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개화의 신념으로 매진한 풍운아 김옥균(1851-1894, 44살, 암살).
김옥균은 명운이 꺼져가던 조선을 걱정하며 시대의 새로운 사조에 맞게 개화시켜야 나라의 부흥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한 자주적 개국론자였다. 그는 민씨 일파의 굴욕적 외교에 대한 폐쇄적인 '위정척사' 주장도 반대했지만 외세의 강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무분별하게 개방하는 것도 배척했다. 그러나 나라의 개국이 세계 대세이기 때문에 조선이 '내수외양' 할 만큼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외국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처음에 그는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 운동을 추진했으나 청나라와 결탁한 민씨 일파의 벽에 부딪히자 부득이 쿠테타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위로부터의 점진적인 개량주의가 한계에 봉착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실이 그로 하여금 폭력적인 수단에 의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의해 주도된 '갑신정변'을 단순히 정권 탈취 음로로만 매도할 수 없다. 내적으로는 제도를 혁신하여 힘을 기르고 외적으로는 나라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한 그의 사상과 행동의 집약점이 현실적인 장애로 인하여 결국 정변의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개혁 추진은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젊은 혈기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조급함으로 인한 졸속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일부 개명한 소수 귀족 자제들에 의하여 독점적으로 추진되어 일반 민중과 유리되었다는 것과 지나치게 외세에 의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정변의 주체 세력이 너무나 허약했던 것이 주된 이유이며, 또한 수구의 후견자인 청나라 세력이 아직가지 조선에서는 일본보다 강성하다는 점을 너무 간과한 것도 실패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결국 내외의 조건이 모두 불리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정변을 감행하여서 이미 실패가 전제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주도한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조국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 했던 그의 의지와 애국심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라면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문벌의 폐지와 같은 사회 체제의 대변혁과 자주적 개국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이익 기반가지 타파하여 조국을 질곡으로부터 건져내려 했던 그는 진정한 애국자이자 개혁 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개화 사상에 눈을 뜨다.
김옥균은 조선 25대 왕인 철종 2년(1851년) 충남 공주에서 호군 김병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백온이며 호는 고균으로서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손이다. 옥균이라는 이름은 그의 외모가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해서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6살 때 5촌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갔다. 원래 맏아들은 양자로 보내지 않는데, 당시 김병기가 일문 내에서는 가장 권세가 있었기 때문에 총명한 그의 장래를 위해 아버지가 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11살 되던 해에 양아버지 김병기가 강릉 부사로 부임하게 되어 그곳의 송담 서원에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16살 때 중앙으로 전임하는 양아버지를 따라 한성으로 올라오면서 더욱 면학에 정진하여 고종 9년(1872년)에 22살의 나이로 알성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기 한두 해 전쯤부터 북촌(서울 북쪽 양반 거주지)에 드나들던 개화 사상가이자 한의원인 유대치를 만나 이미 개화 사상을 접하고 있었다.
그는 급제하던 해에 성균관 전적으로 관직에 진출하여서 이듬해에 대원군이 민씨 세력과 유림들의 연합 공격으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하던 1863년부터 10년 동안 강력한 통치권자로 군림하였지만 외척의 발호를 극도로 경계하여 몰락한 가문에서 들였던 며느리에 의하여 권력의 정상에서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인 계기는 동부승지 최익현의 탄핵 상소에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10년 강권 통치로 인하여 반대 세력을 많이 양산한 것과 특히 야심 많은 고종의 왕후 민씨의 권력욕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대원군이 물러나자 정권은 완전히 민씨 일파의 독무대가 되었고, 대원군에 의하여 퇴치되었던 사회적 악폐가 다시 되살아났다. 특히 민씨 일파는 자신들의 세력 확장과 부귀 영화를 위해 몰지각한 행동을 불사하여 역사의 시계를 완전히 되돌려 놓고 말았다. 대원군의 극심한 쇄국정책에 의하여 새시대로 나갈 기회를 놓친 조선의 민씨 일파의 권력 농단으로 완전히 퇴행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초임 관리였던 김옥균이 보고 느꼈던 조선의 현실은 미몽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형상으로 이를 극복하고 조국을 수렁에서 건져올리자면 신사상에 의한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관직에 나오기 전부터 접하여 알고 있던 선진 외국의 모습과 개혁 사상은 이즈음 더욱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게 되어 나라의 개화에 뜻을 같이하는 인물들과 깊은 교류를 하게 되었다. 대원군이 물러난 그 다음해에 김옥균은 24살의 나이로 홍문관 교리를 거쳐 정언이 되어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김옥균의 사상에 영향을 준 사람들
김옥균의 사상과 신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4명의 인물에 대한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그에게 실용적 사고의 틀을 갖추게 해준 인물로는 실학 사상의 계승자인 박규수를 꼽을 수 있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열하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하여 그 시대의 사대부로는 상당히 개화된 인물이며, 고종 3년(1866년)에 평안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미국 상선 셔먼 호가 대동강변에서 행패를 부리자 이를 공격하여 불살라 버리게 한 강골이기도 하다. 이 셔먼 호 사건은 고종 8년(1871년)에 발생한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당시는 불법 해적 행위에 대한 응징 차원이었지 결코 대원군과 같이 쇄국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운양호 사건(1875년) 이듬해에 일본이 수교를 요구하자 최익현 등의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한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좌의정으로 있으면서 민씨 세력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젊은 청년들에게 신문물과 개화 사상을 교육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그래서 재동에 있던 그의 집 사랑방은 언제나 의기충천한 청년들이 모여서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하여 토론하던 모임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모임은 박규수가 중앙으로 부임한 고종 6년(1869년) 무렵부터 시작되어 그가 사망하던 고종 13년(1876년)까지 약 7년 동안 지속되었다.
