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주인의 원수를 살려둘 수야...
조선조 전기에 정순붕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과거에 급제하여 정암 조광조 등 신진사류와 섞이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따로 놀았다니 어딘가 인간성의 결함이 그들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전화위복으로, 그들과 멀었던 때문에 도리어 덕을 보아, 중종 14년에 벌어진 기묘사화에 말려드는 것을 면하고 순탄하게 벼슬길을 걸었다. 대사헌을 거쳐 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을 때, 왕위 계승문제를 놓고 같은 윤씨 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본시 중종에게는 장경왕후 몸에 낳은 세자와 후취인 문정왕후 몸에서 얻은 경원대군이 있었는데, 인종의 외숙 윤임의 일파를 대윤이라 하고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형 일당은 소윤이라 하여 대립해 있었다. 당연한 추세로 인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은 대윤의 세상이었으나, 그가 재위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고 명종이 왕위에 올라 이번에는 소윤 일파가 득세하여 대대적인 보복을 하니 이른바 을사사화이다. 정순붕은 이기 등과 함께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유인숙, 유관 일파를 숙청하고, 자기 편에 가담 않는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 사림들을 몰아내는 데 적극 참여하였다. 그 공로로 일당은 크게 세력을 떨쳐서 국정을 주물렀으나 굳게 믿었던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 몰락하여 20여 년 동안의 영화는 비참한 결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정변이 있을 때면 언제나 반대파는 역적으로 몰리어 폭삭 망하고, 이긴 쪽은 충신으로 대접받아 공신으로서 높은 지위에 올라 권력을 휘두르게 마련이다.
망해버린 가문의 재산은 몰수되어 새로 된 공신들 손에 들어가고, 가족 중 남자들은 모조리 죽여서 씨를 말리고, 여자들은 신분을 떨구어 공신들 집안에 종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신세가 말이 아니다. 이 얘길 쓰면서 생각나는 것이, 세조 때 단종의 사육신들 가족의 말로다. 인정있고 체통을 아는 가문에 떨어진 분은 그래도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겠지만, `이년 저년, 너의 집 종년이냐?` 하듯이, 한다 하는 명문의 귀한 딸이 종의 신세로 궂은 일을 하다가, 무지막지한 놈을 빈부로 맞아 남편으로 받들고 지내야 했겠으니, 생불여사라 하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을사사화에서도 비참하게 망한 대윤 일파 대갓집 가족들은, 일약 충신이 된 가문에 가 종살이를 해야만 했다. 정순붕의 가문에도 물론 그의 손에 희생당한 대갓집의 수많은 하인들이 상급으로 주어졌다. 그래 유인숙의 옛 하인들도 곧 많이 정순붕의 소유로 돌아갔는데, 모두들 소릴 죽여 울면서 새로운 상전 댁으로 배정받아 가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는데, 저런 발칙한 것이 있나? 해반주그레하게 생긴 계집애 하나는, 조금도 섭섭해 하는 것 없이, 새로 들어간 상전들에게 아양을 떨었다. 그쪽에서야 찔찔 울고 옛상전 생각이나 하는 애들보다야 지연 그애에게로 마음이 갈 것이고, 거기다 예쁘장한 데다가 영리하기 이를 데 없다. 정순붕도 그 애를 극진히 아끼고 사랑하여, 나중에는 신변 가까이의 일은 도맡아 그 애에게 맡기다시피 되었다. 그런데 주인 대감이 꿈자리가 사나와 괴로워 하더니, 그 증세는 차츰 더해져 나중에는 매일 저녁 자다가도 가위를 눌리어 소리쳐 깨어나 헛소리를 하고, 이것은 누가 보나 귀신들린 증세다. 의원을 불러다 보여 약도 쓰고 별 짓을 다해온 정경부인은 짚이는 데가 있든지 이름난 무당을 불러다 보였더니, 아니나다를가 누군가가 예방을 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예방이라면 저주라고 하여 요사스런 방법으로 귀신의 힘을 빌어 상대방에게 벌역을 내리게 하는 일이다. 그리 신변의 물건을 샅샅이 까뒤집어 살펴나갔더니, 주인이 베고 자던 베개 속에서 사람의 해골 뼈가 나오지 않는가? 주인은 병이 중하여 이미 숨을 모으고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누가 한 짓일까?
“나의 상전이 무슨 죄가 있길래, 그 댁을 그 꼴로 만들었더냐? 그 동안 몇해를 벼르고 별러 이제 소원을 뤘웠으니 더 살생각은 없다. 어서 죽여라.”
주인대감의 몸은 차츰 식어갔고, 여자로서 활짝 피어보지도 못한 이 계집종은 그 자리에서 매맞아 죽었다. 자손들은 이 사실을 극비에 부쳐 주인은 그저 심상히 죽은 것으로 새상에 알려졌는데, 주인공의 둘째 아드님 고옥이 나이 70이 넘어 유언으로 말하였다.
“내 평생에 가문의 불명예로 여겨 안팍으로 입을 봉해 왔으나, 그 계집의 의열이 하도 가상하기로, 그냥 묻어버리기 아까와 이제 세상을 뜨면서 처음으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런 올곧은 아버지를 모신 아들들의 그 동한 처신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아들은 형제였는데 맏이는 호가 북창, 아우가 앞에 말한 고옥으로 두 분 다 뛰어난 재주와 기개로 이름났건만, 아버지의 행적에 부담을 느껴, 세상에 나설 뜻을 포기하고 시와 술로 한평생을 즐기면서 보낸 때문에, 아까운 인재를 썩혔다는 의논도 있었으나, 그런 일면으로 이 두 분의 생애를 신선에 비하여 이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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