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율법
알라의 인간에 대한 요구는 율법에 담겨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섯기둥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요구는 십계명에 잘 계시되어 있는데, 십계명는 인간과 하나님,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기본적인 율법은 구약의 나머지 부분과 예수의 가르침에서 설명된다. 이슬람 율법을 이해하는 것은 이슬람 국가에서 살고 있는 무슬림이 갖는 문제를 설명해 줄 수 있고, 현재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득세하고 있는 아랍국가에서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이슬람 율법의 발전과정과 이슬람 율법이 오늘날 아랍세계나 이슬람 세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슬람 율법은 이슬람교에서 핵심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이슬람 율법의 핵심은 가족법이다. 무함마드 시대 이후 1300여 년에 걸쳐 발전해 온 법적체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슬람에 대한 완전한 연구와 이해가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안에서 교회와 국가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곳에서조차도 서로 다른 책임을 갖는다. 그러나 이슬람에서 법의 문제는 알라의 계시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슬람법은 인간에게 내린 알라의 계시로 간주되어 인간의 책임을 명하고 인간의 삶을 인도하며 인간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문제의 해답을 준다고 생각한다.
율법과 법학파
이슬람 율법은 아랍어로 샤리아(Shariah)라고 한다. 이 뜻은 ‘낙타가 물 웅덩이로 가는 길’ 이라는 것이다. 추종자(신도)들을 새롭게 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즉 추종자가 따라야 할 길이다. 그래서 율법은 법적인 내용과 종교적인 내용 둘 다 갖는다. 가령 혼인이나 식사방법, 기도하는 방법과 기도하는 때를 정해 주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샤리아는 통일된 단일 법체계는 아니다. 이슬람법 안에는 여러 가지 다른 법학파가 있고, 정통파 순니(Sunni)안에서도 4개의 법학파가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퍼져 있는 학파는 하나피(Hanafi)학파로 주로 인도, 파키스탄, 터키,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아프카니스탄에 존재한다. 가장 융통성이 넓다고 알려졌다. 법규는 불변이 아니라는 명제하에 여건이 변하면 법이 변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 학파는 아부 하니파(767년 사망)가 이라크에서 창립했으며, 후에 오스만 터키(1300에서1922)제국이 이 교의를 공인하여 중근동 여러 국가의 무슬림 공동체에 지배적이다. 둘째 번으로 큰 학파는 말리키(Maliki)학파로 북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는데,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이집트, 서 아프리카, 쿠웨이트에 있다. 이는 네 학파 중에서 가장 오래 된 학파이며, 말리크 븐 아나스(795년 사망)가 창건 했다. 그는 메디나 출신이고 법관을 역임했으며, 샤리아에 대한 논문도 집필했다. 무함마드 시절 10년과 그 이후 약 25년 간 메디나의 법적관례를 중시했던 학파이다. 샤피이(Shafii)학파는 셋째 번으로 큰 학파로서 중동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이집트 북부(알렉산드리아 등), 동부 아프리카,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 아시아에 퍼져 있으며 주로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법체계이다. 샤피이(820년 사망)라는 법학자가 창립했고, 샤피이 학파는 압바시야조의 공인학파였다. 한발리(Hanbali)학파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서 우세하다. 아흐마드 븐 한발(855년 사망)이 세웠으며, 네 학파 가운데서 가장 엄격하다. 위의 세 학파의 변혁적 해석을 강력히 반발하여 무함마드 통치하에 있던 순수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 이 학파의 창건자는 무함마드가 수박을 먹었다는 증거가 없음므로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여러 학파들 사이에 차이는 근소하다. 더구나 법률해석에 차이는 있지만 모두 자파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타파의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서로가 순니파로 여기고 있다. 대부분 무슬림 국가에서는 어떤 개인이 국가의 공인 법체계와 다른 학파의 해석에 따라 재판을 받고 싶다고 하면 그 요청이 받아들여진다. 특히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는 한때 오스만 제국의 영토이었으므로 아직도 하나피 학파를 공인하고 있으나 국민의 상당수가 다른 학파의 교의를 따르고 있다. 아랍군이 시리아를 정복한 다음에서야 이슬람 법전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알라는 하나이고, 쿠란은 알라의 말씀이며 무함마드는 최종적인 예언자이다.’ 라는 간단한 신앙교리로는 제국을 통치하는데 생긴 여러 문제의 해결책을 주었다. 서기 900년쯤 이슬람 율법의 발전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네 가지 준거가 점진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쿠란: 무함마드를 통해 계시된 알라의 말 2.순나(관습): 무함마드의 말, 행동, 묵인한 것으로 쿠란 다음으로 중요성을 갖는다. 3.이즈마아(합의): 이슬람 국가 또는 울라마(이슬람 법학자)의 만장 일치 4.끼야스(유추): 새로운 교리나 실천사항의 문제, 그리고 어렵고 의심스러운 문제에 대한 학자들의 유비적 추론이다. 법학자들은 쿠란, 순나, 이즈마아의 준거에 의해 이미 해결된 비슷한 사례를 비교하여 해답을 도출해 낸다. 