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겨레의 영원한 스승 - 이이 (2/2)
일가동거와 교육을 위한 해주 생활
사직한 이듬해(선조 10년) 정월에 우선 일가가 모여 살림할 수 있는 집이 완성되자, 어려서부터 꿈꾸어 왔던 일가동거의 계획을 실현하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7년 전에 죽은 맏형 선의 유가족을 데리고 와서 형수 곽씨로 하여금 집안 살림을 주관케 하고는 직계 형제 중심으로 모여 살았는데, 점점 가까운 친척 중에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나 극도로 빈한하여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나중에는 100여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되었다. 율곡은 동거계사라는 가족 사이에 지켜야 할 준칙을 만들어 이 많은 가족들을 무리 없이 잘 이끌었다. 율곡에게는 서인 출신 계모가 있었는데 변덕스럽고 성깔이 사나워서 평소에도 율곡 형제들에게 많은 시달림을 주었고, 홀로 된 후부터는 심사가 괴로워서인지 새벽에 꼭 해장술을 즐겼다. 이런 계모에게도 율곡은 아침 문안을 드린 후에 손수 술 주전자를 데워 두어 잔 부어 드리고 물러나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남 대하듯 하지 않고 부모에 대한 도리로 지성껏 모시자 계모도 마음을 바꾸어 온순한 태도를 가지게 되었고, 후에 율곡이 먼저 죽자 정성껏 보살펴준 고마움에 보답할 길이 없다 하여 소복으로 3년을 지냈다고 한다. 맏형수 곽씨도 율곡보다 한 살 아래지만 항상 웃어른으로 공경하였고 둘째 형 번에게도 예의를 다해 섬겼다. 번은 세상사 체면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동생의 지위가 높아진 뒤에도 주위에 사람이 있건 말건 율곡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곤 하였다. 율곡은 추호도 언짢은 기색 없이 형의 시중을 들었는데 이를 지켜본 제자들이 민망하여 말리면, "부형 앞에서 지위가 무슨 상관이며 그 분부를 어찌 다른 사람에게 대신하게 할 수 있겠는가? 무릇 부형 앞세는 지나친 공손이란 없는 것이며 형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예를 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하고 반문하였다 한다. 이 둘째 형은 동생이 큰 인물이 될 사람인 줄을 미리 알았는지 율곡이 밖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어떤 글을 지었는가를 꼭 물어서 그것을 손수 적어 놓아 오늘날까지 율곡의 작품이 많이 전해질 수 있게 하였다.
어쨌든 율곡부터 이렇게 솔선 수범하니 집안은 법도가 확실히 서고 항상 화평하였지만 대가족이 모여 살다 보니 먹고사는 문제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입이라고 해야 31살 때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파주의 땅에서 나는 소출이 전부였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대가족의 생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 시절 율곡은 호구지책으로 대장간을 차리고 농기구를 만들어 팔아서 생계비를 충당했는데, 이런 모습에 대해 훗날 이항복은 자신의 문집에서 "성인은 참으로 매사에 구애를 받지않는다"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렇게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게 된 친구 최립이 재령 군수로 있으면서 양식을 보내왔지만 율곡은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주위에서 그 이유를 묻자, "옛 친구의 사사로운 물건이라면 안 받을 리 없겠지만 관곡을 헐어 보낸 것 같아 받을 수가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율곡은 어려운 처지이면서도 그렇게 항상 엄중하게 처신하였고 아무리 힘들어도 함께 굶을 망정 같이 살던 식구를 절대 내보내지 않았다.
