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 이원용
끝까지 도전한 세균학자 파스퇴르
파스퇴르 (프랑스 화학자·미생물학자) [Pasteur, Louis] 1822. 12. 27 프랑스 돌~1895. 9. 28 파리 근처.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요 세균학자로 돌에서 태어나, 파리 고등 사범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고등 사범 학교의 과학 지도 교수가 되었다. 최초로 주석산에 대해 연구했으며, 이어 발효에 대해 연구해 유산균을 발견했는데, 유산균은 이때에 발견된 최초의 혐기성균이었다. 또한 발효 현상의 자연 발생설을 타파하는 결정적인 실험을 했으며, 초산 발효 연구를 통해 포도주의 산패를 방지하는 저온살균법을 고안해 냄으로써 프랑스의 포도주 생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전염병을 연구해 각종 균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예방 접종을 실시했으며 또한 살균법과 무균법을 확립했다.
과학보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소년
묘하게도 파스퇴르의 소년 시절은 다른 위대한 과학자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릴 적부터 특별히 과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렇듯 생명의 기본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강한 사명감을 갖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이는 계기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어릴 적 그는 과학보다는 오히려 그림에 소질이 있는 소년이었다. 그는 1822년 12월 27일 도브 강 옆의 작은 도시인 돌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생가가 있는 이 거리를 파스퇴르 거리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무두질 거리라 불리운 것처럼 거의 대부분의 집에서 가죽을 무두질하고 있었다. 그의 부친도 그러한 사람의 하나였다. '장차 교사가 되겠다.' 이것은 파스퇴르가 일찍부터 마음속에 그리고 있었던 커다란 꿈이었다. 그는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이 대학교수를 육성하기 위해 설립한 고등 사범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첫 번째 파리행은 실패로 끝나 버렸다. 겨우 16세인 그에게는 익숙해진 생활로부터 갑자기 400킬로미터나 떨어진, 복잡한 도시로 뛰어든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소르본 대학에서 학생들이 몰려 있는 것을 보거나 젊은이들이 거리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아도, 그들에게 끼여들 수 없는 고독감을 느낄 뿐이었다. 6주 후 부친이 마차를 타고 그를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시 고향의 학교로 돌아가 그림 공부를 계속했으며 친구들이나 친지들을 모델로 멋진 파스텔 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40킬로미터 떨어진 브장송 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해 그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당초의 목표를 결코 잊지 않았다. 즉, 그 학교에서 고등 사범 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초의 입학 시험 결과 지원자 22명 중 15등의 성적으로 입학은 허용되었지만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파리로 가서 1년 더 공부해 재도전하기로 결심했다.
다시금 파리로 돌아온 그는 처음의 경우와는 완전히 딴판인 생활을 했다. 이번에는 꼭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욕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이윽고 명문인 생 루이 고등 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그 후 동경했던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과학자 파스퇴르의 면모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는6, 7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 사이에 끼어 방금 들은 강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대학의 넓디넓은 홀을 지나는 그의 얼굴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커다란 세계에 완전히 사로잡힌 밝은 표정이 역력했다. 학년 말에 고등 사범 학교의 입학 시험을 보았는데 성적은 4등이었다. 공부하고 싶어 좀이 쑤시던 그는 신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파리로 가서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하요 파스퇴르는 1843년 10월 21세의 생일을 눈앞에 두고 화학과 물리의 교습법을 익히기 위해 고등 사범 학교에 입학했다.
최초의 의문에 도전
고등 사범 학교에서의 공부가 끝나가자 그는 뭔가 자기 혼자만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특별한 연구 과제를 찾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복잡하면서 정교하게 조립된 결정체였다. 어느 날 그는 교실에서 소금 결정의 표본을 보고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던 것이다. 순수에 가까운 소금이었는데, 세 가지의 서로 다른 결정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선 그는 소금의 결정이 어째서 세 가지인가 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반드시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자연이 어째서 그와 같은 물체를 조립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다른 명성 있는 과학자들이 느낀 것과 똑같이 그 역시도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되었으면 이를 해명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결정체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또 다른 의문으로 확대돼 나갔다. 결정은 예로부터 호기심이 강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의 시대에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그 모양이 상당한 수준까지 밝혀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다. 파스퇴르의 물리 선생도, 어떤 결정체에 빛을 대면, 그 광선이 휘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빛이 어째서 굴절하는 것일까. 이것 또한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문제였다. 그 후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원자의 내부 구조가 방사선을 통해 분명히 밝혀졌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이를 놓고 생각했다. 이러한 빛의 굴절은 결정의 종류에 따라 다른 것일까? 아니면 결정의 과학적인 성분의 결합 방식에 따라 다른 것일까? 혹은 과학자가 일반적으로 화합물이라 부르는 종류의 차이에 따라 다른 것일까?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많은 의문을 가진 끝에 즉시 주석에서 취할 수 있는 한 조의 아름다운 결정을 지닌 주석산염을 주의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 모양의 결정은 포도가 발효하고 있는 포도주 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상한 것을 알게 되었다. 한쪽의 결정을 녹여 보니 빛이 굴절했지만, 나머지 결정을 녹였을 때는 빛이 굴절하지 않았다. 양쪽 다 화학상으로는 완전히 똑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그는 계속 의문나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도전을 지속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이들 두 개의 결정체를 찔러 보기도 하고 만져 보기도 하며 정성들여 조사를 했다. 그런가 하면 현미경으로 여러 각도에서 관찰해 보았을 뿐만 아니라 녹여서 재차 결정으로 만들어 보면서, 빛을 굴절시키거나 굴절시키지 않는 확실한 차이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 열심히 찾아보았다. 연구하던 것이 벽에 부딪치게 되면 젊은 과학자들은 낙심한 나머지 포기해 버리기 쉽다. 그렇지만 파스퇴르는 그 후에도 결코 동요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드디어 커다란 발견을 했다. 수천 번씩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한 결과, 결국 두 개 결정의 차이를 발견한 것이다. 너무나도 작은 차이였으므로 여태껏 놓쳐 버렸던 것이다. 