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이슬람의 배교에 대한 율법
이슬람을 버리는 자들에 대해 쿠란은 뭐라고 말하는가? ‘... 너희 신앙에서 되돌아올 때까지 투쟁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배교자가 되어 불신앙 속에 죽는다면 그들은 현세나 내세에서나 열매가 없을 것이다(수라 2.217). ‘... 믿은 후에 신앙을 거부하고 배교에 배교를 거부하는 자는 그들의 회개도 받아들일 수 없고 그들은 길을 잃은 자들이다(수라 3.90).’ ‘... 만약 그들이 배교한다면 그들을 붙잡는 대로 죽여라(수라 4.89)’ ‘...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을 친구나 보호자로 삼지 마라. 그들은 서로가 친구이고 보호자이다(수라 5.54).’
쿠란 본래의 문맥상 위 구절들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이들 중 여러 구절이 이슬람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만,진실되지 못해 그들이 이전 신앙상태로 되돌아가는 위선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쿠란 주석가 유수프 알리는 수라 4. 89절을 우후드 전투 이후의 상황과 관련시킨다. “우후드 전투에서 위선자들의 이탈이 무슬림 확장에 문제를 초래하게 되자, 메디나의 무슬림들 사이에는 그들에 대한 반감이 컸다. 어떤 집단은 그들을 검으로 다스리길 원했다.또한 쿠란의 구절들에 의해 뒷받침되어 결정되었다. 만약 그들이 공동체 속에 들어오게 된다면 그들은 무슬림 공동체로서는 분명히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나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어떤 극단적인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무함마드 언행록이 흔히 무슬림들 사이에서 갖는 권위는 교회의 전통이 카톨릭 또는 정교회 기독교인들에게 갖는 권위와 유사한데, 배교의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은 알 부카리가 언급한 하디스이다. ‘위선자들이 알리에게 붙들려 왔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이소식이 이븐 압바스에게 전해지자 그가 말하길 ‘나라면, 나는 무함마드의 말에 따라 분명히 그들을 죽였을 것이다. 누구든지 종교를 바꾸는 자는 죽여라”. 무슬림 주석가들은 쿠란의 구절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린다. 예를 들어, 13세기 저명한 주석가 알 바이다위는 제4장 89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누구든지 그의 믿음에, 공공연히 또는 몰래 등을 돌리는 자는, 그를 어디에서 발견하든지 간에 그를 잡아 죽여라. 너의 자신을 그에게서 완전히 떼어 놓아라. 그의 관심사에 끼어들지 말라.” 만일 어떤 무슬림에게 배교에 대한 무슬림들의 태도에 대해 물어 볼수 있을 정도로 그와 친하다면 그는 당연히 배교와 관련된 율법 같은 것은 이슬람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관용적인 태도가 많이 내포되어 있음을 반영할 수도 있다.
현대 이슬람법 개혁
이슬람 신앙의 다섯 기둥(신앙고백, 기도, 종교, 금식, 순례)은 이슬람법 체계의 밑받침이 된다. 샤리아는 이슬람 신조를 실행하는 근본으로 여겼으므로 그 형성기부터 무슬림 개개인 행위에 커다란 관심을 두었다. 사내아이의 할례도 의무규정으로 되어 있고, 도박과 음주는 금하도록 되어 있다. 돼지고기 먹는 것도 금지되는데 유대인의 음식규제를 따른 것 같다. 샤리아는 고리대금을 금지시켰고 현대사회의 부당이윤, 불로소득, 이자놀이를 금했다. 그러나 울라마는 이윤획득의 원칙을 발전시켜 투자하는 사람이 직접 기업에 참여하는 경우 그의 자본투자에서 발생하는 이윤을 보수로 받을 수 있게 했다. 특히, 하나피 학파들의 노력으로 상법을 발전시켜 중세 지중해 무슬림 상인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샤리아는 자선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재단의 형성과 활동에 대한 규정을 해 놓았고, 사망한 사람의 상속법을 제정해 두었다. 상속에 있어 여자는 남자의 반에 해당한다고 규정하였다. 아내가 남편과 이혼하는 조건은 매우 까다롭고, 남편이 이혼을 원할때는 매우 간단하게 해 두었다. 그는 아내와 동침을 거절하고 3개월만 기다리면 되었다. 여자는 동시에 한 남편 이상을 둘 수 없지만, 남자는 네명의 아내까지 둘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샤리아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슬람 국가에서 4명의 아내를 가진 남자는 많지 않다. 