다음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한의원 유대치가 있다. 그는 중인이면서도 치료를 위해 북촌을 드나들면서 자신의 개화 사상을 뜻이 맞는 귀족 청년들에게 전파했다. 그는 일찍이 역관 오경석과 개화승 이동인 등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들을 소개한 서적들을 탐독하여 오래 전부터 개화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념과 지식을 혈기 방장한 청년들에게 전수하여 백의 정승이라고 불렸으며, 그들과는 봉건적 신분 구조를 탈피하여 스승과 제자로서의 교분을 쌓았다. 김옥균은 갑신년 거사 전에도 수표교 근방에 있던 그의 집을 방문하여 와병중이던 그를 위문하고 거사 계획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했다. 그후 유대치는 청년 귀족들에 의한 정변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병든 몸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가 행방을 감추었고, 그의 아내는 자결하였다.
세 번째로 중요한 인물은 역관 오경석이다. 그는 한역관으로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면서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알게 되었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북경에서 돌아올 때마다 새 지식들이 담긴 서적들을 구해 와서 여러 친구들에게 권했다. 이때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이 유대치로 오경석이 입수하여온 신 서적은 유대치를 통해 김옥균과 같은 청년들에게 전해졌다. 오경석은 병자년(1876년)에 있었던 일본과의 수호조약 당시 척화비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협상을 추진하도록 노력했다. 그는 일개 역관이었지만 당시에는 대청 외교에 대한 공로로 당상관의 대접을 받았으며, 빈번한 중국 출입으로 국제적 외교 교섭의 절차를 아는 유일한 조선의 관리였기 때문에 교섭 막후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금석학에도 관심이 높아 중국 역대의 금석문을 많이 수집하였고, 그의 외아들인 오세창은 기미년 독립 운동 때 33인 중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아버지를 닮아 전자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그는 병자 수호조약을 끝낸 지 3년 후에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인물은 개화승 이동인이다. 이동인은 서울 근교에 있던 봉원사 소속 승려이며 일본통으로 알려진 인물로서 처음에는 유대치와 교류하다가 그의 소개로 김옥균 등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 본원사 부산 별원을 왕래하면서 입수한 '만국사기'와 세계 각국의 풍물 사진을 청년 관리들에게 전달하여 개화 사상에 눈을 뜨게 하였다. 고종 16년(1879년)에는 김옥균 등의 주선으로 일본을 여행하여 신문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고, 이때 후쿠자와 유기치와도 친교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쿠자와와 조선 개화파의 첫 인연이 되었다. 그런데 귀국한 후 다음해에 소위 '신사유람단'이라고 하는 '관신 시찰단'의 일본 파견에 동행하기로 하였으나 출발 직전에 왕궁에 들렀다가 행방불명 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이동인의 실종에 대하여 척화파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일본 시찰과 임오군란 발생
일본과의 병자 수호조약 이후에 김옥균 등의 신진 개화파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서 개혁을 뒷받침할 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사회 각 계층의 동지들을 모아 '충의계'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당시의 강고한 신분의 틀을 뛰어넘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포섭하였던 것인데 외부적으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온 계의 형태로 결사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물론 지도부는 김옥균을 위시한 청년 귀족 출신들인 홍영식, 서광범, 박영교, 박영효, 서재필 등으로 김옥균이 가장 연장자였다. 또한 김옥균은 사고가 깨어 있던 선배 관료들인 김홍집, 이윤중, 김윤식 등과 동지적 유대관계를 형성하고 그들을 통하여 국왕과 그 측근을 설득하여 개화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그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면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도입하여 근대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였으며 이 길만이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고종 18년(1881년)에는 일본 시찰단에 동행하여 선진 문물 도입에 모종의 역할을 하기로 한 이동인이 실종되자 그 해 12월에 자신이 직접 나서 일본을 시찰하였다. 그는 도입할 때 2만 엔의 자금을 마련해서 생산용 기계를 구입하면서 일본의 산업 시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먼저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조선소, 제력소, 탄광 등을 시찰한 뒤 오사카로 가서 군수공장과 조폐국을 둘러보고 교토와 고베를 거쳐 다음해 3월에야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는 조선 개화파의 일본 내 후원자 역할을 해준 후쿠자와의 별저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면서 일본의 발전상을 관찰하고 정계와 재계의 여러 인물들을 만나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진의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김옥균이 아직 일본에 머물러 있던 그 시기에 조선에서는 큰 변란이 일어났다. 고종 19년(1882년) 6월에 구군영 소속 군인들에 의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김옥균은 귀국 도중인 7월에 시모노세키에서 이 소식을 들었다. 임오군란은 당시에 군인 급료 지급 책임자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부정이 발단이 되어 무위영,장위영 소속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이었다. 