두 개의 결정은 거의 똑같았지만 결정의 면이 딱 한 개 달랐던 것이다. 제 1의 결정은 그 면이 모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제 2의 결정은 오른쪽과 왼쪽 양 방향으로 기울어진 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설레는 가슴을 진정시켜 가며, 제2의 결정에서 오른쪽으로 기운 것과 외쪽으로 기운 것을 구분해, 이를 각각 녹여 용액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용액이 빛에 어떠한 변화를 주는지 실험해 보았다. 그 결과 오른쪽으로 기운 결정을 녹인 용액은 빛을 오른쪽으로 굴절시켰으며, 왼쪽으로 기운 결정을 녹인 용액은 빛을 왼쪽으로 굴절시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빛을 굴절시키지 않는 현상을 이 양쪽의 결정이 동량이어서 서로 상쇄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늘에라도 두둥실 날아오를 것만 같은 흐뭇한 기분이었다. 짐작건대 과학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감격의 순간이 있어, 그처럼 까다로운 실험을 되풀이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물체가 어떤 식으로 조립되었는가를 알게 되면, 이와 관련된 새로운 방법, 새로운 기술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전개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 후 수년 동안 결정의 연구에 열중하여 입체 화학이라고 하는 과학이 새로운 분야에 대한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파스퇴르의 이와 같은 발견은 과학의 발전에 한몫을 단단히 한 주요한 발견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우수한 과학자로서의 결의와 끈기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모험가로서의 멋진 본능을 지닌 탐구자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그는 이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즐겁게 연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그는 1848년 말에 고등 사범 학교를 졸업한 다음, 다음해 1월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화학 강사라는 최초의 직업을 갖게 되었다. 한편 그는 여기서 학장의 딸을 사귀어 사랑에 빠진 끝에 26세 때 그녀와 화촉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그 아가씨를 만난 지 불과 15일 만에 학장에게, 당신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한 번 결심한 것은 끝까지 해내는 그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편지의 한 부분을 보면,
전재산은 5만 프랑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형제들에게 주려고 훨씬 전부터 결정했습니다...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건강과 일을 하려는 의욕과 연구뿐입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편지에서도 일에 대한 그의 강한 의욕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사람은 마침내 1849년 5월 29일에 결혼하게 된다. 부인은 남편이 연구에 열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실험실에만 파묻혀 있는 남편을 차츰 이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편이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녀는 아내인 동시에 남편의 제자였으며 따라서 과학상의 문제를 이것저것 서로 이야기하며, 연구가 잘 진척되도록 응원한 우수한 협력자였다. 이는 그들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던 5년 동안 아내와 결정 연구 및 대학 수업을 위해 모든 힘을 쏟아부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부인은 이 같은 역할말고도 어머니로서의 임무도 다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5남매의 자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1854년 9월 그는 마침내 릴 대학의 이학부장 겸 화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릴은 북프랑스의 활기찬 산업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사탕무에서 얻은 주스를 발효시켜 알코올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파스퇴르가 겨우 32세의 나이로 그렇듯 책임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은 그의 재능이 각별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열심히 가르쳤다. 자연이 이룩해 내는 무한한 기적에 대해서 자신이 느끼는 외경심을 학생들에게도 심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자 하나를 아들에게 보이며, 이 감자에서 설탕이 생기고, 그 설탕으로부터 알코올이 생기며, 그 알코올에서 초가 생긴다고 가르쳐 주면, 이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자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파스퇴르는 돈 많은 사업가나 그 부인들을 향해 이와 같이 열기 어린 연설도 했다. 릴 대학의 학생들은 대단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파스퇴르 선생의 강의는 하나도 놓치지 말라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프랑스나 벨기에의 철강이나 금속 공장으로 견학을 하는 식으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부패한 알코올에서 살아 있는 효모를 발견
1856년의 어느 날 파스퇴르가 가르치는 학생의 아버지인 알코올 제조업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 놓았다. 알코올이 술통에서 제대로 제조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알코올이 양조되지 않고 그대로 시어지기만 하는 것도 적지 않아 하루에 평균 1,000프랑의 손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의 스승이니까,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찾아왔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주석산염의 결정에 대해 연구한 일이 있어 발효에 대해 다소의 지식은 있었지만 알코올 제조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즉시 그 학부모의 알코올 제조 공장으로 찾아가서는 사탕무가 발효되고 있는 술통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대부분이 알코올의 좋은 냄새를 풍겼다. 그렇지만 그 중 몇 통에서는 쉰내가 났다. 통 속을 살펴보니 내용물들이 진흙처럼 덩어리져 있었다. 그는 좀더 자세히 실험실에서 관찰해 보기 위해 부패한 통 속의 내용물을 두어 병 수거해 가지고 돌아왔다. 동시에 알코올이 주조되고 있는 향기가 좋은 쪽의 것도 조금 수거해 왔다. 파스퇴르는 제대로 발효가 되고 있는 병의 액체 한 방울을 현미경 밑에 놓았다. 과학자로서의 직업적 본능이라기보다 어떤 일이든지 실수 없이 완벽을 기하려는 그의 의도 때문이었다. 들여다본 순간 무수히 많은 소구체가 보였다. 노랗게 계란처럼 둥근 것이 그보다 색이 진한 소구체와 함께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그렇게 작은 것은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어쩌면 이것이 효모의 세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탕무나 포도가 발효하는 액체 속에는 반드시 효모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었다. 이렇듯 확실히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그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이 구구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 효모의 세포가 사탕무나 포도 주스의 즙에 있는 당의 분자를 썩게 하고 분열시켜 알코올과 투명한 탄산 가스를 발생시킨다고 믿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관찰을 계속하던 그는 솟구쳐 오르는 흥분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 소구체가 살아 있어 발효를 시키고 있다는 것을 점점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효모야말로 발효를 일으키는 근원이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다시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보였다. 확실히 눈이 보였던 것이다. 