첫번째 아내가 아이를 못 낳는 경우를 제외하고 경제적인 뒷받침이 어렵기 때문에 둘 이상은 힘들다. 20세기 전반까지도 사우디아라비아에선 엄격한 샤리아법 적용이 있었다. 간통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고 도둑의 손을 자르는 처벌이 있었다. 지금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칼라스’ 광장에서 손을 자른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물론, 수단에서도 1983년 누메이리가 샤리아법을 강화하여 이것을 적용한 바 있다. 이 형벌은 다른 무슬림 국가에서는 오래 전에 크게 완화 되었다. 샤리아법에 노예제도를 인정함으로써 인간의 불평등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출세여부는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서 결정된다. 무슬림은 비무슬림인 기독교나 유대교인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킬 의무가 있었다. 무슬림에게 기독교인은 신의 계시를 부분적으로 받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들끼리의 종교활동에는 상당한 자유를 주었지만, 기독교인이 무슬림들에게 선교하려고 하면 기독교를 상당히 열등한 종교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역사적으로 비무슬림은 군대도 갈 수 없었으며 말 대신에 당나귀만 타고 다녔다. 비무슬림 남자는 무슬림 여자와 혼인이 금지되고, 무슬림 남성은 기독교 여성과 결혼할 수 있었다. 샤리아는 도덕적, 인간적, 종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 정치, 경제, 공공문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랍어 낱말 ‘까눈’은 세속법이란 뜻인데 유럽어에서 이 용어 Canon은 교회법을 의미한다. 이말대로 유럽이 갖는 법은 세속법이고, 그들이 갖는 법은 이슬람 공동체의 성법이란 인식에서 온 것이다. 중동에서 법의 개혁은 19세기 중반 오스만 상법과 오스만 형법이 반포되면서 오스만 제국때 시작되었다. 이 법의 형식과 기본이 주로 19세기 서구의 진출로 유럽법(특히 영국과 프랑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니자미야 법원이 샤리아법을 가족법에만 한정시키고 민법과 형사법도 다루게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법을 재해석하고 개혁하기보다는 이슬람법 자리에 서양법을 앉히는 꼴이 되었다. 20세기까지 이런 현상은 계속되었고, 대부분의 이슬람 세계에서 현대 상법, 형법, 그리고 마침내는 민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슬람법은 가족법의 핵심이 되고 있다. 아직도 고전적인 가족법이 중동에서 쓰이고 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민법과 형법에서 공식적인 법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무슬림 가족법은 수세기를 통하여 변함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인도에서도 이슬람법은 가족법에만 한한다. 그래서 가족법이 개혁된다면 이것은 이슬람의 현대화 개혁을 의미한다. 중동에서 초기의 가족법 개혁은 다음 두가지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여성의 지위향상이고, 둘째는 부모와 직계자녀의 권리강화가 그것이다. 그리고 가족법이 주로 개혁할 부분은 혼인, 이혼, 유언을 남기지 않는 상속 등이다. 중요한 혼인법 개혁 중에는 조혼배제와 일부다처의 제한이다. 무슬림 국가에서 전통법에 따르던 혼인 나이를 올렸는데 이집트와 파키스탄에서는 여자는 최소한 16세로 하고, 남자는 최소한 18세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일부다처제의 개혁입법은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무슬림 국가의 가족법 개혁에 이집트가 선두에 서고 있지만 이집트 남성에 대한 일부다처를 제한하려는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시리아에서는 1953년 결혼한 무슬림 남성이 또다시 혼인하려면 법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다시 말해서 남편이 재정적인 능력이 있을 때에만 허락했다.
