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6. 거절당해도 손해볼 것 없다
중국이 가트에 복귀신청을 한 기간은 국제기구 역사상 가장 긴 시간을 끈 경우일 것이다. 중국은 1989년 초 이미 가트 복귀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실천하였다. 당시 이 조직에서도 중국을 복귀시키는 데 필요한 최후협정서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미국측의 방해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48년 초에 중화민국 정부대표는 아주 중요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문건에 서명해 버렸다. 이 문건이 바로 80년대 말에야 중국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포괄협정(GATT) '이었던 것이다. 이 문건을 기초로 만들어진 가트는 이후 근 반세기 동안의 변화를 거치면서 갈수록 그 중요성이 더해 가고 있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경제는 '지역화'라는 추세로 변모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이미 경제일체화를 달성하여 회원국들 사이의 관세와 출입국에 따르는 각종 제한을 철폐하였고, 심지어는 공통화폐를 발행할 계획까지 세우고있다. 북미에서는 북미자유무역구(NAFTA)가 성립되어 캐나다, 미국, 멕시코 3국간의 무역장벽을 없애고, 3국을 직접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하여 인적, 물적 자원이 이 지역 내에서 자유롭게 유통되도록 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가 점점 중요한 활약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조직은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회원국 간에 무역자유화문제에서 이견이 있긴 하지만 아시아 지역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그 중요성이 재인식되어 아르헨티나와 같은 먼 남미의 국가들도 태평양 연안국가임을 자처하며 가입하려 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 3개 조직은 경제력이 가장 막강한 지역으로 회원국 상호 간의 편의를 제공하고 공동체 이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배척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개혁개방을 한 지 10년이 지난 중국은, 한편으로는 호혜의 원칙을 고수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배척하는 세계적 경제구도에 직면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일부 학자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해 회의적으로 우려한 적이 있었다. 중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상황은 '아시아의 네 마리용'이 한창 경제발전을 이룩하던 시기와는 다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당시 국제 경제환경은 수출에 아주 유리하여 미국과 같은 주요 수입국이 수입 물품에 대해 지금처럼 경계하지도 않았고 특정 국가의 수입품에 대해 지금처럼 '반덤핑 조사' 같은 것을 하려 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이 '네 마리 용'이 겪은 당시의 수출증대 경험을 모방하려해도 결코 순조롭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전문가들의 이러한 우려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선진국이 무역자유화를 부르짖는 것은 경제공동체의 국가 간에 관세상의 특혜를 주자는 것이고 '나와 다른 부류'들로부터 수입되는 상품에 대해서는 '반덤핑' 의 깃대를 마음대로 흔들어보자는 의미가 깔려 있다.
1년 전 중국의 어느 기업이 미국에서 온 반덤핑조사단의 조사를 받자 과감하게 미국 법정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기업은 승리하였고 원래 응징의 성격을 지녔던 관세율도 대폭 내려 갔다. 이는 중국의 수출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가 자신을 위한 싸움에 성공한 것이어서 국내 언론계가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된 것이다. 사실 중국 기업으로 외국의 '반덤핑조사'를 받은 회사는 한두 개가 아니다. 중국 수출상품 중 200여 종류가 외국의 제한적 조치를 받았었다. 1994년 유럽연합이 중국의 신발에 대해 '반덤핑조사'를 하겠다고 선포했었다. 이 신발의 가격은 대략 4억 달러였으며 1천여 국내 기업이 여기에 관련되었다. 1995년 미국은 2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자전거에 대해 같은 조사를 벌이겠다고 선포하였고 이에 관련된 기업은 100 개나 되었다. 이렇게 되자 1995년 중국 정부와 미국은 협상을 하여 중국의 꿀 수출량을 연 1만 9천 톤 이내로 제한하고,이후 매년 미국시장의 수출 증가율을 6퍼센트 이내로 제한하는 데 동의하였다. 어느 국가`할 것 없이 국내공업이 외국으로부터 위험에 처하면 자신의 민족산업을 보호하는 조치를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국민경제는 대외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앞으로도 수출증대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직물을 생산하는 나라다. 중국이 전세계인의 옷을 입힌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993년 중국의 방직물 수출액은 2백70억 달러에 달했으나 88억 달러의 방직원료와 기계를 수입해야만 했다. 2백70억 달러의 방직물 수출을 위해 88억 달러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1994년 중국 국민총생산액은 4조3천억 원(元)이었으며 같은 해 수출입 총액은 2천3백67억 닿러였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중국의 국제의존도가 약 4=퍼센트에 이름을 알 수 있다. 1979년 국제의존도는 8퍼센트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0년 동안 진행된 중국의 개혁개방정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도 이제는 전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중국인들이 살고 있는 이세상에는 유럽연합과 북미자유무역지역 및 자유시장동맹 같은 자유무역 지역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지역의 무역자유를 누릴 인연이 없다. 