그 조그마한 세계에 사로잡힌 것처럼 그는 한시도 현미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차분히 지켜보고 있자 그 눈은 점차 커지면서 마침내는 분리되어 하나의 효모가 두 개가 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는 그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했던 것이다. 즉 효모의 세포는 커져 가지고 수를 불리면서 사탕무의 즙 속의 당에 영양을 공급하면서 알코올과 탄산 가스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증거가 불충분할 때 나는 매우 소극적이 되며 아무것도 할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반대로 과학적으로 틀림없는 증거가 있을 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진실을 끝까지 밝혀낸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양조업자의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알코올이 양조되지 않는 까닭을 밝혀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시어진 술통의 액체가 현미경 밑에 놓여졌다. 그렇지만 동그란 효모 세포는 어디에도 없었다. 놓치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찰해 봤지만 역시 한 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무거리 같은 액체가 든 시험관 하나를 들고 차분히 관찰했다. 그러자 작은 알맹이가 안쪽에 붙어 있는가 하면, 액체 속에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부패하지 않은 알코올을 넣은 시험관에도 이러한 것이 붙어 있는가 하고 조사해 봤지만 전연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부패한 알코올 속에서 발견한 작은 알맹이를 하나만 간신히 꺼내어 순수한 물 속에 넣어 그 물방울을 현미경으로 조사해 봤다. 그러자 전연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고작 하나의 물방울 속에 엄청난 수의 거무튀튀한 막대기 모양의 작은 생물체가 한데 엉겨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효모보다도 훨씬 작았다. 크기를 재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작아서 잴 수조차 업었다.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든 그 미생물에 사로잡히고 만 것이다. 더 많은 견본이 필요했다. 그는 양조 공장으로 다시 돌아가 부패한 액체를 더 수거했다. 그 생물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런데 그 액체가 시면 실수록 그 생물의 수가 많았다. 파스퇴르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 생물체의 수가 효모의 수보다 많아지면 효모는 알코올을 만들 수 없게 된다. 그 대신 이 막대기 모양의 생물이 우유를 시게 하는 것과 똑같은 유산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부패했다고 생각한 술통 안에서는 알코올 대신 유산이 생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알코올 업계의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즉 술통 속의 액체를 현미경으로 조사해 효모만 발견되면 그대로 계속 발효케 할 수 있었지만 한 개라도 막대 모양의 미생물이 발견되면 술통과 함께 버려야만 했다. 한 개라도 그런 것이 있으면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 효모를 전멸시키기 때문이었다. 파스퇴르의 미생물에 대한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처음부터 그에게는 막대 모양의 미생물이 유산을 만들며, 효모가 알코올을 만든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이들 두 생물체가 서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 그의 뇌리에 못박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싸움 모습에 착안해 그는 다시 전염병의 세균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다. 막대기 모양의 미생물인 간균은 사탕무의 과육에 완전히 엉겨 있으므로 정확하게 조사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문제되는 제1과제는 이들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는 배양액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파스퇴르는 우선 설탕물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다. 발효하고 있는 액체에는 틀림없이 당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는 자라지 않았다. 그저 춤만 추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파스퇴르는 완전히 과학의 요리사가 되어 각종 혼합액을 하나하나 시험해 봤다. 여러 가지 액체를 만들어 이를 가열하고 여과한 다음, 균을 심어 봤지만 그 곳에서는 배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낙심하게 되었다.
다음은 효모가 들어 있는 용액을 가지고 시험했다. 그리하여 즉시 드라이 이스트를 물에 녹여 거기에 소량의 설탕을 주의 깊게 재서 섞었다. 다음은 그 용액을 끓도록 하여 안에 있는 세균을 완전히 죽인 다음 투명한 액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걸렀다. 방해가 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부패한 발효액에서 꺼낸 간균이, 완전히 멸균된 효모 용액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을까. 그는 용액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에 부패한 용액을 한 방울 떨어뜨려, 그것을 조심스럽게 배양기 안에 넣었다. 거기서는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그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다. 교단에 서야 했으며 농민들이나 양조 제조업자들에게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틈을 내어 배양기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런 변호가 없었다. 그리하여 거의 절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추측이 절대로 옳다는 신념은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2일째 되던 날 끝무렵에 그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작은 거품이었다. 용액에서 가스가 발생해 거품이 생긴 것이다. 분명히 그 거품은 자신이 균을 심은 곳에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작은 반점이 잔뜩 생겨 있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그 액체 한 방울을 현미경 아래 놓고 정신없이 살펴보았다. 있었다, 수만 개나 되는 간균이 거기 있었다. 플라스크에 심은 것의 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확인했다. 즉 그 효모용액에서도 역시 유산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효모 용액에서 만들어진 간균 몇 개를 꺼내어 새로 끓여 살균한 효모 용액 속에 넣었다. 그리하여 잠시 관찰하고 있자, 하나 하나의 균이 길게 자라는가 싶더니 갑자기 갈라지며 여태껏 하나였던 균이 두 개가 되었다. 이번에는 거기에 신선한 우유를 넣어 보았다. 그러자 우유는 시어지면서 균이 계속해서 증식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실험을 확신이 설 때까지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실시했다.
깨끗한 효모 용액 속에 간균이 들어 있는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리면, 그 곳에는 틀림없이 새로운 간균이 무수히 발생해 유산이 만들어졌다. 1만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수수께끼에 싸여 있던 발효의 정체가 마침내 밝혀진 것이다. 즉 발효의 원인은 바로 그 미생물이었다. 동그란 효모균이 설탕을 발효시키며 알코올을 만들 듯이, 이들 갸름한 균도 발효를 일으켜 유산을 만들었다. 1857년 8월, 완전히 확신을 얻은 그는 자신의 의견을 공표했다. 그는 릴 과학 협회에 논문을 발표했으며, 또한 프랑스 과학의 최고봉인 과학 아카데미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의 발표는 커다란 반응을 불러있으켰다. 그것은 당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던 과학자들의 생각과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발효를, 어떤 물질에 다른 물질이 가해졌을 때 일어나는 단순한 화학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 있는 효모가 없으면 알코올의 발효는 전연 일어나지 않는다고 파스퇴르는 주장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올바른 주장이었다.
