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실사구시 정신의선구자 이익(1681-1763, 83살, 노사).
이익은 평생을 재야에 묻혀서 학문에 몰두하면서도 관념론적 성리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실생활에 필요한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연구한 인물이었다. 또한 죽은 노비를 위해서 비문을 지어 줄 정도로 진보적 성향과 인권평등의 정신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중세 봉건사회였던 점을 감안하면 가히 파격적인 태도라고 아니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 기반가지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일면을 생각한다면 시대의 선구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관직에 나가 투쟁하면서까지 자신의이념을 정치현실에서 실천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신념을 오직 학문적 가치로서만 추구했고, 그 내용을 실천해 줄 몫은 자기의 차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현실 정치에는 가급적 관여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일상에서는 되도록 배우고 믿는 바를 실천하여 지식인으로서 도리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욕심에 기초한 이해와 떳떳한 방법을 통한 인부를 잘 구별할 줄 알아서 좇을 바를 잃지 않아야 군자로고 했다. 그래서 재부를 차지하고 덕이 없느니보다 재부 없이 덕을 지니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사실 자기가 공부한 내용을 반드시 스스로 정치 현실에 나가 실천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 각 분야에서 연구하는 사람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각각일 수 있는 상태가 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직접 나서서 실천하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또 하나의 쟁투 마당이 될 것이며, 다양성이 실종되고 경직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와 같이 명리를 욕심 내지 않고 자기 분야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제대로 발전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진다.
그는 사회 비판에 있어서도 주관적인 가치 개념을 앞세워서는 안 되며 시비의 관념을 떠난 실증적 견지에서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이나 역사는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조건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하여 김육으로부터 발아되고 유형원에게서 꽃피기 시작한 학문의 새 경향을 선도하여 그의 호인 성호의 뜻 그대로 실학에 있어서는 별들의 호수처럼 커다란 학해의 물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하려고 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요순시대와 같은 과거의 것이었고 "나라의 흥망이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왕조시대 인물로서 한계를 안고 있었다.
학문에만 전념했던 일생
이익은 조선 19대 왕인 숙종 7년(1681년)에 이하진과 권씨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남인 출신으로 대사간과 진주 목사를 역임했으나 그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발생한 경신대출척으로 정계에서 쫓겨나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당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유배지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여주 이씨인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가였지만 부친대에 이르러 당쟁의 된서리를 맞고 가운이 기울어지고 말았다. 더구나 그가 태어난 다음해에 부친이 유배지에서 55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 버려서 더한층 집안의 쇠락을 재촉하였다.
홀로 된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고향인 안산의 첨성촌으로 돌아왔다. 그의 어머니 권씨는 부친의 후처로 자신의 소생인 2남 2녀 뿐 아니라 전처 이씨 소생의 3남 2녀까지 양육하면서 어떻게든 양반가의 체모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그의 호를 성호로 지은 것은 첨성리의 성호장에서 살았다고 하여 스스로 붙인 것이며, 그의 자는 자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잔병이 많았지만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정진해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으며, 둘째 형 염계공 잠이 그의 초년 시절 글 선생이었다. 그는 25살 되는 해에 처음으로 과거에 나갔으나 낙방한 후 다시는 과거에 응시 하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에만 몰두하며 살았다. 26살 때 존경하고 따르던 둘째 형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하였다고 역적으로 몰려 장살되는 화를 당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에게는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구차하게 살지 않을 만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다. 또 부친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구입해 온 수많은 서적들이 남아 있어서 공부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맑고 깨끗한 성품이어서 음험한 구석이나 명리를 좆는 법이 없었으며, 스스로 예절을 엄하게 지키고 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여 향리에서는 물론이고 널리 사림들에도 존경을 받았다. 그가 35살 때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복상을 마치고는 노비와 집기 등을 종가로 보낸 후에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일찍이 형의 참화를 겪은 탓인지 그의 일가에대한 애정은 각별하였다. 죽은 둘째 형에게 자식이 없자 양자를 들이게 하였고, 여러 조카들을 데려다 가르치며 친아들처럼 돌봐주어 가문에 지주 역할을 했다. 그의 일생은 외면적으로 볼 때 별다른 굴곡이 없었다. 평생을 성호장에 은거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일만 하였기 때문이다.
