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진정한 공직자의 사표 황희 (3/3)
민씨 형제 제거에 앞장 설 때는 그들의 득세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지 왕의 의사에 영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세자 폐출에 반대한 것은 아무리 왕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문제를 파생시킬 여지가 있는 사안에는 진중해야 된다는 그의 사리 분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위의 두 사건을 대비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황희의 곧고 바른 자세로 이미 주요 관직 생활을 통하여 그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소간 거리감을 느끼던 사대부들도 그를 완전히 인정하게 되었다. 황희에 대한 이러한 조야의 인정은 훗날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을 세우려고 할 때, 모든 대소 신료들과 유학자들이 동맹 파업까지 하려 하자, 오로지 황희만이 그들 모두를 설득해 낼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조선은 원래 척불숭유 정책을 통치이념으로 출발한 국가이지만, 왕실에서는 태조 이래 불교를 신앙으로 섬겨왔는 데다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도 불가에 귀의한 몸이었고, 세종 또한 불심이 깊어 대궐 안에 왕실 가족들을 위한 불당을 신축하고자 한 것인데, 모든 신하와 재야 학자까지 벌떼같이 일어나 반대를 한 것이다.
성군으로 이름난 세종도 모든 신하들이 반대하자 고립무원 처지에서 낙심 천만이었는데, 이때 황희만이 왕의 입장을 이해하여 자신도 유학자이지만 반대하는 신하들을 오히려 설득하기로 하였다. 왕이 국가정책 자체를 바꾸려는 것이 아니고, 어찌 보면 자기 가족 내의 믿음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왕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고 용인해 주자는 논리였다. 대체에는 밝고 소리에는 무신경한 황희의 성품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으로서 왕이 국가 기본의 대강을 훼손시킬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팔뚝을 걷어붙이고 중재에 나선 것이다. 여기서도 세종과 황희의, 군신간에 쌓인 굳은 믿음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사실 타인에 대한 황희의 배려는 이미 기술한 대로 그의 일생을 통한 삶의 기조였다. 태종 때 맹사성 등이 역모사건의 취조 중에 왕의 사위를 사전 허락 없이 문초한 사건 때문에 죽을 고비에 이르자 이를 구해준 사람도 황희였으며 그 뒤 사헌부에 죄지은 자를 가벼이 다루라는 청을 하여 탄핵을 받기도 한 것은 그의 성정상 그러한 일면 때문이었다.
이러한 많은 일화를 통하여 황희는 참으로 인간을 깊게 이해하고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품성의 인물이었으며, 공무와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사소한 일과 타인에게는 너그러운 공직자의 표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삶에 궤적 때문에 두문동에서 고려에 대한 충절을 꺾고 조선에 출사한 것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결코 미화된 사실만이 아니라는 것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즉, 황희가 두문동을 나온 것은 그의 뜻이라기보다, 두문동 열사 72인이 합의하기를 자신들은 고려에 충절을 지키되 젊고 굳은 인재 한 명은 조선 조정에 내보내 백성을 돌보게 하자고 의견을 모았는데, 이때 지목된 사람이 그였다. 그는 선비의 도리를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으나, 결국에는 동지들의 참뜻을 이해하고 선비로서 훼절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용단을 내렸던 것이다.
청빈의 대명사
황희는 50년 이상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도 청빈한 삶을 산 것으로 더욱더 유명하다. 그의 물욕 없음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일화를 살펴보자.
영의정 시절 세종이 미복 차림으로 사전 연락 없이 황희의 집을 찾았다. 그때 마침 황희는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예고 없는 왕의 방문에 허겁지겁 상을 안쪽으로 물리고 왕을 맞았다. 세종은 황희의 집을 들어서면서 정승의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초라함에 이미 놀랐었는데, 방에 들어서서 보니 방바닥은 장판도 없이 멍석이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먹다 치워놓은 밥상에는 누런 보리밥에 반찬이라고는 된장에 풋고추 너덧 개만이 놓여 있었다. 세종은 민망스러워 하는 황희를 보고는, "경은 등이 가려우면 시원하게 긁기는 좋겠소. 자리에 누어 비비기만 해도 될 테니까" 하는 농을 하고 돌아갔다. 이때 실상은 영의정의 가세가 빈한하여 막내딸을 시집 보낼 혼숫감을 장만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세종이 믿어지지 않아 확인차 출행한 것이었다.
다음날 세종은 혼숫감을 공주의 수준에 준하여 황희의 집으로 손수 보내줬다고 하며, 이후로도 곤궁하여 결혼 준비가 어려운 관리들에게 왕이 혼수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황희의 청빈한 삶의 자세를 알 수 있는 일 중에 이런 것도 있다. 언젠가 그의 아들 황치신이 집을 새로 짓고 집들이를 하게 되었다. 황희도 잠시 들렀으나, 집에 들어갔다가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돌아가 버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치신은 아버지가 자기를 나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백배 용서를 구한 후 집을 분수에 맞게 새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사실 황치신은 그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재물을 탐하였지만, 황희의 생전에는 그 아버지의 엄중함 때문에 근신하며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황희가 청백리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처럼 빈한하게 살았다는 것이 과연 사실일까?