저온 살균법을 발견하다
발효에 대한 파스퇴르의 연구는 그 후에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미생물이 다른 많은 물질에 발효를 일으킨다는 것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열로 죽임으로써 포도주, 초, 맥주 등을 부패로부터 지키는 방법도 개발했다. 이 방법은 파스퇴르-이 이름을 따서 '파스투어라이제이션'이라 했다. 즉 저온에서 살균하는 '저온 살균법'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매일 마시는 우유나 요구르트가 부패하지 않는 것과 세균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은 모두가 다 파스퇴르의 덕택이다. 발효의 연구를 통해 파스퇴르는,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발효 이외의 유익한 현상이나 무수하게 많은 유해한 현상이 다 같이 이 미생물의 조화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결심했다. 이렇듯 그는 새로운 의혹을 발견해 이 문제를 해결해 보이겠노라 다시금 도전한 것이다. 이는 그의 끈질긴 도전 정신 내지는 모험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57년 말, 스팔란차니(L. Spallanzani)가 결사적으로 부정한 이래 이미 1세기 동안 파스퇴르가 주장하는 세균의 자연 발생설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는 그가 모교인 고등 사범 학교의 이학부장으로 부름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 무렵의 과학자들은 인간이나 동물 및 곤충 같은 생물은 부모 없이는 태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효모 등 미생물은 자연히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발효를 연구한 결과 세균이 공기 속에 있으며, 이들이 물체에 붙거나 액체에 뛰어드는 것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지 않는 한 알아차릴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은 파스퇴르뿐이었으며 고명한 과학자나 교수들도 이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증거가 없으면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과학자로서의 자기 인생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기로에 선 그는, 자신에게는 오직 하나의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확고한 증거만 찾아낸다면 과학자들을 자신이 믿고 있는 방향으로 유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세균이 없으면 발효도 부패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까지는 그가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체나 썩은 고기에는 부패라는 현상에 의해서 세균이 발생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반대, 다시 말해서 세균 자체가 부패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입증해야 좋을 것인가. 우선 균이 밖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부터 생각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 속의 균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인 다음, 그 입을 막아, 그 이후에는 새로운 균이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그는 스팔란차니가 100년 전에 실험했던 것과 비슷한 실험을 생각해 냈다. 우선 설탕이 들어 있는 효모 용액을 몇 개의 플라스크에 넣고, 안의 세균을 죽이기 위해 끓이면서 그 동안에 플라스크의 입을 녹여 밀봉했다. 다음은 밀봉된 플라스크를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제1그룹에서는 플라스크의 목을 잘라 공기를 넣고 다시금 유리를 녹여 밀봉한다. 제2의 그룹은 세균이 번식하기 쉬운 온도를 유지하는 배양기 속에 넣었다. 결과는 확실했다. 목을 잘라 공기를 넣은 쪽 플라스크에는 효모나 기타 세균이 번식했지만, 밀봉한 채로 있는 쪽에서는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았다. 파스퇴르는 이와 같은 실험을 여러 차례 되풀이 해 보았다. 우유나 요 및 혈액과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용액을 가지고도 실험해 보았다. 액체를 끓여 밀봉한 다음 입을 열어 배양하는 이와 같은 작업을 되풀이해 자신의 생각이 옳은가를 조사해 보았던 것이다. 이로써 세균이 밖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자연 발생설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반론했다. 즉 공기와 떼어놓으니까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끓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공기만 있으면 세균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이에 대해서 그는 여전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아직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미개발의 영역으로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공기 중에 어떤 것이 이와 같은 생물을 낳게 하는 것일까. 그것이 세균일까, 고체일까, 아니면 액체나 기체일까,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속 실험할 수밖에 없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동안 그는 다시금 자신의 실험을 계속했다. 그는 세균을 운반하는 것이 공기 자신이 아니라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먼지일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연구해 봐도 공기만을 플라스크 안에 넣는 일은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세균과 함께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를 도와준 사람이 연상의 화학 교수인 발라르(A,J. Balard)박사였다. 발라르 박사는 남이 실험하는 광경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기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파스퇴르의 실험실에 찾아온 박사는 매우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세균과 공기에 대해서 파스퇴르와 같은 의견이었던 박사는 그의 실험에 기꺼이 협력하기로 하고 함께 연구한 끝에 마침내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는 플라스크의 길다란 목 부분을 가열해 그곳을 아래쪽으로 S자형으로 휘게 해 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면 공기는 굽은 부분을 통해서 흘러 들어가지만, 먼지는 중력이 있으므로 굽은 부분에 걸려 안에까지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파스퇴르는 발라르 박사의 말대로 실험을 해 봤다. 그랬더니 정말 박사의 말대로 공기는 S자형의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지만 먼지나 세균은 S자형 부분에 걸려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으므로 플라스크는 여전히 깨끗했으며, 균에 의해 번진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1세기가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백로의 목 모양의 플라스크는 그대로 남아 있어 파스퇴르의 실험의 증거가 되고 있다. 또한 이 플라스크는 발라르 박사처럼 오직 진리만을 추구한 과학자들의 너그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생각게 해 주고 있는 점에서도 귀중하다.
공기 중의 먼지의 양은 장소에 따라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효모 용액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를 여러 개 준비해 그 중의 10개는 파리 천문대의 지하실에, 다시 10개를 천문대의 정원에, 이어 20개를 자기 고향의 가까운 언덕 위에, 다시 20개를 몽블랑의 정상까지 운반해서 실험했다. 그 결과 지하실에 두었던 10개의 플라스크 중 세균이 번식한 것은 고작 한 개뿐이었다. 지하실에서는 공기의 움직임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으므로 먼지도 적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런데 정원에 놓아 두었던 10개의 플라스크는 단 한 개에도 세균이 번식하지 않았다. 고향 근처의 언덕으로 운반한 20개 중에서는 8개에, 그 언덕보다 좀 높은 곳에 놓아둔 20개 중에서는 5개의 플라스크에 균이 번식했다. 그리고 몽블랑 정상에 놓아 둔 플라스크에서는 20개 중 한 개에만 균이 번식했다. 이렇게 하여, 1860년 11월 그는 이 실험 결과를 과학 아카데미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들 실험 결과에 따라 공기 중의 먼지야말로 액체 속에 생기는 생명의 유일한 기원이며, 첫째로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지고 추가했다.
