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2.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
까다르
모든 무슬림은 알라의 절대적인 명령,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명령을 믿어야 한다. 알라가 영원부터 정해 놓았으며, 악과 선, 믿음과 불신은 물론 모든 것을 여원부터 명하였다고 무슬림은 믿는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과 앞으로 일어날 것도 전적으로 알라의 예지와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다. 쿠란은 이 주제에 대하여 여러 구절에서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우리가 신이 정해 놓은 명령에 따라 창조했다. ” 이 절대적인 명령, 즉 정해진 명령이 까다르이고, 타끄디르는 모든 피조물 속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을 말한다. 아랍어 까다르는 원래 ‘역량, 용량’의 뜻이지만 ‘한계, 한도, 제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곧 운명‘으로 귀착되는 낱말이다. 그리고 보면 이슬람에서 신의 의지와 운명은 하나로서 같은 것이다. 알라의 뜻과 섭리에 의하지 않고서는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질 수도 없고, 벌레가 땅위로 기어갈 수도 없다. 알라는 이 세상의 인간에 대한 행운과 불운을 영원부터 정해 두었다. 게다가 행운과 불운은 물론 인간에게 신앙이 있는 것, 신앙심이 없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내세에서 그의 행복이나 불행도 영원부터 결정해 두었다. 이처럼 이슬람에서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고, 그 운명은 알라만이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함마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인간은 40일 동안 그의 어머니 자궁 안에 붙어 있다가 곧이어 40일간 피가 응고된 후에 또 그 후 40일 동안 약간의 살이 붙는다. 그리고 나서 알라가 자궁의 천사를 보내어 그가 태아에게 4가지 정해준다. 첫째, 재산의 배당(성공, 번영, 부의 목), 둘째, 식량의 많고 적음, 셋째, 생명의 길과 짧음, 넷째, 미래 세상에서의 행복 또는 불행을 기록한다. ”이와 같이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지를 가르쳤으나 까다르에 관해서는 정밀하게 써 놓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를 당황하게 했고 그가 자주 모순된 말을 하게 됨으로써 그 앞에서 이 문제가 논쟁으로 번지면 그는 화를 냈다. 이슬람의 까다르란 어쩔 수 없는, 다시 말해서 피할 수 없는 이미 정해진 명령으로 나중에 와서야 발전된 교리이다. 인간의 선한 길과 악한 길을 명하는 까다르는 인간에게 이런 방법 또는 저런 방법을 따라 선택권을 주었다고 말하는 쿠란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다만 선악을 명한다는 교리는 알라의 예지교리의 결과로서 생긴 것이다. 알라가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안다면 - 각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할지, 악한 행동을 할 지 - 알라의 예지가 틀릴 리가 없으므로 그 남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은 알라의 예지 다음에 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알라의 예지가 예정론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쿠란은 물론 하디스에도 까다르 신앙에 대한 언급이 없어 이를 이슬람의 기본신앙으로 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강림과 현존을 맞이한 인류 앞에는 알곡과 쭉정이의 두 신분과 천국의 곡간과 꺼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불 두 처소뿐이고, 그 외에 제3의 장소 연옥과 같은 곳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후에 즉시 낙원의 안식에 들어간다. 이슬람에서 심판은 무슬림들의 행위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 믿음은 구원을 받은 후의 믿음의 열매인 행위와는 엄연히 구분되고 있다. 사후에 영원한 구원과 사급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하늘 나라의 많은 유업과 주의 기쁨에 참여하는 축복을 받는 성도나, 있던 것도 빼앗기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자들이나 그들의 종말은 오직 현세에서 최종적으로 다 결정되는 법이요, 사후에는 다시 그들의 운명을 고칠 기회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며 기독교의 본질적인 사상이다.
무슬림에게 죄는 천주교에서처럼 대죄와 소죄로 나뉜다. 무슬림은 죄 없이 태어난다고 주장하며, 만약 알라의 법을 어겼을 때는 무슬림이 죄를 지은 후 즉시 죄를 회개해야 하는데 회개를 지체하면 이것도 죄가 된다고 한다. 지체에 따른 죄의 정도는 회개하기까지 경과된 시간에 근거한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이든 알라와 동등되게 여기거나(우상숭배, 다신교), 마술을 부리거나 이유 없이 생명체를 죽이는 것 그리고 돈에 이자를 붙이거나 고아의 재산을 빼앗거나 전쟁터에서 도망치고 간통했거나 순진한 여인을 간음했다고 거짓비난하는 것이 죄가 되나. 그러므로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하고 라마단달에 금식하고 일곱 가지 대죄를 피하면 부활의 날에 천국으로 들어가는 8개의 문을 열어 줄 거라고 말한다. 그 반대로, 무르지아파는 그가 무슬림이라면 모든 죄는 소죄이며 그에게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였다. 한편, 카와리즈(카리즈)파는 모든 죄는 대죄이며, 모든 대죄는 이슬람을 불신하는 것이 해당한다고 하였다. 대죄의 정확한 수효에 대해 이슬람 학자 간에 합의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4가지, 또 어떤 이는 7가지, 그리고 11가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가잘리와 순니파의 학자들은 대죄의 정확한 숫자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하지 않은 모든 죄는 소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알고도 고의적으로 반복해서 지은 죄, 학식 있는 자가 무매한 자를 잘못 인도한 경우는 대죄가 된다. 그러나 고의성 없이 반복된 소죄는 대죄가 안 된다. 죄의 용서는 그런 죄를 지은 인간을 벌하지 않고 알라가 용서해 주거나, 천사의 눈으로부터 피하거나, 회계장부에서 지워버림으로써 가능하다. 하디스에 따르면 소죄는 기도하기 전에 씻는 세정의식에 의해 속죄된다고 말한다. 정통파의 교리는 무함마드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즉 죄가 없다고 말하나 이 교리는 쿠란과 하디스의 여러 내용과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진실한 회개는, 첫째, 죄의 용서를 구하고, 둘째, 알라에 대한 죄를 지었음을 슬퍼하고, 셋째, 다시는 죄를 짖지 않겠다는 목적이 필요하고, 넷째, 만약 그 죄로 인해 다른 사람이 상처를 입었으면 그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다. 죄의 개념에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다른다. 개신교에서 죄란 원칙적으로 대죄와 소죄의 차이가 없다. 따라서, 작은 죄라도 사망에 이르고 다만 속죄의 길은 하나님만의 힘으로만 가능하며 예수 그리고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 이슬람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슬람이 자력구원의 교리를 주장하는 반면, 기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기 때문에 성도의 생활이나 그들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구원과 멸망은 오직 신자의 현세에서의 신앙과 사망 전까지의 결단으로 즉시 완전히 결정되는 것으로서 일단 죽은 후에는 다시 신자의 심판이나 불신자의 구원의 기회가 결코 없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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