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감의 세계 - 저 : 해롤드 셔어먼 / 역 : 안동민
제 4장 텔레파시 통신
1. 유령이 유령을 죽이다.
텔레파시란 알다시피 여하한 물질적 매개물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의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마음과 전달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통신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떤 에너지에 의해 전달되는가 하는 것은 아직 정확하게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공간을 통하는 상념> 이라는 책에서, 그 해답은 마음의 전기적 활동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 작용하는 전자장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자극을 받아 발생시키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된다. 과학은 뇌의 전류를 기록하고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뇌파 기록기에 의해서 밝혀 냈다. 마음이 정신적 혹은 감정적으로 흐트러지면 의식의 자극상태를 반영한 전기 폭풍이 뇌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감정이 격해지면 많은 에너지가 생겨 상념을 더욱 더 외부로 발산하는 원인이 되는 것 같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러나 대뇌의 전류는 아주 약하다. 꽤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물론이지만, 바로 옆방에 있으면서도 상념을 받아 느낄 수 있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로 뇌파 에너지는 약하다고 생각된다. 나는 얼마 전에 시공을 초월한 정신 에너지체라든가, 그것을 통해서 작용하는 정신에너지의 한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며, 그 것은 기계로서는 탐지할 수 없으리라고 대담하게 말한 적이 있다. 외부로부터의 전자파를 받을 염려가 없게 절연되어 있으며, 주위를 덮을 파라디 상자 (파라디는 영국의 물리학자로서 자장 전기분해 등의 실험을 했다) 나 두꺼운 납으로 안쪽을 바른 곳에 특수 능력자를 가둘 수 있다는 것을 미국이나 소련의 과학자가 최근의 실험에서 증명하고 있으므로, 이 가정은 그런대로의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텔레파시의 힘은 그러한 공을 들인 방어물 까지도 뚫고 보내지기도 하며 받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여하한 힘보다 더 미세하고, 어떠한 장애물도 통과할 수 있으며, 무엇에도 제약 당하고 있지 않은 힘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의식 속에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힘의 내막에 대해서는 아직도 태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 속의 이러한 힘은 인간의 육체적 기관이 미치지 못하는 아주 먼 저쪽에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초감각적 지각의 활동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지도 못한 채 수많은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기의 경우처럼, 이제는 설사 그 기본적인 성질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기회 있을 때마다 esp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지식을 활용하지 않으면 이에 관한 우리의 지식도 초기 발달 단계에서 한 걸음도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무선 전신을 발견한 직후에 실험을 중단하고, 말코니 (이탈리아의 발명가) 가 개발한 들리지 않을 때가 자주 있는 초보단계의 무선 전파의 수신력에 만족한 채 그냥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표면 바로 아래에서 많은 일이, 아니 그 이상의 굉장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많은 증거가 있다. 이러한 일들은 인간이 탐구를 계속하여 발굴해 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요즈음 자주 행했던 강연 중에 초감각적 지각에 대한 체험을 한 번 혹은 그 이상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요청했는데, 반 이상의 청중이 그러한 체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개인적으로 체험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아무리 의심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한 번 보기 드문 체험을 하게 되면 esp가 사실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게 되며, 마음의 신비나 esp의 체험을 되풀이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열심히 알고 싶어한다. 그러나 보통은 이에 대한 신뢰할 만한 지식이나, 사실에 대한 초보적인 교육이 없었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말로 옮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필요사항을 여기에서 말해 두기로 하겠다. 다만 책은 틀에 박힌 교과서는 아니므로 바로 여기다라는 곳에서 한숨 돌리고, 필요한 자료나 흥미 깊은 자료나 화제 등을 삽입해 두려고 생각한다. 가령 순서가 다른 책과 다르다고 하여도 내용적으로는 결함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어쨌든 앞에서 대강 말해 두었던 일곱 가지의 다른 의식 수준을 여기에서 기억해 주기 바란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 현재의식 수준 2. 잠재의식 수준 3. 기억 수준 4. 창조력 수준 5. 치유력 수준 6. 직관적 수준 7. 광대무변한 의식 수준
보통 경우에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의식 수준이 갑자기 작용하기 시작하는 셈인데,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개별적인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마음에 요구한 회답으로서 초보적 가르침이 주어진 것으로 알 뿐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라든가 원하는 일에 현재 의식이 주의를 가만히 기울이고 있을 때에 어떻게 해서 다른 의식 수준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을 활동시키는가 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 두세 가지의 예를 들기로 하겠다. 5관 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이 작용을 통하여 현재 의식에 의해 받은 체험은 잠재 의식에 보고된다. 그러면 마음의 기관이 작용하기 시작하여 그것을 기록하고 정리한다. 정상적 상태에서, 즉 정신이나 감정이 정지하고 있거나 또는 적어도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잠재 의식은 신체의 전 기관의 기능을 통제하고 있다. 서로 관계가 있는 하나의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에너지가 율동적으로 조화를 유지하며 흐르는 것을 중단하거나 방해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체험을 갖게 되고, 이 체험들 중에서 불행하고 애처로운 체험은 육체를 제어하는 중추를 방해하여, 예를 들면 호흡곤란, 심장 판막증, 소화 불량과 같은 여러 가지 증상을 일으킨다. 이것은 감정의 파동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며, 여기에는 하나의 세포에 흔적을 남길 정도의 힘이 있다고 생각된다. 잘못된 감정의 영향은 감정이 고쳐짐으로써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 수준에서는 어떤 체험과 관련을 맺고, 이 체험 때문에 자극을 받은 감정과 맺어진 마음의 영상이 기록되어 버린다.
