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 이원용
청각 장애를 극복한 작곡가 베토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 1770~1827)
독일의 작곡가로 본에서 태어났다. 궁정 가수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이어 네페(C. G. Neefe)에게 사사해 정식으로 작곡을 배웠다. 12세 때 극장 관현악단의 피아노 연주자가 되어 대주교 등에게 인정을 받았다. 1792년에 하이든의 제자가 되었으며, 1795년부터 연주가로서의 명성을 얻어 여러 귀족으로부터 장려금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즉흥 연주의 명소로서 인정을 받아 촉망받는 음악가가 되었으나 이 무렵부터 청력이 점차 약해져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이랄 수 있는 장애를 극복하고 모차르트와 하이든 등이 세운 독일 고전 음악의 형식을 자유로이 구사해 음악을 단순한 취미로부터 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시적 표현의 그릇으로 끌어올려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 주요 작품으로 "영웅 교향곡", "운명 교향곡", "전원 교향곡" 외 다수가 있다.
새벽에 일어나 피아노 연습
눈부신 햇살이 라인 강 근처에 위치한 본 시의 거리와 즐비한 지붕을 비추고 있었다. 그 햇살은 베토벤 일가가 살고 있는 강가의 허름한 2층집에도 비치고 있었다. 당시 9세였던 베토벤은 그날따라 새벽녘에 자리에서 뛰쳐나와 잠옷차림 그대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어제 저녁 퍼뜩 머리에 떠오른 짧은 멜로디가 언제까지고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그 곡을 피아노로 쳐 보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조심조심해 가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고 해서다. 한편 어머니는 부엌에서 두 동생의 아침 식사를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그리하여 베토벤도 달가닥거리는 식기 소리를 등을 수 있었다. 베토벤은 자기가 지은 짧은 곡이 무척 마음에 들어, 이를 바탕으로 멋진 곡으로 발전시켜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이렇듯 자기가 좋아하는 곡에 대해서는 잠자다 말고 뛰어 일어나 곡을 쳐 보는 그 였던 것이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늘 그렇게 연습하곤 했다. 그의 피아노 선생은 그런 곡을 가리켜 '곡예'또는 '즉흥 연주'라 이름 붙였다. "너는 나이에 비해 놀랄 만큼 즉흥 연주를 잘해" 하고 선생은 그를 칭찬했다. 베토벤은 어느새 아버지가 아직도 자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자기가 치는 곡에 열중해 있었다. 그리하여 마치 공을 힘차게 쳐올리듯이 양손으로 피아노의 건반을 힘껏 내리쳤다. 그 곡은 아름다운 무늬를 수놓으면서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피아노 소리는 더욱더 높아지고 커졌다. 몇 개의 음이 서로 부딪치며 울리는가 싶으면 이내 잔잔해졌다가는 다시 강렬해졌다.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되풀이되곤 했다.
이때 정신없이 피아노를 치고 있던 베토벤의 귀에 벼락치듯 하는 고함소리가 울렸다. 바로 그의 옆에 아버지가 서서 호통을 치고 있었다. "도대체 너는 몇 번이나 불러야 대답을 할거냐!" "듣지를 못했어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하고 베토벤이 그 때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내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도 못 들었단 말이냐?" "예,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아까부터 치는 그 넋두리 같은 곡은 뭐냐?" 하고 부친이 계속 화가 나서 물었다. "피아노 선생이 그따위 엉터리 곡을 네게 가르치지는 않았을 텐데." 부친은 계속 다그치며 호통을 쳤다. "연습하라는 곡은 치지도 않고 그런 식으로 시간만 낭비한단 말이냐? 이놈아 모차르트가 몇 살 때부터 유럽 연주 여행을 다녔는지 너도 알고 있잖니!" "예, 여섯 살인가 그보다 조금 더 이를 때인 것 같습니다." "그것을 분명히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너는 이미 아홉 살이 되었어. 그런 나이에도 아직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을 하나도 이룩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다." "...." "이제 앞으로 1년만 더 지나면 음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학교도 그만 다니게 할 참이다. 그때까지 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소리를 남겨 놓고는 발소리도 거칠게 다시 침실로 돌아갔다. 베토벤은 말없이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부엌에서 일하던 어머니가 그러한 베토벤을 안쓰러운 눈길로 맞았다. 사실은 지난밤에도 술에 취해 밤늦게 돌아온 부친이 자고 있는 아들을 깨워 한동안 피아노를 치게 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집안의 세 아들 중 맏아들이었다. 깡마르고 작은 키였지만 베토벤은 어른스럽고 침착해 어머니는 마치 어른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늘 술만 마시는 부친의 일로 골치를 앓고 있는 모자는 아버지의 일과 집안의 장래에 대해서 함께 걱정하곤 했다. 한편 베토벤은 어머니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점차 여위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색 또한 나쁜 데다가 심한 기침 발작을 가끔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언제나처럼 우유를 빵에 적셔 먹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집을 뛰어나가 거리의 광장에 있는 교회의 부속 학교로 달려갔다. 등교 시간에 조금 늦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간신히 등교시간에 대어갈 수 있었다.
선천적인 음악적 재능
베토벤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궁정 악단의 테너 가수였다.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아 겨우 최소한 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매일 같이 마시고 술로 목이 상해, 이제는 거의 재대로 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장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들인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고는 마치 미래의 재산을 발견한 것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토벤이 네 살 때부터 직접 음악 교육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이미 아들에게 날카로운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가혹할 정도로 어린 아들에게 음악 연습을 강요했지만, 베토벤은 피아노를 칠 때만은 조금도 피로한 줄 몰랐다. 그러면서도 연습을 조금만 게을리해도 심한 꾸지람을 듣게 되었으므로, 꾸지람을 듣게 된 후에는 피아노에 엎드려 우는 경우도 흔했다. 이렇듯 가끔씩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음악적인 천분을 어쩔 수 없었던지 그 재능이 날로 발전해 8세 때는 음악회에 참가했으며, 9세때부터는 부친이 가르칠 만한 음악의 영역이 없어지고 말았다. 베토벤은 그 후 할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오르간을 배웠다. 그는 궁정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1781년에 그가 그만두고 그의 후임으로 네페가 임명되자, 베토벤은 비로소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네페 선생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소년 베토벤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번 스승은 다소 보수적이긴 했지만 정말로 음악을 이해하고 있는 데다가 교양도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베토벤의 스승인 동시에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스승의 사람됨됨이가 음악적인 재능보다도 한층 더 깊이 베토벤에게 영향을 주었다. 한편 스승은 베토벤의 음악적인 천재성을 깊이 촉망했다. 바흐의 평균율을 치는 베토벤의 힘차고 동시에 세련된 연주에 감탄하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아직도 어린 나이에 일류급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제2의 모차르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여행을 떠날 때는 11세 소년인 베토벤으로 하여금 자기 대신 오르간을 연주하도록 했다.