그러므로 세계 여러 나라들과 자유로운 무역이 가능한 가트에 복귀하는 것만이 국제적 생존공간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게 된 것이다. 1986년 7월 11일 중국 정부는 가트에 정식으로 복귀신청서를 제출하였다.신청서를 제출할 때 중국 정부는 3가지 원칙을 밝혔다. 첫째 중국은 복귀하는 것이지 신규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다. 복귀와 신 규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1950년 3월의 협정에는 개발도상국에 대한 일련의 우혜정책을 제정하고 있었고 중넌으로서는 이 우헤정책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미국대표는 중국이 복귀하는 데는 경제적인 것과 법률적인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하였다. 법률적인 면으로는 협정의 어느 조항에도 탈퇴 후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규정이 없고, 중국이 복귀할 경우 하나의 선례를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으로서는 중국이 1950년 당시의 우혜조건 혜택을 받고자 하지만 중국은 이제껏 이 조직의 의무를 이행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중국에게 복귀의 기회를 준다면 '의무이행 후 권리를 누린다'는 원칙을 깨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중국의 두 번째 원칙은 수입관세율을 점차 내린다는 것이다. 복귀의 주요조건은 중국이 수입관세율을 인하한다는 것인데. 미국과 다른 국가들이 요구하는 구체적인 협상조건은 지나치게 과도한 것이었다. 중국의 세 번째 원칙은 개발도상국의 신분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현재 개발도상국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이 문제가 바로 중국과 미국의 가장 격렬한 논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95년 3월 미국의 무역협상 대표인 캔트가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협정'을 체결하려 북경에 왔을 때 그는 필자에게 미국인들이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볼 수 없다고 내세우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그가 열거한 4가지 지표는 세계은행 백서에서 나온 것이었다. 먼저 중국의 1994년 국민총생산액은 만 3천억 원으로 이 숫자는 세계 2위인 것이다. 두 번째 지표는 중국의 외화보유액이 이미 세계 5위라는 것이다.세 번째는 중국의 수출 규모가 1994년 1천2백15억 달러에 이르렀으며 이는 세계 10위에 달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1인당 국민생산총액이 4천여 달러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계산방법과 다른 '구매력 평가' 법칙에 따른 것이며,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 볼 때 미국은 중국을 개발도상국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주장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은 3가지 예를 들어 중국의 종합적인 국력을 설명하였다. 세계의 어떤 개발도상국도 선진국만이 할 수 있는 위성을 발사한 나라는 없으며, 어떤 개발도상국의 수도도 베이징과 같이 현대화된 곳은 없고, 어떤 개발도상국도 올림픽 개최신청에서 중국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중국은 선진국의 자격으로 신규가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1987년부터 1994년 1=월까지 중국은 모두 40여 개 국가의 대표들과 제네바에서 19차례의 협상을 벌였다,유럽의 기본적인 자세는 미국과 같았다. 이런 협상은 진행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1994년 8월 대외경제무역부 부장 보좌관인 롱용투(龍永圖)는 제네바에서 제18차 협상에 참여하기 전, 만일 연내에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중국은 앞으로 협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신규가입신청서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최후 결정사항을 공포하였다. 중국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만일 이 기한 내에 협상을 마무리짓지 못하면 1995년 1월 1일부터 가트를 대체하여 조직될 세계무역기구의 창립 회원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94년 12월 가트의 중국관계책임자 길라드의 요청으로 중국대표는 다시 제네바에서 제19차 협상을 열었다. 그러나 19차 협상도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중국의 기본 이익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쉽게 양보할 수 없는 사항들이었다. 그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관세인하문제이다. 중국은 고관세 국가로 6만여 종의 수입품에 대해 관세가 부과되고 수입관세는 평균 65퍼씬트 정도였다. 중국은 3년내에 이를 35퍼센트 이내로 내리겠다고 하였다.그러나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요구는 이보다 더욱 높았다. 둘째, 비관세문제이다. 