그것은 이전에 기록되어 있던 같은 종류의 다른 경험 전부와 합쳐진다. (마음의 영역에서 뜻이 맞는 자끼리 모이는 셈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경험이 가져다 준 지배적인 감정이 불안감이라면 이전에 기억 속에 새겨진 불안감은 더욱 격렬해질 것이다. 알다시피 현재 의식에 과거의 경험을 축적시키고, 이들 경험이 가르쳐 주는 것을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는 데에 쓰기 위해서 기억 수준이 있다. 그런데 이 기억의 보고를 주로 불안과 무력감과 인생에 대한 잘못된 감정적 반응의 영상으로 채워 두면 건설적인 가치가 있는 것까지도 거의 이용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지금은 기억으로 비축하고 있는 과거의 일체의 체험 내용을 들추어 내어 장래를 설계하는 일을 도와 주는 것은 의식의 두 번째로 높은 수준에 있는 마음의 창조력이 할 일이다. 새로운 경험이 기억에 기록될 때마다 창조력이 반응을 일으켜 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행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의식이 내리는 결정을 통해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하면 자기가 맡은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기억에 축적되어 있는 경험이 설사 많이 있다 하더라도 몇 년간이나 쓰지 않은 채 버려진다. 그것은 다시 그와 같은 경험을 가져보고 싶다든가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싶다든가 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더구나 의식적인 건망증 때문에 이 경험을 매장시키려고까지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경험한 일은 확고부동하며,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있건, 알아차리지 못하던 간에 잠재 의식의 수준에서는 항상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은 또 현재도 맞보고 있는 체험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치유력에 의해 기운을 회복시키고 다시 정력을 높일 반응이 필요하게 된다. 치유력은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으며, 몇 백만 혹은 몇 억만이나 되는, 죽어 가든가 또는 이미 죽어버린 세포를 새것으로 바꾸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의 청사진을 갖고 있으며, 무엇을 고쳐야 할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또 육체적인 경험이든 정신적인 경험이든 또는 그 양쪽의 어느것이든간에 경험을 갖는 순간에 그 요구를 즉시 알아채는 것 같다. 그러나 또 잠재의식의 육체 제어 수준의 경우처럼 불안한 생각이나,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느낌이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생각에 의해 이 치유력 수준의 기능이 하는 일을 뒤틀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와 반대로 강한 신념과 자신, 용기를 갖게 되면 이 치유력을 자극하여 얼핏보아 기적이라고 생각할 만한 일까지도 할 수 있게 된다. 직관적 수준이란 육체와 관련이 있는 낮은 감각 기능 전부가 높은 감각 기능으로 용해해 들어가는 수준이다. 이것은 초감각적 지각의 능력이 들어 있는 수준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능력이 실행하는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나타나는 힘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결심을 한다든가 긴급 사태에 대처할 때, 육체적 감각이 따를 수 없는 번득이는 지각으로 도움을 받는다는 정도로, 이 감각들의 작용은 직관이라는 모습 속에 융화되어 나타나는 일들이 많다.
