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문화의 이해 - 공일주
1. 신의 인간에 대한 관계
무함마드 시절의 기독교
무함마드가 보았던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외국인 종교였다. 그가 접촉했던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아랍인이 아니었고 주변국가에서 온 외국인이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아라비아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랍인들과 멀리 떨어져 살았으며, 그들 자신의 언어로 예배를 계속했다. 그러므로 무함마드는 그의 자신의 언어인 아랍어로 된 어떤 성경책도 접해 보지 않았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다. 기독교 교회는 교리적인 분쟁으로 심히 분열되어 있었다, 니케아 회의(325년)와 칼케돈 회의(451년) 이후로 동방에서 교회들은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칼케돈의 교리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별도로 하고, 우선 당선론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는 완전히 인간이 아니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 네스토리우스파는 인성과 신성이 예수의 위격에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물체는 악하고 구원은 신비주의적인 계몽을 경험했느냐에 의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성육신을 부인하였고, 어떤 이들은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믿었다. 무슬림이 보기에 당시의 기독교는 정치세력과 식민주의의 팽창과 관련된 종교였다. 비잔틴 황제는 정통신앙에 확고한 지지를 보냄으로써 자연히 여러 이단교파를 맹렬히 박해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아랍인에게 기독교는 비잔틴 통치와 동의어가 되었고, 국교와 다른 신앙은 강압적으로 박해받는다는 것과 동의어가 되었다.
당시에는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해 팔레스타인에서 나온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반도의 곳곳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 중에는 매우 강하고 영향력이 강한 종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올바른 경전을 갖지 못하고, 또한 수효도 유대교인보다는 적었다. 그리고 경교도계 기독교인 공동체가 존재했으나 그들은 오늘날처럼 선교에 힘쓰는 교회가 아니라, 형식화되고 영적 능력과 복음증거의 열정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러한 공백기에 많은 외경의 이야기들과 전설적인 자료들이 성행하였다. 이로써 그릇된 신앙관을 가진 기독교 이종단파들이 생겨났고, 이슬람은 이를 기회로하여 많은 신도들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의 아라비아 반도는 오늘날 아랍인의 조상인 셈족이 모여 일찍이 정착해서 거주해 왔다. 일부는 농사를 짓거나 수공업, 무역 등에 종사하면서 오아시스와 도시에서 생활했고, 일부는 낙타, 말, 양, 염소들을 기르면서 초지와 사막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이었다. 문화적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것은 이 나라들 사이에 무역로가 아라비아 반도를 통과하기 때문에 그 중 중요한 무역 요충지인 홍해 연안에 위치한 메카가 그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메카는 상업의 중심지뿐만아니라 순례의 중심지로서 종교가 크게 부상되는 지역이 되었다, 이와같은 문화적, 종교적 상황하에 무함마드가 570년경 커끼리해에 메카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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