구식 군대 2개 영은 그 해 초에 훈련도감, 용호, 금위, 어영, 총융의 5영을 통폐합한 것으로, 그 전해(1881년)에 일본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신식 군대 별기군과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데에 심한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민겸호의 부정이 폭동을 촉발했던 것이다. 대원군과 교감하고 연결되었던 구군영 소속 군인들은 민씨 척족들을 살해한 뒤에 별기군 병영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소위를 죽이고 일본 공사관까지 난입하였다. 폭동 이튿날에는 도시 빈민까지 합세하여 대권로 진입하자 고종은 사태의 수습을 위하여 대원군을 급히 불러들여 전권을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며느리에 의해 정권에서 물러난 지 10년만에 대원군이 권력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한편, 대권을 겨우 탈출하여 장호원까지 도피하였던 왕후 민씨는 천진에 주재하고 있던 영선사 김윤식을 통해 청나라의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청국은 4500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출동시켰고 사태 수습을 위해 자신들의 군영으로 찾아온 대원군을 납치하여 천진의 보정부로 호송시켜 버렸다. 일본도 하나부사 공사의 보고를 통해 군변의 전말을 알게 되자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청군의 신속한 군사 행동으로 사태는 이미 끝나 버린 다음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피해의 책임을 물어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고 50만 원의 피해 배상, 공사관 경비를 위한 일본군 주둔 허용, 군란 주모자 처벌, 수신사를 파견하여 공식 사과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결국 민씨 일파의 사리사욕과 무분별한 권력 욕구가 외국 군대의 조선 주둔이라는 반국가적 결과까지 불러왔던 것이다. 군란 직후에 잠시 권력을 잡았던 대원군은 김옥균이 귀국하는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가 도착하기 전에 대원군이 청군에 납치되어 천진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김옥균은 무사할 수 있었다.
수신사 파견과 개화파의 좌절
제물포 조약에 의해 일본에 파견되는 수신사의 정사에는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가 결정되고, 부사는 김만식, 종사관은 홍영식, 수행원으로는 서광범 등 여러 명이 임명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민영익과 함께 수신사의 고문이 되어 다시 도일하게 되었다. 일본은 수신사 일행을 국빈으로 대접하고 극진한 환영을 하여 젊은 개화파 일색인 조선 사신들의 환심을 사서 친일 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외무대신 이노우에는 17만 엔의 차관까지 주선해 주면서 고종의 신임장을 가져온다면 더 많은 차관을 구할 수 있더록 해주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다. 당시 수신사 일행이 기채한 17만 엔의 차관 중 5만 엔은 대일 배상금 1회분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대일 유학생 파견 경비와 수신사 체재 여비로 오두 일본에서 사용되었다.그해 11월에 수신사 일행은 새로 부임하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김옥균은 호롤 남아서 일본 정세를 더 살펴보면서 협조와 지원에 대한 가능성을 집중적으로 타진해 보기로 했다. 그가 다른 수신사 일행보다 6개월 정도 더 일본에 체재하면서 얻게 된 중요한 정보는 일본이 술과 담배에 세금을 부과헤서 국가 재정을 늘리고 있다는 것과 그 재원으로 육해군의 확장에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었다. 일본은 자기들의 군세 확장이 일본의 국방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감언이설을 흘리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차관 주선의 용의와 같은 선심 공세도 잊지 않았다. 김옥균은 그때 아직 젊은 탓인지 일본이 개화파의 조선 개혁 운동을 지원하는 체하면서 사실은 침략적 진의를 숨기로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한편, 귀국한 개화파 일색의 수신사 일행 앞에는 국내에서도 암초가 놓여 있었다. 청국을 뒤에 업은 수구세력이 권력을 독점하여 귀국한 개화파를 한직으로 내쫓아 박대하였던 것이다. 박영효는 한성 판윤을 거쳐 광주 유수로 좌천시켰고, 김옥균은 포경사겸 동남제도 개척사라는 이상한 직책을 맡겨 중앙에서 내몰았다. 그러나 김옥균은 외아문 참의라는 명분으로 한성에서 계속 머무를 수는 있었다. 또 급진 개혁파 주력들이 일본에 가 있는 사이에 조영하가 청국의 소개로 불러들인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정부의 재정 고문으로 있으면서 자기를 초빙해준 수구파의 입맛에만 맞추는 책동을 하고 있어서 더더욱 정책적 퇴행을 불러오고 말았다. 특히 파탄 상태에 이른 국가 재정을 해결하기 위한 바안이 정부에서 논의될 때 묄렌도르프는 수구파의 이익을 좇아 이미 경복궁 중건 때 그 폐해가 익히 드러난 당오전의 주조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악성 화폐는 실질적인 재정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면서 백성들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구상이라고 절대 반대의 의견을 냈다. 새 돈의 주조를 앞두고 민영익의 집에서 김옥균은 거의 한나절에 걸친 토론을 통해 묄렌도르프를 논리적으로 몰아붙여 그 후 두사람은 반목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결국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수구파의 의도대로 당오전은 발행되었고, 그 결과 물가는 폭등하고 국가 재정은 탐관오리들의 농간으로 더욱 어렵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오전은 상평통보의 5배 명목가로 만들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시중에서는 상평통보와 동일한 가치로 통용되어서 관리들이 조세를 상평통보로 거두어들이고서 국고에 상납할 때는 당오전의 액면가로 납부하고 그 차액을 착복했기 때문이다. 또 당오전 발행 이전에는 엔화에 대한 조선 화폐의 비교 가치는 1대 2.5정도였는데, 당오전 통용 이후에는 1대 8로 급락하여 무역 수지에도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다. 그야말로 잘못된 통화 팽창 정책으로 국가경제는 완전히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그런데도 민씨 일파와 묄렌도르프는 자신들의 정책 과오를 오히려 김옥균과 개화파에 대한 공격으로써 호도하려고 책동할 뿐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도 못했다.
