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3장 시들어 가는 미국, 일어서는 중국
1. 내가 '친미감정'을 가지게 되기까지
나는 1964년에 태어나 사상해방의 시대인 70년대 말부터 세상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토론의 분위기가 만연하여 어떤 가치관도 인정 되던 시기인 80년대에 쌍하이(上海)에서 대학을 다녔다. 당시에는 나와 같은 자유사상을 지닌 중국청년이 미국에 대해 깊은 관심과 좋은 감정을 가지는 것은 무척 보편적인 일이었다. 이런 감정은 광적인 형식으로 표현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따뜻한 향기까지 내뿜고 있어 우리들이 현실을 인 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하고 나아갈 방향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1987년 여름, 나는 싼뚱(山東)에서 뜻이 맞는 대학친구와 어려운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우리 둘은 모두 문학청년으로 부정적인 면이 강하였다. 당시 우리는 아주 낡은 흑백Tv 한 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루는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초원의 집[이라는 미국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유치하며 지나치게 과장되고 심지어는 기만적이라고 할 정도의 드라마였으나. 당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한 편의 미국 드라마가 가져다준 희열은 너무나 강렬하였다. 그 당시 친구는 즐거운 얼굴로 야, 우리도 뿌리를 찾는다면 우리들의 뿌리는 모두 미국에 있는 것 같다. 미국 드라마가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니 말이야'라고 한 적이 있다.그리고는 웃고 넘긴 적이 있는데 나는 이 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없이 내뱉은 이 한 마디로부터 나는 무엇인가 절박하게 와 닷는 느낌을 받았었다. 생각해 보라. 동방 대국인 중국의 한 아이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단조롭게 청년기를 지냈다. 그들은 야영을 해본 적도 없고 남의 과일을 훔쳐 본 경험도 없이 아주 조용하고 단순하게 자랐다. 청년이 되어서도 기껏해야 그림책을 들여다보는 - 물론 이런 방면의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지만 -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권위있는 신문의 국제면을 통하여 적어도 정치,군사 면에서는 '조숙'하였고, 철이 들면서부터 소설이나 탱크포탄에 ' U S A'라고 표기된 서양의 강대국 '미국'이란 존재를 차츰 인식하게 되었다. 청년은, 미국 군인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각기 '투항서' 를 미리 준비해 다닌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점이 청년에게 미국 군인이 일본 군인보다 더욱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가장 먼저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나라이고 가장 먼저 원자탄과 수소폭탄을 제조하였으며, 그 나라의 스파이들은 무성권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정도를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대단하지만 결코 잔인하지 않은 나라이고, 국가관도 동방의 나라처럼 그렇게 투철하지는 않으며 노동자와 농민을 특별히 박해하지도 않고 고급간부를 무자비하게 숙청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낙천적이고 활기 넘치는 나라라고 청년은 알고 있었다. 중국 전역에 반미감정이 만연되어 있을 때에도 대개의 청년들은 미국에 대해 일종의 막연한 호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또한 같은 또래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영화 {햇빛 찬란한 날[]}에서 보여 주었던 것처럼 사회제국주의의 전쟁위협은 우리 세대들에게 전쟁의 충동을 느끼게 하였고, 닉슨의 중국 방문은 우리들을 제국주의와 수정주의의 어느 한 편에 있게 하였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는 무슨 비밀이라도 털어놓듯이 '만약 중국이 소련과 전쟁을 벌인다면 미국은 중국을 도울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우리들은 무척 술렁거렸다. 사실 우리들은 미국을 특별히 싫어할 이유도 없었다. 비록 한국전쟁 때 충돌이 있긴 했지만 미국은 후에 평화서명을 하는 등 현명한 처신을 하였기 때문에 이 정도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에 대해서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첫째로 소련의 통치집단은 스탈린 주변에 숨어있는 반역자들이었다. [레닌 1918에 보면 레닌 주변의 반역자들은 아주 흉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구 차르() 황제에서 신 차르 황제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실들은 우리들이 죽기 전에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900년 7월 중 .러 국경지대인 하이란파오(海蘭泡)에서 러시아인이 자행한 수천 명의 중국인 대학살사건에서부터 60년대의 쩐빠오따오(珍寶島) 국경 충돌사건에 이르기까지 양국 간에 일어난 각종 사건으로 볼 때 악랄하기 비길 데 없는 사회제국주의 소련과는 절대로 우방이 될 수 없다는점이다. 셋째, 소련인은 그 품성이 비열하다는 것이다. 전 소련의 '국가안전위원회'인 KGB의 음흉한 활동이나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원에 보낼 수있는 인간성 따위는 우리가 소련 자체를 형편없는 국가로 보지 않을 수없게 하였다. 림비아오(林舊)도 결국 이러한 소련으로 도주하려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 동안 받은 교육과 직감으로 볼 때, 반역자와 KGB가 통치하고 있는 소련을 증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쭈펑보(朱逢舊)가 부른 {붉은 삼나무[]}라는 노래를 배웠었다.