그가 일가에 대해 베푸는 마음은 지극하기 이를 데 없어 먼 친척에 대하여도 늘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려고 했다. 또한 이웃이나 비복들에게도 항상 예로서 대하였으며, 경조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우애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가동거에 대한 꿈은 7살 때 이륜행실을 읽게 된 후부터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 책에서 당나라 시절 장공예가 9세대가 동거하며 살았는데, 당시 황제가 그 비결을 묻자 참을 인자를 100개를 써서 바쳤다는 내용을 읽고 감명을 받아 그때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또 교육홀동을 하면서 격몽요결을 지어서 교습하였고, 향약과 사창을 세워 주민들의 교화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43살 되던 해(선조 11년)에는 은병정사를 세워 이곳을 통해 학문을 가르치면서 많은 인재를 육성해 냈다. 율곡은 강론을 할 때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준으로 설명하였으며, 내용에 대한 분석을 철저히 하였다. 질문이 있으면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답을 주었는데 명쾌하면서도 이치에 틀림이 없었다. 암기보다는 스스로 사색하고 깨우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학문은 일상에 있다는 그의 지론대로 어느 자리에서나 항상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였다. 소학을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 할 교과목으로 권장하였으며, 이의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소학집주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41살 2월에 은퇴하여 45살 12월에 대사간으로 다시 출사하기까지 5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일가동거의 꿈을 실천하면서 교육과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활동에 주력하며 생활하였다. 그 동안 은퇴해 있던 시기에도 몇 차례 출사의 요청이 있었지만 모두 사양하면서 상소를 올려 동서붕당의 문제점과 이의 타파를 간청했다. 그러나 당파를 없애고 조정을 화해시키려던 율곡의 상소는 도리어 당시의 권력자들에게는 비난만 받았고 왕도 그의 진정을 알아주지 않았다. 45살 되던 해 5월에는 기자실기를 지었는데, 이는 윤두수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사람들이 조선으로 온 기자의 사저을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서 율곡은 "이 땅에 기자가 들어와 오랑캐를 면하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모화주의적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율곡으로서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주자의 출생지가 중국이기 때문에 그의 이런 태도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기보다 학문의 연원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은병정사는 율곡이 다시 관직에 나갔을 때에도 폐쇄하지 않고 제자들에 의해 자체적으로 운영되었으며, 율곡도 비록 정사에 바빴으나 제자들에게 서신으로나마 계속적인 지도를 하였다.
마지막 관직 봉사
율곡은 선조 13년(1580년) 12월에 45살의 나이로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6월에 대사헌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예문관 제학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호조판서로 잠시 있다가 11월에는 대제학으로 전임되었으며, 다음해(47살)정월에 이조판서를 겸임하면서 많은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에 율곡이 길을 열어준 인물 중에 훗날 영의정이 되는 이덕형과 이항복도 있었다. 이조판서 재직시에는 왕명에 의하여 인심도심설, 김시습전, 학교모범을 짓기도 하였다. 8월에는 형조판서로 전보되었다가 그 후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우찬성까지 승진되면서 왕의 은혜에 보답하고 치도에 도움이 되고자 진시폐소라는 상소를 올렸다. 거기에서 그는 현실 문제를 먼저 지적하였는데, 첫째 풍속이 타락하였고, 둘째 관리가 개인의 이익에만 신경을 쓰며, 셋째 조정이 분열하여 기강이 헤이해졌고, 넷째 백성들은 폐단에 시달려 점점 곤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의 해결을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강조하고 세 가지 폐단을 고칠 것을 건의하였다. 