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순교한 조선의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2-1846, 25살, 처형).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김대건은 오로지 신앙을 향한 일념으로 살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한 조선 최초의 신부이다. 그는 천주교 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은채 15살의 어린 나이에 신부가 되기로 작정하고 이역 만리 타국 땅으로 신학 공부를 떠났던 굳센 신앙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참신앙으로 받아들여서 순조 원년의 신유년 교난부터 박해를 받아왔고, 이를 피하기 위해 고향에서 살지도 못하고 타지로 이주해야만 했던 독실한 천주교 가정이었다. 그는 집안을 신앙으로 이끌었던 할머니에 의하여 일찌감치 신부감으로 키워졌으며, 그 자신도 어린 나이에 이미 강한 신앙의 힘으로 무장하여 스스로 시련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조선의 실정으로는 일반 신도도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신부가 된다는 것은 고난의 단계를 넘어서 죽음을 예상해야 하는 형극의 길이었기 때문에 보통의 결심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 어떤 새로운 문물도 수용하지 않을 정도로 극히 경직된 보수주의 사회였던 조선에서 최고의 이단으로 손꼽는 천주교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발상은 아무리 신앙의 힘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가질 수 있는 생각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신앙인이기도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능동적인 인간상의 표본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전인미답의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자신만의 의지와 천주에 대한 신앙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흑암을 뚫고 나아간 것이므로 그 도전 정신만으로도 타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세계로 도전한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되어 왔다.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자세이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타인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법이다. 김대건 또한 현실에 편안히 안주하기보다 가시받길일지언정 미지의 세계로 나갔기 때문에, 그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과 함께 적극적인 인간 정신의 발현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천주교 집안에서 출생
김대건은 조선 23대 왕인 순조 22년(1822년)에 김제준과 장홍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이라는 산중 마을이었으며 본관은 김해이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진후대까지 충남 내포에서 살았는데 둘째 며느리로 들어온 조모 이씨에 의하여 전 집안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의 조모는 일찍부터 교회를 만들고 충청도 일대를 전도하며 천주교의 교세를 넓혀나간 이존창의 질녀였다. 그러나 순조 원년(1801년)에 발생한 신유사옥 때 증조부가 잡혀가 옥고를 치른 후 계속 감시와 박해를 받다가 순조 5년(1805년)에 또다시 붙잡혀 결국 해미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에 그의 조부 택현은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용인 땅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조부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그의 부친 제준은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친은 '이냐시오'라는 본명으로 이미 영세를 받았던 독실한 신자로 김대건을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양육했다. 그의 아명은 재복으로 일찍이 그의 집안을 전도했던 할머니는 그를 어려서부터 신부로 키우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영세를 받지 않았다. 연이은 교난으로 집안이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신부에 의해 정식 성세성사를 받기 위해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교회는 아직 신부의 인도 없이 신도들 스스로 교리 연구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교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조선의 천주교인들의 신앙적 힘만으로 교세를 이어온 자생적 형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이들을 올바르게 지도해 줄 신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이에 따라 중국 천주교단에 조선에도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러한 조선 교인들의 요청으로 청국인 신부 주문모와 유빠치피꼬가 입국했고 곧이어 프랑스 신부들도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실정과 말에 어두운 외국인 신부들로는 효과적인 포교가 용이하지 않자 조선인 신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프랑스 신부 모방도 이 점을 절실하게 깨닫고 신학생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이 대상자로 선발된 사람이 과천 지방의 회장(신도 대표) 아들인 최양업과 홍주에사는 최한지의 아들 방제였다. 