이는 주로 수입할당제, 수입허가제 등의 수입제한조치를 말하는 것으로 비록 자유무역의 원칙에는 부합되지 않으나 중국이 자국의 민족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 조치를 단번에 취소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의 방안은 주요수입품에 대한 제한조치는 계속 유지하되,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4년 내에 취소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미국은 중국이 보류하고자 하는 수입제한조치를 당장 취소하라는 것이다. 셋째, 시장개방문제이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잠재된 시장이 크고 이윤이 많은 보험, 은행, 유통업 및 여행업 등의 서비스업에 큰 흥미를 가져왔었고 따라서 미국 기업이 이 업종에 진출하는 데 우선권을 줄 것을 요구하였다. 넷째,투자정책문제이다.중국은 공동 투자기업의 생산품에 대해 일정한 국산화 비율을 요구했었다. 예를 들면 싼타나자동차의 국산화율이 현재 90퍼센트 이상이 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주로 민족산업의 보호육성을 위한 것으로, 이밖에도 공동 투자기업은 외환의 입출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하며 생산품의 일정비을 이상을 국제시장으로 수출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있었다. 이와 같은 공동 투자기업에 대한 요구는 개발도상국가에서는 보편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세계무역기구는 선진국은3년 내에.개발도상국은 5년 내에 이런 조항을 철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미국은 2년 내에 이러한 조항을 철폐하라고 요구하여 중국의 복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선진국 자격으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개발도상국 자격으로 복귀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19차 협상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나, 이는 결코 중국이 세계를 향해 스스로의 대문을 걸어잠근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96년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 영수회담이 일본 오사까에서 열렸다.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은 이 회의에서,중국은 1996년 4월 1일부터 수입관세율을 평균 23퍼센트 수준으로 대폭 인하한다는 내용의 의외의 결정을 선포하였다. 1996년 4월 1일부터 이 결정은 시행되었으며 이와 관련된 상품은 5천여 종에 달했다.
중국이 가트에 복귀하기 위해 걸어온 협상의 길은 험난하고도 멀었다. 중국은 지금까지도 이 협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이 협상과정에서 미국은 극도의 모순된 태도를 보여 주었다. 한편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경제력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자꾸만 감소하기 때문에 중국의 경제력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복귀는 의심할 것도 없이 국제시장에서 더 큰 생존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미국의 '슈퍼301조'와 같은 일방적인 무역제재조치나 중국에 부여한 최혜국대우 등은 세계무역기구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쉽게 시행하거나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미국이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별로 없다. 그래서 지금 내놓을 수 있는 카드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중국이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절대로 가볍게 양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 역시 쉽게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무역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며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게 베푸는 은혜도 아니다. 미국도 중국상품에 대해 보복을 가하고 응징성 관세를 징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시장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모두 미국과 같이 행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무역대표 캔트가 중국상품에 대해 고액의 관세를 징수하겠다고 선포한 날, 중국은 겨우 2시간 차이로 이에 필적할 리스트를 발표할 수있었다. 무역이 아무리 자유화한다 해도 국제무역은 주권국가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다. 1994년 12월 중국의 가트복귀협상이 결렬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의 빠마통원자력회사가 중국 정부로부터 꽝똥(廣東)따야완(大亞潛) 핵발전소의 제2기 공사를 따내고 있을 때 미국회사의 총수들은 시기심과 실망이 가득찬 심정으로 이를 지켜봐야만 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미국의 보잉항공사가 아마 가장 확실하게 알 것이다. 중국민항은 과거 10여 년 간 보잉항공사로부터 167대의 비행기를 구입하였다. 보잉항공사측의 계산에 의하면 이후 13년 간 중국 국내 승객수는 매년 22퍼센트 증가할 것이라고 하니 중국은 앞으로 800대의 비행기를 구입해야 한다. 이 시장의 잠재력과 이익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미국 3대 자동차회사 중 크라이슬러자동차만이 현재 베이징에서 공동투자로 지프를 생산하고 있으며 독일의 폴크스바겐과 프랑스의 뿌조 및 씨트로엥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만일 미국이 계속해서 중국의 골치를 아프게 한다면 중국은 미국 회사들에 대해 문을 굳게 닫아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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