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 주강현
미륵의 손가락에 숨은 뜻은
천년 묵은 나무의 숨결을 생각하며
일본의 국보 1호 - 아스카시대의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
나는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미륵의 손가락을. 나무를 세밀하게 깎은 약지를 구부려서 동그렇게 환을 그리고, 나머지 손가락들은 가볍게 세웠다. 손가락에 혼신의 힘이 쏘린 듯하다. 그 손가락에서 나는 천 년을 훌쩍 뛰어 넘는 삼국시대 여인의 손길을 보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것을 감싸안을 듯한 손길. 왜 , 무슨 이유로 고대인들은 56억 7천만년만에 다가올 미륵보살의 손가락을 그토록 섬세하게 빚었을까.
1960년의 일이다. 어느 학생이 불상의 약지를 절단하는 사건이 벌어져, 전 세계 해외토픽에 올랐다. 다행히 미술원 국보 수리소에서 손가락을 수리하여 붙였다. 불상이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미륵불로 뛰어들었을까. 밀교의 해석에 따르면 약지는 약사여래의 상징이다.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적 병에 걸린 중생까지 모두 구제하겠다는 의지의 드러냄일까. 중생제도의 방도를 가리키는 어느 불상의 수인에서도 나는 이같은 섬세함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눈치채지 못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이 상반신을 벌거벗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라의 정창원 보살상도 배꼽과 가슴을 드러냈으며, 우리나라 반가사유상도 다수가 반라다. 전기 앙코르 불교유산을 비롯한 고대의 많은 미륵보살들도 허리띠를 묶은 도티만을 입은 사례가 많으니 이 미륵불만 특별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에 상반신에 옷을 걸쳤다면 어떻게 저토록 날렵한 등선을 창조할 수 있었을 것인가.
1300여 년 전인 7세기경, 신비의 손을 가진 장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무결의 흐름을 신기에 가깝도록 활용하여 코와 눈, 입, 그리고 눈썹을 빚었다. 눈썹에서 코를 거쳐 입술까지 물 흐르듯 고운 선이 흐른다. 자는 듯, 실눈을 뜬 듯, 미소가 감도는 눈길과 다소 육감적이기까지 한 입술, 더할 나위 없이 얇은, 그래서 더욱 돋보이게 흘러내린 옷자락,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머리의 보관, 심지어 좌대의 연화문조차도 부드러우면서 힘차게 느껴진다. 날렵한 허리의 곡선이 등줄기와 무릎으로 뻗어나가는 흐름은 균형감과 세련미의 극치이다. 1903년도 보수 이전의 기록을 보면, 현존 미륵불과는 다소 다르다. 수리 전 사진을 보면, 불상 표면은 더 두껍고 우둘두둘하다. 겉면에 나뭇가루나 향을 섞어 반죽한 흙이 엷게 입혀져 있다. 헤아안시대의 기록에는 금색 미륵보살로 되어 있다. 차갑지 않은 나무의 질감 위에 금빛으로 은은하게 감쌌다는 이야기다. 나무가 주는 거친 질감과 조화를 이루었을 그 불상을 상상하노라면 그것을 만든 이의 세심한 마음이 절로 다가온다. 미륵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잇다. 오른쪽 다리를 구부린 채 발목을 왼쪽 허벅지에 올리고, 몸은 지그시 앞으로 조금 숙였다.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쟁의 참화에서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고민의 드러냄이었을까. 만약,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 감탄하는 사람이 반가사유상의 그 고민하는 모습을 이해하지 멋한다면 어찌 균형 잡힌 심미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일본 국보 1호의 출생 비밀 - 유서 깊은 일본의 도읍지 교토.