이제부터 가장 바람직스러운 일은 이들의 연구를 더욱 깊이 하여 각종 전염병의 기원을 알아내는 일일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파스퇴르는 자신을 포함한 당시의 과학자들을 발견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실험을 끈기 있게 계속해서 그 문제가 속시원히 밝혀질 때까지 지속해 나갔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곧잘 날카로운 의견이 교환되었지만, 그는 반대 의견을 하나도 그냥 두지 않고 깨버렸다. 어떻든 반대 의견은 많았다. 과학적인 근거에 따른 것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자신의 지위를 뽐내기 위해 무조건 방해를 하기 위한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과학 아카데미에서 실제로 자신의 실험을 공개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했다. 40세가 된 1862년에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에 선출되었다. 그때 그는 매일 강의를 하면서 과학자들에게 상상력의 불을 붙여 주었다. 1850년대와 1860년대는 과학계는 물론이고 세계에 있어서도 가슴 설레는 시대였다. 그렇지만 파스퇴르의 개인 생활에서는 슬픈 일이 생겼다. 즉 1859년 9월 맏딸이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자세한 내용은 잘 알 수 없지만, 이 딸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결심은 한층 더 굳어졌으며 전염병 극복을 위한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세균은 어디에나 있다
그는 일반 사람들도 세균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864년 4월 그는 소르본 대학에서 과학자, 학생, 장관 및 유명한 작가나 공주 등 많은 청중을 모아 놓고 연설했다. 우선 그는 대강당의 조명을 다 꺼서 캄캄하게 한 다음 한 줄기 광선을 비추었다. 그러자 공기 중에 무수히 먼지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넋을 잃고 바라보는 청중에게, 이 먼지의 입자 속에 엄청난 균이 있다고, 그가 설명했다. 그 다음 그는 두 개의 플라스크를 보여 주었다. 한쪽 플라스크의 효모 용액은 탁했으며 세균이 가득했지만, 다른 한쪽 플라스크의 효모 용액은 투명했고, 실험으로부터 4년이 경과했는데도 전연 균이 붙어 있지 않았다. 갸름하고 굽은 목이 세균의 침입을 방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개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는 청중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이 두 개의 플라스크는 똑같은 액체와 똑같은 공기로 차 있으며 두 개가 다 입이 열려 있습니다. 단지 한 가지 차이는, 한쪽은 공기와 세균이 플라스크 안에 들어가 액체에 닿아 그곳에서 작은 생물을 만들었지만, 다른 한쪽은 공기 중의 세균이 액체에 닿기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한편 파르퇴르는 세상 사람들이 세균설을 아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포도주 박사로서의 일도 했다. 고향의 포도주 제조업자들이 도움을 청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제조한 포도주 중 딱하게도 반드시 식초처럼 시어지는 것이 있는가 하면, 오랫동안 단맛을 유지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호소해 왔기 때문이다. 그는 문제의 포도주를 즉시 현미경으로 조사해 이내 그 범인을 잡아냈다. 포도주 통 안에 많은 세균이 있어 그것이 술을 시게도 하고 쓰게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각종 실험을 시작해 발효가 끝난 직후 어느 정도의 온도로 가열해야 포도주의 맛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균을 죽일 수 있는가를 제조업자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것이 바로 '저온 살균법'이라 불리는 방법이었다.
스코틀랜드에 조지프 리스터(J. Lister)라고 하는 선견지명이 있는 의사가 있었다. 그는 외과 의사로서, 어느 날 파스퇴르의 공기 중의 세균설이 증명되었다는 것을 읽어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어떻게 하면 전염병을 방지할 수 있는가 하고 골치를 앓고 있던 중, 그것을 읽고,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무렵의 병원은 상처나 피에서 나오는 고름 냄새로 가득 차 있는 기분 나쁜 장소였다. 환자들은 자신의 병이 아니라, 병원에서 전염된 병으로 죽는 일이 많았으며, 수술 후의 사망률이 특히 높았다. 리스터의 환자들은 수술을 한 후, 회복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4일째경부터 상처가 세균에 감염되어 얼마 후에는 죽어 갔다. 그러나 파스퇴르의 과학 아카데미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난 후부터, 그의 이론에 공감해, 1867년까지는 그의 병동에서 상처를 처리하는 기구를 전부 강한 석탄산 용액 안에 담그도록 했다. 이 용액은 세균을 죽이게 된다. 의사들은 이 석탄산에 손을 씻고, 수술중 상처에는 이 산의 스프레이를 뿌렸다. 수술 후에는 상처를 다시 이 용액으로 소독하고 붕대 등도 살균된 것을 사용했다. 한때 수술 후의 환자들은 최소한 100명 중 50명이 사망했지만 이 방법을 도입한 직후에는 그 사망률 100명 중 15명으로 줄었으며, 얼마 후에는 100명 중 3명이 되었다. 한참 후의 일이지만 1874년 리스터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파스퇴르에게 보냈다.
이 기회를 빌어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싶습니다.당신의 훌륭한 연구는 부패가 세균에 의해 일어난다는 것을 저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소독법을 실천할 수 있는 원리를 제게 알려 주셨습니다.
프랑스에서 살균제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1871년 보불 전쟁이 끝난 후 어떤 외과 의사가 파스퇴르의 생각에 주목하게 되어 외과 의사는 병사들의 상처를 곪게 하는 것이 세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술에 사용하는 기구를 소독하고 상처 언저리의 공기를 정화하곤 했다. 그렇지만 인간이 무엇에 의해 병에 걸리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인 채로였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병은,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의 일부이고 인간에 의해 활동을 시작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병이 부패와 관계된다는 생각은 예로부터 있었다. 파스퇴르보다 200년이나 전에 로버트 보일(R. Boyle)이라는 영국의 과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효소나 발효의 성질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를 무시하는 사람보다 전염병의 각종 현상을 훨씬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발효 현상을 이해하고 있던 우리으 파스퇴르야말로 우연한 일이 겹친 것도 도움이 되어, 새로운 지식이 넘쳐 흐르게 되는 길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된다.
전염병으로 세 딸 잃고 자기도 반신불수
그 무렵 사람들은 전염병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파리와 마르세유에서 콜레라가 발생해 하루에 200명이나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전염병은 개인적인 면에서도 그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미 맏딸을 장티푸스로 잃은 데 이어 1865년 9월에는 넷째 딸이 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집안의 불행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로부터 8개월 후에는 12세 된 둘째 딸이 역시 장티푸스로 1866년 5월 사망했다. 이것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의사이면서도 죽어 가는 자식들을 위해 전연 손을 쓸 수 없었으니 얼마나 분하고 안타까웠을까. 더구나 그 무렵에는 누에고치의 병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던 때라 자신의 연구 결과가 옳은가 아닌가에 사활을 걸고 있는 양잠업자들에게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1868년 10월, 그는 파리로 돌아갔다. 19일 눈을 뜨자 뭔가 몸이 이상했다. 몸의 왼쪽 절반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고 통증이 있었다. 오후가 되자 그 증상은 온몸으로 번졌다. 그러나 그날 밤 어떤 이탈리아 과학자 대신 과학 아카데미에 논문을 제출할 약속을 했으므로 꼭 외출해야 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그는 이내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몸이 이상했다. 밤 사이에 상태는 더욱더 악화되었다. 이제는 말도 할 수 없었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몸의 왼쪽 절반이 마비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그때 곧 46세를 맞이하게 되어 있었다. 그 전에도 뇌출혈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으므로, 주의 사람들은 그가 그만 죽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될 많은 일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내가 생각하고 있는 많은 일들을 해내기 전에는....'