교회 오르가니스트란 깊은 음악적 수련이 필요한 직업이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네페가 얼마나 베토벤의 음악적인 재질을 인정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렇지만 이 모두가 베토벤의 지칠 줄 모르는 연습 덕택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시간을 아까워하며 늘상 피아노 앞에 앉아 계속해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그리하여 흥이 나면 자신의 피아노 음에 말려들어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연습을 했다. 1783년 4월, 베토벤은 극장 오케스트라의 쳄발로 주자가 되었다. 이는 극을 연습할 때 반주를 하는 직책으로, 즉 당시에는 오페라 악단을 지휘하는 책임 있는 자리였다. 그해에 베토벤은 세 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인쇄해 선거후인 막시밀리안 프리드리히에게 바쳤다. 이는 아무래도 자기 아들의 천재성을 선전하기 위한 아버지의 지시였을 것이다. 헌정의 시도 아버지가 대필했다. 그는 1784년 프리드리히 선거후가 죽은 후 새로 부임한 M. 프란츠로부터 네페 선생의 제2 오르가니스트로 임명되어 150플로린의 연금을 받게 되었다. 1787년 베토벤은 부활절 행사를 끝낸 오르가니스트로서 휴가를 이용해 빈으로 여행했다. 16세가 된 그는 희망과 자신에 넘쳐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빈에서 요셉 황제를 배알했으며 당시 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했던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인간"
처음에는 기성의 대가가 베토벤 같은 소년의 방문을 받자,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뭐든 좀 쳐 보지 않겠는가?" 라고 베토벤에게 말하면서도 모차르트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 투였다. 어차피 자신이 많이 연습한 곡을 치겠지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나 민감한 소년 베토벤은 이를 알아차려, 뭔가 칠 곡을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모차르트가 곡을 주자, 그는 이를 기반으로 해 풍부한 악상을 담은 즉흥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놀란 모차르트가 친구가 있는 옆방으로 걸어가서 이렇게 속삭였다. "저 아이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어. 머지않아 이 세상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 될 걸세." 음악의 대가로 하여금 이런 평을 하게 할 정도로 베토벤의 연주 솜씨는 그야말로 대단했던 것이다. 동시에 이와 같은 평은 소년 베토벤에 대한 세간의 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내 음악계에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하이든도 그와 같은 소문을 듣는 "베토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군" 하면서 편지를 써 보냈다. 베토벤은 그 후 모차르트에게 작곡에 대해 두세 가지 공부를 했으며 그의 연주법도 익혔다. 베토벤은 피아노 연주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면서도, 이렇듯 피아노의 대가인 모차르트에게 자기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인정하면 즉각 이를 가르쳐 달라고 청해 익히는 성실성을 지니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방면의 천재든 그것을 연습, 즉 공부하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은 물론 주위에서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고 또 공부해 비로소 완성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를 제작하는 데 분주했던 시기였으므로 그 이상의 교섭은 없었다. 빈으로 가는 동안과 빈에 머물러 있었을 때는 찬란했으며 즐거웠던 데 비해 돌아오는 길은 불안과 초조로 인해 허둥대는 여행이었다. 어머니의 위독을 전하는 편지가 왔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지체없이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간신히 어머니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지없이 선량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었으며, 나의 가장 좋은 친구였습니다. 아아! 어머니라 부르고 이에 대답해 줄 사람이 있었을 때, 나 이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무렵 무리를 해서 돌아온 여행의 피로로 인해 천식에 걸렸다. 그는 어머니가 폐를 앓아 죽은 것을 생각하고 자기도 어쩌면 천식에서 폐병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근심하곤 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의 집안은 한층 더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아직도 나이 어린 두 명의 남동생과 알코올 중독이 심해진 아버지가 그의 양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걸려 있었다. 이것이 16세가 된 베토벤에게 부가된 운명이었다. 그 무렵 베토벤은 브로닝 집안에 출입하게 되었다. 그 후에 그가 죽을 때까지 친하게 드나들던 집이었다. 그 집에는 아들 셋과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들 중 딸과 아들 한 명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모친은 궁정 고문관의 미망인으로서 고양이 있는 세련된 부인이었다. 그는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한편으로는 부인으로부터 문학적인 교양을 쌓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13세에 초등 학교를 그만둔 정도의 공부밖에 한 것이 없는 베토벤으로서는 교양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으므로 부인의 지도를 받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집안에서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이 집안 사람들을 음악 연주로 즐겁게 해 주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여러 가지 지식을 익히는 보답을 받았다.
어떻든 베토벤은 당시의 즉흥 연주의 대가인 선배들을 능가하는 연주를 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아직 청년도 되기 전인 베토벤이 힘차고 감정이 풍부하며 표현이 깊은 동시에 매우 독창적인 연주를 한다는 평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는 이 무렵부터 한 가지 버릇이 생겼는데 그것은 작곡을 할 때 엄청나게 많은 스케치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쉽게 발표하지 않는 신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 스케치야말로 작곡에 대한 철두철미한 공부였다. 작곡한 것을 고치고 스케치하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한 예를 들면 실러의 "환희" 같은 작품은 만 30년 동안이나 발표하지 않고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20여 세 때 이미 36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렇다고 베토벤은 작곡을 할 줄 몰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작곡을 해놓고서도 그만큼 신중하여 발표를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의 멋진 즉흥 연주곡이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당시의 그를 천재라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늘 그의 즉흥 연주를 머리 속에 그리면서 그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빈에서 다시 음악 공부
이 무렵 사귀게 된 중요한 인물로 발트슈타인 백작이 있다. 그는 아직 젊은 귀족으로서 베토벤보다 8살 위였다. 그리하여 연장자라는 의미에서 그를 많이 격려해 주었으며 피아노를 사 주는 등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원조를 했다. 그는 백작의 이름을 단 연탄 변주곡을 작곡해 이에 보답했다. 그 밖에도 백작의 암시를 받고 가장 무도곡의 일종인 "기사의 발레"를 작곡했다. 이는 그의 최초의 오케스트라곡이었다. 또한 빈에 나간 후 1805년에는 유명한 "발트슈타인 소나타"를 작곡했다. 1788년에는 선거후의 뜻으로 궁정 악단의 조직이 바뀌어 국민 극장이 만들어졌다. 베토벤은 이번에는 비올라를 맡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아직도 궁정의 차석 오르가니스트 직책을 맡고 있었다. 동시에 둘째 동생에게 음악을 공부시켰으며 셋째 동생은 궁정 약국에 집어넣을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절망 상태였다. 밤낮 없이 술에 취한 끝에 경찰 신세를 지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리하여 베토벤이 곤드레가 된 아버지를 경찰서에서 데려오는 일이 곧잘 있었다. 그는 이를 무척 부끄럽게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789년에는 궁정의 경리 담당자가 동정한 나머지 아버지의 월급을 베토벤에게 건네주도록 조치했다. 아버지가 이를 받게 되면 이내 술값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동안의 일이었으며 마침내 그의 아버지는 테너 가수의 자리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그 아버지도 1792년 12월에 결국 죽고 말았다.