47살 되던 해인 영조 3년(1727년0에는 선공감 감역에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애초부터 관직에 뜻이 없던 그는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가 62살 되던 해(1742년)에 아들 맹휴가 정시에 장원 급제하여 말년의 기쁨을 맛보았고, 그 후에 아들이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자 훈계 8조를 지어 보내 치도의 각성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아들이 영조 27년(1751년)에 38살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여 71살의 그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 자신도 평생을 크고 작은 병으로 고생하였는데 노년에 접어들면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으며, 아들을 먼저 잃고 난 뒤에는 심신이 더 한층 쇠약해졌다. 자신의 궁핍이 상혼비용에 가산을 남용하여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자탄하기도 하였는데, 75살 무렵에는 자신의 경제적 무능을 고백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나는 글읽기나 좋아했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실 한 오리, 낟알 한 알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으니 가히 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가 83살 되던 해인 영조 39년(1763년)에는 우로예전에 따라 첨 지충추 부사로 승자되는 은전을 받았으나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초서에도 능했으며 죽은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당시의 사회상
그가 살았던 시기는 왜란과 호란의 여폐가 사회 각 부분에 남아 있었으며, 무너진 사회 질서가 좀처럼 복구되지 못하던 때였다. 동서분당으로 발단이 된 당쟁은 지배층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왔으며, 사회 상태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자 당쟁은 더욱 격화되는 양상이었다. 또 과거 제도마저 그 기능을 상실하여 오직 문벌과 당색만이 입신양명을 좌우하는 요인이 되었다. 과거 제도는 시험 자체도 사장중심의 경향을 갖고 있어서 실제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식견이나 능력은 무시되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양란의 결과 황폐화된 전지가 제대로 복구되지 않고 있는데다 궁방, 관아, 영문에서 어장, 염전, 전지 등을 넘겨 받아 자신들의 이익에만 전용하였으며, 대토지 겸병 현상과 면세지의 증대는 백성들을 더욱 고통에 빠뜨리고 국가 재정 수입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 재정은 주로 한곡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환곡은 빈민구휼이라는 그 본래의 뜻과는 달리 관가의 영리 사업이 되고 만 셈이며, 오히려 억지로 주고 고리대로 이자를 받아서 백성들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동법이 실시되었지만 현물 공납이 모두 없어지지 않은 데다 정남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군포는 백성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부담이었다. 공납의 어려움을 못 견디고 유민이 생기면 일가 친척이나 이웃에게까지 그 책임을 전가시켰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과 유아의 몫으로도 거두어들였다. 또 화폐는 오로지 재정 수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주조되어서 일반 백성들의 수중에는 들어가지 않고 관리들의 농간으로 이자 놀이의 자금으로나 악용되었다. 이렇게 사회의 모든 기반이 온통 뒤틀린 상태에서 지배층은 유교적 관념 논리에만 집착하여 국가 운영을 더욱 경화시키고 있었다. 거기에다 거듭되는 재황과 전염병의 창궐은 백성들의 생활을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제는 사회 체제의 전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 재정의 파탄과 백성들의 피폐를 구해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일부나마 뜻있는 학자들에 의해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과 각성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청나라로부터 유입되던 새로운 학풍과 문물에 영향을 받아서 사회 개혁과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었다.
당쟁에 대한 이해와 양반 비판
성호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속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생지부터가 그의 아버지의 유배지였고, 둘째 형도 당파 싸움 와중에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자신의 가문과 적대 관계에 있던 노론에 대하여 원한을 가질 법도 하지만 그는 조금도 당파색을 띠지 않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을 가려내려고 했다. 그는 당쟁의 기본적인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전제하였다. "붕당은 쟁투에서 비롯되고 쟁투는 이해에서 일어난다. 이해가 절실해지면 그 당이 뿌리 깊어지고 이해가 오래 계속되면 그 세력으로 인하여 당파가 견고해진다." 말하자면 모자라는 밥 그릇 수에 따라 필연적으로 붕당이 일어난 것이지 다른 이유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밥 그릇 수가 부족한 까닭은 수요 공급을 계산하지 않은 잘못된 과거 제도에 있다고 지적했다. 더구나 관직 인사에 원칙이 없고 정실에 좌우되는 폐단이 이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결국에는 나라가 인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관직을 구하는 형상이 되었다고 개탄했다.