아름다운 서호(西湖) 가에, 서 있는 붉은 삼나무 한 그루. 바다 건너 피안(彼岸)에서 와, 우정의 이슬을 맺고 있구나. 삼나무야 붉은 삼나무야, 너는 미국 사람의 우정을 가져와, 동방의 아름다운 땅에서 자라는구나. 아-.너는 튼튼하게 자라는구나, 우뚝 솟은 붉은 삼나무야.
이 노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고 많은 노인들도 젊은 시절의 양코배기 미국인에 대한 좋은 인상을 떠올리며 흥얼거렸다. 비록 정부에서는 '미 .소 양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절대 반대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었지만 우리 또래의 청년들은 중국과 미국이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십대에 이미 국제 정치상황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하였다. 알다시피 브레즈네프 때의 소련은 국제 정치무대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고 따라서 세계의 혁명세력과 좌파세력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마오쩌똥은 이에 불안을 느끼며 당시의 미국무장관 키신저에게 '나는 우파를 좋아하며 우파가 좌파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빌리 브란트( )를 싫어해 반동적 제국주의의 두목격인 닉슨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위인들의 언행에 대단히 공감하고 있었다. 나는 극우의 관점에서 국제관계를 바라보았다. 박정희(), 환원싸오(阮文稻). 장지에쓰(외에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친미적 경향을 가지기만 하면 현명하고 깨끗한 정치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반면 칠레의 알랜드 살바도르( )는 정치 난쟁이로 알았고. 시인네루다 파브로(는 수치스러운 KGB 스파이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기니() 의 세쿠 투레는 구제할 약도 없는 인물로, 이집트의 낫세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알고 있었다. 친소적일 뿐 아니라 반중국적인 인도의 인디라 간디 부인에 대해서는 원한까지 품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중국을 지지한다고 믿었던 아프리카에서조차 반중국의 물결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디오피아혁명 후의 정부기관지인 사인 아프리카=洲號角]에 중국을 공격하는 언론이 실릴 정도였다 나는 제3세계에서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소련의 조작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남예멘에서 일어난 사건은 사회제국주의국가의 음흉한 음모를 극명하게 보여 주기에 충분하였다. 로바야 대통령의 특사가 북예멘으로 날아가 북예멘 대통령 카스미를 면담하는 자리에서 특사의 가방을 여는 순간 폭발물이 터져 카스미 대통령이 즉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아랍국가들이 남예멘과 외교를 단절하기도 하였다. 며칠 뒤 미그기가 남예멘 대통령궁을 공격하였고, 중국에 대해 우호적이던 누바이 대통령은 의자에 묶인 채로 쿠데타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소련은 이렇게 잔악한 방법으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어 결국 두 나라는 소련의 세력권으로 넘어갔다. 70년대 말은 사회제국주의국가인 소련의 기세가 등등한 시기였다. 이에 반하여 미국은 실패를 거듭하였고 나는 이런 미국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며 반미활동을 혐오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반미 성향을 띠는 것은 몰상식하고 문화수준이 낮아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보았다.
70년대 말 북경에서 공연된 {정글의 북소리[라고 기억되는 연극을 보고 소년이었던 나는 공포를 느끼기까지 하였다. 이 연극을 본 중국인들은 모두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프리카 어느 나라 해방전선 참모장이 우연히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는 소련의 흉계를 알게 되었는데. 아름다운 소련 여간첩의 방해공작을 뿌리치고 이 사실을 폭로하려 기자회견을 열자마자 암살당하는 내용이었다. 아마 모든 중국 관중들은 참모장이 예정대로 흉계를 폭로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이때부터 제3세계의 정세에 대해 마음 아파했다. 온갖 고통을 다 겪고 있는 사람들아, 그대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있는가? 우호조약에 서명하고 소련 교관을 받아들이고, 미대사관을 점령하고, 미국 지원자들을 가해하는 일 따위가 전부란 말인가? 적과 우방을 분별하는 아주 간단한 이치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나는 털끝만큼의 의심도 없이 캄보디아와 아프간사건으로 미국을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과 중국이 나란히 모스크바올림픽에 불참한것에 대해 박수를 쳤으며. 루마니아와 중국이 당당하게 로스앤젤레스 을림픽에 참가하자 환호를 보냈다. 내가 겪은 이런 모든 경험은 자연스럽게 대학시절에 미국을 이해하는 기초가 되었다. 스무 살을 갓 넘은 사람이 대학교수가 되고 준수하게 생긴 젊은 대통령이 탄생하는 나라, 열광적인 선거분위기, 관중을 매료시키는 훌륭한 영화, 혜밍웨이에서부터 피츠제랄드에 이르기까지 미국으로부터 받은 충격은 혜아릴 수 없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정신생활을 위주로한 거의 모든 것들이 미국과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졌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우리들은 자기도 모르게 미국의 체내로 빨려들어가고 있음에도 이런 사실에 대해 심사숙고해 볼 방법이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더이상 말하지 않겠다. 당시 절대다수의 학생은 미국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추세였다. 페르시아만전쟁을 받아들이는 중국인의 인식에서도 보이듯이 미국의 가치가 중국인의 가치척도가 되는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슬픈 일이든 기쁜 일이든 미국은 인류 모두에게 여전히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항한다는 것은 그들 스스로 혼란과 불행을 자초한다고 보았다. 나는 그때 레이건 대통령을 극도로 숭배하였다. 나와 함께 일하는 방송국의 아나운서 한 분이 나에게 '레이건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국 대통령 중의 하나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 같다'고 한 적이 있었다.그 해에 마침 레이건이 쌍하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레이건이 보여 준 행동은나를 매료시켰다. 레이건이 어느 텔레비전공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그는 보좌관들을 따돌리고 작업대로 다가가 예의바른 태도로 납봉인두를 빌려 아주 숙련된 솜씨로 여공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아마 그 여공은 틀림없이 '이 순간이 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나와 함께 방을 쓰던 친구는 레이건 같은 훌륭한 정치인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한탄에 한탄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그가 마치 '영원불변의 여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러워하였다.