1792년 선거후는 베토벤을 빈으로 보내어 더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리라 결심했다. 이는 하이든과 네페 선생 및 발트슈타인의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드디어 그해 12월에 베토벤은 빈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좋은 지도자였던 네페 선생과 발트슈타인 백작 그리고 브로닝 집안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발트슈타인 백작이 베토벤에게 준 편지 속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열심히 공부해 모차르트의 정신을 하이든의 손에 받아 갖도록 하시오.
11월 중순 그는 음악의 도시 빈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성 바깥의 어떤 인쇄소의 다락방을 빌렸다. 얼마 후 1층에 있는 방으로 옮겨, 그 후 가발을 위시해 구두, 책상 등을 구입했으며 피아노를 갖추었다. 살림살이가 일단 갖추어지자 그는 하이든에게로 다니며 엄격한 대위법을 공부했다. 245개의 과제를 만들었음에도 선생은 고작 42개밖에 고쳐 주지 않자 그는 스승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게 되었다. 고친 것만 해도 매우 형식적이었다. 물론 하이든은 당시 유명한 대음악가로서 조금도 한가할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신분이었다. 게다가 대도시에서 혹은 시골로부터 상경해 오는 이런저런 소천재들에 식상해하고 있었다. 1792년 하이든이 영국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본에 들렀을 때 베토벤이 작곡한 어떤 칸타타를 보고 격찬한 적이 있었다. 이를 생각하고 베토벤은 하이든에게서 알차게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사정이 매우 달랐다. 그리하여 하이든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어, 하이든에게 공부하는 것 외에 몰래 유명한 여러 음악가를 찾아 착실히 공부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알브레히트베르거(Albrechtsbseger)에게서 엄격하게 음악 이론과 기법을 익혔다. 그렇지만 선생은 베토벤을 대단치 않게 여겼다. 가르친 것을 그가 그대로 따르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베토벤은 음악적인 규칙 같은 것을 전연 문제시하지 않았는데 보다 아름다운 곡이 가능하면 어떤 규칙이든 어겨도 상관없다고 확신하는 동시에 선언하는 베토벤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의 여파
1793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드디어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 위에서 처형하면서 그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러 유럽 전체를 떨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있는 빈도 긴장했다. 그해 10월에는 고향인 본으로 프랑스 군이 침입해 선거후가 망명했다. 1796년 4월부터 오스트리아 군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군과 싸워 패전을 거듭했으며 5월에는 밀라노가 점령당했다. 11월에는 오스트리아 군이 3일 동안의 대격전 끝에 크게 패해 총퇴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해 1월에는 조국을 구하려고 하는 오스트리아 군에 의해 빈 시가지가 애국적인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2월에 하이든의 "황제 찬가"가 초연되었으며, 4월에는 베토벤이 "우리들 위대한 독일 민족"을 작곡했다. 그렇지만 3월에는 나폴레옹 군이 빈의 10킬로미터 밖에까지 접근했다. 황제는 한때 망명하려고 했지만 공자의 만류로 머물러 있었으며 8개월 후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런 이유로 베토벤의 학자금은 선거후가 망명한 3월 이래 중단되고 말았다. 그해 1월에 선거후가 빈에 들러 살펴보았지만 험악한 정치 정세로 인해 베토벤을 도와주지 못했다. 이때부터 그의 빈의 시민으로서의 진짜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처음으로 젊은 연주가로서 데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791년 12월에 모차르트가 죽자 그의 영역으로 힘들이지 않고 들어갈 수 가 있었다. 그의 연주는 풍성했으며 동시에 깊이가 있어 독보적이었다. 그러한 그에게 제일 먼저 접근해 온 보호자가 지난날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리히노프스키 공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 베토벤을 거주하게 했다. (비록 고집이 센 그가 이내 뛰쳐나왔지만). 베토벤은 그의 집에서 매주 금요일에 아침 연구회를 개최했다. 그의 부인도 선량하며 아름다운 여자로서 그 후에도 베토벤을 많이 도와 주었다. 은 정도로 친절했는가 하면, 베토벤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나를 가능하면 유리 상자 속에라도 집어넣어 키우고 싶어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하이든에게 대단히 불만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하이든과 함께 1795년 12월과 1796년 1월에 계속해서 공동 음악회를 가졌다. 연주가로서 행동하게 되면 적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베토벤과 공공연히 맞설 수 있었던 사람은 훔멜(A. W. Hummel)과 베르프르였다. 특히 훔멜은 정확하고 아름다운 연주로 유명했다. 그리고 베르프르는 엄청나게 큰 손이 도저히 다른 사람은 비교도 안 되었다. 그는 그 큰 손으로 건반을 넓게 잡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연주에 대한 열정과 감정의 깊이 및 즉흥 연주 때의 악상의 풍부함에서는 도저히 베토벤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그의 즉흥 연주는 사람들에게 그의 재능과 미래 등 모든 것을 보증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연주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열정이 있었다. 연주회에 참석해 전원이 진한 감동의 물결에 휩싸여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감격적이었다. 끝내는 감동한 나머지 소리를 내며 흐느껴 울게 했다. 그의 연주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독창성, 음악적인 내용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얼마나 연주가 감동적이었으면 청중들을 흐느껴 울게까지 만들 수 있을까. 오랜 연습을 통해서 얻어진,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연주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그와 같은 연주에는 오랜 피나는 연습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다