교토는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로 치면 경주나 부여쯤에 비견된다. 쿄토 서쪽에 자리잡은 고찰 고류사는 관광병소인 동영의 태진영화촌과 교토촬영소가 붙어 있어 여행객들로 늘 붐빈다. 며년10월 10일에는 오곡풍요와 악귀 퇴치를 기원하는 축제인 우제가 열린다. 국보급만 15개, 중요문화재만 31개에 이르는 '일본문화의 보고'로 소개되는데, 그중 단연 미륵보살상만이 군계일학이다. 이 미륵불을 보기위하여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기 대문에 고류사를 먹여살리는 '재정 담당'이라고 할 만하다. 유서 깊은 이 절에는 미륵불이 3개 있는데, 그중 나라시대 것이 2개다. 하나는 보관미륵이라 부르는 미륵반가사유상이며, 다른 하나는 보관을 쓰지 않는 일명 '상투미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미륵불은 일본문화의 세계적 우수성을 과시하려 할대 여러 지면에 단골손님으로 늘 소개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도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표정'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구인의 평가라면 '오금을 못 쓰는' 일본사람들인지라 야스퍼스의 평가를 두고두고 자랑하면서 전세계에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마이니찌신문사에서 발간한 '매혹의 불상' 시리즈에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을 자랑한다. 1982년 고류사 경내의 영보전앞에 신관을 만들어 그 안에 극진히 모셔두고 있다. 진열관을 '영보관'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글자 그대로 신령스런 보물이란 뜻이 아닌가. 총 높이 137.5cm의 불가사의한 목불. 고류사 미륵상을 보고서 곧바로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찾아가 보라. 쇠붙이냐, 나무냐 하는 재질 차이만 빼놓고서는 일란성 쌍둥이 같다. 그러나 일찍이 1897년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이래 우리나라와의 상관성은 늘 무시되어 왔다. 해방 후 우리나라에 있는 문화유산도 챙기지 못한 마당에 일본에 있는 우리 것까지 챙길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나 목불의 나무 재질이 우리나라 토산의 적송으로 밝혀지면서 그들도 더 이상 일본 고유의 것으로만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목불의 출생 비밀에는 세 가지 견해가 상존한다. '백제에서 불상을 가지고 왔다'는 전래설, '도래인들이 성스런 물건으로 여기던 소나무를 가져와서 일본에서 제작했다'는 현지제작설, '도래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손 치더라도 만들어진 풍토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순전히 일본풍이다' 라는 제작지풍토설이 그것이다.
1951년 일본의 과학자들은 미륵불의 목재가 조선산 소나무인 적송임을 밝혀냈다. 일본에서는 적송을 조각용재로 사용하지 않음에 반하여, 조선에서는 건축과 조각에 늘 적송을 사용한 데서 착안하여 미륵불의 한반도기원설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때 엉뚱한 답변이 준비되었다. 미륵불의 좌대 장식 일부분이 녹나무로 되어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다라서 '본토에서 가져온 적송으로 몸체를 만들고 모자라는 부분은 녹나무로 만들었다'는 궁색한 주장까지 나왔다. 후대에 좌대를 만들면서 일본산 녹나무로 보강하였음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현재 미륵은 발가락과 죄대 등의 일부가 다른 재질의 나무로 되어 잇다. 중간에 보강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출생을 거부하는 가장 심각한 주장은 일본풍토설이다. 모든 조형성은 풍토에서 생기므로, 일단 도래한 이들의 손에 의히여 만들어졌다손 치더라도 일본의 풍토에 맞추어 조성된 것이란 주장이다. '고류산 미륵불은 한국의 국립중앙밝물관의 것과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재질이나 기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조형감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인의 이상미'란 표현까지 쓰고 있다. 글쎄, 국립중앙박물관 것과 어떤 면에서 조형감각이 다르다는 것인가. 1,300여 년을 모셔온 '일본 국보 1호'를 가능한 한 일본식으로 해석하고 싶은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여기에는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스런 은폐.엄폐 의도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 국보 1호의 출생 비밀
일본 국보 1호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국보 1호를 생각해본다. 초등학교 때부터 품어온 의문이 하나 있다. 누구라도 시원스런 답변을 해주길 바랬는데 어느 선생님도 답변을 해주지 못했다. 왜 남대문은 국보 1호인데, 동대문은 보물 1호인가? 내 자신도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학생들이 물어오면 옳게 답변할 능력이 없다. 국보와 보물의 정확한 차이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서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어느 고명하신 문화재 전문위원에게 전화로 여쭈어보니, 이렇게 호통만 치셨다. "아니, 주 선생!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이 그것도 모른단 말이오." '국보가 보물보다 한수 위'라는 판에 박힌 답변이었다. 나는 아직껏 양자의 차이를 모르겠다. 덜 중요한 어떤 문서는 국보로 지정되었건만 <월인천강지곡>같이 귀중한 문헌은 왜 보물 정도로만 여기는가. 아무도 답변을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일제의 식민지 잔재이다. 일제는 문화유산정책에서도 에외없이 민족차별정책을 구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치사한 짓인데. 우리나라 문화유산을 지정하면서 국보는 한 개도 허락하지 않았다.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전령' 에 의한 문화유산 격하정책으로 모조리 보물로만 지정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병합한 이후로 고고학자들을 대량 동원하여 경주, 평양, 부여 등 삼국시대의 수도를 집중적으로 파헤쳤다. 말이 고고학 발굴이지 '유적 싹쓸이'가 아니었을까. 그때 유물을 그대로 두었다면, 해방 이후에 우리의 손으로 차근차근 원형을 보존하면서 발굴했을 것이다.