인생의 체험이 감동이나 위기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이 직관 수준이 활동적이 되며, 때로는 esp 능력이 직관을 대신하여 보호적이고 지도적인 역할을 해 내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일어나는가 하는 것은 설명할 수 없을 지라도 그때야말로 절대적인 esp의 실례를 체험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esp를 작용시키는 단계에 도달하면 비로소 광대무변한 의식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신의 존재라든가 신의 의식으로서 표현되는 것과 연결되는 수준이다. 진심이 어린 심사나 명상으로 도달하는 영원하고도 무한한 수준이며, 거기에서 비로소 '나는 영원이니라' 라고 하는 영원 불멸의 소리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물질의 본체가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우리들이 말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실체를 갖고 있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것과 만나는 장소이다. 이것을 실재의 중심이며, 그 주위를 이들 의식의 좀 더 낮은 수준이 돌고 있다. 여기에서 사람은 받아서 느낀다고 하는 스스로 개발한 능력에 따라서 신, 즉 위대한 예지와 맺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의지에 파장을 맞추면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 걸친 전 생명의 의식에, 무엇인가 근본적 관계가 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는데, 사람을 그것에 복종한다든가 그것을 의식하는 것 조차도 강요당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의 파장을 확대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슬프게도 인간이라고 하는 무수한 생물은 실재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물질적인 생활에만 빠져있어서, 이와 같은 초월적인 힘을 감지하는 경우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물다. 모든 인생의 경험을 자기의 실체에 의해 재음미하는 것은 광대무변한 의식 수준에서만 가능한 일이며, 이 세상에 있어서의 우리들의 본질은 실체나 혼 속에 마술처럼 끼워 넣어져 있다. 현 시점에서 당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의 전부와, 이에 대한 당신의 정신적이며, 감정적인 반응방식을 더한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체험을 명심하게끔 되어있는 의식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인간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딘가 딴 곳에서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 이 체험의 본질을 갖고 가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경탄할 만한 기관의 기적적인 기능을 생각할 때,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을 수 있으리라고는 나는 도저히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층 더 큰 발달과 공적을 성취하기 위한 준비로서 그것은 사건 전부를 아주 정확하고 정밀한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물질적 기관의 사멸만으로 모든 결과가 소멸되어 버리는 운명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이 무섭도록 방대한 에너지를 조그마한 몸과 마음에 쓰이도록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사람은 어느 생명보다도 - 모든 인간이라고 하는 생물의 표면 바로 밑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숨겨져 있는가? -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훌륭하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평가와 발달이나 진보의 가능성을 얼핏 헤아려서는 알 수 없으리만치 높여야 할 것이다.
육체로부터 마음을 해방한다
마음의 기능에 대해서 그 배경이 되는 지식을 배웠으므로 이제 텔레파시의 정신적 기법을 생각할 준비가 갖추어진 셈이 된다. 인상의 송신과 수신은 육체적인 것과는 관계가 없으므로 초감각적인 능력을 양성하는 제 1보는 이 육체적인 작용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육체의 존재를 순간적으로 의식하지 않은 채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먼저 신체를 느슨하게 하고, 그후에 현재 의식의 주의력을 이 신체와, 또 신체가 갖는 외계와의 접촉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일을 해야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오랫동안 써 왔고 몇 권인가의 책에서도 말한 바 있는 특히 효과가 있는 이완법을 이용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요령으로 진행시킨다.
1. 안락의자나 침대에 편안한 마음으로 눕거나 폭신한 의자에 앉는다. 보통의자나 안락의자 혹은 침대가 전신의 무게를 감싸고 긴장이 풀리면 여유있는 기분이 된다.
2. 조용히 현재 의식의 주의력을 한쪽 발에 충분히 기울인다. 자기의 의지를 작용시켜 양 발을 정면 바깥쪽으로 눕히던가 임기응변으로 윗쪽으로 올리도록 한다. 근육이 어느 정도 팽팽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양발을 마음에서 놓아준다. 마치 신체에서 떨어져 나간 것같이 내 버린다는 뜻이다. 지금 그 발에서 현재 의식의 주의력을 거두어 같은 방법으로 반대쪽 발에 집중시킨 후 앞에서와 같이 한다. 위로 혹은 바깥쪽으로 굽힌 후 한숨을 돌리고, 마음으로부터 해방시켜 마치 몸에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내린다.
3. 그리고는 현재 의식의 주의력을 한쪽 팔에 집중시킨다. 그 팔을 뻗치고 - 잠시 받치고 - 팽팽해진 느낌이 들면 주의를 거두어 팔을 녹초가 된 것처럼 내린다. 다시 다른 한쪽 팔에 주의력을 옮기고 - 그 팔을 들어 올려 떨어지지 않게 해 두고 - 팔을 지탱하는 정신력을 감소시켜 - 천천히 내린다.