1957년 튀니지에서 급진적인 변화가 있었다. 부르기바 대통령이 일부다처를 두 가지 근거를 내세워 불법이라고 공포했다. 첫째, 일부다처는 노예제도처럼 과거의 필요에 있어서 존재했던 것이고, 현재는 일부다처를 대부분이 반대한다. 둘째는 쿠란에 지적되었듯이 아내를 모두 똑같이 대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무슬림 국가에서는 튀니지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1958년 모로코에서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혼인하려고 할때 부인에게 이혼할 권리를 준다는 내용의 혼인계약에 규정해 놓았다. 1959년 이라크법에서는 남편이 두번째 부인을 얻고 싶을때 법원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만일 1959년 법을 어기면 형사상의 제재는 물론 두번째 부인과의 혼인도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63년 법에는 형사상 제재는 받지만 합법적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무슬림 가족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것은 아마도 이혼이 아닐까 한다. 이슬람법에 의하면 특별한 이유없이 이혼하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내에게 이혼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남편의 일방적인 이혼권리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개혁이 필요했다. 1915년 오스만 제국에서 처음으로 개혁이 있었는데 처자를 불법 유기했을 때, 그리고 남편이 전염병을 얻어 부부생활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아내도 이혼할 권리를 얻었다. 좀더 넓은 의미의 이혼법 개혁은 1929년 이집트에서 있었다. 이개혁법에서 여성이 이혼할 수 있는 4가지 사유를 추가했다. 첫째, 남편이 가족부양을 못 할 때, 둘째, 남편이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질병에 걸렸을 때, 셋째, 남편이 아내를 불법유기했을 때, 넷째, 부인을 학대했을 때 등이다. 그러나 1957년 튀니지에서는 법원이 명하는 재정적 보상을 하면 아내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게 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아내가 그의 지참금을 돌려 준다면 아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혼인을 그만둘 수 있었다. 무슬림 가족법 개혁의 마지막 부문은 역시 유언 없는 상속문제이다. 상속제도는 전통적인 무슬림 사회의 필요성에 맞추어 있었다. 쿠란은 이슬람 이전의 부족법에서 명시한 것을 바꾸어 상속지분에서 직계가족을 강조하고, 여성가족 구성원에게도 그 지위를 개선해 주었다. 쿠란에서는 상속자가 그들의 지분을 받은 후에 나머지는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가장 가까운 남자 아버지 쪽의 친족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현대에와서 대가족의 유대가 줄어들고 나머지 재산이 가장 가까운 아버지 친척에게 돌아가자 아들은 쿠란에서 말하는 지분만을 받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 직계 가족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상속법의 직접적인 변화보다는 유산에 관련된 법을 바꿈으로써 간접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따라서, 부모는 재산의 1/3을 아내나 딸을 위해 유증할 수 있다. 상속법의 변화 중에 고아가 된 손자에게 줄 상속문제이다. 전통적인 이슬람법에 따르면 만일 할아버지의 다른 아들이 살아 있으면 고아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규정은 전통적인 무슬림 사회가 가족의 단결을 대가족의 기본 특징으로 삼고 연장자가 남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화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고아도 보호받아야 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속지분을 그가 받는 것으로 개혁이 이루어져야 했다. 하지만, 울라마들은 현대의 법개혁을 비이슬람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서구의 세속법을 알던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이슬람을 함부로 바꾼다고 주장한다. 물론 몇몇 울라마들이 법의 개혁을 부르짖지만, 더 많은 울라마들은 이슬람법이 시행될 호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개별적인 무슬림 국가가 각각 어떻게 변했든 간에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과 현대화 간의 종합은 실패했음을 점차 인식하는 무리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슬람 현대화를 다시 정의 하면서 역사적, 문화적 뿌리를 재발견하고 재정립해야 함을 많은 무슬림들이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슬람법의 전통적인 역할에서 이슬람 생활방식에 그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정치와 사회를 이슬람화하기 위해 샤리아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초기 이슬람 형성기 때 있었던 이슬람화 과정이 오늘날 이슬람의 원리에 따라 재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