이 그림에 선명하게 흰 동정을 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복에서 산뜻한 동정이 어느때부터 시작되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백제 복식에서 흰 동정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고 주목을 끄는 사실이다.
백제시대에 흰 동정이라니! 고대사회의 문서만이 아니라 그림으로도 확실하게 흰색 선호의역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변화하는 상가집, 밀려나는 백의문화
그토록 흰옷을 사랑한 우리 민족이 지금은 왜 흰옷을 입지 않을까. 일제시대에 흰옷을 입지 말자는 운동이 일각에서 전개되었다. 국학자 이윤제는 <백의금제의 사적 고찰>(신생, 1930년 12월)이란 글에서, '현대적 생활사상상 절실한 경제적 충동으로 민중의 반성 자각에서 순민간적 전 사회적으로 생겨난 운동'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백의문화가 결정적으로 무너진 것은 해방 이후 미군 진주와 더불어 원색문화가 대대적으로 몰려오면서다. 원색문화의 홍수는 우리의 복식생활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카키색 군복문화가 휩쓸었고, 양복과 양장이 퍼져나가면서 흰옷은 사라질 위기에 처해졌다. 특히 남자들의 양복 착용은 곧바로 흰 바지저고리의 벗어 던짐을 뜻하였다. 요즈음 상가집을 다니면서 늘 느끼는 묘한 감정이 하나 있다. 가장 완고하게 전통적인 풍습이 살아 있는 분야가 상례인데, 그곳에서도 일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상주들의 복식이 소복이 아니라 검정옷으로 바뀌었다. 얼마 전까지는 남자들이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여자들은 소복을 입는 절충혀이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들도 검정옷을 입는 상가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흰옷, 엄밀히 따지면 삼배 같은 천연섬유를 중심으로 한 장례문화가 서구식 양복문화에게 그 색깔마저 점령당한 셈이다. 검은 상복에 검은 조화, 검은 리본에 검은 글씨, 종내는 검은 리무진을 타고 떠나는 장레 풍습도 도입되엇으니 어느결에 장례 풍습마저 미국식으로 바뀐 얼치기문화로 바뀌었다. 1980년대 이후 불기 시작한 원색문화는 바야흐로 20세기를 마감하면서 더욱 과감하게 진전하고 있다. 원새그이 홍수 속에서 오히려 흰색옷은 눈에 띄는 '선정적'인 옷차림이 되고 만다.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 내에 흰옷을 벗어던지고 서구화로 치닫게 되었는가. 불과 50년 만에 백의문화가 퇴장한 것을 보면, 한편으로는 우리가 정말 백의민족이었던가 하는 의심마저 품게 된다. 아니 그 이상으로 자기 것에 대해 천시하는 그 정신적 풍토가 밉다못해 혐오스럽다. 서구 것을 받아들이되, 좀더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을까. 이이화(역사연구소 소장) 선생은 <백의와 백의민족>이란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에 와서 색상에 대한 미의 감각을 찾고 시각의 단조로움을 벗어나는 것은 나무랄 일이 못 될 것이다. 그러나 너무 현란한 것도 눈을 어지럽히고, 조화되지 않는 다색이 천박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리하여 백의의 단순함이 지난날의 일이었다면 원색의 천박함이 오늘의 일이라 하겠다. 너무 양극으로 치닫는 일은 조화를 결하게 될 것이다. 흰옷은 단순함도 있지만, 그 단순함 속에 오히려 드넓은 세계를 포용하고 있으니, 오늘날의 원색문화에 조화시켜 새롭게 흰색문화를 복원할 필요는 없는 걸까. 새삼스레 '온고지신'이 떠오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