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제2장 살아나는 용의 혼
1. 미국에 NO라 고 말하는 중 국의 철의 여인
1995년 2월 26일, 베이징의 중심 창안지에(틋安衡)의 우중충한 회색건물 밖에 어깨에 각종 카메라를 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들은 각국 통신사와 방송국의 주재기자들이었다. 불이 환히 밝혀진 중국대외경제무역부 건물에는 중 .미 지적재산권에 대한 협상이 진행중이었다. 쌍방의 협상대표는 묘하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미국측은 변호사 출신이며 말을 아주 조리있게 하는 무역협상 부대표 바셰프스키였으며 중국측은 현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인 우이(콧儀)였다. 밤 11시,두 여성대표는 동시에 협상장을 나와 세계 각국의 기자들 앞에서 쌍방이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협의'에 가조인했음을 발표하였다. 중 .미 양국 간에 20개월에 걸쳐 진행된 지적재산권협상이 드디어 막을내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한 외국통신사 기자는 기사를 타전하면서 '전세계가 한시름 놓았다'라고 하였다. 중 미 간 지적재산권문제는 80년 이래 계속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1990년 4월 미국이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해 불리하다는 이유로 미국무역법 '슈퍼301조'의 규정에 근거해 중국을 '중점 관찰 대상국'에 넣을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의 지적재산권문제를 대하는 태도도 아주 적극적이었음을 말해 두어야 할 것 같다. 1992년 1월 중 .미 쌍방 대표인 우이와 칼라 힐스는 '중 .미 지적재산권보호에 대한 양해각서'에 공동 서명하였다. 이 각서에서 중국은 약속기한 내에 이 문제에 대한 보호작업을 완성하길 원하였고 미국측은 중국에 대한 특별조사를 취소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994년 6월에 미국은 재차 '슈퍼301조'를 들고 나와 중국 정부가 양해각서에 서명한 이후 취해 온 노력은 고려하지 않고 6개월 간 중국에 대해 조사를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번에 미국이 거론한 문제는 컴퓨터와 관련된 레이저디스크의 해적판이었다. 중국의 불법행위가 미국 기업에 매년 수십억 달러의 손해를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반년 동안 중국과 미국 간에는 지적재산권보호문제로 모두 일곱 차례에 걸친 협상이 계속되었다. 협상이 시작되기 전 기자회견에서 '철의 여인'으로 불리는 대외경제무역부 부장인 우이는 단호한 어조로 중국 정부를 대표해서 '선진국이 몇십 년 내지 몇백 년의 과정을 거쳐 겨우 완성한 지적재산권보호법을 중국은 단기간에 걸쳐 비교적 완벽한 보호체계를세웠다'고 말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 정부는 미국측이 제시한 불법 복제 레이저디스크에 대처하기 위한 전문 단속반을 구성해 백만에 이르는 해적판 레이저디스크와 비디오테이프를 몰수하여 불태우고 관련 공장들을 폐쇄시켰다고 하였다. 솔직하게 말해 미국측이 지적재산권의 보호를 요청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중국 역시 이 요구를 매정하게 거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측 협상대표들이 협상중에 지적재산권보호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을 연이어 추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기들의 단독 자본으로 중국에 신문, 출판과 오디오 및 비디오 관련회사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라는 요구 같은 것들이다. 비디오 및 오디오 제품의 대외 시장개방문제에 대해서는 선진국들 사이에서도 지금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또한 미국측이 요구한 국경통관제도와 판권인증제도 및 행정장의 법집행권한 등의 문제는 미국 스스로도 아직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측은 중국의 사법 및 입법 과정에 이르기까지 간섭을 하려고 들어 중국인을 크게 불쾌하게 만들고 있다. 