이렇게 두사람을 선발하여 모방이 기초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때가 헌종 원년(1835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그 이듬해에 추가로 선택한 사람이 김대건이다. 모방은 자신이 직접 김대건에게 영세를 주고 상경시켜서 먼저 선발되어 공부하던 두 사람과 합류시켰다. 김대건은 선배 두사람과 교리 공부를 하며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하여 역관 유진길로부터 중국말을 배웠다. 이렇게 6개월 동안 기초를 닦은 후에 헌종 2년(1836년) 12월에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들의 나이 15살 안팎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험난한 신학 공부
사실 신부의 길로 나설 작정을 한다는 것은 요즘도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유교적 전통이 강고하던 당시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우선 독실한 신자이어야 함은 물론이고 성직자가 되기 위한 확고부동한 신념도 있어야만 했다. 또 빗발처럼 쏟아지는 비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버텨낼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그때 신부의 길을 선택한 어린 소년들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오로지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념이 없었다면 조국을 떠나 낯선 타국 땅가지의 장도를 이겨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조선은 외국인의 입국을 막았던 것은 물론 내국인의 월경도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나라 밖으로 나간다는 자체가 발각되면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중죄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내외의 어려움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카오였다. 당시 마카오에는 중국인을 위한 신학교가 있었고, 조선 선교의 책임을 맡은 파리의 외방 전교회 지부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조선을 떠난 지 8개월여의 긴 여행이었다. 이때 외방 전교회 경리 책임자였던 르그레스와 신부는 그토록 먼길을 걸어온 조선의 어린 세 소년을 보고 감동하여 청국인 신학교나 동남아의 다른 지역 신학교로 보내지 않고 마카오에서 전교회지부 책임 아래 직접 교육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세 소년은 이역 만리 마카오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신학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정세도 극도로 혼미하여 민란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마카오에 도착한 지 두 달도 안되어 김대건 일행은 난을 피해 마닐라에 가 있기도 했다. 이렇듯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개획된 교육 일정에 따라 빠짐없이 공부하던 중에 최방제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1년만의 일이었다. 대건과 양업은 의지하던 벗을 잃고 그를 이역 땅에 묻으면서도 슬픔을 삼키며 공부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조국에서 그들이 신부가 되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교인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떠난 지 4년째 되는 1839년 봄에 또다시 민란이 발생하여 마닐라로 피난했다가 그 해 11월에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한편 그때 조선 국내 정세는 천주교도들에게 더욱 고통과 박해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헌종 4년(1838년)에 조선 선교의 책임을 전담한 프랑스 신부 앙베르가 입국하여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외국인으로 한계에 부닥치자 전도의 효율성을 위해 김대건 등이 공부를 마치기 전에 조선 내에서도 신부를 양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정하상 등 4명을 뽑아서 교육을 시켰지만 그 이듬해에 발생한 기해 박해로 이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 기해년 박해로 프랑스 신부 앙베르, 모방, 샤스탕도 잡혀 처형되었고,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소위 척사윤음이 전국에 반포되고 5가작통의 압제가 철통같이 가해졌다. 이때 대건의 아버지 제준도 사위 곽가의 고발로 잡혀서 죽고, 어머니는 겨우 변을 피해 도망을 했다. 양업의 부모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마카오에 있는 대건과 양업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학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귀국을 위한 진통