무슬림의 신앙은 이슬람의 기원이 하나님이고 무함마드는 유일한 마지막 예언자라는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 위와 같은 이슬람법에 근거한 종교법을 둠으로써 이슬람 국가를 이끌어가고 있다. 이슬람법은 쿠란에 근거하는 데 메카시대의 쿠란계시는 부족적 집단주의와 세속주의를 부정하였고, 메디나 계시는 이슬람 공동체(옴마)의 토대를 제시했다. 신을 최고의 주권자로 예언자 무함마드를 지상에 있어서 신의 대리자로 보는 무슬림들이 그들의 공동체를 지상에서 실현하는 과정에서 신의 절대의지를 표현한 것이 메디나 계시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이전의 사회질서 대신에 신의 말씀인 쿠란에 의거하여 자신의 행위의 권위성과 입법성을 주장하였다. 메디나 시기의 쿠란수라가 메카시대 수라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정치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는 말이 된다. 또, 메디나 시기의 수라가 길어졌다는 것은 메카시기처럼 종교적 상징성이 없어지고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했음을 의미한다. 무함마드가 메디나에 갔을 때 메디나 사회의 아우스 부족과 카즈라즈 부족 사이에 분쟁의 조정자로 초대받았다고 무슬림들은 말한다. 쿠란 제4장 65절에 ‘그들이 너에게 분쟁을 조정하게 하고 그들 자신이 너의 결정에 대하여 반대가 없을 때 그들은 알라를 믿는 자들이다’고 했다. 무함마드가 중재자로, 그리고 신으로부터 받은 예언자의 사법행위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즉, 예언자의 행위는 신에 의해 보증된 무오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의 언행이 관습을 초월한 입법임을 뜻한다. 그래서 서구 학자 중에는 무함마드를 예언자, 입법자라고 표현했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칼리파가 이를 계승했는데, 칼리파는 종교 지도자의 역할뿐만 아니라 국가의 원수, 군의 총사령관도 겸했다. 특히 정통 칼리파 시대에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신정국가의 정치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이슬람력 1세기에는 이슬람 이전의 관습과 쿠란 입법과의 갈등, 조화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태형에 의한 처벌 강화와 모세율법에서 비롯된 불륜한 성관계에 대한 투석처벌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쿠란입법을 적용, 발전시켜 새로이 정복된 지역을 조직화하는 행정적인 법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관습(순나)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였다. 이슬람 이전부터 아랍부족 간에는 선조로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이 확립되고 나서 무함마드의 언행이 곧 순나가 되었다. 따라서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가 모든 무슬림에 의해 존중되고, 하디스 내용 중에 법률적인 부분은 순나로 인식되었다.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다른 지역을 정복하면서 정복지의 주민과 토지, 재산 처분에 대한 지침이 필요했다. 칼리파 우마르(634에서644)가 비잔틴과 페르시아 법의 일면을 취해서 이런 목적의 해정지침을 내려보냈다. 그는 페르시아의 디완(Diwan:행정제도)을 써서 군인과 군인가족들의 연금을 기록하는 명부(기록부)를 만들었다. 우마르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모든 비무슬림을 추방하고, 아라비아 밖에서도 비무슬림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명했다. 아랍인들은 자카트(Zakat, 종교세)를 내면 아라비아에서 토지를 소유하게 해 주었다. 만일 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 토지의 기존 소유자는 자신의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토지법이 새로운 정복의 결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마위야조(656에서750)는 베드윈의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중앙 집권주의와 조직화된 관료주의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행정은 외적과의 전쟁수행, 국가안보, 세금징수 등으로나타나며, 전쟁, 재정 등에 관한 법이 발전하였다. 우마위야 초기에 종교와 통치의 개념이 분화되었지만, 우마위야 칼리파들은 종교적 충성심을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수행에 이용하였다. 이 때는 통치권으로부터 사법권이 분리되었다. 사법관(까디)이 통치자에 의해 임명되고, 그가 모든 법률사무를 담당하였다. 이슬람 초기의 중재자와 다른 점은 까디는 칼리파가 통치자에게 준 권한 내에서 그에게 이양된 행정, 입법, 사법적 사무를 대행하는 정부의 관료라는 점이다. 까디는 법률사무의 전문화, 종교법에서 실정법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거의 100년 동안 우마위야조의 이슬람법의 보존과 발전은 이 기간의 까디에게 달려 있었다. 까디들은 쿠란과 순나에 의거한 개인적인 의견에 따라 판결했다. 여기서 법학파의 학설이 달라지게 된다. 이 시기에 비아랍인으로 이슬람에 개종한 미왈리들은 흔히 볼 수 있었던 로마법, 비잔틴법, 동로마 교회법, 탈무드법, 랍비의 법 등의 원리가 도입되면서 이슬람법에 실정법적인 원리를 제공했다.
이슬람력 132년 압바스조(750에서1258)가 등장하면서 종교법의 전문가를 중심으로 법정을 구성하고, 그들의 토론을 존중하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압바스조의 까디는 이슬람법을 통하여 법을 해석하고 적용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까디는 칼리파에 의해 임명되었고 까디의 판결을 집행하는 것은 정치권력에 있었다. 특히 형사판결의 경우 집행은 법집행부가 맡았기 때문에 이슬람법 테두리 밖에 있었다. 까디의 업무도 중앙 집권화하여 칼리파에 의해 임명된 최고 까디와 그에 의해 임명되는 지방 까디가 있었다. 칼리파는 완전한 법적권한을 소유하고 까디는 입법권이 없는 관료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직 행정규제만을 적용하는 임무를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