4. 현재 의식의 주의력을 몸통에 기울인다. 그런 후 서서히, 그리고 침착하게 주의력을 거두어 들인다. 마치 물결이 엉덩이에서 머리로 전해져 오는 것처럼, 허리에서 시작해서 윗쪽으로 옮겨가고 몸으로부터 마음을 떼어 나간다. 이렇게 하면 마치 육체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긴장에서 풀려나 둥둥 떠있는 듯한 기분이 된다. 가벼운 물결이 목과 머리에 닿는 순간 목의 근육을 이완시켜 머리가 앞으로 내려가는대로 내 버려 둔다. - 앉아 있을 경우 혹은 머리를 안락의자 또는 침대에 축 늘어 뜨려서 걸쳐 둘 것 - 다소 숙련되면 마음으로부터 육체를 해방시키는 일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실제로 이 점진적인 이완법에 숙련되면 중간 방법을 생략하더라도 의지의 행위에 의해서 현재의식으로서 육체를 완전히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5. 그러면 육체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을 이제 없다. 현재의식의 주의를 내부로 향하게 하여 의식의 직관 수준과의 접촉을 문득 생각해 낼 준비가 갖추어진 셈이다. 여기에서는 잠재 의식의 육체 제어, 기억, 창조력, 치유력 수준을 일부러 무시해 버린다. 실재의 의식성인 실체가 의식의 이 직관 수준에 집중되어 그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직관 수준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다른 수준을 방해하여 충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현재의식의 주의력의 초점으로서 어떤 대상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내부 의식의 어두운 방에 붙어있다고 상상하는 아무 것도 비쳐 있지 않은 새하얀 영사막을 나는 문득 생각해 냈다. 마음에 든다면 내가 지금 한 것과 같은 방법을 써도 된다. 지금 말한 것처럼 영사막을 마음의 눈에 쉽게 그릴 수 없다면 주의력에 초점을 맞추어 둘 수 있는 수단으로서 거기에 막이 있다고 자기 자신에게 느끼게 하면 된다.
6. 이상으로서 완전히 준비는 갖추어진 셈이다. 육체는 느슨해져 있으며, 현재 의식은 스스로 활동하지 않고, 그 주의력을 내부를 향하고, 마음에 그린 이 아무것도 없는 영사막에 집중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의식의 다른 수준에서 단편적으로 생기는 육체적인 느낌이나 인상의 끊임없는 흐름을 초래하는 것을 지금 말한 간단한 방법으로 방지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텔레파시의 통신을 받고 싶다고 원하는 사람의 일을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리고 영상이 마음의 영사막을 재빨리 가로지르는 순간에 그것을 마음 속에서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자신에 찬 기대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7. 일단 이들 심상이 나타나면 마음 속에 보인 것을 외워 버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버리므로, 이 일을 특히 여기에서 강조해 두고 싶다. 마음에 느끼는 충격과 함께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버린다. 지금 잠재의식에서 생각해 내려고 하는 어떤 지식을 조금 전에 배운 일이 있었던 것처럼, '잘 있는 듯한 느낌' 이라고 내가 부르고 있는 것이 후에 남는 일이 있을 것이다. 어떤 때나 자기가 받은 인상에는 심상이 따르는 것 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자기의 마음은 그것을 잡을 수 있으리만치 재빠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어떤 감정의 형태를 취하는 심상의 그림자라고 해도 좋을 만한 것이 남는다.
나는 이 느낌을 해석하면서 심상 자체를 잃어도,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의 전부나 아니면 일부를 마음속에 떠올릴 수가 있다. 이들 영상이 얼마나 순간적인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기가 지금 바로 코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해안에 있다고 상상해 주기를 바란다. 당신은 머리 위의 하늘 가득히 펼쳐져 있는 별을 올려다보고 있다. 갑자기 한 유성이 칠흑 같은 배경과는 대조적으로 섬광처럼 밤하늘을 가르면서 지나간다. 그것은 차차 사라져가는 한 줄기의 빛나는 꼬리를 남기면서 깜박 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면 보내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포착하여 당신의 심안으로 보고있는 어떤 체험의 심상을 저 유성이 나타내 보였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지금까지는 본 일이 없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것과 관련이 있을 법한 일은 자기 마음에는 아무 것도 기억이 없다. 그 순간에 마음 속에서 본 것을 기초로 하여 이 유성의 번득임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초에 마음으로 인정한 것과, 이 사건이 남긴 상세한 흔적은 될 수 있는 대로 오랫동안 곡해하지 말고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감정은 일단 잡기만 하면 마음의 영상이 사라져 버린 훨씬 나중까지도 그대로 의식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상을 해석하려고 너무 무리를 하게 되면 기억이나 창조력 수준을 활동하지 않게 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상상력이 작용하여 똑같은, 혹은 관련성이 있는 어떤 옛날의 경험이나 지식중 어느 쪽인가를 기억에서 끌어 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두면 받았을지도 모를 진실한 인상은 무엇이든 그 때문에 채색되기도 하고 또는 왜곡되기도 한다. 인상을 받을 때 그 인상이 아무리 있을 수 없는 일이라든가 이치에 닿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마음에 떠 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기록해 주는 훈련이 필요하다. 현대 의식이 끼어 들어가 그 추리력이 도전해 오는 것을 허용하는 순간에 그 인상은 변질되기 때문이다. 마음에 그린 텅 비고 새하얀 영사막에 주의력을 일단 집중해 버리면 현재 의식과 그 보통의 기억은 어느 점에서 보아도 제거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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