일제는 문화유산의 개명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은 지금도 별도의 암기를 해야 한다. 남대문은 숭례문, 동대문은 흥인문...... 참으로 한심한 교육정책이다. 한국민속문화답사회의 회원 한 명이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 분은 문화재를 설명하는 간판 앞에만 서면, 그 복잡하고 어려운 일본식 한문투성이 설명문에 주눅이 들어서 김수희의 '애모'라는 노래가 늘 떠오른다는 우스갯소리였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자꾸 작아지는가......
지난 100년 동안 우리의 문화유산정책이 그런 상황에 빠져 있었으니 미륵반가사유상도 온전할 수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미륵반가사유상은 1910년 전후하여 후치가미의 손을 거쳐 데라우치총독에게 들어갔고, 총독부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해방을 맞았다. 부여박물관의 미륵반가사유상도 1910년을 전후하여 충청도에서 도굴되어 도굴범 가지야마가 이왕가박물간에 거금을 주고 팔아먹었던 '도굴품'이다. 도굴범의 손에서 소장자의 손으로 넘어가기까지 수많은 역경을 겪은 고구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의 사연은 또 얼마나 기구하던가. 그에 비하면, 우리 선조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은 태평스런 삶을 살아온 셈이다. 천 년을 넘긴 우리의 문화유산 중에서 목제품은 모두 불탔음을 생각할 때, 목불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감개무량할 일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축조된 우리나라 국보 1호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일본 국보 1호의 시대. 문화적 위상이 너무도 다름에 비애감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다 건너 이역에서 일군 문화의 대서사시
고대 한일관계는 일본 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의 우리나라 남부경영 운운하는 내용이 전혀 아니었다. 왜왕이 4세기 후반에 조선남부에 출병해서 백제, 신라, 가야를 복속시키고, 특히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직할 지배를 구축, 6세기 중엽까지 존속하였다는 식의 남한경영론은 일제 식민사관의 토대를 이루어왔다. 이에 대한 최초의 정교한 반박은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이 제출하였다. 그는 복속되었다는 백제, 신라, 가야 따위가 실은 우리나라 이주민들이 세운 분국으로서 일본 본토 내에 존재했다는 학설을 내세웠다. 말하자면 일본 본토에 백제, 신라, 가야를 그대로 이어받은 지점이 설치되었다고 할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대목이나, 분명한 것은 초기 한일관계가 우리나라의 서부 일본 개척과 문화개척자로서의 선진적 역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본토로부터의 이민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래인들은 고국인 백제, 가야를 그대로 이어받은 지점이 설치되었다고나 할까.
본토로부터의 이민은 집단적으로 이루어졌다. 도래인들은 고국인 백제, 가야,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나갔다. 그 결과 일본땅에 도착하자마자 '귀화'하여 일본문화에 흡수된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우리 문화의 고유성을 그대로 간직하였다. 7세기 전반기까지 이주민 세력은 야마토정권에 의해 통합되었지만 자체의 본토적성격은 이어졌다. 순전히 우리나라의 불상양식인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은 초기 한일관게의 비밀을 밝혀주는 중요한 실마리가 아닐 수 없다. 1919년 경남에서 출생하여 열살 때 일본으로 건너간 길달수 옹은 <일본 속의 한국 문화유적을 찾아서> 한국어판에서 이렇게 압축 설명한다.
