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 - 쏭챵, 짱창창, 챠오벤, 꾸칭셩, 탕쩡위 공저
8. 모호한 일본
이 제목은 원래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스톡홀름 황실문학원에서 수상할 때 했던 연설제목 '모호한 일본의 나'에서 나왔다.오에는 국가와 국민을 분리시키는 이런 강력하고 예리한 모호(ambiguity) 증상은 일본과 일본인 간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본의 현대화는 단순히 서구모방 일변도로 나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시아에 위치하고 있고 일본인 또한 강력하고도 지속적으로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있습니다. 모호한 과정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침략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일본문화는 서구에 전면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면서도 서구의 이해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혹은 이해도가 오히려 정체 내지는 후퇴되어 암울한 면만 남겼다고도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정치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적으로도 일본은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오에가 말한 '모호한 과정은 아시아에서 일본이 침략자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라는 말에 대해 아직도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논단은 그 자체가 모호한 면을 잔뜩 가지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갈라 놓을 수 있는 '모호'가 어떻게 폭력을 야기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이 기이하고 신비스런 일본민족이 내심의 속박과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택한 일종의 극단적인 수단인지도 모른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구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방된 일본은 '이해의 정체'로 인해 여전히 허공에 떠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는 '자신에 대한 속죄와 성공'의 관건이 되고,민족영혼을 비출 수 있는 등불이 되어 버렸다. 작가를 고뇌스럽게 한 것은 전쟁과 그에 따른 현대화 과정이 일본 및 기타 아시아 국가 간의 골을 메워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도 이질화하는 현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이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고통스럽고 오만하면서 위로를 갈구하는 민족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일본이 2차대전에서 ' 무조건 항복' 한다는 한 마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동맹국의 승리는 철저하지 못했다. 그 당시 이에 대한 중국의 인식도 미국처럼 깊고 넓지 못했다. 미국의 '신타협주의'로 일본은 황권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황권은 일본의 상징이며 국민이 영혼을 기탁하는 곳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승리의 성과를 어둡게 만들어 버렸다. 일본을 보호하여 자신의 전후체제로 끌어들인 것은 미국이 패권을 가진 나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가장 성공적인 깃발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공산주의 영향을 받게 될 소지가 가장 많던 원동지역에 공산주의와 맞설 수 있는 보루를 구축하였다. 이때 2차대전의 피해가 가장 큰 국가 중 하나인 중국으로서는 전후 일본의 징계방법과 일본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효과적인 건의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부분적으로 상실했었다. 1972년 키신저가 일본을 피해 비밀리에 파키스탄에서 베이징으로 날아오자 일본 국내에서는 중 .일 국교정상화를 촉구하는 여론이 비둥하여 일본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한편 그들은 일본에게 한 마디의 사전통고도 없는 미국에 대해 처참한 자괴감과 분노를 느꼈다. 이외에도 중국과는 이웃에 있으면서도 정치적인 단절로 양국의 관계가 진공상태에 있다는 사실로 일본인 스스로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런 심리는 시간이흐를수록 심해졌다. 이와 같이 '사태가 급박해지는' 상황에서 다나까(中角榮)는 끝내 모든 간섭을 떨쳐 버리고 베이징으로 달려와 국교정상화를 모색하였다.
일본의 '모호'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좋은 예가 있다. 유엔에서 대만을 축출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다시 정식회원국으로 가입시키자는 의안에 대해 일본은 대다수 국가들과 상반되는 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러나 이 문제가 해결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바꾸고는 베이징으로 달려와 쩌우인라이와 건배를 한 것이다. 이런 노예근성과 자주의식의 충돌에서 나타나는 기이하고 대책없는 행위는,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그들의 세련되지 못함과 정책상의 무지를 여지없이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종종 최후 순간이 되어서야 대책을 마련하느라 야단을 피우는 모양이다 중 .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여론이 일어나자 일본 국내의 많은 정치가들은 '중화민국' 과의 관계를 어떤 틀에 넣을 것인가에 대해 꿈임없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도의적으로 장지에쓰를 버릴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일본의 수치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장지에쓰는 전후 일본이 일어서도록 도와 주었고, 또 중국대륙에 있던 수백만 명의 일본포로들이 시베리아로 보내지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장지에쓰는 중국의 권리 중 일부를 포기하면서 까지 일본이 천황제를 유지하고 독일과 같이 양분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장 총통 각하께서 일본에게 베푼 은혜는 산과 같이 위대하고 높은 것이었다. 그래서 다나까가 중국을 방문하기 전에 일본내각은 쓰이나(權名)라는 특사를 대만에 보내 일본의 입장을 해명하게 하였다. 그러나, 쓰이나의 역할은 해학적이기도 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명하고 어떻게 용서를 빌 것인가? 이는 막 이혼하려고 하는 부부 사이에 자주 보이는 광경과 비슷하였다. 또 다른 사랑이 현재의 부부관계를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혼하자니 옛 정-하룻밤의 부부는 백일의 정[一日夫妻, 百日恩]이라 했던가-과 서로간에 얽힌 손익 때문에 망설여지고 피할 수 없는 도덕적 손상이 두려워진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숙원을 이루면서도 도덕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고 재산상의 손해를 면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잘 처리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쓰이나는 대만에 가기 전 자신의 임무 때문에 어안이 벙벙하였다.'나더러 이 한 장의 비행기표를 가지고 가라고?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목적을 달성해야 하지?' 당시에 어떤 사람도 그에게 임무를 정해 주지 않았다. '눈치 보아가며 일을 처리하라'는 말조차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상황이 얼마나 혼란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일본 정치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현실과 결과에 대한 감지력과 판단력을 잃었던 것 같다. 만일 일본의 소망에 따라 중국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대만과도 '예전 같은'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면 그야말로 두 아내를 한꺼번에 차지하려는. 실현 불가능한 혼인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쩌우인라이가 일본의 이와 같은 생각을 안 후 인민대회당에서 약간 격노한 어조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일본은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고 하는가?'라고 경고하자, 일본은 발등의 불을 끄듯 베이징으로 달려와 해명하였던 것이다. 지금 당시의 상황들을 회상하자니 우습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애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중국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해 베푼 관용에 대해 일본의 많은 정치가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분명 중국과 아시아인들에게 더할 수 없는 불행을 가져다 준 국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배들이 보여준 너그러운 마음과 원한을 초월해 베풀 수 있는 관용정신에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명백히 인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의 이러한 관용에 대해 감격한 나머지 자신들의 죄책감을 감추기 위해 오히려 중국을 모략하는 언행을 일삼고 있다. 일본은, 중국이 그때 자기들에게 지대한 관용을 베푼 것은 중국의 '대중화(大中華)' 사상이라는 모략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며, 또 다음 세기를 바라보는 야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중국이 일본과 역사적인 분쟁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중국이 자기에게 유리한 현실적인 환경을 만들어 후일에 세계를 제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일본이란 나라와 발생한 문제를 처리할 때 중국은 어느 정도 비극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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