이렇듯 연주자로서의 명성이 오르자, 동시에 그의 작곡도 차례로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1795년에는 그의 최초의 3개의 소나타가 리프노스키 공의 금요일 연주회에서 발표되었으며 변 라조의 피아노 콘체르토, 12곡의 미뉴에트와 "독일 무도곡"이 작곡되었다. 이어 1796년에는 "러시아 무도곡에 의한 변주곡", "현악 5중주"(작품 4), "피아노와 관의 5중주"(작품16), 1800년에는 "현악 7중주"(작품12)와 6개의 "현악 4중주"(작품18), "다조 현악 5중주"(작품 29) 등이 계속 발표되었다. 그리고 1801년 3월에 발레곡인 "프로메테우스"를 궁정 극장에서 연주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어,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의 이제 압도적인 것이 돼 버렸다. 그렇지만 이때 이미 운명은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이면에서 역설적인 함정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나타난 적은 때려 눕혔지만 몸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그가 가장 크게 의지하고 있는 장소를 먹어치워, 그를 득의의 절정에서 이내 절망의 계곡으로 굴러떨어지게 만든 악마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이때 이미 절반쯤 벙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1796년경부터 그는 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798년경부터 그것이 한층 더 악화되기 시작해 심한 귀울림과 함께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걱정이 된 그는 몰래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음악가에게 있어 귀가 들리지 않다는 것은 거의 치명적인 문제였다. 그것이 보통 음악가에게 일어났다면 이미 하나만으로도 그 사회에서 매장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병을 비밀로 했다. 본래 거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다정하게 교제하는 일을 매우 좋아했던 그는 사교를 되도록 피하게 되었다. 가끔 지인에 대해 폭발하는 광적인 분노나 경솔함, 용서 없는 비꼼 등의 결과로 곧잘 그는 비참한 고독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그러한 고독을 견뎌낼 수 없어 이제는 체면도 잊고 사과의 편지를 보내 새로운 우정과 애정을 구했던 것이다. 그른 남달리 사랑에 굶주렸으며 다정한 교제를 요구하면 눈물을 흘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한 그가 귀에 이상을 감추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했던 것이다. 그의 고민은 이렇듯 깊고 심각했다. 마침내 그는 혼자 견딜 수 없게 되어 친구인 칼 아멘다에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편지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자네가 내 옆에 있어 주기를 내가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 알겠나. 자네의 친구 베토벤을 대단히 불행하다고, 상상해 보게나. 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청각이 무척 약해져 버렸단 말이야. 자네가 이곳에 있을 무렵부터 나는 그 징후를 느꼈지. 그렇지만 그것을 숨기고 있었지. 그 후 점차적으로 더 악화됐어. 만약 언젠가 병이 낫는다면 기다릴 필요가 있어. 위장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의사가 말하는데 배 쪽은 완전히 좋단 말야. 그런데 귀는 여전하거든. 나을 수 있을는지. 물론 낫기를 원하지만 매우 어려울 것 같아. 이런 종류의 병이 가장 치유되기 어려워서 말이야. 좋은 사람들은 피하고 극히 천하고 자기 본위인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지. 정말로 나는 슬픈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 귀가 제대로 말을 들어 준다면 아아!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게 되면 자네한테로 달려갈 거야.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피해 있지 않으면 안돼. 그리고 나의 전성기에는 나의 재능이 허용하는 한의 일을 완수 할 거야. 그지없이 딱한 체념! 나는 그런 곳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돼. 물론 나는 이러한 불행을 초월해 일어서려고 스스로 생각해.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그것이 가능해질는지...
그는 곁들여 이 일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1801년 6월 1일의 편지였다. 그후에도 여러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귀에 대해서 고백했다. 그 밖에도 가까운 친지에게도 편지로 고백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에 대해서 그가 어떠한 치료를 받았는가 알게 하는, 의사인 동시에 친구인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있다.
...3년 전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어. 이것은 배의 병이 원인임에 틀림없지만, 배에 대해서는 자네도 알고 있듯이, 훨씬 옛날부터 좋지 않았어. 그것이 악화된 거야. 나는 계속 설사에 시달렸으며 그 결과 매우 허약해졌어. 의사는 강정제로 나를 튼튼하게 해주었으며 청각에도 필요한 조치를 취해 주었어. 그렇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어. 귀는 점점 더 나빠질 뿐이었으며 배 쪽도 변함이 없었어. 이런 식으로 해서 작년 가을까지 지내왔지. 나는 여러 차례 절망했어. 어떤 의사는 냉수욕을 하라고 했으며, 또 어떤 의사는 미온욕을 권유했어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와 배 쪽은 나았어. 그렇지만 귀는 더 악화됐어. 이번 겨울을 정말로 비참한 상태야. 무서운 복통이 엄습해 병은 완전히 재발하고 말았어. 그런 상태가 한동안 계속되었어. 나는 그 다음 외과 의사의 진찰을 받으러 갔어. 오히려 외과 의사의 진찰을 받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게다가 나는 평상시 그를 신뢰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는 맹렬한 설사를 거의 완전히 멈추게 해 주었지. 미온욕을 명했을 뿐만 아니라 강장제 한 병을 주었어. 4일쯤 전에는 위약과 환약을, 그리고 귀를 위해서 달여 먹는 약을 주었어. 이로써 나는 회복 경향을 나타났지. 남은 것은 밤낮 없이 울리고 귀울림뿐이었어.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비참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할 수 있어. 최근 나는 사교계를 멀리하고 있어. '나는 병어리다'하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서운 결과를 만드는 거야. 적지 않은 나의 경쟁자들이 이 사살을 알게 되면 뭐라고 할까! 상상할 수 없는 벙어리의 상태에 대해 잘 이해해 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말하지만, 극장에서는 오케스트라 바로 앞에 있지 않으면 배우가 하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해. 조금 더 떨어져 있으면 약기의 고음이나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남과의 대화에서는 놀랍게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게는 멍청해하는 버릇이 있어. 사람들은 그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상대방이 조용히 말하면 간신히 들려. 그런데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음이 들리는 거야. 의사는 완전히 낫지는 않지만 확실히 좋아질 거라고 말하고 있어. 나는 자주 나라는 존재와 조물주를 원망했어. 그렇지만 나는 운명에 도전하고 싶어....