즉 공안을 개정하고 아전 수를 줄이며 지방관을 자주 바꾸지 말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당시 조정과 왕은 적극적으로 실천할 의지가 없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10월에는 명나라 사신을 맞는 원접사로 활동하였는데, 율곡에게 감명받은 명나라 사신들이 돌아가서는 자신들의 조정에 요청하여 조선 사신들의 대접을 더욱 융숭하게 하도록 조치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원접사의 소임을 마치고 그 해 12월에 병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2월에는 국방 대책을 위한 6조계를 올리고 그 유명한 10만 양병론을 주장하여 외침에 대비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붕당에 휩싸인 당시 조정에서는 이러한 그의 혜안을 이해하고 찬동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류성룡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중신들도 태평 시에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공연히 민심을 불안하게 하여 활르 부르는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율곡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10년도 되지 않은 선조 25년(1592년)에 왜군이 침략하여 전 국토가 토붕의 화를 당했으니 그의 선견이 실행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국방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서얼 출신과 공사의 노비 중 원하는 자를 북방 수비 병력으로 차출하여 서얼은 관직을 허용하고 노비는 속량하는 방안으로 병력 증강을 도모하였으며, 상번군사를 면하는 조건으로 바치는 속포를 병조의 관리들이 사적으로 나누어 쓰던 것을 북방 병력 군수품으로 전용하게 조치한 것 등이 있다. 또 병사들의 양곡이 부족하자 서얼들이 곡식을 납입하고 관직에 나갈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신분제도의 폐습을 개선하고 군량도 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수 1만여 명을 뽑으면서 3등 이하의 사수에게는 말을 바치고 군역의 임무를 면제해주어 부족한 전마를 충당하였으며, 관리들의 녹봉에서 각출하여 북방 파견 군사들의 가족을 도와주어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율곡의 정치 철학은 먼저 조정에서 처신을 올바르게 하여 백성들의 사표가 되어야 하고, 치도의 폐단이 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그의 원칙적 태도는 무사 안일한 자세가 팽배하였던 당시의 조정에서는 적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동, 서의 대립이 여전한 세파에서 그가 서있을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율곡에 대해 시기하고 미워하던 무리들이 그를 조정에서 몰아낼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왕의 호출에 격무와 지병으로 인한 현기증 때문에 즉시 응하지 못하자 3사에서 탄핵이 일어났다. 이 기회에 반대파들은 율곡을 완전히 실각시키려고 집요하게 공격하여 결국에는 그 해 6월에 사임을 하고 파주로 내려갔다가 8월에는 해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을 신임하여 그를 비난하던 무리들을 징벌하고, 9월에 판돈령 부사로 다시 부른 후 10월에는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그렇지만 이때 율곡의 병은 깊어져 49살이 되던 이듬해(선조 17년) 정월부터는 완전히 병석에 눕게 되었다. 율곡은 병석에서도 항상 나라 일을 걱정하였는데 죽기 하루 전에도 서익이 북방을 순찰하는 임무를 받아 떠난다고 하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육조방략을 만들어 준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깨어나서는 손발톱을 자르고 목욕을 하여 단정한 모습으로 한성대사동에서 숨을 거두었다. 49살의 한창 나이에 운명하여 무슨 한이 그토록 깊었던지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율곡이 죽기 하루 전날 부인 노씨가 흑룡이 침실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는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에도 가장 가까운 사람의 꿈에 용이 나타나는 기이한 인연을 가졌던 셈이다.
그는 사후에 남긴 유산이 없어 염습에 쓸 수의도 친구들이 추렴하여 준비하였으며, 그가 한성에서 지낼 때는 집을 세내어 지냈기 때문에 유가족들이 거처할 곳이 없자 친구와 제자들이 염출하여 집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장지는 선영이 있는 파주 자운산으로 정해졌으며, 발인하던 날에는 일반 백성들까지 슬피 애도하며 마지막 길을 가는 그를 전송하기 위해 길을 가득 메웠다. 사후에 소현서원(은병정사)과 묘소 근처 자운서원에서 제사를 모셨으며 현재까지 겨레의 영원한 스승으로 민족의 가슴에 남아 있다.