또 당쟁이 거듭되면서 원한은 누적되고 후대에까지 세습되어 그 끝이 나타나지 않을 정도라고 보았다. 그리고 일단 당파가 대립하면 자파의 이익만을 좇게 되어 국리 민복은 아예 뒷전이 되고 만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실로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도 좋은 교훈이 되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근본적으로 양반 정치의 모순을 비판하고 나왔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은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 당파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차등이 생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신분은 후천적으로 노력 여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견고한 신분 질서가 고착되었던 봉건시대 인물이면서도 자기의 이익 기반까지 무시하는 근대의 평등적 인권 개념을 가졌던 셈이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도 무위 도식하지 말고 농토에 돌아가서 실제 생산에 종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적 노동을 천하게 여기는 양반의 생리를 뜯어고쳐야 하며 관리도 실제 생업에 종사하는 선비 중에서 우수한 자를 뽑아쓰는 것이 폐단을 없애는 첩경이라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사농합일의 정신의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다. 그리고 선비들도 문장이나 시가에만 몰두하지 말고 실제로 경세치용할 수 있는 재구를 갖추게 하는 현실적인 학문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도 개혁론
성호는 당시 피폐한 사회 현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정치 기구를 간소화하고 그 기능을 제대로 살리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보았다. 무엇보다 우선하여 무계획적인 과거 제도를 뜯어고쳐야 모든 것이 해결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리채용을 위한 정기시험은 5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되 전과목을 일시에 보지 말고 매년 과목을 나누어 실시하여 응시생이 과목마다 충실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다. 이는 관직 대기자 수를 줄이고 과거 시험 합격자의 실력 향상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과거시험 이외에도 천거에 의하여 등용시키는 공거제를 병행하여 훌륭한 인재를 파벌에 좌우되지 않고 공평히 선발하는 시회로 삼자고 했다. 그리고 기존의 관리들에 대하여는 고과를 천저히 실시하여 진급, 증봉, 출퇴의 기준으로 삼고 관리에 대한 감찰과 징계를 실효적으로 담당할 총장국 같은 기관을 신설하자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관청의 기구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축소시키고 관리의 수를 줄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대신 관원의 녹봉을 높여서 생활보장을 해주어야 그들의 부정 부패를 근절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실 당시 관청의 실상을 살펴보면 군국기무를 담당하던 비변사는 유명무실해졌고 국가의 최고 의결 기관인 의정부도 본연의 기능을 상실하여 원로원이 되고 말았다. 또 간언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사간원도 정치적 문제에만 매달려 백성의 고통이나 요구는 전혀 돌아보지 못하였고, 허다한 겸직 체제 때문에 관리들의 책임 한계가 모호해져서 직책을 나누어 놓은 의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더구나 관리가 너무 자주 바뀌어 실무가 완전히 이서에게만 맡겨져 그들의 농간과 협잡의 작태가 극심하여 시급한 개혁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세 번째로 재정의 우실 요소를 강력히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환관과 궁녀의 수를 줄여서 임금부터 절약을 솔선수범하여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임금이 없어도 백성은 살아갈 수 있지만,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백성의 은혜가 임금의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어찌 임금만을 위하여 억조의 힘을 낭비하고 물자를 부족하게 만들어 은혜가 고루 돌아가지 않게 할 것인가?" 참으로 왕조시대 사람으로, 그것도 지배 계급 소속 일원으로서는 파격적인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나라의 이익이 소수에 의해 독점되어 백성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현실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네 번째로는, 토지 제도의 전면적 개편을 주장했다. 