그는 반벙어리가 되고서도, 자신의 음악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도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운명에 도전하고 싶다는 결의를 굳히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해 주기를 원했으며,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다음해에는 시골로 가서 반 년 정도 흙을 만지는 생활을 하고 싶어하기도 했다. 그렇듯 비참하게 벙어리가 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가 많았다. 장이 나쁜 것이 원인이라고도 했는가 하면 지나치게 냉욕을 해 관절염을 일으켰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처럼 결핵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 밖에도 어렸을 적 심하게 티푸스를 앓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어떤 이비인후과 의사의 세밀한 병리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이상할 정도로 민감한 감각 기관을 지나치게 혹사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아무래도 이를 대부분이 합쳐져서 생긴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그의 극단적으로 난폭한 성질이 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확실히 베토벤 스스로 그 병을 초래한 게 틀림없다. 그는 본래 튼튼하긴 했지만 지신의 몸을 다루는 데 지극히 난폭했다. 비가 오는데도 온몸이 흠뻑 젖도록 산책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작곡에 열중했을 때는 흔히 식사하는 것도 잊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작곡중에 왔을 때는 매우 화가 나서 사나운 기세로 뒤를 돌아봤으므로 어떤 때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벌렁 넘어지기도 했다. 그로 인해 후두부를 바닥에 크게 부딪쳐, 그 후부터 귀가 들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비록 귀가 들리지 않아도....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이 고통만 없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텐데" 하고 베토벤은 한탄했다. "이제 겨우 내 나이 31세니 참다운 나의 인생은 이제부터야. 해야 할 일이 태산 같이 많지 않은가! 하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다니 살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베토벤은 내심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지신도 채 알아차리지 못한, 마음의 위안이 되는 점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귀가 설사 들리지 않아다 하더라도 연주와 작곡을 하는데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일이었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남과 같이 있을 때뿐이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작곡한 곡은 분명 머리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속에서 혹은 머리속에서 분명히 음으로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될 수 있는 데까지 용기를 내서 자신의 운명을 꾹 참고 견뎌 내어 이를 극복하려고 다짐했다. 그렇지만 약한 인간이었기에 때로는 하느님이 만드신 것 중에서 지신이 가장 비참한 존재라는 생각도 했다.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나의 인생이 왜 이다지도 외로운 것일까요! 나는 본의 아니게 나를 사랑해 주는 모든 사람들을 피해야만 하는 괴로움을 안고 살아야 합니까?
그러한 그의 슬픔은, 예를 들면 피아노 소나타 "비창"과 같이, 그가 불행했던 시대에 작곡한 몇 편의 곡에 담겨 있다. 그렇긴 하지만 그가 겪었던 불행의 크기에 비해 슬픈 곡의 수효가 매우 적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무렵에 작곡한 것으로 "7중주곡"이 하나 있는데 이 곡에서는 슬픔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밝은 즐거움으로 충만해 있다. 그 외에도 "제 1교향곡"이 있는데, 이 곡은 흡사 원기발랄한 즐거움에 취해 버린 젊은이가 작곡한 것과도 같은 곡이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보아 그는 이미 한편에서 하늘이 준 고통, 즉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고통을 극복해 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베토벤에게는 빈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구석구석에까지 유명해져 연주하러 와 달라는 초청이 여러 건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그런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새로운 작품에 대한 구상이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이 끝도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몇 개의 곡이 동시에 머리 속을 점령하는 때도 있어 그 자신마저 놀랄 정도였다. 이렇게 해서 철로 소나타, 클라리넷 3중주곡, 5중주곡 및 그 밖에도 몇 편의 피아노 소나타 등의 계속 작곡되었다.
한편 레슨을 요청하는가 하면 작곡의 주문도 힘에 겨울 정도로 많았지만 하나같이 다 들어줄 수가 없었다. 또한 그렇듯 많은 돈이 들어온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귀족들의 경제적인 원조도 한 한몫해, 이를 저축해 둔 그는 필요할 때 얼마라도 찾아서 쓸 수가 있었다. 그는 깨끗한 옷을 사서 맘껏 치장할 수도 있었다. 값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것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으며, 또한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돈과 명예로도 살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아내를 맞아들여 가정을 꾸미는 일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동경하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귀족 친구들의 딸이었다. 아가씨들도 베토벤을 좋아했지만 결혼 상대자로서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막상 베토벤이 결혼을 신청하면 상대방은 듣기 좋은 변명을 하며 은근히 이를 거절했다. 베토벤을 이렇듯 여러 번 거절을 당하자 고민도 했으며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는 자기 심정을 털어놓고 의논할 상대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마음이나 기분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그런 유의 작품에 귀를 기울이면 베토벤의 마음을 충분히 읽어 낼 수가 있었다. 또한 그러한 작품들은 그의 젊은 시절의 온갖 슬픔과 괴로움에 대한 무언의 항의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은 동시에 그의 즐거움과 환희도 담고 있었다. 그는 어떠한 장애나 실망이 닥쳐오더라도 이를 극복해 승리로 이끌겠다는 결심을 굳혀 가고 있었다.
실연의 상처로 유서까지 쓰다.
귀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된 최초의 2년 동안은 그런대로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조촐하게 행복한 시기도 있었다. 이 무렵 베토벤은 다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번의 상대자는 줄리에타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아가씨로서, 귀족 제자의 사촌이었다. 베토벤은 그녀에게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 당시에 작곡한 "월광 소나타"를 이 처녀에게 바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줄리에타 쪽에서도 그를 좋아했으며 때로는 깊은 사랑의 즐거움을 나눈 때도 있었으므로 베토벤은 그녀 역시도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줄로 알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신분의 차이가 장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 쪽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같은 신분인 어떤 백작과 갑자기 결혼해 버리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베토벤은 깊은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반한 것이 모두가 자신의 귀 때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신분의 차이 때문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신분의 차이가 장애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 쪽에서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같은 신분인 어떤 백작과 갑자기 결혼해 버리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베토벤은 깊은 실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자신을 원망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반한 것이 모두가 자신의 귀 때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신분의 차이 때문이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깊은 번뇌와 실망에도 굴하지 않고 그는 작곡에 전념했다. 새로운 교향곡을 위시해 다른 곡에 대한 구상이 계속해서 머리에 떠올랐다. "제1교향곡"은 임 발표되었는데 이에 대한 의견이 구구했다. 지나치게 대담하다고 모질게 비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이 곡을 즐거운 곡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잠시 동안 이 제3악장을 들어 보십시오. 아름다움과 참신함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전반부의 가락을 의식적으로 익살스럽게 했으며 춤추듯하는 리듬이 풍부하게 넘치고 있어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 저렇듯 멋진 음악을 작곡했다니, 정말로 믿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바깥의 귀는 점차 들리지 않았지만 마음 속의 귀로는 더욱 선명하게 잘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베토벤은 그러한 자신에 대해 감사했다. 지금까지보다 마음의 귀는 확실히 더 잘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계에 대해서 그의 귀는 완전히 닫혀 버렸으면서도 그는 그 음을 마음으로 또렷하게 들을 줄 알았다. 그 옛날 스승과 주고받은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즉 음악가는 설사 귀머거리가 되더라도 악보를 읽거나 머리 속에서 생각해 내기만 하면 분명히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는 실연의 쓰디쓴 아픔을 딛고 일어나서도 다시 "제2교향곡"을 완성시켰다. 의사의 권유로 시골로 휴양을 떠나가 있을 때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에도 가끔 들른 적이 있는 그 곳 시골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과 조용한 분위기가 그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어느 날 그는 완전히 의기 소침해져 이대로 있다가는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책상에 앉아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를 고집이 세고 완고하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든 나라는 사람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어째서 그렇게 보였는지, 숨어 있는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근 6년 동안 나는 회복이 도저히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나는 본래부터 천성이 밝은 사람이다. 남과 사귀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남과 헤어져서 고독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싫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을 보고 좀더 큰 소리로 말해 주시오, 혹은 외쳐 주시오, 나는 귀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하고 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추방당한 사람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 사람에게는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가 들리지만 나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그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나는 자살하려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예술이 나를 그러지 못하게 했다. 내가 작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을 모두 다 완성시킬 때까지 이 세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인내라는 것을 나의 길잡이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재산이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그 상속인을 동생으로 한다. 아무쪼록 그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서로 돕고 지내도록 당부한다. 안녕히. 나를 잊지 말아 주기를 빈다.