이이의 사상과 성품
먼저 율곡의 사상적 기저를 살펴보자. 모든 현상은 기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고, 기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는 근거가 이라는 것이 율곡 사상의 출발이다. 즉 이가 아니면 기는 근거할 곳이 없고, 기가 아니면 이는 의착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는 이통기국이라는 표현으로 양자 관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이는 어디서나 통하는 무소불통한 것이고 기는 형태나 자취를 가진 국한된 상태의 것으로서, 만물의 본연이요 변할 수 없는 이가 본말과 선후가 있는 기에 의하여 형상화되는 연고로 모든 현상계가 천태만상으로 구별되어 나타난다고 설명하였다. 이는 공기와 물 같은 것이고, 기는 그릇 같은 것으로서 공기와 물은 그것을 담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천변만화로 구획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이도 변화하지 않는 본연의 것이기는 하지만 성질이 국한되는 기의 존재 때문에 표출될 때는 서로 다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는 형이상이요 무위한 것이고, 기는 형이하의 것이고 유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는 기를 주재하면서 기를 타고 이가 나타난다고 보았다. 즉 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이고, 이는 그것을 탄다고 하는 기발이승도설을 주장하였다. 또 기청명어리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의 명령에 대한 기의 청종 여부에 따라 현상의 질적 차이를 설명한다. 기가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을 주리라 하고, 기가 본연이 아니어서 이의 명령을 듣지 않는 상태를 주기라고 하여 전자를 지선으로 보았다. 율곡은 이가 만물의 본연이므로 물론 중요하지만 기에 의하여 국한되고 차별되므로 기의 탁마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개별적인 규범인 소당연만 알고 만물의 근본 원리인 소이연을 깨닫지 못하면 참된 도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여 당시의 교조적 견해를 반대하고 학문의 참된 이치를 탐구하는 자주적인 학풍을 세웠다. 따라서 그는 화담이나 퇴계처럼 재야에 머물러 학문 연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정학일체의 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현실 정치에서의 실천을 추구하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경세제민의 경륜을 실천하는 것이 배운 자의 임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으로 율곡의 성품을 알아보자.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그는 효성과 동기간의 우애가 깊고 인정이 많은 인물이었다. 성격도 담백하여 언행의 표리가 항상 일치하였고 심성이 맑고 깨끗하여 일찍이 타인과 밀담을 하거나 소곤거리는 법이 없었다. 광풍제월 같고 청통쇄락하다는 말은 율곡의 인물됨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다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분석적 사고 때문에 모든 사람을 샅샅이 들어 평하기를 좋아했다. 또대담하고 침착한 일면도 있었다. 젊어서 친구인 성혼과 화석정 아래 강에서 배를 타고 유람할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배가 크게 요동쳐 성혼이 걱정하자 율곡은 "우리 같은 사람이 탔는데 무슨 염려가 있겠는가?"하고 태연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 대하여 강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철저히 피해갔으나 편벽되지 않은 자세로 융통 자재하는 성품을 가졌다. 이를 알 수 있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그 하나는 그의 정갈한 이성관을 증명해 주는 내용이다.
황해도 관찰사 시절에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유지라는 아이가 평소에 율곡을 흠모하다가 율곡이 떠난 후 숙성하여 관기가 되었는데 율곡이 원접사나 황주에 있는 손위 누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 해주를 들렸을 때 율곡을 찾아와 연모의 정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 방에서 병풍으로 경계를 짓고 촛불을 밝혀둔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그리고 유지의 애끓는 마음에 혹여 상처라도 될까봐 다음과 같은 위로의 글을 전해주었다.
문을 닫자 하니 인정을 상할 것이요, 같이 자자 하니 의리를 해칠 것이다.
이렇게 남녀 문제에 깨끗하게 처신한 율곡이었지만 지나치게 결벽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 친구인 정철이 득남하여 축하잔치를 벌이는 자리에 기생까지 동원하자 고지식한 성혼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며 나무랐지만, 율곡은 웃으면서 "검은 먹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 것이 도인 것이다."라고 설득하여 잔치의 흥을 깨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율곡은 곧으면서도 유하고 강하면서도 유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웠으며 평생을 자기가 생각한 바를 솔선 수범하며 주변 사람들을 가르친 실천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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