조선은 과전법의 실시를 통하여 관리들의 경제적 기반을 조성해 주었고, 직책에 따른 녹봉도 추가 지급되었으므로, 고위 관리였던 그가 경제적으로 곤궁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측면이 있다. 더구나 황희는 태종대 이후로 주요 관직을 역임해 왔고, 영의정으로 18년 동안 장수하는 등 정승의 반열에서만 20년 넘게 봉직하였다. 조선조 초기에는 별다른 산업 발달 없이 농업 위주였으므로, 토지에 대한 권한이 경제적 능력을 좌우하였고, 이 권한 자체도 관직의 위치에 따라 부여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관직에 있는 자가 경제적으로도 우월하던 시대였다. 즉, 부의 척도가 관직의 여부와 직접 연관되던 사회였다. 유직자냐 무직자냐의 차이와 관직이 높으냐 낮으냐에 따라 경제적 능력도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대표적 고위 관리였던 황희가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황희가 청빈을 넘어 곤궁하였다는 것이 알려진 대로 사실일까? 그러나, 그 답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청렴하게 산 것만은 사실이지만 여러 일화에서 보듯이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었고, 직위에 따른 과전도 지급받았기 때문에 결코 가난으로 고통스러울 수는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많은 일화들은 황희가 원체 물욕이 없었던 인물이었고, 고위 공직에 장기간 머물렀음에도 청빈한 사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후대에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미화된 측면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가 민본의 정치가로서 스스로 자신의 과전에서 수조권을 제한하고, 수입의 대부분을 민생의 구휼을 위하여 사용하였다면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경작지를 소유하지 못한 유민들에게 둔전을 개간하여 정착시키려는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식량을 절약하기 위하여 개를 키우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시대와 부합하던 행복한 인물
황희는 조선 개국 초 4대에 걸친 왕에게 봉직했지만, 그의 역량을 최고로 꽃피운 것은 세종대였다. 세종대는 개국에 공이 있는 인물은 거의 죽었기 때문에 일방 독주의 가능성이 있는 권신이 없었고, 태종이 워낙 왕권을 강화시켜 놓아서 정국이 안정되어 있었다. 세종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집현전을 통해 자신과 뜻이 맞는 신진 관료들을 양성하고 관직에 등용시켜서 국가 경영의 근본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인재들을 통제하고 이끌어갈 인물이 필요했는데, 그 적임자가 황희였다. 황희는 이미 태종대에 6조의 판서를 역임하여 그 경륜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고, 그의 반듯하고 당당한 태도 또한 뭇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세종대는 안정된 정국, 탁월한 군왕, 능력과 인망있는 재상이라는 3위 일체의 조화를 통하여 사회, 문화적으로 최고의 융성기를 구가하게 된 것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태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개국 이후 고려조의 도평의사사 후신인 의정부에서 국사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던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를 도입하여 왕이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는 체제로 바꾸었다. 즉, 오늘날 내각격인 6조가 단순한 정책 실행기관에서 정책 결정 기능까지 담당하고 모든 정무를 6조에서 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6조 기능 강화는 결국 공신 계열의 재상권을 약화시키고, 국왕 중심의 권력 집중적 정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은 개국 후 국가 운영체계의 대강을 설계할 때 최고 합의 기관인 의정부에서 모든 정무를 처결하고, 6조에서는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경국대전에 제정하여 두었으나, 이후로도 실제 운영 실태는 왕권의 강약과 연결되어 당시 권력의 역학 관계에 따라서 시기마다 차이가 많았다. 아무튼 태종의 왕권 강화 의지로 인하여 왕이 6조를 직할하고 정무를 총괄할 수는 있었으나, 모든 국사에 왕이 관여하여야 했기 때문에 업무량의 과증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세종은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고 당뇨의 증세까지 있어 과도한 업무 집중은 건강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부득이 세종 19년(1437년)에 의정부 서사제로 환원하였고, 황희는 이 시기에 영의정으로 직무하고 있었다. 사실 이 시기에는 국가 기관의 각 기능도 전문화되고 정국도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왕이 세세한 국사에 모두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황희를 비롯하여 맹사성, 유관 같은 훌륭한 재상들이 정사를 잘 이끌어 가고 있었고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서 각 분야의 기본 토대도 튼튼한 상태였다. 이렇게 황희는 안정된 국정 상황 아래 치국의 근본을 아는 국왕과 동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행복한 공직자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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