"영웅 교향곡"의 탄생
이렇듯 구제불능의 인생은 달리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의 태도에는 돌연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베토벤은 강한 의지의 힘을 짜내어 절망과의 투쟁에서 승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뼈아픈 성명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부터 나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비밀로 하지 않겠다. 다시 한 번 빈의 사교계로 복귀하려고 한다. 귀머거리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다 해도 거리낄 것이 없다. 계속해서 작곡을 할 수 있으며, 또한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예술이 손상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베토벤의 머리 속에는 새로운 곡이 끊임없이 용솟음쳐 떠올랐으며, 계속해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타이르기도 했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나는 아름다운 음악을 이 세상에 내보낸다는 일생의 사명을 이룩하기 위해 그러한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절대로 패배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인류에게 바칠 수 있는 아름다운 곡을 위해 귀가 먹은 자신과 싸워 승리를 거두어야 할 것이다.
이때가 베토벤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였다. 새로운 의욕으로 "제3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이 곡에서 한 영웅의 생애를 나타내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누구를 영웅으로 할 것인가? 그것은 물론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이 인간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와 같은 숭고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 프랑스 사람들의 용기를 불러일으키지 않았는가. 베토벤은 "제3교향곡"을 '에로이카'라 명명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생애를 기초로 작곡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3교향곡"을 듣는 사람들이 이로 인해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기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본에 있을 때의 친구의 아들이자 현재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는 제자가 헐레벌떡 숨가쁘게 베토벤의 방으로 뛰어들어와 선생에게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세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선언했대요!" 베토벤은 잘못 들었는가 싶어, "여보게 잘 알 수 있도록 이 필기장에 써 보라고!" 글을 읽고 난 베토벤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이렇게 소리쳤다고 한다. "역시 그 사람도 한낱 보잘것없는 졸장부에 지나지 않는군! 아마 이제부터는 저 사내도 인간의 권리를 발 밑에 깔아뭉개고 자신의 양심만 만족시키려고 하겠지.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높은 자리에 군림해 폭군이 될 게 틀림없어!"
베토벤은 이렇게 말하면서 책상 앞으로 다가가 보나파르트라고 씌어 있는 "영웅 교향곡"의 표지를 박박 찢어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는 다른 의자에 앉아 다른 표지에 '어느 위인의 추억을 위해'라고 썼다. 그러자 그 제자는 선생을 진정시키려고 필기장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선생님, 보나파르트를 잘못 봤다고 해서 지나치게 실망하시지 마십시오. 그 교향곡은 보나파르트가 아니라, 참혹한 운명을 극복하면서 계속 투쟁하신 선생님의 용감한 정신을 찬양하는 기념비가 될 것입니다.
"제3교향곡 영웅"은 베토벤의 마음에 드는 곡이 되었다. 베토벤은 이 곡이 특정의 영웅의 인생을 표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영웅적인 행위가 인간의 인생을 이끌어 가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이다. 베토벤의 보호자나 친구들 대부분은 "영웅 교향곡"은 베토벤이 지금까지 작곡한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위대한 곡이라고 열렬하게 찬양했다. 그렇지만 비평가들 중에는 "이 교향곡은 지나치게 구성이 까다롭고 지나치게 색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교향곡은 밝은 악장에서는 무척 아름다웠으며, 다른 악장은 깊은 슬픔이 담겼으며 또 다른 악장은 커다란 희망에 차 있어, 이 곡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위대한 행위에 감동을 받고 이 곡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 곡은 베토벤의 음악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결혼을 거부하다.
어렵게 어렵게, 베토벤은 자기를 깊이 사랑하는 연인을 만났다. 그 처녀는 바로 베토벤이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귀족의 한 사람인 테레제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다. 테레제와 그녀의 여동생은 소녀 시절부터 베토벤을 존경해 오면서 그의 레슨을 받아 왔다. 베토벤은 또한 그녀들의 집안 사람들과도 가까이 사귀고 있었으며 특히 테레제의 남동생인 프란츠와 친하게 지냈다. 처음에는 테레제를 단순히 귀여운 제자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차츰 베토벤은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비밀리에 결혼할 것을 약속했다. 새로운 행복을 잡은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한 곡을 만들어 그녀에게 바쳤다. 그는 솟구쳐 오르는 애정에 힘입어 그렇듯 행복한 1년 동안에 "황제 협주곡"을 비롯해 "철로 소나타", "현악 4중주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동생들의 일이 이를 망쳐 놓았다. 그런 골치 아픈 일들만 없었다면 베토벤의 행복은 오래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동생들은 둘 다 결혼했지만, 베토벤은 두 제수가 다 마땅치가 않았다. 동생들 또한 도덕적으로 혹은 교양면에서 자신들과 지나치게 다른 점에 대해 실망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기분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았다. 특히 막내동생 요한이 문제였다. 그는 사업에 성공해 시골에 적지 않은 땅까지 기지고 있었다. 하루는 그 요한이 형인 베토벤에게 인사장을 보냈는데, 서명란에 '요한 판 베토벤, 토지 소유자'라 씌어 있었다. 베토벤은 이 인사장을 아니꼽게 생각하면서 답장 서명란에, '루트히비 판 베토벤, 지능 소유자'라 적어 보냈다. 베토벤은 동생인 칼이 택한 부인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근처에 살고 있으면서도 될 수 있는 한 만나는 것을 피했다. 그렇지만 같은 이름인 칼이라는 조카만은 사랑했다. 그리하여 어린 칼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하고 늘 걱정하곤 했다. 그러면서 칼이라는 조카가 자신의 애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베토벤은 몹시 화가 나거나 심하게 놀라게 되면 몸에 이상이 생기는 체질이었으므로, 그때도 동생의 일로 마음이 대단히 상해 건강을 해쳤다. 그리하여 광천 이 몸에 좋다는 이름난 휴양지로 갔다. 귀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으나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테레제는 그가 돌아오기를 무척 기다렸다. 베토벤의 음악가로서의 생활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베토벤의 일이 라면 어떤 것이든 중요했다. 그렇지만 돌아온 베토벤은 전과 다름없이 그녀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지만 결혼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끝내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귀에 병이 있는 이상 결혼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자신의 전부를 음악을 위해 바칠 작정입니다. 제발 저의 이와 같은 마음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오. 당신만큼 내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이런 고백에 그녀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만 자신의 슬픔을 베토벤에게 절대로 보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다만, "당신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일은 내 일생을 두고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라고만 말했을 뿐이었다. "나는 나의 음악을 위해서 이와 같은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하고 베토벤의 말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잘 아시겠지만, 저만큼 아내와 가정을 원하는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이처럼 성공하고서도, 이렇듯 많은 친구들이 있어도 나의 생활은 언제나 쓸쓸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는 결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베토벤의 집안은 하나도 정리된 것 없이 엉망이었으며 더구나 하인들까지 그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그는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몸치장도 깔끔하지 못했다. 양복도 손질이 안 된 채 구겨져 있을 때가 많았다. 베토벤에는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히 생각해 늘 곁에서 뒷바라지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모처럼 그런 여인이 생겼으면서도 그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해 버린 것이다. 베토벤의 수입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그의 후원자인 세 명의 귀족 친구들 중에서 한 사람이 죽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여전히 돈을 대주기는 했지만 액수가 많이 줄어들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동생 칼이 병에 걸려 그 가정까지 베토벤이 돌봐 줘야 할 입장이 돼 버렸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어디서 돈을 벌어야 할지 막막하지만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베토벤은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 그러나 칼의 건강이 매우 나빴으므로 영국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 사이 "전쟁 교향곡"(일명 웰링턴의 승리) 등의 곡을 작곡해 이를 발표했으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 곡으로 2회에 걸쳐 자선 공연도 열어 전쟁 미망인이나 고아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연주회를 열어 달라는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연주회가 상당한 수입이 되기도 하여 영국으로 건너가지 않아도 되었다.