심지어 미국은 중국에 탐정사무소 설립을 허락하라고까지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차라리 베이징에 C I A 지부간판을 걸겠다고 설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미국측의 6개월 이내 무역보복 엄포에 직면한 중국의 여장부 우이는 이미 쌍방이 내밀게 될 비장의 카드를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머리가 약간 희끗한 이 '철의 여인'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측에 사납게 경고하였다. '당신들이 보복리스트를 선포하는 날은 바로 우리가 반보복리스트를 공포하는 날이 될 것이오." 1994년 최후의 그날, 미국 무역대표 캔트는 비장의 카드인 대중국 무역보복리스트를 공포하였다. 그러나 중국측도 이에 굴하지 않고 2시간 뒤 대미 무역보복리스트를 공포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한 일본 통신사의 베이징 주재기자는 아주 감탄한 논조로, '일본이 미국과 무역협상을 할 때는 중국의 우이 여사와 같이 미국에 대해 과감히 'No'라고 말할 인물이 없다'라는 내용을 본국으로 타전하였다. 1995년 2월 4일 미국 무역대표 캔트는 대중국 무역보복을 단행한다는 최종 결정을 선포하였고, 이에 맞서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역시 대미 무역보복의 최후 결정을 공포하였다.이 두 리스트를 보면 미국측은 28억 달러였던 대중국 수입액을 1억8천만 달러로 삭감하였으며 중국의 대미 주종 수출품인 운동화, 가방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이가 미국에 제시한 리스트에는 무역 외에도 투자에 관계된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사는 중국으로부터 공동투자에 의한 자동차 생산공장의 설립허가를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때였으므로, 우이가 새로 추가한 항목은 미국의 급소를 정확히 찌른 셈이 되었다. 목록이 공포된 후 캔트는 우이에게 친필서한을 보내 워싱턴에서 이견 조정을 위한 최후 협상을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벌이자고 하였다. 미국이 이렇게 나오자 중국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단 우이는 협상을 다시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장소는 워싱턴이 아니라 베이징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아 회신하였다. 중 .미 지적재산권 협상은 실무급에서 대표급으로 격상되어 베이징에서 열리기로 결정되었고, 미국 무역협상 부대표 바셰프스키가 베이징까지 날아와 중국 대외경제무역부 부부장 순쩐위(孫振宇)와 함께 최후 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이 내놓은 투자카드가 비로소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국내 대기업들의 계속되는 압박을 받게 되었고 드디어 중국의 입법 및 사법권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더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중국측 역시 일정 수준의 양보를 하였다.미국이 요구한 오디오나 비디오 관련제품과 소프트웨어 및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기 위한 단독 투자는 불허하는 대신 그것들을 합자의 방식으로 완화하여 허가하였다. 이로써 쌍방의 입장 차이를 조금씩 좁힐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25일, 쌍방은 협의문의 초안을 쓰기 시작했다. 30페이지에 달하는 본문의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대조가 필요했기 때문에 협상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다. 25일에 작성하기 시작한 초안은 26일 새벽 3시까지도 겨우 4분의 1 정도 분량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결국 26일 밤 10시가되어서야 이 무역전쟁은 쌍방의 대표가 샴페인을 터트리는 가운데 막을내렸다.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은 우이와 바셰프스키가 10여 시간을 기다린 기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기자들은 미국에게 감히 'No'라고 말할수 있는 중국의 여인 우이에게 존경과 감탄을 보냈다. 그녀는 어떠한 강압에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자신의 이익과 존엄을 지키는 중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 것이다.