일본의 배신 - 차관 도입 실패
그즈음 미국 공사의 통역으로 귀국한 윤치호를 통하여 일본 외무성의 요인으로부터 국왕의 위임장이 있으면 외채 모집이 가능할 것이라는 언질이 왔다. 그동안 수구파의 방해와 재정 부족으로 개혁 추진에 장애를 느끼던 김옥균은 이 소식을 듣자 즉시 대권로 들어가 고종에게 피폐한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서는 외채 도입이 필요함을 역설하여 위임장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고종의 위임장을 받아든 김옥균은 새 희망을 갖고 고종 20년(1883년) 6월에 서재필, 서재창 등 50명에 이르는 유학생까지 인솔하여 세 번째로 일본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희망을 좌절시키는 비열한 음모가 배후에서 진행되고 있을 줄은 그때까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고종으로부터 위임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묄렌도르프와 수구파는 방해 공작을 백방으로 펼쳤다. 먼저 고종의 생각을 바꾸려고 시도하다 실패하자 일본 공사 다케조에에게 김옥균이 일본에 가져가는 위임장은 위조된 것이라고 무고하였다. 다케조에는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본국에 보고하여 일본에서는 김옥균의 방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도 모르고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통하여 차관 교섭을 벌였으나 그의 희망과는 달리 냉담한 반응만 얻게 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김옥균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차관도입은 단념하고 일본 주재 외국 상사와 민간 은행을 통한 기채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나 모두 일본 정부의 보증을 요구하여 차관 도입을 위한 방일은 결국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차관 도입 실패는 수구파의 모략 방해 책동도 한몫을 했지만, 당시 일본의 대조선 정책의 변화에도 주요 원인이 있었다. 그 동안 일본이 개화파를 지원했던 것은 그들의 조선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개방적인 인사들이 조선 정부의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일반론적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즈음의 민씨 정권은 말만 수구파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일본의 조선 진출을 묵인해 주는 매판성 경향을 나타내고 있어서 오히려 그 어떤 개방적 정권보다 다루기 쉬웠다. 그래서 자주성이 강한 개화파 정부가 조선에 들어서면 도리어 조선 진출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화파의 입지가 강화되도록 조선에 차관을 빌려주느니 그 돈으로 군비 확장에 더 주력해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 상대인 청국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이라고 생각한 결과 김옥균의 차관 교섭단을 박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이면의 사실을 알 수 없었던 김옥균은 일본이 차관 제공에 당연히 협조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의외의 배신을 당하자 낭패와 분노를 삭이면서 이듬해(1884년) 2월에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이 아무런 성과 없이 귀국하자 그 동안 차관 도입을 기대하고 개화파가 벌여놓았던 사업은 모두 중지되고 말았다. 박영효가 추진하던 양병 사업은 자금 부족으로 포기되어 양성해 오던 병력들이 한규직, 윤태준 휘하의 친군 전후영에 편입되고 말아 수구파의 군사적 기반만 강화시켜 주었고 박영효는 광주 유수 자리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또 최초의 인쇄 및 출판 기관이던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순보'도 청병의 행패를 보도한 것이 말썽이 되어 일본 기술자들이 추방되고 이 도한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외채 도입 실패를 추궁하는 수구파의 압력이 거세지자 김옥균은 신변의 위협까지 느껴서 정계에서 물러나 한성 동쪽 교외에 있던 별저에 칩거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근 2년 동안 공들여 추진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폭풍 전야
이제 수구파들은 공공연하게 '김옥균을 죽이라'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신변에 위협을 가하고 있었고, 그나마 깨어 있다고 믿었던 민영익마저 수구 회귀 대열에 가세하자 김옥균 등은 마지막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민영익은 김옥균보다도 9살 어린 25살이었는데 그 해 4월에 구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하여 누구보다도 선진 외국의 발달된 문물을 견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문의 이익을 위해 수구파에 앞장을 서서 반역사적 책동을 일삼고 있었다. 이에 순리적 방법을 통한 개혁 운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는 구테타에 의하여 일거에 국정 개혁을 수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의 국내외 정세는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죽음까지 각오하였던 개화파들에게 거사 실행의 결심을 더욱 재촉하게 만들었다. 국내적으로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빈발하여 수구파 정권을 흔들고 있었고, 국제적으로는 청국이 프랑스와 베트남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다가 계속 패퇴하자 그 해 6월에 조선 주둔군의 절반인 1500의 병력을 차출하여 전선에 투입했다.