그는 반신불수의 불편한 몸으로도 자기 자신을 격려했다. 억척스럽기 그지없는 강한 정신력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이었는지 얼마가 지나자, 처음에는 단어를 지껄일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얼마 후에는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까지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1주일 후에는 조수들을 위해 메모까지 써서 넘겨주었다. 분명히 왼손과 오른손이 마비돼 있었지만, 그는 그런 일에 꺾일 수 없다고 다짐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자기가 시작한 누에고치 연구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현지로 출발했다. 반신불수 발작 이후 그는 자기가 실험 기구를 직접 다룰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자잘한 조작을 조수들에게 맡겨 놓았다. 그 동안에 파스퇴르에 협력해 일한 조수들 중에서 훗날 위대한 과학자가 많이 탄생했다.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파스퇴르의 연구에 감화를 받았으며, 동시에 그의 정열과 꺾일 줄 모르는 강한 정신력에 감동한 것이다. 누에고치를 연구하면 할수록, 효모의 발효와 동물과 인간의 전염병 사이에 뭔가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커져 갔다. 파스퇴르는 다시금 도료인 과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이 지구상에서 전염병이 쫓아내는 것은 인간의 힘입니다. 자연 발생설은 잘못된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그의 예언을 무시했다. 전염병이 미생물에 의해 발생한다니! 그런 바보 같은! 그렇지만 그의 호소가 전연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파스퇴르가 표시해 보인 중요성을 다시 확인하고, 의심을 풀었으며 그의 예언을 실제로 현실화한 것은 독일의 시골에 사는 어떤 의사였다. 동프러시아에 로베르트 코흐(R. Koch)라는 의사가 있었다. 코흐는 어렸을 때에는 탐험가가 되고 싶어했다. 그런데 의사가 된 그는 자신이 병을 고치지 못하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해, 부인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현미경을 선사받았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신경질이 다소 가라앉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코흐는 그 현미경 밑에 끈적끈적하고 거무튀튀한 혈액을 떨어뜨려 보았다. 그 혈액은 당시 유럽 전체의 양과 소를 엄습하고 있었던 탄저병이라는 전염병으로 죽은 동물에서 채취한 것이었다. 현미경을 들여다본 순간 코흐는 혈액 속에 막대와 같은 미생물이 우글우글한 것을 발견했다. 강한 호기심과 모험가로서 피로를 모르는 본능에 의지하면서 그는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결과, 그 막대와 같은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동시에 그것들이 번식하는 일 하며, 건강한 동물에서는 전연 볼 수 없으며, 포자로 변형해 다시금 활동하게 될 때까지 그 모습으로 생존하고 있는 일 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병균만이 탄저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 문제로 구하기 시작한 지 3년 후인 1876년 4월, 코흐는 옛날 의학을 가르쳐 준 교수들을 만나,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특정 세균이 특정의 병을 일으킨다는 결론으로, 파스퇴르가 누에고치의 병 연구를 통해서 거듭하여 주장하고 있는 일을, 코흐가 증명해 낸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매년 온 세계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전염병, 이를테면 콜레라, 장티푸스, 결핵, 폐렴, 매독, 디프테리아, 페스트 등을 일으키게 하는 세균을 찾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10년 동안, 과학자들의 눈길은 이들 세균을 향해 쏠렸다. 그들은 현미경을 통해 그 작은 생물체를 찾아내서 배양해 그것이 어떤 식으로 살아 있으며, 어떤 식으로 죽는가를 연구했다. 코흐가 전염병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냈으므로, 그 다음은 파스퇴르가 그 치료법 개발에 나서게 되었다.
면역학을 창안하다
자신의 이론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굳힌 파스퇴르는 병이란 살기 위한 투쟁, 다시 말해서 세균이 침입하려는 세포 조직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 국내를 여행했을 때 파스퇴르는 탄저병에 걸려 있던 소가 자연적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더구나 그 후에 그 소에 강력한 탄저병 균을 주사했지만 그 소는 결코 죽지 않았다. 병에 걸림으로 해서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병에 대한 저항력이 붙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당분간은 그저 생각에만 머물러 그것이 구체화하기 위한 적당한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파스퇴르는 의사가 아니었으므로 연구실에서 실험하는 화학자가 의학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비난하는 의사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파스퇴르의 연구가 세상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 1873년 파스퇴르는 의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파스퇴르는 여러 젊은 박사들을 조수로 고용했다. 그들은 인간이나 동물에 관한 새로운 지식이나 의학적인 방법을 파스퇴르의 연구실로 가지고 들어와, 파스퇴르는 전염병 억제를 향한 연구를 한층 더 폭넓게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1979년 파스퇴르는 닭 콜레라라는 병을 일으키는 세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는 닭의 10분의 1이 병으로 죽어 가고 있었다. 파스퇴르는 닭고기 수프 속에서 이 세균을 배양하는 일에 성공했다. 옛날의 과학자들과 똑같이 그 역시도 미생물이 분열에 의해 증가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이해의 밑바닥에서는 어떻게 하면 전염병을 억제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어떤 미생물은 7,8시간 후에는 몇 백만 개나 되는 수로 증식되었다. 서로 다른 종류의 미생물이 많이 있는 곳에서는 미생물끼리 싸움을 전개해 그 결과 승리한 쪽이 그 물질 또는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승리한 쪽이 그 물질 또는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어떻든 파스퇴르는 수프 속에서 배양한 세균 즉 배양균을 닭에 주사하게 되면 2, 3일도 지나기 전에 전부 죽어 버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무렵은 여름이었으므로 그와 조수들은 여름 휴가를 떠나 닭이나 콜레라의 배양균에 대한 일은 일단 소홀히 취급하게 되었다. 여름 휴가로부터 돌아온 그는 배양균을 버리려다가 문득 마음이 변해 닭에 주사해 보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우연히도 닭에 닭 콜레라 균을 듬뿍 주사했던 것이다. 그 닭은 가벼운 병에 걸리긴 했지만 이내 회복되었다. 보통 같으면 이미 병의 증상이 나타나 있을 텐데, 닭은 대체로 건강했으며 행복한 듯이 닭장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탄저병으로 죽지 않았던 소의 사례를 생각해 낸 그는 완전히 흥분하게 되었으며, 오래된 배양균을 좀더 많이 닭에 주사해 보았다. 그러자 처음과 마찬가지로 닭들은 계사 주위를 힘차게 뛰어다녔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결과에 그의 마음은 불이 붙은 듯이 기쁘게 타올랐다. 그 다음 그는 닭들에게 보다 강력한 배양균을 주사했다. 그것은 주사를 하면 그 즉시 죽어 버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그런데 한 마리도 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그는 오래된 배양균을 접종하지 않은 닭에 새로운 배양균을 주사해 보았다. 그러자 한 마리도 남지 않고 다 죽어 버렸다. 이를 보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실험 연구의 분야에서는 우연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의 편이 된다.
