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4장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는 중국 - 꾸칭생(古淸生).자유기고가
17. 하고 싶은 대로 하라
중국의 작가들은 한 번도 노벨상을 타보지 못했다. 중국 작가들은 이 사실을 전혀 납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주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은 문명국이며 문화대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문화를 만들어 수출했으며 일본, 한국. 동남아 등의 나라들도 모두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노벨상에 대한 두 가지 설이 있다.라오써가 노벨상 후보에 오른적이 있었으나 그때 그가 죽었으며. 루신도 후보에 올랐으나 그가 수상을 거부하는 바람에 두 건 다 무산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두 설은 그 후 노벨상위원회에 의해 공식부인되었다. 이로 볼 때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 문인들이 노벨상에 얼마나 연연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작가들은 옛날보다 총명하여 더이상 누가 노벨상을 탈뻔했다와 같은 말을 억지로 꾸며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은 방송매체가 발달하여 노벨상위원회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을 하면 마음을 상하게 되고 체면이 깎이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방법은 노벨상이 별것 아니라는 것과, 심지어는 재주가 없는 사람들도 이 상을 타지만 톨스토이처럼 비범한 성과를 이룬 사람들은 결코 이 상을 타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우리가 왜 받아야 하는가? 우리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노벨상위원회가 안목이 없는 것이라고 혹자는 말한다. 또 다른 견해는 노벨상위원회의 위원들이 모두 서구인이어서 중국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도와 일본은 받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하나는 서구의 식민지였고, 하나는 서구의 연맹국이기 때문이며, 다만 중국만이 그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설은 서구인들은 한자를 모른다는 것이지만, 심사위원들에게는 한자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국가의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러하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가짐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분명히 얻어내려고 하는 바에 대해 오히려 그것을 경시하며 톨스토이도 못 탔다는 말로 얼버무리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실은 나는 많은 작가의 책꽂이에서 노벨상 수상작가의 문집을 보았다. 그들은 거의 모든 수상자들의 책을 다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일본작가 카와바타 야쓰나리의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우리들의 노벨상에 대한 그런 마음가짐은 사실 불필요한 것이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올림픽을 서구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중국문학은 도대체 어느 수준에 와 있는가? 훌륭한 작가들이 너무 많아 범람하고 있지 않은가? 한번은 문우들과 문학상 수상작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해 보았는데, 작품성이 뛰어나서 반드시 수상해야 한다고 할 만한 작품이 몇 손가락 꼽아지지 않았다. 국내의 문학상도 이런 형편인데 어떻게 노벨상을 논한단 말인가? 현재 우리의 심리상태를 살펴보면 중국작가들은 아직도 노벨상을 받지 않는 것을 최상으로 삼는 것 같다.영화감독 짱이머우(張藝謨)가 아주 좋은 예이다. 짱이머우의 영화가 외국에서 찮은 상을 받았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짱이머우는 서양인들의 심리를 꿰뚫고 있어 중국을 아주 낙후되고 지저분하게 묘사한 영화를 찍어 서양인들의 환심을 사서 그런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짱이머우가 나라를 팔아가면서 영광을 취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서양의 심사위원들이 중국의 낙후된 모습을 찍은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은 집에 앉아 글을 쓰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서양사람들이 별것 아니라고 말하면서도,속으로는 너무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출국하는 사람들이 유니폼을 제작하여입는 것이 그 예이다. 중국의 회사원이나 공무원들이 유니폼을 입고 획일적인 걸음걸이로 똑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파리나 뉴욕의 거리를 걷는 정경을 상상해 보라! 이상하지 않은가? 출국하여 직무를 수행하고 일을하는 데 유니폼이 왜 필요한가? 평생 한 번도 중국에 와보지 못한 서양인들이 본다면 어! 중국인들은 원래 유니폼을 이렇게 입는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자신을 왜곡시키는 일이다. 왜냐하면 국내에서는 결코 이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 쓰고 입는 것만큼은 자유로우며, 결코 정부가 통일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왜 출국할 때는 이렇게하는가?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병폐이다. 그러나 최근몇 년 사이에 중국인들에게 다소 변화가 생겼는데, 견문도 넓어지고 심리도 어느 정도 정싱적으로 돌아와 유니폼을 입는 등의 행동까지는 하지않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파리의 거리을 걸어가면 영화 속의 장면처럼 많은 파리사람들이 둘러싸고서 중국사람이 왔다고 구경하는 대신 아주 정상적으로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베이징 시의 찐빵같이 생긴 자동차 ' 빵차 택시[函的] '도 하나의 진풍경이다. '빵차'와 같은 교통수단은 싸고 실용적이어서 국내의 상황에 잘 어울리며 수입이 괜찮은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2년 전부터 빵차를 형편없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빵차를 힐난할 때마다 빵차 기사는 골머리를 썩이며, 소형 승용택시인 샤리(KrI1)역시 3기통으로 좁아 비틀어지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투덜댄다. 