중국인에게 특별히 해야 할 이야기 한 가지가 있다. 미국이 베트남과 다시 수교하고 하노이에서 대사관 개관식을 거행할 때 국무장관 크리스토퍼가 참석하였다. 국무장관이 이런 행사에 직접 참석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과 베트남 국민 간에 깊은 우의가 있어서도 아니고, 하노이의 열대풍경을 즐기려고 한 것도 아닐 것이다. 그들의 이런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크리스토퍼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으나. 미국 참의원 군사위원회 위원인 맥카인이 숨김없이 그 이유를 말하였다, 그는 '미국과 베트남은 중국의 패권주의를 제재하여야 하는 공동의 목적이 있다. 경제적으로 활기에 넘치고 안정을 되찾은 베트남이 북방의 강력한 이웃 나라를 제재하려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안전에도 이익이 된다'라고 말하여 미국 정치가들의 속셈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다. 중국을 제재하려는 미국의 의도가 갈수록 분명해 짐에 따라, 지금까지 미국의 비호를 받아왔던 몇몇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미국과 보조를 맞추려 하고 있다. 미국은 인권과 가트{ GATT)에의 복귀 및 세계무역기구( WTo ) 가입 등의 문제를 들고 나와 구체적인 행동으로 중국을 제재하기 시작하였다. {워싱턴 포스트}는 사설을 통해 미국 정부는 중국이 2000년 올림픽을 개최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가트에의 복귀문제에 대해서는 '중국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도 하였다. 미국은 끝내 그들의 말대로 하고 말았다. 2000 올림픽을 중국이 개최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세계가 주목하던 중국의 세계경제무역기구 가입문제에 대해서도 미국 때문에 일치된 의견을 얻을 수 없었고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1995년 7월, 영국의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책 표지에 '중국제재'라는 제목을 싣고 중국의 경제력이 우려할 정도로 고속성장하고 있다는 장편의 글을 실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쟁의를 마무리하고 공고한 공동전선을 구축해야 하며, 유럽은 미국과 중국의 충돌을 방관자적 태도로 바라보면서 어부지리(를 노리던 태도를 버리고 미국과 손을 잡아야만 효과적으로 중국을 제재할 수 있다고 진지하게 경고하였다. 영국이 중국제재의 글을 내놓은 이튿날, 미국에서 최대 판매량을 자랑하는 {타임즈}도 유명 칼럼리스트 크로사모의 글을 실었다.그는 비엔나회의를 열어 프랑스제재방안을 만든 것처럼 중국에 대한 통일된 제재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중국을 제재하자는 주장을 이들 저널이 앞서서 내놓자 {데일리 뉴측} 이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미국의 주요 일간지들은 앞다투어 덩달아 보조를 맞추며 미국 정부가 중국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데일리 뉴욕}은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대만은 지난 1세기 동안 겨우 40년 정도 중국 정권의 직접통치를 받았을 뿐인데도 국제법상 '하나의 중국'이라는 것이 인정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던졌다. 더욱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영문 잡지 [파 이스트 이코노믹 리뷰]의 표지에 '부드럽게 나아가라[輕柔地走]'라는 제목으로 실전 글에서는 중국을 제재할 정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나아가 성립된 자 얼마 안 된 동남아안전회의가 현재 직면한 문제는 미국과 협력하여 중국을 효과적으로 제재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일본의 주간지 {시지카이세쓰(時事解說)}의 맨 앞에 실린 글에서 미국정부는 그들의 정책이 중국과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지 절대로 '중국을 제재'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이미 동남아 국가들과 ' 대중국 포위권'을 형성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확실히 중국을 제재하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처럼 시끄럽게 추태를 부리는 자들은 오히려 비웃음을 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속으로는 내키지 않으면서 마구 떠들어대는 놈들도 있고, 남을 선동하면서도 자신은 방관자인 척하는 놈도 있으며, 험은 남아돌지만 쓸 수 없는 놈도 있고, 부화뇌동하는 무리도 있다. 이처럼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제재론자들이 어떻게 공동의 이익을 위해 함께 뭉칠 수 있겠는가? 중국으로서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조차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언행들에 대해 중국 정부는 제재할 것은 제재하고 따질 것은 따지고 반박할 것은 반박하고 무시할 것은 무시해야 한다. 이 문제로 시간을 길게 끌어 우리가 나아갈 길에 방해가 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 국민들은 실질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중국을 제재하려고 허튼 수작을 부리는 나라의 물건은 사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이들의 작태에 효과적인 제재를 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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