우연히 일어난 일을 그는 재빨리 이해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에서는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E. Jenner)에 의해서 개발된 우두법에 따라 우두 접종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파르퇴르의 닭 콜레라 균의 경우는 그것하고 달랐다. 그것은 똑같은 병으로 약해진 병원균 자체가 그 병과 싸울 저항력을 몸안에 불러일으킨 것이니까 말이다. 파르퇴르는 머리 속의 여러 가지 의문들을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모두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는 이를 제너의 치료법을 따라 백신 주사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우리들은 사전에 병원균을 접종해 그 병을 예방하는 일을 백신 주사 또는 예방 접종이라 부르고 있다. 그 밖에 어느 정도의 병원균이 실험실에서 배양이 가능하며 이를 백신으로서 사용할 수 있을까. 파스퇴르는 그 자신의 타고난 호기심과 탐구심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동안, 그와 같은 것을 찾아서 오직 연구를 계속해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후 죽을 때까지 그는 병원균의 증식력을 약하게 만드는 방법, 즉 다시 말해서 병을 일으키지 않고 이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몸이 만들 수 있는 정도로 균을 약하게 하는 연구에 몸을 바치게 된다.
탄저병 백신을 발견하다.
코흐가 훌륭한 연구 성과를 발표한 탄저병에 대해서 파스퇴르도 얼마 동안 연구를 했다. 과학자들이 그 원인을 밝혀냈지만 프랑스의 목축 지대에서는 수천 마리의 가축들이 여전히 죽어 가고 있었다. 양의 무리들이 턱턱 쓰러져 거의 반수가 죽었다. 사람까지도 상처를 통해 감염되어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탄저병 백신을 발견하기까지에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파스퇴르 등의 1877년 이 연구를 시작해 1879년에는 닭 콜레라의 배신을 발견했다. 이 탄저병 백신이 성공한 것은 1881년 2월의 일이다. 그런데 파리에 가까운 어떤 농촌 마을에서는 농민들이 이 백신을 의심해, 파스퇴르에게 공개 실험을 해 보라고 요청했다. 파스퇴르는 그와 같은 도전을 받아들여 1881년 5월 한 농장에서 그 유명한 공개 실험을 실시했다. 수의나 농민뿐 아니고 심지어는 장관을 비롯해서 과학자들과 멀리 영국에서 온 신문 기자들이, 파스퇴르와 그의 조수 두 명과 양들의 동작을 지켜보았다. 50마리의 양이 두 개의 그룹으로 구분되었다. 첫 번째 그룹의 25마리에는 백신 주사가 2회 접종되었다. 처음에는 오래된 약한 균이 주사되었으며 그리고 두 번째는 그로부터 12일 후에 저항력을 강화하기 위해 보다 새롭고 강력한 균이 접종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룹의 양들에게는 백신 주사를 일체 접종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두 그룹의 양들을 들판에서 따로따로 생활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들 50마리 모두에게 치사량의 강력한 탄저병 균을 주사했다. 겉으로는 자신만만해 보였던 파스퇴르였지만 내심으론 걱정이 돼 밤에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농장으로부터 결과를 알리는 전보가 도착했을 때도 도저히 자기 손으로 뜯어볼 요기가 없었다. 대신 개봉한 그의 부인의 손조차도 덜덜 떨렸다. 양의 수를 되풀이해서 세고 있는 동안, 그곳에 모여 있던 관리나 과학자 및 농민들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결과는 백신 주사를 맞은 쪽 양은 모두 원기 왕성하게 뛰어놀고 있었지만, 백신 주사를 맞지 않은 양들은 전부 죽었거나 빈사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파스퇴르와 그의 조수들이 다시금 그 농장을 찾았을 때 주변 곳곳에서 일제히 환성이 일어나 그들을 환영했다. 파스퇴르로서는 감격스러운 한 순간이었으며,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의 연구에 대해 참다운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 후 그의 연구소는 백신 제조소로 변신했다. 그는 몸이 불편한데도 피로를 잊고 조수들과 더불어, 동물에게 백신 주사를 접종하기 위해 프랑스 안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많은 동물이 예방 접종을 받게 되었다. 프랑스 안에서만 50만 마리의 양과 8만 마리의 소가 접종을 받았다고 한다. 백신을 만드는 일에 문제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순수한 것을 만들기가 어려웠으며 따라서 탄저병이 일어나기도 했고, 백신으로서는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의학계에 커다란 비약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유럽 전체의 목축 지대를 엄습하고 있던 병을 사전에 막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웠던 마지막 도전
오늘날 파스퇴르는 탄저병보다 광견병의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광견병이란 무서운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린 개나 늑대에게 조금이라도 물리게 되면 몸이 덜덜 떨리며 경직 상태가 되어 질식사하거나 온몸이 마비돼 버린다. 또한 광견병에 걸리면 누구나가 정신 장애를 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 병원균이 아무래도 뇌라든가 척수와 같은 중추 신경 안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광견병에 걸려 죽은 개의 척수에서 신경 세포의 조각을 끄집어내어 토끼의 뇌에 이식했다. 2주일 후 그 토끼는 광견병에 걸렸다. 그리고 그 토끼가 죽게 되면 그 척수를 꺼내어 또 다른 토끼의 뇌에 이식하는 식으로, 이런 작업을 25회나 되풀이했다. 그러자 균이 강해지며 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1주간으로 줄어들었다. 더 이상 균을 강력하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한 파스퇴르 등은 그렇듯 강한 균에 감염된 척수의 조각을 빼내어, 이번에는 이를 약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당시 파스퇴르는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금년에 나는 개에게 광견병의 예방 접종을 받게 하는 일을 실증했습니다. 그렇지만 광견병에 걸린 인간에게 도저히 그것을 주사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1885년 7월 6일, 일요일 아침에 아홉 살짜리 소년을 동반한 한 부인이 파스퇴르의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 소년은 이틀 전 알자스의 마을에서 미친개에게 얼굴과 손 그리고 몸을 물렸노라고 했다. 파스퇴르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스러웠다. 광견병 백신을 인간에게 접종하는 데는 아직도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의학 아카데미의 동료들과 상의했다. 과연 소년이 광견병에 걸릴 것인지. 소년의 몸을 살펴보자 깊은 상처가 14곳이나 있었으며, 모두가 그 소년이 광견병에 걸릴 게 틀림없다고 대답했다. 소년에게 백신 주사를 놓게 되면 그 소년은 죽고 말는지도 모른다. 주사를 놓지 않아도 소년은 아마 죽어 버리거나 온몸이 마비되고 말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파스퇴르는 위험을 각오하고 백신 주사를 놓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7월 6일 밤에, 그는 의사를 불러 15일 전에 광견병으로 죽은 토끼의 척수에서 추출한 독성이 약한 백신을 소년에게 주사했다. 그로부터 10일간 전날의 것보다 약간 강한 백신을 매일 계속 주사했다. 