동양으로의 진출에서 영국보다 늦은 프랑스는 1842년에 세실 제독이 지휘하는 군함을 마카오에 파견하였다. 늦으나마 중국에 진출할 통로를 개척하고 극동의 다른 나라들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마카오에서 정세를 살피던 세실은 중국과 이어져 있는 조선에 진출하기로 결정하고 지리를 알고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 신부 수업을 모두 마친 대건과 양업은 귀국할 채비를 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 배에 편승하기로 하고 그들의 통역을 맡았다. 대건은 지휘선 에리곤 호에 승선하여 세실의 통역이 되고, 양업은 보조함 파보리트 호에 승선하여 함장 바즈의 통역을 맡았다. 드디어 프랑스 함대는 1842년 2월에 마카오를 출발하여 마닐라에 들렀다가 대만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아편전쟁이 끝나고 난경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본 세실은 중국에서 영국에게 선수를 모두 빼앗기자 작은 나라 조선으로의 진출을 포기해 버렸다. 결국 프랑스 인들을 따라 입국하려던 대건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배에서 하선한 대건은 양업과 함께 프랑스 신부 한 명을 대동하고 육로를 통해 조선으로 향했다. 이리하여 그들이 요동반도 서남단에 도착한 것은 그 해 10월 말이었다. 그곳에서 입국 기회를 엿보던 중에 중국 상인을 통하여 비로소 기해년 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피맺힌 소식을 접한 그들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귀국을 재촉하기 위해 의주로 통하는 변문 땅에 당도하였다. 변문에서 의주까지 140리 길을 달리듯이 걸어서 국경을 경비하는 군졸들의 눈을 속이고 압록강을 건넜으나곧 발각되어 다시 중국으로 도망쳐 나와야만 했다. 대건일행은 그 길로 몽고의 빠자스까지 들어갔다. 그곳에는 조선 선교 책임자로 다시 임명된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자스에서 한동안 머물던 그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헌종 10년(1844년)초에 두만강변의 경원을 통해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빠자스에서 경원까지 2000리 길의 만주 벌판을 걸어서 도착한 것은 그해 구정 무렵이었다. 경원에서 2년마다 장이 서는 것을 기회로 삼아 조선으로 잠입하기로 하였으나 조선에서 온 안내자가 경원으로부터 입국하는 것은 의주로부터 가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빠자스로 돌아갔다.
결국 프랑스 신부까지 대동하고 여러 사람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페레올 주교는 대건 혼자만이라도 입국할 것을 명령하여 헌종 11년(1845년) 정월에 드디어 대건은 의주를 거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실로 귀국을 시도한 지 3년만의 일로 대건 자신도 감개가 남달랐고 그를 맞은 신도들도 기쁨이 컸다. 그러나 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거처와 소식을 몇몇 교회 간부 외에는 일체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붙였다. 그는 조선에 입국해서 신학생을 뽑아 교육을 시키면서 순교자에 대한 사료 수집에 나섰다. 1785년에 조선에서 처음 순교자가 나온 이래 아무도 손대지 못한 사업이었다. 이때 그는 추사 김정희가 입교 준비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각지의 순교자의 수도 파악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한동안 극심한 병고에 시달리다가 겨우 일어나기도 했었다. 병석에서 일어나자 그는 페레올 주교를 조선으로 데려오기 위해 배를 구하러 다녔다. 외국인 신부를 육지로 입국시키기는 당시 조선 사정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신부가 되다.
드디어 길이 8미터, 넓이 3미터짜리 소형 배를 구해서 중국으로 향한 것은 그가 입국한 지 4개월이 지난 1845년 4월 말이었다. 서해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비로소 신부의 서품을 받았다. 그 동안 신학 공부는 마쳤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신부가 되지 못했는데 조선 선교의 막중한 임무 때문에 재입국하기 정에 신부로 승품되었던 것이다. 그는 금가항 신학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어 만당성당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신부로 서품되자마자 그 해 8월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데리고 떠나왔던 뱃길을 따라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목적지를 연평도로 정하고 출발했지만 도착한 것은 충남 강경 근처의 황산포였다. 해풍이 그들을 목적지보다 먼 곳으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우선 강경의 신자들 집에 두 사람의 프랑스 신부를 은신시켜서 말을 배우게 하고, 그는 신부들이 거처할 집을 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상경하여 집을 구한 후에는 신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조직적인 연락망을 작성하여 체계적인 포교를 위한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그 동안 말이 잘 통하지 않던 외국인 신부들만 모셨던 신도들도 조선인 신부가 지도하고, 또 제대로 진행되지 않던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나가게 되자 모두 좋아하였다. 