"신천지를 꿈꾼 진보적인 고대 한반도인들이 바다 건너 이역에서 일군 문화의 대서사시."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이주민 행렬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에도시대 말기까지 텐무천황릉으로 알려진 다카마쓰의 고분벽화가 고대 우리나라의 풍속을 그대로 보여주는 등 무수한 증거물이 쏟아져나왔다. 본토에서 불교가 일본으로 전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일본서기>를 보면(603년 11월), "쇼토쿠태자가 중신들에게, '소중한 불상을 갖고 있는데 누군가 이 불상을 신앙하는자가 없을까?' 하고 물었을 때, 중신의 한 명인 진씨가 나와 이것을 받아 고류사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623년에 한반도로부터 헌납된 불상을 안치시켰다는 기록도 나온다. 우리나라로부터의 '헌납', '진상'같은 용어 자체가 <일본서기>의 왜곡인 바, 상당한 윤색으로 얼룩진 <일본서기>의 역사적 진실성은 새삼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우리나라의 선진문화가 끊임없이 일본 열도로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미륵반가사유상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라는 새로운 신앙을 무기로 하여 귀족의 사상적 통일을 기하고 조정의 위력을 강력하게 인식시킬 정치적 필요성을 느꼈다. 막대한 자금으로 고류사, 아스카사 같은 화려한 대사원을 세웠고, 우리나라로부터 수많은 승려나 불상, 불화, 사원건축 전문가를 초빙하였다. 595년 고구려의 혜자스님은 쇼토쿠의 스승이 되어 백제의 혜종스님과 함께 법흥사를 창건하였다. 아스카문화는 한반도문화의 '붕어빵', 혹은 '카피본'이다. 일본 초유의 대건축인 아스카사도 백제 본토인과 도래인들이 이룬 성과물이다. 이와나미 발간의 <일본의 역사>라는 책에서 역사학자 이노우에 야스시는 아예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사회는 한반도와 중국의 선진문명을 갓난아기가 엄마의 젖을 빨 듯이 탐욕스럽게 수용하며 미개에서 문명의 단계로 들어섰다. 대개의 일본학자들은 대륙으로부터의 문화전래설은 일반적으로 인정하며 중국으로부터의 전래설만 수긍할 뿐, 한반도로부터의 직접 전래설만은 애써 피하려 한다. 근년까지도 일본의 교과서는 '귀화인'이란 멸시에 가까운 표현을 의도적으로 쓸 뿐, '도래인'이란 표현을 쓰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오기는 왔으나 귀화하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범주에 속한다는 식의 일관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미륵반가사유상은 일본 국보 1호로 지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명품이다. 그러나 그 출신지는 한반도다. 그들은 명품의 진가는 인정하면서도 출신지를 거부하고픈 '쪼잔한' 심정으로 문화유산을 대하고 있는 중이다. '섬나라 근성' 어쩌고 하는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사색하는 청년 미륵을 그리며
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륵반가사유상인가. 석가모니 불타는 2,500년 전에 중생을 제도하면서 미래의 희망을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미 불교사상의 원초적 뿌리에는 미래불에서의 서원이 담겨져 있었다. 도솔천 용화수 아래서 중생제도를 행할 삼회법회를 기다리는 심정은 석가모니 이래로 모든 중생들이 간절히 바라던 바가 아니던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서양의 천년왕국운동에 견줄까. 그래서 미륵신앙은 늘상 하나의 운동적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불교 전래 이래로 이 땅에도 무수한 미륵불이 빚어졌다. 그중에서도 반가사유상은 우리 고유의 미륵불이랄 수 있을 정도로 불료조각사에서 단연 수위를 차지하는 불상양식이다. 반가사유상의 기원은 일찍이 고대 인도의 간다라양식에까지 소급된다. 중국의 북위시대에 조성한 운강석굴 제6동을 가면 5세기 후반에 만든 미륵반가사유상이 '사색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음에도 이 땅의 장인들은 그들 중국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느낌과 감동을 연출하였다.