이럴 때마다 빵차 기사는 벙어리 냉가슴 않는 심정으로 언젠가는 샤리를 잡아 혼을 내주겠다고 벼른다고 한다 만약 아무도 이처럼 빵차를 욕하지 않았다면 빵차 기사라고 해서 샤리에 대해 잡아먹을 듯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 때문에 놀라워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고위층 인사들이 갑자기 빵차 같은 교통수단은 등급이 너무 낮아 베이징 시의 미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이며 국제적인 대도시로 중국의 관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빵차를 없애고 등급이 높은 차로 교체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안전성이나 기타 기술 때문에 빵차를 도태시켜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도시미관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도태시킨다는 것은 확실히 그 이면에 좋지 못한 심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들이 자신들을 위해 사는지 서구인들을 위해 사는지를 묻고 싶다. 현재 우리들의 경제수준으로는 빵차를 타는 것이 당연히 어울린다. 일반 국민들도 이런 실용적인 교통수단을 좋아한다. 우리들이 차를 타는 목적은 푸싱먼(復興門)에서 싼웬챠오(三元橋)나 혹은 다른 곳에 가기 위한 것이지 남에게 겉치레로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슨 영향을 준단 말인가? 독일에서는 택시도 모두 벤츠인데 그렇다면 우리도 모두 벤츠를타야 국위선양을 한다는 말인가? 사실 합리적이라는 서구인들은,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허영을 부리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빵차는 베이징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음을 실제적으로 알려 주고 있으며, 신경과민인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그렇게 베이징 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인지 자기 생활의 편리와 자유로움을 위해 사는지 명확히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사람들은 당신이 무슨 차를 타는지 알아보려고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다. 왕푸징(王府井)이나 젠구오먼(建國門)에서는 서양인들도 중고 자전거상점에서 산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이다. 서구에 대해 과민반응하는 것은 앞으로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확실히 고쳐져야 한다. 애국이란 말을 매일 입에만 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축구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선수들이 경기 전후에 기립하여 국가를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경기에서 져 화제가 안 된 것이지, 이겼다면 당연히 언론매체에서 어떻게 그렇듯 훌륭한 애국교육을 시켰느냐고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축구는 국가를 불러서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력도 있어야 하고 작전도 잘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일일이 애국과 연결시켜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은 다소 병적이다. 관중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경기는 대 그루미아 전이었다. 이 축구경기는 중국인이 심판을 맡았는데, 심판의 편파적인 판정 탓-그것이 애국심의 발로인지는 몰라도-에 상대편이 졌다.그 팀은 앞으로 중국에 와서 경기를 할 때는 자기네 심판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축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원칙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중국 각계의 인사들도 마찬가지로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나쁜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한 심리현상이 우리에게 만연하고 있다. 한번은 버스에서 두 젊은이가 싸우자 자상해 보이는 한 노인이 그들을 말리면서 다음과 같이 훈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너희들이 어떻게 길거리에서 싸울 수 있느냐? 아주 몰상식한 짓이야. 너희들은 수도 베이징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 !'이런 식의 말은 베이징의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수도 베이징사람이므로 문화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싸우는 짓 따위는 자칫수도의 이미지를 망칠 우려가 있다는 뜻으로 들린다. 텔레비전 화면에서도 이런 광경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좀더 넓혀서, 수도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길거리에서 싸워도 좋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 말 속에는 질서가 잡힌 안정된 곳에서 살고 싶은 염원보다는. 실제는 그렇지 않더라도 수도와 같은 한 나라의 관문과 같은 곳에서는 남의 이목을 염려해서라도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안타까운 우려가 담겨 있다. 우리들 속에는 확실히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마음이 많이있다. 사실 우리들의 환경. 옷. 생활방식, 문화기준 등에서 가장 우선시해야 할 조건은 우리들의 위생과 안락한 생활을 위한 우리 자신들의 필요성이다. 예를 들면 식당의 위생, 시장의 질서등은 우리들의 삶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데 실질적인 기여를 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단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화는 진정한 문화라고 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작년에 베이징에서 세계여성대회를 개최했는데, 여러 곳에서 소위 '위생과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국제적인 회의를 개최하려면 위생적이어야 하는 모양이다. 이것은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회의가 끝난 뒤에 베이징의 위생상태는 옛날보다 오히려 못해졌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은 진정한 문화가 아니며,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깊은 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당연히 세계의 많은 나라나 많은 지역에도 우리와 같은 이런 심리상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처럼 심한 곳은 드물다. 이와 같이 단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행동에서 사람들은 외국인들이 찾아와야만 그나마 가까스로 문화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그 '문화'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수동적으로 강제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