성호는 토지 경제를 기본으로 한 자급 자족 위주의 농업 사회를 전제하였기 때문에 경제 체제 개혁 문제는 토지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재부의 원천인 토지의 소유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어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는 것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규모 토지를 경작하는 일반 백성들의 몰락을 막을 수 있는 방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일정 면적 이내의 정전에 대하여는 팔아서 없애지 못하도록 법으로 강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기득권층과의 마찰을 최대한 줄이고 일반 백성들의 기초 생산 단위가 상실되지 않도록 할 수는 있으나 이미 대토지를 겸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추가 획득의 기회만을 봉쇄하는 것에 불과하고 토지를 모두 상실한 백성들에게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다섯 번째로,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조세 감면과 화폐유통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먼저 지나치게 많은 잡세부터 모두 없애고 오직 10분의 1세의 원칙을 준수하여 백성의 최저 생활을 보장해 주는 선정을 베풀어야 한다고 했다. 또 간상배들의 협잡과 모리에만 기여하고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고통의 도구로만 통용되는 화폐의 유통을 중지하고 상행위의 발호를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시대 발전에 역행하는 발상 같아 보이지만 당시 일부 부유층이 청나라로부터 사치품을 사들이는 데 국내 은화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사치 풍조를 조장하는 것은 물론 국가 재산을 국외로 유출시키는 폐단이 있었다. 또 그가 판단한 현실은 화폐 유통의 악순환으로 농촌은 더욱 피폐해져가고 있었으므로 차라리 화폐 사용을 막고 상업 활동을 억제하여 농촌이 자급 자족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섯 번째로는 편재되어 있는 사유노비의 수를 제한하고 노비 매매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먼저 노비 제도의 모순에 대하여 "조선의 노비법은 천하고금에도 없는 것으로 한번 노비가 되면 백세를 고통받아야 한다"고 갈파하였다. 그래서 한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노비의 수를 제한하고 그 한도를 넘는 인원은 해방하여 양민으로 만들면서 5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노비적에 올리지 못하도록 하여 점진적으로 노비 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상정하였다.
4가지 경제 회생 방안
성호에게 있어서 재의 근본은 농업 생산물에 있었다. 그것은 타 산업 분야가 억제된 농업 위주의 경제 질서 속에서 살았던 조선 중기의 인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 것이다. 그는 농산물에 대한 생산을 장려하고 앞서 거론한 것과 같은 자신의 이념들을 실천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4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첫째는 생중으로 무위 도식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고 모든 사람을 생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조선에는 일하지 않고 사는 무리가 지나치게 많다. 벼슬이나 학식이 없는 자라도 양반이라 하면 아무리 가난해도 일하려 하지 않는다. 이를 고치려면 양반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 이를 멸시하고 교류도 하지 않으려 하는 의식부터 없애야 한다. 따라서 관직을 엄격히 제한하고 노비 제도를 고쳐서 누구든지 농업 생산에 종사하게 해야 한다." 둘째는 식과로서 관리의 수를 줄이고 생산 노동력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하여도 그의 직접적인 언급을 살펴보자. "조선은 토지가 좁고 생산량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관리의 수는 중국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방만하다. 마땅히 기구와 인원을 줄여서 경비를 절약해야 한다." 셋째는 위질로 농번기에 부역을 시키지 말고 농민의 생활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민생 안정의 가장 큰 걸림돌로 관청의 강제 노역 동원을 지적하고 이의 억제를 강조했다. "백성들의 자력 갱생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생산에만 몰두하게 하고 나라에서는 도적을 방지하여 벽지의 미개간지도 안심하고 개간하도록 장려하면 10년 안에 전국의 황무지가 비옥한 경작지로 변할 것이다." 넷째는 용서로서 근검,절약하는 사회 정신을 진작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검소한 생활 자세가 정착되어야 나라의 근본이 확립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치를 즐기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사치를 방치하면 아무리 힘써 생산하여도 소용이 없다. 또 지금 사용하는 화폐는 사치를 조장할 뿐이며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풍속을 해친다. 그런데 지금 중국으로부터 진기한 물건과 호화스러운 비단을 사들여서 상하간에 사치가 성행하니 이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상업에 눈이 멀면 농민은 농구와 토지를 버리고 장사꾼으로 나서려 할 터이니 이를 절대 억제해야 한다." 이상은 30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 내세운 주장이지만 지금의 세상에도 일견 타당한 내용이 적지 않으며, 근검 절약과 적극적인 근로 자세를 강조한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귀감으로 삼아야 할 정신이라고 하겠다.