우리나라 불교는 결코 인도나 중국 불교의 단순 연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학자들은 우리의 불교문화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불교미술에 조예가 깊은 독일의 미술사가 젝켈은 <불교미술 The Art of Buddism>에서, "미륵반가사유상은 한국적 요소를 뚜렷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과 비교되는 중국 작품이 없기 때문에 학자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정도로 얼버무리고 있다. 우리의 역사와 자연 속에서 우리의 불교문화가 꽃핀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삼국시대의 미륵반가사유상이 지닌 뛰어난 조형양식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하지만 젝켈 같은 서양인도 다음과 같이 미륵반가사유상의 전래만큼은 잘 기술한다. "양식면에서 볼 때,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미륵반가사유상과 유사한 작품들이 일본에서 6세기와 7세기에 발견되는데 그들중 몇몇은 한국에서 건너간 것 같다."
남북조시대를 거쳐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풍미하였고, 일본까지 영향을 주었기에 가히 동양 삼국은 미륵반가사유상이라는 공통분모로 문화를 공유한 셈이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일본 고대의 불교미술은 전적으로 한반도로부터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고류사 미륵불은 고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소산이며, 한반도의 영향을 강력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에 다름아니다. 현재 교토, 나라, 오사카 등지에는 아스카, 나라, 헤이안, 가마쿠라 시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미륵불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한반도 도래인들이 밀집된 거주지였다. 미륵반가사유상은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중요한 것만 뽑아도 여럿이 된다. 서산 마애삼존불, 단석산 마애미륵불, 봉화 송화산 석조반가사유상,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립중앙박물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립경주박물관), 백제 활석제반가사유상(국립부여박물관) 등... . 이들 미륵반가사유상의 실존은 고류사 미륵불이 본토에서 건너갔다는 유력한 증거이다. 다시 백제의 미륵불과 비교해 볼겸, 잠시 서산 마애삼존불로 눈길을 돌려보자. 서산 매아삼존불 세 개 중 협시보살 하나가 미륵이다. 두 개가 입상인데 반하여 미륵보살상은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몸을 약간 옆으로 튼 대담한 반가 자세인데, 오른쪽 협시보살의 우아하고 세련된 형태와는 눈에 띄게 차이가 난다. 다문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햇살이 비치면 수줍게 웃는 미소는 백제인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표정 그대로이다. 천혜의 암벽에서, 아침 해를 받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미소가 떠 오른다. 이 '백제의 미소', 삼존불을 찾아가면 안내인은 예나 지금이나 대나무 장대에 백열 등을 매달아 각도를 달리하여 비추면서, 이렇게 하면 얼굴이 웃고 저렇게 하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으로 익숙한 조교처럼 시범을 보여준다. 실제로 조명받는 각도에 따라서 얼굴 표정은 다르게 나타난다.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도 햇빛의 각도에 따라 전혀 느낌이 다르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삼국시대 장인들의 솜씨였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다.
고류사 미륵불은 목불이다. 다잇에는 상당수의 목불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깝게도 금동불이나 마애석불은 있으되 목불은 전승이 끊겼다. 끊임없는 병란이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모두 삼켜버린 것이다. 일본땅에서 우리의 천 년 넘은 목불을 만난다! 그래서 더욱 감개무량한지도 모르겠다. 명상하고 있는 '청년 미륵'의 다부진 질감을 보여주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단단한 석질을 유연하게 다듬어 부드러우면서도 후덕한 표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서산 마애삼존불, 돌이나 쇠붙이와 같은 무생물과는 달리 따스한 생명이 감돌았던 나무로 빚어진 고류사 미륵불, 이들 삼자는 각각 돌, 쇠, 나무로 상징되는 우리나라 불상의 최고 명품들인 것이다. 하나는 일본의 국보로서 교토의 고류사에 자리잡았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의 국보로서 서울의 박물관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연 속에 있는 그대로 자리잡았다.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든 거기에서 불심을 느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어디에 있든, 전란으로 산 속에 숨기도 하고 멀고 먼 일본땅으로 이주해야 했던 백성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았을까. 나는 고류사 미륵반가사유상과 국내의 미륵불상들을 볼 때마다, 그 '사람답게 사는' 미륵 세상에 대한 해탈된 미소에서 고달픈 삶이 승화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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