개화파 내부에도 그즈음 동원 가능한 군사력이 꽤 많이 확보되어 있었다. 우선 '충의계'에도 40여 명의 비밀 조직원이 있었고, 미국과 일본에 유학 갔다 돌아온 사관 생도들도 서재필을 비롯하여 십 수명이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개화파 동료 윤응렬이 함경남병사로 재직하면서 500여 명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고, 비록 수구파가 장악한 양 군영으로 편입되기는 했지만 박영효가 양성하던 병력도 어느 정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사를 위한 병력은 자체 조달이 가능하겠지만 수구파의 배후에 있는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협조가 필요했다. 청군이 병력을 절반으로 줄였다 하더라도 1500명이 아직 남아 있어서 개화파 군사력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불급이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일본측의 의향을 타진하기 위해 본국에 소환되었다가 귀환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그 해(1884년) 9월 12일에 만나서 차관 교섭 비협조건을 질타하고 조선의 국정 개혁 필요성을 은근히 역설하였다. 이때 다케조에는 차관 교섭 건은 자신의 판단 잘못이었음을 시인하면서 앞으로는 그의 활동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달라진 다케조에의 태도에 안심이 되면서도 전날의 행태에 비추어 지원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자 며칠 후에 박영효를 보내 다시 의중을 탐색하게 하였다. 이에 다케조에는 다음과 같이 부추기는 말까지 하면서 협조를 약속했다.
"청나라는 장차 망할 것이니 귀국의 개혁 지사 제위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
예전에 의심 많고 소극적이던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다케조에의 모습이었다. 김옥균은 다케조에의 변화된 자세에 의구심이 가시지는 않았지만, 본국에서 다시 귀환한 다음부터 달라진 다케조에의 언행에서 일본측의 정책 변화를 읽고 거사를 작정한 대로 추진할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일본은 청불 전쟁에 의한 청나라의 곤경에 편승하여 조선의 개화파를 부추겨서 청나라와 연결된 수구파 정권을 약화시키고 그 틈에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책동을 알아챈 김옥균이 그 점을 거사에 역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 뒤, 20여 일 동안 거사 준비를 진행시키면서 보내던 김옥균은 거사 10일 전쯤 다케조에를 다시 만나서 소위 '3책'을 알려주고 협조에 대한 확답을 받아내었다. 김옥균이 전한 3책이라 함은 첫째, '충의계'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의 단결을 통하여 쿠데타를 계획대로 추진시키고 둘째, 고종을 설득하여 정변을 승인받아서 거사 명분을 확립한 다음 셋째, 청군의 간섭이나 방해 책동은 일본군이 막아준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거사 5일 전인 10월 12일에는 대궐에 들어가 고종과 독대하여 세계 정세와 청국과 결탁한 수구파의 매국적 작태를 설명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새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역설에 감동한 고종은 마침내 "국가의 대계가 위급한 때의 조처는 경의 지모에 일임한다"는 '친수밀칙'을 내렸다.
고종의 동조를 얻는 데 성공한 그는 미국 공사에게도 정변을 암시하고 협조를 부탁하여 대내외적으로 거사를 위한 정지작업을 마쳤다. 일본측이 완전히 미덥지 않아 거사 일자를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우정국 낙성식 날을 거사일로 내정하고 동지들과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다케조에로부터 본국의 정확한 훈령을 받은 후에 거사하자는 요청을 받았지만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무리한 정변의 강행
드디어 운명적인 거사의 날은 밝았다. 고종 21년(1884년) 10월 17일 오후 6시에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총판 홍영식의 초청으로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하여 축하연이 벌어졌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일본 공사관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이날 거사할 것임을 은밀히 알려서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키도록 하였다.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 우정국 북쪽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화재가 발생했다. 가장 먼저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던 민영익이 매복하고 있던 개화파측 장사들의 칼을 맞고 한 쪽 귀가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다시 들어오자 연회장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때를 틈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급히 우정국을 빠져나와 매복하고 있던 서재필 휘하 사관 생도들과 장사패들을 경우궁으로 이동시키고 교동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가서 일본군의 출동을 확인한 후에 대궐로 향했다. 창덕궁 금호문 앞에 당도한 그들은 김봉균, 신복모 등이 이끌고 온 40여 명의 장사패들을 금호문 밖에서 경비하게 하고는 미리 내통되어 있는 수문군의 도움으로 대권 안으로 들어섰다. 전문 앞에서 윤경완이 인솔한 무장 병력 50여 명을 지키게 하고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3인은 침전으로 올라가서 고종에게 우정국에서 변란이 일어난 것과 사고의 근본이 수구 세력에게 있음을 고하고 형세가 위급하므로 경우궁으로 어전을 옮길 것을 요청하였다. 처음에는 사태의 자초지종을 따지던 고종 내외도 침전 동북쪽 통명전 부근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오자 놀라서 그들을 따라나섰다. 경우궁에 도착하자 박영효가 다케조에 공사와 함께 일본군 200명을 거느리고 와서 외곽 경계를 서고 서재필이 지휘하는 사관 생도 13명이 왕을 거처 바로 앞을 지키면서 출입자를 통제하도록 조치한 후에 왕명으로 중신들을 불러들여서 일단의 수구파 세력들을 척살해 버렸다. 그 밤 안에 개화파 구테타로 살해된 수구파 인사들은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 민영목, 조영하, 민태호 등과 내시 유재현이었다.