그러자 상처도 나았을 뿐만 아니라 그 소년은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식은 이내 온 세계로 전파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광견병에 걸린 개나 늑대에게 물린 농부들이 파리의 파스퇴르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몰려왔다. 그리하여 광견병에 걸려 죽게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 백신 덕택으로 살아났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상당수가 된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동물뿐만이 아니고 인간의 생명까지도 구할 수 있는 이 백신의 발견은 그만큼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 과학 아카데미는 광견병을 치료하기 위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의 반응도 대단했으며, 온 세계로부터 많은 기부금이 답지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70세 가까이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1887년 64세 때 두 번째 뇌출혈 발작이 엄습해 왔으므로, 그는 도저히 혼자서 실험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제자들이나 동료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888년 11월 그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가 정식으로 발족했으며, 이로써 그는 자신의 인생의 원동력이었던 과학에 대한 정열과 꺾일 줄 모르는 강한 정신력이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1895년 9월 28일, 파스퇴르는 가족이나 동료들 그리고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2세의 생애를 끝내게 된다. 거의 반세기 동안 파스퇴르는 과학계를 지배했으며 사반 세기 동안이나 반신불수의 몸에 채찍질을 하며 계속 일해 왔던 것이다. 지금 그는 없지만 그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다. 그 정신은 파스퇴르가 남겨 놓은 지식을 계승한 과학자들이나 의사들의 마음속에 내내 살아 있는 것이다.
파스퇴르가 키운 조수들 중에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루(P.E. Roux)박사와 에르생(A. Yersin)박사는 한 때 1년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어린이의 생명을 앗아간 티프테리아의 치료법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가장 두뇌가 명석한 조수였던 메치니코프(E. Metchnikoff)는 사람의 몸이 어떤 식으로 세균하고 싸워 면역을 키우는지를 분명히 밝혀냈다. 에르생 박사는 그 밖에도 페스트 균을 발견해 냈다. 나이가 들어 은퇴한 파스퇴르에게 현미경을 통해 그것을 보게 해 주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고 한다.
"아직도 할 일이 산처럼 많아."
천재 파스퇴르는 그야말로 위대한 일을 해낸 것이다. 어떤 일이든 혼자서는 해낼 수가 없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의 도움과 그 이전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축적된 지식이 뒷받침이 돼야만 가능하다. 그런 것이 있었기 때문에 파스퇴르처럼 한 가닥 한 가닥의 실을 꼬아 모아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본인의 노력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개인의 끈질긴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만약 파스퇴르가 그렇듯 악착같은 노력형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서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끝가지 싸워 관철시키는 강한 의지가 없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리스퍼와 같은 깊은 통찰력을 가진 의사가 파스퇴르가 연구할 사실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면 의학에서의 그와 같은 발전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파스퇴르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분은 나에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과학과 평화가 무지와 전쟁에 승리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미래는 개척된다고 나는 믿는다. 그와 같은 신념은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연구는 계속된다.
인류는 몇 세기가 되는 긴 세월 동안 정체 불명의 병으로 시달려 왔다. 그러나 1870년대 및 1880년대에 전염병에 관한 파스퇴르의 획기적인 연구부터 시대는 급속히 발전해 왔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전염병의 병원균이 프랑스에 있는 파스퇴르의 연구실과 독일에 있는 코흐의 연구실에서 확인되었다. 1895년에 파스퇴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어떤 전염병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는 최초의 증거가 이미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바이러스의 모습이 확실히 밝혀진 것은 1938년 전자 현미경이 발명된 후의 일이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들어갈 무렵에는 디프테리아나 파상풍의 균을 죽이는 약이 개발되었으며, 사람들은 이들 전염병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888년 루와 에르상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디프테리아의 독소를 끄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파상풍의 독소는 1890년 코흐의 연구실에서 확인되었다. 20세기가 되자 두창, 결핵, 황열병, 광견병, 폴리오(소아마비), 콜레라, 홍역, 장티푸스, 백일해, 풍진, 인플루엔자와 같은 병에 대한 효과적인 백신이 계속해서 개발되었다. 또한 페스트의 백신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20세기 최대의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항생 물질의 개발일 것이다. 이는 인체에 전연 해를 끼치지 않고 병을 고칠 수 있는 획기적인 물질이었다. 1941년에 처음으로 페니실린이 사용된 이래 계속해서 다른 항생 물질이 개발되고 있다.
루이 파스퇴르의 발효 연구가 과학자들을 전염병 해명으로 몰고간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최근 100년의 발자취 중에서 파스퇴르의 연구야말로 최고봉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스퇴르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 놓은 사람으로서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생각은 당시의 과학자들에게 사물의 탄생, 생명, 부패 그리고 죽음 같은 것을 이해시키는 데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에 완전히 새로운 학문이 계속 탄생되었다. 첫째는 세균학이며, 예방 접종과 면역법과 같은 전염병의 원인, 억제 그리고 예방에 관한 과학적인 연구가 진척되었다. 이로써 처음으로 병원균에 대한 면역이 인공적으로 가능해졌다. 또한 무균법도 발견되었으며 병원에서는 세균의 번식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으며 특히 수술에 도움이 되었다. 한마디로 파스퇴르가 연구해 찾아낸 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실증한 것이라 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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