외국 문물에 대한 이해
평생을 성호장에서 칩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던 성호의 식견은 넓고 깊었다. 성리학은 물론이고 천문과 지리, 민속에서부터 의술에 이르기까지 실로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중국을 통하여 유입된 서양 학술이나 천주교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다. 명말 청초 중국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적지 않게 들어와 활동하면서 서양 문물과 기독교 사상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시 서양 학문 중에서 조선 학자들이 가장 관심을 두었던 분야가 천문과 역법에 관한 것이었다. 성호도 이마누엘 디아즈의 '천문략'을 통해서 천문 지식을 습득하고 아담샬의 '시헌력'을 통하여 역법을 익혔다. 또 지리에 관하여는 마테오 리치의 '만국전도, 휄비스트의 '곤여도설', 우르시스의 '간평의설', 쥬리오 아레니의 '직방외기'등을 읽고 그 식견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학자적 호기심으로 서양의학, 심리학, 기하학, 교육학 등 모든 분야의 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하고 그 진보적인 과학 기술을 적극 수용하면서 실사구시 하는 실학의 기초를 열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은 받아들이면서도 천주교의 정신은 황망한 것이라고 하며 배척하였다. 그는 '천주실의 발'을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천주교를 받드는 것은 마치 유가에서 상제를 받드는 것과 같고, 불가에서 석가를 섬기고 믿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러면서 천주의 자비에 대한 설이 진실이라면 어찌하여 온 세상이 모두 평화롭지 않으며 천주의 기적들이 동양에서는 왜 나타나지 않느냐면서 한갖 허황한 설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성호로서는 당시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그러한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일본에 대하여도 남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일본을 다루는 근본 정책은 회유와 교린책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원조하고 사절의 왕래를 정례화하여 시문을 숭상하게 한다면 관계가 원만해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또 천황은 명목상의 일본 대표 인물이고 실권은 막부의 관백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 정확하게 대처하되 조선은 국왕이 국가 통치권자인데 일본은 상징적으로라도 천황이 존재하므로 의전상 격차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한 이러한 지적은 조선 말기에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었으니 그 의 통찰력은 가히 세기를 앞서갔다. 실제 일본 사신을 동래까지밖에 오지 못하게 했던 관례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내에서 정한론이 대두되는 발단이 되기도 하였으며 국왕의 호칭 문제도 대당한 대일 외교에 장해가 된 것이 사실이다.
실학의 비조로서의 역할
성호는 이념적 기반은 성리학에 있으면서도 반계에서 봉우리가 영글어진 실사구시 정신을 계승하여 조선 후반기의 중요한 사상적 경향이었던 실학의 물꼬를 튼 인물이다. 그는 '사칠론'이란 현실에 긴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실제 인간의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은 가치가 없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래서 그때까지 관념론적 사조에만 빠져 있는 성리학의 폐단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 영락되고 퇴색해 가던 조선 후기 사회에 그나마 한 줄기 횃불이라도 밝히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이념은 당대에는 실제 사회 구조 개혁에서 전혀 실천되지 못했다. 그가 정치 현장에 나오지 않고 평생을 칩거하면서 학문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이 익혀왔던 학문을 한번도 현실에서 실천해 보지 못하고 뜻만 품은 채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일문의 자제들과 문도 들에 의하여 면면히 계승되었다. 직계에서 살펴보아도 많은 준재를 찾아볼 수 있는데 손꼽을 수 있는 인물들로는 아들 맹휴, 조카 병휴, 용후, 손자 구환과 종손으로 삼환, 가환, 중환 등이 있었다. 문도로서는 윤동구, 안정복, 신후담, 권철신 등이 있었으며 모두 당대에 대학자가 되었던 인물들이며, 그 흐름은 다산에게까지 이어져서 실학의 일대 금자탑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과 진면목이 그대로 집약되어 후학들의 길잡이가 되었던 '성호사설'은 그가 40여 년 동안 배우고 느낀 점을 적은 것으로 족자들이 정리했다가 순암 안정복이 간정해 낸 것이다. 사설이란 본래 여러 가지 내용을 세세하게 기술한 것이라는 뜻인데 성호 자신이 겸사의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그 외에도 직접 저술한 작품들을 통하여 그의 해박하고도 깊고 넓은 학문적 면모를 보여주었는데, 정치 이념을 피력한 '곽우록'을 비롯하여 '도동록', '사칠신편', '예설', '이자수어' 등 허다한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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