수구파 거두들을 제거한 개화파는 다음날 날이 밝자 대내외에 신정부 발족을 알렸다. 새 정부 주요 직책의 면면을 살펴보면 고종의 사촌형 이재원을 영의정에 내정하고 홍영식은 좌의정에, 박영효는 전후영사, 서광범은 좌우영사, 서재필이 병조참판, 윤응렬이 형조판서, 이조참판에 신기선, 도승지에 박영교가 포진하여 국가 중추기관을 개화파가 완전히 장악하였다. 김옥균은 내무와 재무의 실권을 쥐게 되는 호조참판을 맡아 개혁을 뒷받침하는 재정의 조달을 담당하기로 했다. 조각을 마친 새 정부는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새 정책을 발표하였다.
1. 청국에 잡혀간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동시에 청국에 대한 조공을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평등권을 실시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한다.
3. 조세제도를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가난한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키운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자는 관직에 등용한다.
5. 탐관 오리 중에서 그 죄가 극심한 자는 치죄한다.
6. 백성에게 빌려주었던 정부 소유 환자미는 탕감하여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빠른 시일 내에 순검을 두어 치안에 주력한다.
9. 혜상공국을 폐지한다.
10. 유배되거나 구속되어 있는 자는 감형한다.
11. 4개 영을 1개영으로 통폐합하되 그 중에서 정정을 뽑아 근위대를 곧 설치한다.
12. 일반 내정은 호조에서 통할하고 기타 모든 재부아문은 폐지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 안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 반포한다.
14. 6조 이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은 없애되, 대신과 참찬이 이를 결정하게 한다.
그 외에도 개화파 혁명 정부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개혁안도 발표하였다.
1. 전국민은 단발한다.
2. 외국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다.
3. 궁내성을 별도 설치하여 일반 국무와 구분한다.
4. 국왕을 '폐하'로 칭해서 타국의 황제와 동등하게 예우하여 대조선국의 군주로서 존엄을 유지한다.
5. 재래의 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에 6개의 부서를 둔다.
6. 과거 제도를 폐지한다.
7. 내외의 공채를 모집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한다.
이와 같이 청년 개화파 관료들은 갑신년 혁명으로 부패와 무능에 젖어서 자신들의 안일만 추구하던 수구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려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때 김옥균은 34살, 홍영식이 30살, 서광범은 26살, 박영효는 24살, 서재필은 불과 19살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지하여 조급하게 서둘러서 단 한번의 반격에 그대로 밀려 버리는 허약한 체질을 불과 3일만에 여지없이 드러내고 말았다.
삼일천하
문제의 발단은 왕후 민쎄에게서부터 나왔다. 그녀는 경우궁으로 옮긴 다음날 아침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너무 협소하다고 창덕궁으로 환궁하자고 졸라댔다. 경우궁으로 국왕을 옮기게 한 것은 좁아서 경비하기가 용이한 때문이었는데 왕후 민씨가 이를 트집잡고 나온 것이다. 할 수 없이 조금 더 넓고 비교적 안심이 되는 계동군9영의정 이재원의 집)으로 옯기도록 하였으나 왕후는 계속 환궁을 요구했다. 이것은 수구파 일원인 전 경기 감사 심상훈이 문안을 빌미로 국왕 내외를 배알하여 사건의 실상을 고자질하자 민비측에서 청군과 내통하여 그들의 무력 간섭을 예정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김옥균 등이 외부 문제에 분주한 틈을 타서 민비는 경비를 책임지고 있던 다케조에를 졸라서 기어코 환궁의지를 관철시키고 말았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김옥균이 다케조에를 책망하였지만 다케조에는 "창덕궁으로 환궁해도 경비는 문제 없다"고 큰소리 쳤다. 이미 환궁이 결정되어 고종도 채비를 마친 터라 어절 수 없이 박영효 등이 일본군 무라카미 중대 병력과 함께 호위하여 국왕을 창덕궁으로 모셔갔다. 그러나 해질무렵 대궐문을 닫으려고 하자 선인문 밖엣 진을 치고 있던 청군들이 폐문을 방해하여 양측 사이에 일촉즉발의 긴박한 상태가 조성되었다. 박영효는 강경하게 대응하자고 했지만 김옥균과 다케조에는 타협책을 쓰기로 하여 궐문을 닫지 않고 궐 밖은 청군이 경비를 서고 궐내는 일본군이 지키는 것으로 청군측과 합의를 하였다.
그런데 정변 3일째 되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케조에는 돌연하게 태도를 바꾸고 나왔다. 일본군은 형편상 오래도록 조선의 궐내에 머무를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날 안으로 철수하겠다고 통보해 왔던 것이다. 김옥균으로서는 일본으로부터 또한번 배신을 당한 셈이지만 감정을 억누르고 다케조에와 담판을 벌여서 개화 정부의 자위 태세가 갖추어질 때까지 3일간 철병을 유예하고, 개혁 사업의 추진을 위한 자금 조달에 협조할 것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허망하게도 그날 안에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날 오전에 청군 제독 오조유로부터 시내가 평안하다는 봉서가 고종에게 전해졌고, 그 얼마 후 원세개가 600명의 병력을 대동하여 국왕의 접견을 요청했다. 김옥균 등은 원세개의 접견은 허락할 수 있으나 군사들이 대궐로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여 이 요구는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에 접어들자 원세개는 전 우의정 심순택으로 하여금 청군 출동을 요청하게 하여 자신들의 군사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억지로 확보한 다음 마침내 500명의 1대는 오조유 지휘 아래 선인문 쪽으로, 800명의 다른 1대는 자기가 직접 지휘하여 돈화문 쪽에서 창덕궁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따라 궁궐 외곽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들과 청군 사이에 교전상태가 발발하고 말았다. 당시 창덕궁을 에워싸고 공격했던 인원은 조선주둔 청군 전 병력과 수구파가 장악했던 좌우영 소속 조선 군졸에다가 개화파가 일본과 결탁하여 국왕의 연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일반 백성까지 가세하여 엄청난 수의 대부대였다. 이에 반하여 궁궐을 수비하던 병력은 일본군 200명과, 개화파 자체 동원병력 800명 정도로 그 수에서 이미 결판이 나있었으며, 더구나 조선병력은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다.