이미 1805년(38세)에 "영웅 교향곡" 및 "피델리오"를 작곡해 초연했으며, 이어 1808년 12월에는 제5교향곡 "운명"과 제6교향곡 "전원"을 발표했다. 1811년(42세)에는 독일의 시인 괴테를 만나 사귀게 되었지만 서로 인생관이 달라 깊이 사귀지 못하고 이내 헤어졌다. 이어 1813년(43세)에는 제7 및 제8교향곡을 발표했다. 거의 완전 벙어리와 같은 상태에서 거의 필사적으로 작곡을 계속했던 것이다. 가히 위인이요, 음악의 천재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계속 자신의 불편한 몸에 채찍질하며 그렇듯 어려운 곡을 완성시켰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귀는 이미 완전히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그는 이제 귀가 들리지 않는 것을 감출 재주가 없어졌다.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슬픈 듯이 미소지으면서 호주머니에서 회화장을 꺼내어 글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그는 만년의 쓸쓸한 모습으로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귀머거리로 오페라를 지휘
1822년의 "피델리오 공연" 때의 일이었다. 베토벤은 이 곡의 총연습 때 지휘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가 지휘를 하자 1막의 2부 합창 무렵부터 그의 지휘봉과 무대가 전연 맞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무대 쪽의 음을 전연 듣지 못했다. 그의 지휘봉이 상당히 느리게 움직였다. 오케스트라에서는 그의 지휘봉을 따랐다. 그렇지만 무대 쪽에서는 멋대로 소리를 내어 그의 지휘봉보다 점차 빨라져 갔다. 마침내는 피치가 다 같이 엉망이 돼 버렸다. 상임 지휘자가 이를 차마 볼 수 없어 이유를 말하지 않고 잠시 휴식 시간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무대 쪽 가수들에게 두세 가지 주의를 준 다음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번째도 똑같이 엉망이 돼 버렸다. 베토벤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진상을 말할 수 없었다. 모두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로 바라볼 뿐이었다. 베토벤은 제자를 불렀다. 그리하여 그 상황을 글로 써달라고 했다. 제자가 이렇게 썼다. "이 이상 계속하지 마십시오. 부탁입니다. 이유는 집에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때서야 비로소 베토벤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며, 제자를 향해, "돌아가자!"고 말한 다음 달려 나갔다. 귀머거리로서 오페라를 지휘할 수 없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었다. 만년에 그는 지휘봉을 입에 물고 그 봉의 끝을 피아노의 몸체에 대고 자기가 치는 음을 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이로 음을 들은 것이다. 마침내 "제9교향곡"을 공연할 차례가 되었다. 오케스트라 앞에 두 명의 지휘자가 섰다. 동서 고금을 통해 일찍이 없었던 광경이었다. 한 사람은 귀머거리인 베토벤이었고 또 한 사람은 단원들이 이 사람만을 믿고 있는 상임 지휘자 우물라우프였다. 베토벤은 자기 작품을 지휘한다는 생각에 그지없이 즐거웠다. 베토벤의 지휘는 맹렬했다. 그는 거의 전부가 그를 주시하지 않고 우물라우프만을 의지하고 있는 악단에 대해서 무엇을 지휘하려고 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격렬한 몸동작은 미친 사람과 같았다. 저음부에 들어가면 몸을 심하게 낮추어 악보를 놓아 둔 대 밑으로 들어가 거의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이어 고음부로 들어서게 되면 점차적으로 몸을 뻗어 이내 몸이 쭉 되로 휘며 마침내 최고음부에 이르게 되면,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고는 폭발하듯이 하늘로 뛰어올랐다. 마치 구름 위까지 날아오를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도 모든 단원은 우물라우프의 지휘봉만 바라보고 있었다. 각 악장마다 터질 듯이 갈채가 일어났으며 특히 템포가 빠른 제 2악장과 합창의 최종 악장이 끝났을 때는 청중의 열광과 갈채로 극장이 흔들릴 정도였다. 장내는 노도와 같은 박수와 감격의 폭풍 속에서 귀를 멀게 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더구나 쾅쾅 울리는 소리가 뒤를 보고 있는 베토벤에게는 전연 들리지 않았다.