이렇게 상경하여 프랑스 신부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를 닦아놓은 그는 그 해 말에 페레올 주교를 한성으로 데리고 와서 본격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이때쯤 프랑스 신부들도 어느 정도 말을 익혀서 간단한 의사 소통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상경한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한성교회를 맡기로 하고는 그에게 지방 선교를 명하였다. 그때 김대건은 어렸을 때 그가 살던 '골배 마실'에서 가까운 '은이'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제야 유리 걸식하고 다닌다는 어머니를 수소문하여 모셨다. 그 동안 귀국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를 찾아볼 여유가 없었던 그는 '은이' 마을에 머물던 5개월 동안 각지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포교 활동을 하면서 수소문을 하던 그는 겨우 어머니를 찾아내어 모자 상봉의 기쁨을 얻었지만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페레올 신부의 명에 의하여 또 다른 신부들과 최양업의 입국을 안내하기 위하여 다시 바다를 통해 출국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순교자의 길
헌종 12년(1846년) 4월에 상경하여 중국으로 떠날 기회를 엿보던 그는 연평도로 떠나는 어물상선에 유람객으로 가장하고 편승하였다. 이번에는 직접 배를 구하여 여행을 하는 모험을 하지 않고 조기잡이 철에 조선 근해까지 출항하는 중국 배를 이용하기로 하고 연평도 부근에서부터 육지까지 항로를 확인하는 지도를 작성할 작정이었다. 그 해 5월 중순에 마포를 떠난 배는 연평도를 지나 5월말에 등산진에 닿았다. 여기서 중국 배를 만나 사례를 하고 페레올 주교의 서신과 자기가 그린 지도를 상해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부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목적을 달성하고 그는 배가 돌아갈 때문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수상한 행색을 의심한 관리들의 불심 검문을 받고 갑자기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수중에 있던 소지품을 통해 천주교 신자임이 발각되었고, 선원들의 밀고로 중국 배에 전달한 편지와 지도도 압수되었다. 그는 해주 감영에 이송되어 심한 문초를 받았다. 사태가 파국에 이르렀음을 안 그는 죽음을 각오하였지만 해주 감사는 그를 중국인으로 오해하고 자신이 함부로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한성으로 압송하였다. 김대건은 한성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을 때 자신은 조선 사람이며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은 신부임을 똑똑히 밝혔다. 취조 받는 과정에서 세계지도를 그려내고 각국의 말에 능통한 것은 물론 해박하게 세계대세를 논하면서 조선의 낙후성을 역설하자 문초관들도 아연하여 그를 쉬이 보지 못하였다. 또 천주교는 세계 강국에서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데 유독 조선만이 박해하고 신자들을 죽이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라고 당당하게 통박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문초가 한창 진행중일 때 프랑스의 세실 제독이 군함 3척을 이끌고 나타나서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면서 프랑스 신부를 죽인 이유를 확인하겠다고 시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느닷없는 사태에 직면한 조선 조정은 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김대건을 내세워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이유를 해명하고 화의를 제의하기로 하였다. 김대건으로서는 사태가 급반전하여 살아날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세실 제독의 프랑스 함대는 항의 국서만 전달한 채 김대건이 교섭 대표로 나서기도 전에 떠나 버렸다. 김대건으로서는 만사가 휴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프랑스 함대가 별다른 적대 행위 없이 떠난 것은 8월이었는데 조선 조정은 9월에 접어들자마자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제 정말 마지막임을 직밤하고 자기를 가르쳐 준 신부들에게 하직 편지를 쓰고 '전국 신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남겼다. 또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신앙을 위해 자신의 피로 혈제를 드리게 된 그였지만 육친에 대한 걱정은 어떨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그 다음날인 9월 16일에 처형되고 말았다.
천주교에서 세상은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 같은 곳이고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한 것처럼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의 제물이 된 것이다. 그는 1857년에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는 시복식이 거행되었으며 조선의 전 성직단 대주보로 정하여졌다. 그 후 그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라서 죽어서도 조선 천주교의 영원한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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