양쪽의 충돌이 일어나자 왕비는 청군 진지를 통해 북묘로 향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이규완 등과 나머지 사관생도는 다케조에를 따라 일본 공사관으로 향하였다. 홍영식 등은 개화파 중에서 비교적 온건하였던 데다가 원세개와 친교도 있고 수구파 쪽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많아서 왕을 따라가면 신변은 안전할 것으로 믿었지만 북묘에 도착한 직후 그들 모두는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한편 일본 공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김옥균 등은 10월 20일 오후에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 호위 아래 인천으로 탈출하여 이튿날 아침에 인천항에 정박중이던 찌또세마루 호에 승선할 수 있었다.
고통스러운 망명
그러나 그들이 안전하다고 믿은 그곳에서도 또 한번 생사의 갈림길에서는 일대 곤욕을 치르게 된다. 수구파의 집요한 추적과 다케조에의 세 번째 배신이 어우러져 자칫 배에서 내몰리는 상황에 빠지고 만 것이다. 수구파는 그 사이에 벌써 심순택을 영의정으로 하는 새 조각을 마치고 김옥균 등을 5적으로 규정하여 인천까지 쫓아와서 다케조에에게 김옥균등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인천까지 쫓아와서 '조선의 죄인을 인도하지 않으면 중대한 국제 문제로 비화된다'고 협박하며 개화파 인사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 인물들은 조병호, 홍순학, 묄렌도르프 등이었다. 묄렌도르프는 당오전 주조 시비에서부터 김옥균과 다툰 후 그를 특히 증오하고 질시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식언을 밥 먹듯이 해온 다케조에가 김옥균들에게 극도로 무책임한 하선을 요청했다. 김옥균 등은 이제 자결하는 방법 이외에 달리 도리가 없게 되었다. 이때 다케조에를 막고 나선 사람이 짜또세마루 호의 쓰지 선장이었다. 그는 다케조에와 김옥균 등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다케조에를 힐난하고 나섰다. 쓰지 선장은 "이 배에 조선 개화당 요인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공사를 믿고 모종의 일을 도모하다가 잘못되어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하선하라는 것은 도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승선한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인간의 도리로 도저히 하선시킬 수 없다"고 말하고는 김옥균 등을 배 밑의 밀실에 숨겨준 뒤 수구파 인사들에게 "그런 사람들이 탄 사실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추적자들도 외국 선박을 수색할 수가 없는 노릇이라 별수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이렇게 김옥균 일행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여 10월 24일에 찌또세마루 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까지 4일 동안 꼼짝없이 배 밑바닥 밀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인천항을 출발한 지 3일 후에 배가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젊은 망명객들은 그제야 안도와 좌절감이 함께 밀려와서 서로 붙잡고 통곡을 하며 회한을 삭였다. 그들은 도쿄로 옮겨가 전일의 연고를 의지하여 한동안 후쿠자와의 집에서 지내다가 셋집을 얻어서 합숙하며 피곤한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망명지에 있는 그들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책동을 거듭하였다. 갑신정변 때 발생한 일본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한성조약'을 체결하면서도 김옥균 등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일본이 정치범은 국제법상 인도하지 않는다고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비열한 일본은 자객을 보내서 드러나지 않게 처리한다면 이를 묵인하겠다는 이면 양해를 했다. 김옥균으로서는 일본으로부터 네 번째 배신을 당하게 되는 것이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개화파의 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전보다 더 심한 악폐를 자행하고 있었다. 특히 가렴주구가 심한 민영준, 민영환, 민영소, 민영달을 4민이라고 지탄할 정도로 그 원성이 가히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리고 개화당의 가족들은 모조리 붙잡아 처형하여 피의 보복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때에 김옥균은 일본에 도착한 직후부터 외무대신 이노우에를 만나려고 하였으나 이미 이용 가치가 없어진 그를 일본측은 따돌리기만 했고 노골적으로 귀찮아 하기까지 했다. 일본의 배신에 분노한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경위와 일본측의 간여를 만천하게 공표하겠다고 나섰지만 이 또한 망명지에서는 여의치 않은 일이었다.