그는 연주가 끝났을 때 뒤쪽의 열광을 전연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직도 지휘봉을 손에 쥔 채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이때 알토를 독창으로 부른 가수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뒤를 돌아보게 했다. 그는 처음으로 청중의 폭풍을 알게 되었다. 그는 정중히 그러나 어린이처럼 멋쩍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시금 우레와 같은 갈채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이 감격과 열광을 귀가 먹은 그에게 알리기 위해 일제히 일어서서 손을 흔들고 박수를 쳤으며 어떤 사람은 그와 같은 비장한 모습을 바라보며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두 번 세 번 박수가 울렸으며 답례가 5회가 되어도 박수는 그치지 않았다. 당시의 빈의 관습으로는 3회의 박수가 황족에 대한 예의였다. 이렇듯 정도에 넘치는 열광에 대해서 드디어 임석한 경관들이 이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침내 청중의 흥분이 베토벤에게로 옮겨갔다. 이미 음악회 준비 등으로 완전히 지쳐 버린 그는 겹친 심신의 피로와 흥분으로 제정신을 잃은 것처럼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제자의 집으로 데려 갔다. 그는 거기서 음악회의 복장 그대로 하룻밤 내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꿈을 꾸는 듯한 상태에서 아침까지 누워 있었다. 소리를 전연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인 그가 자신의 곡을 지휘하겠다는 강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음악회는 그 달 23일에게 프로그램을 다소 변경해 다시 열렸다. 이렇듯 음악의 세계에는 출중했으며 군중을 굽어보며 질타할 수 있었던 그도, 일단 속세의 일로 돌아오면 그야말로 아는 것이 없었으며 생각하는 것이 깊지 못했다. 그것은 일종의 희극인 동시에 비극이기도 했다. 그의 마음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소박함과 성실함이 깊은 애정과 결부될 때 그것은 비극이 되었다. 그와 같은 편린은 이미 여태까지의 경과를 통해 이곳저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이를 가장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년에 가졌던 조카인 칼과의 관계였다. 이 조카에 대한 그의 사랑은 부모 이상이었다. 그와 같은 사랑이 거의 그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조카에게 재산을 남겨 주기 위해 수전노처럼 구두쇠가 되었던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서 끝가지 걱정했으며 마지막까지 펜을 쥐겠다고 결심한 것도, 그 조카 때문이었다. 그는 보통 인간으로서 제대로 교육을 받은 것이 없었으며, 세상에 익숙하지 못한 채로 지금까지 지내 왔다. 말하자면 이것이 그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와 같은 결점을 빈의 귀족들 사이에 있었을 때는 그의 음악 그 자체의 힘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칼의 문제를 마지막으로 그의 명수도 끝났다. 이 문제가 희극적이면서 동시에 비극적인 베토벤의 가련한 생애에서의 마지막 갈등이 되었다. 마침내 베토벤은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작곡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그와 같은 신세를 한탄했다. 말썽 많았던 조카 칼도 군대에 들어갔으므로 노여움 같은 것도 없어졌다. 베토벤은 조카를 무척 만나고 싶어했지만 그의 생활은 조카가 없는 것이 훨씬 평온했다. 이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이 소망했다.
아아, 나에게는 이미 작곡을 할 기력도 없지만, 적어도 훌륭한 곡을 하나만 더 작곡해 다정한 어린애처럼 다정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이 세상의 생활을 끝맺고 싶다.
그는 병들어 누웠을 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빨리 병이 완쾌되어 음악의 날개에 몸을 싣고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싶다." 이때 런던의 음악 애호가 협회로부터 베토벤이 병으로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500달러를,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보내 왔다." 이 돈은 협회를 위해 작곡해 주시기를 바라는 작품의 작곡료의 선금입니다." 극히 곤란을 받고 있을 때 그와 같은 대금을 받은 베토벤은 살아 난 듯이 기뻤으며 또한 마음이 놓였다. 영국 국민에 대해서 깊은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몸이 좋아지면 런던으로 가야지. 영국 국민을 위해 대 교향곡 하나를 작곡해야지'하고 결심했다.
불끈 치켜든 주먹
그러나 2, 3일이 지나자 베토벤은 더욱 쇠약해져서 거의 말도 하지 못하게 됐다. 어느 날 오후 베토벤이 좋아하는 포도주 세 병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놓여 있었다. 출판사에서 선물로 보내 온 것이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유감이지만 너무 늦었어"하고 중얼거렸다. 1827년 3월 26일의 저녁 무렵, 심하게 비바람이 몰아치며 천둥까지 쳤다. 번갯불이 베토벤의 방을 대낮같이 밝혀 두 사람의 문병객을 놀라게 하였다. 그 때까지도 베토벤은 꼼짝도 않고 눈을 감은 누워 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는 2,3초 동안 그대로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올렸던 오른손을 침대에 늘어뜨리고 그는 결국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1827년 3월 26일 오후 6시였다. 이제 그 어떤 것도 그를 괴롭힐 수 없게 되었지만, 이와 동시에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고 힘을 북돋아 주는 빛나는 음악이 머리 속에 끓어올라 사나운 물결처럼 치닫는 일도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빈의 모든 시민들은, 곧 이 위대한 작곡가가 운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2만 명 이상의 각계 각층의 문상객들이 그의 집 앞에 서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일생을 통해 받은 것은 적고 베푼 것이 많았던 한 인간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베토벤의 음악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 사람들도 베토벤이 자기들의 거리에 명예를 가져다 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는 베토벤은 흔한 황족보다도 위대한 인간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베토벤은 음악계의 왕이며, 그 지위는 이 세상의 어떤 귀족도 누려 보지 못한 고귀한 자리였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일생의 절반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로 보낸 베토벤이지만, 마음속에서는 아름다운 음악을 끊임없이 들으면서 가난이나 질병 그리고 괴로움에도 굽히지 않고 그 아름다운 음악을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온갖 고난을 이겨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장례식 때는 베토벤의 집에서 교회까지 연도에 모인 추모 인파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 모든 학교가 애도의 뜻으로 휴교를 했으며 군중을 정리하기 위해 군대가 출동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장례 행렬에는 귀족들을 위시해 관리들과 그의 많은 친구들 그리고 빈 음악 학교의 학생들도 합류했다. 빈에서 가장 뛰어난 가수들과 네 사람의 트럼본 연주자들이 행진하면서 베토벤의 작품 중 한 곡을 연주했으며 반주도 했다. 땅거미가 짙어갈 무렵 많은 친구들이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위해 바치는 시와 그의 생애를 묘사한 시가 온 거리에 배포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베토벤의 유물의 정리하자, 작은 책상 안에 조카를 위해 저축해 둔 약간의 돈과 유서, 그리고 작은 사진 두 장이 있었다. 한 장은 그의 조부의 사진이었으며 나머지 한 장은 사랑했던 테레제의 사진이었다.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영원한 애인' 이라는 서두로 되어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베토벤은 비록 조카 칼에게 고생하며 저금한 약간의 돈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온 세계 사람들에겐 엄청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음악의 큰 보물을 남겨 놓은 것이다.
음악을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들어가며 작곡을 계속한 그 각고의 노력이야말로 베토벤만이 간직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귀한 정신이었던 것이다. 그가 눈을 감기 바로 직전 팔을 번쩍 치켜올리며 주먹을 불끈 쥔 것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었을까. 죽기까지 완성하지 못한 많은 곡에 대한 마지막 손짓인 동시에 커다란 한의 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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