80년대는 경제와 사회개혁의 심화시기로 과거의 모든 가치관을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는 때였다. 민주주의 정치관이나 대학의 학제가 변했고 상품경제가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새 연애관까지도 변하였다. 모든 것이 일순간에 변하였다. 자유라는 특징을 가진 대학생들은 오직 미국식 가치관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정색을 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지나치게 강력해진 반면 다시 소생하고 있는 중국은 아직도 나약하다. 또 직감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 사물에 접근하고 관찰하도록 가르친 미국문화는, 우리를 앞 세대에 비하여 훨씬 실질적이고 명쾌하게 만들었다. 밝고 자신감에 넘치는 행동은 어린 양과 같은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이 내가 친미적 경향을 띠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중국의 국가 언론기관은 대부분 미국의 CBS나 영국의 BBC로부터 국제뉴스를 제공받아 내보내기 때문에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세계 각국의 소식들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어쨌든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대상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국가일 수밖에 없으며 미국의 각종 외교적 조치는 국내신문의 머리 기사로 등장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객관적인 사실 때문에 우리가 오류를 범했거나 가치관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깊고 넓게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데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볍게 '에이, 어제와는 작별하고 싶다'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제는 우리의 일부분인데 어떻게 어제와 고별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쯤에서 내가 친미감정에 빠져 들면서도 지울 수 없었던 감응(感應), 이것은 어쩌면 참회인지도 모를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대학 3학년 때인 1986년의 일이다. 내 바로 위의 침상에는 쩌장(料뚱)쌍위 사람인 뤼( 군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쌍하이 학생연맹 회장이었다. 우리는 그 당시 중동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 토론하기를 좋아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레바논으로 축출하였다. 이 사건은 전략적인 면에서나 전술적인 면에서 모두 낭만적인 색채가 농후하였으나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스스로의 일관된 잣대를 가지고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루는 뤼 군이 잔뜩 흥분하여 달려오더니 팔레스타인 전국학생연합회 대표단이 쌍하이를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데 좌담회에 참석할 인원이 우리 학교에도 배정되어 있어 나를 추천해 두었다는 것이다. 뤼 군은 나에게 함부로 말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입조심히고, 모든 문제는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먼저 언급하도록 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특히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내부 파벌과 투쟁에 대해서는 묻지 말라는 당부까지 하였다. 비록 나는 나대로의 견해와 할 말이 있었으나 학생은 규율을 지켜야 하고 특히 이는 국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이들과의 만남에서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신념'으로 여겼던 일들이 그들의 원시자료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하였기 때문에 그들과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보편적인 것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여기에서 나는 우리가 평소에 매우 '진보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쫓아가는 것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정과 국가를 잃어버린 민족이 그들의 기본권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데도 나는 대학가의 카페에 앉아 마음 편하게 '이스라엘의 영웅'이니 엉클 샘()들의 나라, 미국의 '국제적 책임'이니 하면서 사치스러운 입방아를 찧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가식적인 정신적 풍요로 진지함과 진리에 접근하려는 의지를 망각하고 있었으며, 거리낌없이 정부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약소민족의 투쟁을 야비한 태도로 보아왔었던 것이다. 눈앞의 권세와 이익에만 집착하여 노골적으로 미국에 대해 환호를 보내고 있었으니, 이런 것을 두고 우리가 성숙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태도가 우리 세대에게 희망이 있다고 보는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나는 나도 모르게 내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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