일본은 1885년 4월에 청나라와 '천진 조약'을 맺고 조선에서 양궁이 공동 철병하기로 한 후 거리낌없는 조선 경제 침략을 추진할 수 있게 되어 이제는 조선 개화파의 협조가 필요없었기 때문에 김옥균 등을 더욱 박대하였다. 김옥균은 심화를 겨우 다스리고 거처에 틀어박혀 자신의 개혁 운동을 회고하는 '갑신일록'을 집필하면서 망명지에서의 생활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연이은 자객과 암살
김옥균을 제거하려는 조선 자객은 그의 목숨을 노리고 끊임없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장은규인데 "옥균이 자유당 계열 무사들과 결탁하여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이른바 '오사카 사건'을 일으켰을 뿐 김옥균의 신변에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다. 이 사건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는 그에게 일본을 떠나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빈곤한 조선 망명객 처지에 일본 이외의 어떤 나라에도 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번째 자객으로는 지운영이라는 사람이 왔다. 이 자는 김옥균의 역공작에 휘말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옥균은 이 사실을 거론하며 외무대신 이노우에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자 일본 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에송환하고 김옥균을 일본과 조선의 우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야마켄 내무대신 명의로 공식정인 국외 퇴거를 명했다. 김옥균은 이에 항의하며 이노우에를 상대로 한 문서를 공표하고 일본 신문에 고종에게 보내는 장문의 상소와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 앞으로 사건의 책임을 따지는 공개 서한을 게재하였다.
이렇게 김옥균으로 인해 국내외적으로 큰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일본정부는 1886년 7월에 그를 오가사와라 섬에 강제 연금시켜 버렸다. 그로서는 일본으로부터 다섯 번째 배신을 맛보게 된 것이다. 오가사와라에 동행한 동지는 이윤과 한 사람뿐으로 이 고도에서 그는 2년 동안 실의의 나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습한 기후와 악조건을 견디지 못하여 연금 해제를 탄원하자 1888년에 북해도로 이송되었다가 1890년에야 겨우 풀려나올 수 있었다. 오가사와라 섬에서는 소일 삼아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때 만난 와다라는 청년이 그를 추종하여 상해에서 죽음의 순간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연금에서 해방되고 도쿄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보내다가 마지막 승부를 걸기 위해 청국으로 들어가 실권자 이홍장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이는 마침 주일 공사로 새로 부임한 이홍장의 아들 이경방이 자신의 아버지가 그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서신을 건네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의 거듭된 재기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아직도 조선에 영향력이 큰 청국의 실권자를 만나서 협조를 얻어보려는 의도였지만 그것은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었던 날개 꺾인 조선 지식인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었다. 청국행을 결심한 그는 백방으로 여비 조달을 위해 노력하던 차에 오사카의 한 후원자에게서 경비를 협조해 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동료들은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비밀리에 운신하고 여러 명의 수행원과 함께 가도록 권했으나 그는 와다와 심부름 역할을 할 수 있는 또 한 사람만 데리고 떠났다. 그런데 오사카 역에 도착하자 의외의 마중객이 나와 있었다. 조선의 자객으로서 이일직과 홍종우가 그들이었다. 이일직은, 자신은 청일 양국을 왕래하면서 약종상을 하는 사람이고 홍종우는 프랑스 유학생이며 자신의 친지라고 거짓 소개했다. 그러면서 평소부터 김옥균을 존경해 왔기 때문에 자기가 청국행 경비를 제공하겠노라고 자칭하였다. 김옥균은 한눈에 자객임을 알아보았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는 심산으로 도움을 승낙했다. 이일직은 자기가 동행하면 좋겠지만 자신은 아직 업무가 남아 일본에 더 있어야 하고 대신 홍종우가 동행하며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면서 김옥균의 의심을 줄이려고 하였다. 실은 김옥균이 상해로 떠난 것을 확인한 후에 이미 작당한 권동수와 함께 박영효까지 암살하기 위해 도쿄로 돌아간 것이지만 이들은 박영효의 기지로 체포되어 훗날 홍종우의 배후가 밝혀지기도 했다.
한편 1894년 2월 말쯤 상해에 도착한 김옥균 일행은 미국 조계안에 있는 동화양행에 여장을 풀었다. 투숙한 다음날 오후에 김옥균 일행은 거리를 구경하기로 하고 오전에는 각자 용무를 보았다.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돌아온 김옥균은 피곤하다고 침대에 누우면서 와다에게 일본에서 타고 온 배의 사무장이 마쓰모토에게 전할 일이 있으니 그를 불러오라고 했다. 이때가 김옥균에게는 운명의 시간이 되고 말았다. 와다가 나가자 김옥균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눈치챈 자객 홍종우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김옥균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여 그를 절명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상해 경찰은 홍종우를 체포하고 김옥균의 사체는 와다의 요청에 따라 일본으로 운구하기로 했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홍종우와 사체를 청국측 상해 주재 관리에게 넘겨주었다. 청국 정부는 홍종우의 범행을 조선인 상호간의 문제라고 하여 홍종우와 사체를 다시 조선에 인계하였다. 조선에 도착한 김옥균의 사체는 상해 및 조선 주재 외교 사절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고 말았다. 잘려진 그의 목에는 '모반 대역부도 죄인 옥균 당일 양화진두 능지처참'이라고 쓰여진 커다란 천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렇게 김옥균은 파란만장한 삶을 비극적으로 마쳤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44살의 한창때였따. 독립, 자주, 자립이라는 민족 의식을 바탕으로 문벌을 폐지하고 재민 평등의 국민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그는 이역 땅에서 자기 민족의 손에의해 암살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이 비극의 개화주의자는 살해된 그 이듬해에 반역죄가 사면되고 1910년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가 주도한 갑신정변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비교되고, 외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기층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동학 농민 정쟁과 구분된다. 또 조선 왕조의 체제 자체를 변화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갑오경장과도 대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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