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실수와 고의는 엄연히 다른 법
동래 정씨에 홍순이라는 이가 있었다. 영조 21년 을축에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쳐 우의정에까지 오른 분이다. 그가 호조판서로 예조판서를 검하고 있을 때, 저 유명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서 죽게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연히 예조판서 책임하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그는 모든 절차를 될 수 있는 한 후하게 하고, 염습하는데 쓰인 옷감에서부터 시신에 신기는 신발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재료를 한조각씩 따로 떼어, 그 당시의 경비 쓴 문부와 함께 궤짝에 넣고 굳게 봉하여 두었다. 그리고 그 궤짝의 열쇠를 몸소 지니고, 믿을 만한 서리에게 일렀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니 부디부디 이 궤를 단단히 간수 하렸다.”
아니나 다를까, 영조가 연세 높아 승하하시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니, 까딱 잘못했다가는 연산군의 재판으로 일대 보복의 형옥이 일어날 판이다. 자기 아버지를 혹시라도 소홀하게 다루었을까 하여 왕은 상례 당시의 담당관을 물었다. 곧 어전에 불려 들어간 그는 이미 일러두었던 서리에게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하고, 몸소 차고 다니던 열쇠로 열었다. 그리하여 이러이런 천으로 이러이러한 옷을 지어 입혀 드리고 이러한 재료로 이런 것을 만들어 넣어 드려 경비는 암만암만이 나고... 재료 견본과 함께 손살피같이 밝혀진 사실을 보고, 정조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아버지를 위해 쏟은 그 정성, 오늘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만반의 대비를 갖춰놓은 그 꼼꼼한 일솜씨... 임금은 크게 감동하였고 그래 정승으로 승진시켜 국가대사를 의논하게 된 것이다.
그보다 앞서 그가 평안감사로 있을 당시의 일이다. 기생 하나가 사또가 안계신 틈을 타 담배를 조금 훔쳐서 피웠다. 자리에 돌아와 담배 함 안의 것이 대중에 틀리는 것을 알고는, 누가 그랬는가를 밝혀, 예의 기생은 끌려내려가 매 30대의 무서운 형벌을 받았다. 그런지 얼마 뒤 일이다. 심부름하는 통인이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전신을 비춰보는 체경을 깨뜨리자 겁에 질려서 떨었다. 담배 한두 대에 그런 형벌을 내리던 사또인데.... 자리에 돌아와 대령할 아이들 하나 없이 텅 빈 것으로 보고 다른 하인에게 물으니 그런 사정이라, 모두 불러 오게 해 잘 타이르고, 깨어진 것이나마 한쪽씩 나눠갖게 하고는 다시는 말이 없다. 그 당시 유리로 된 거울은 정말로 귀중품이었으므로 측근에 모셨던 이가 의아해서 물었다.
“거울을 깨친 것이 먼젖번 담배에 비할 것이 아닌데, 먼젓건 벌하고 이번엔 그냥 두시다니...” “그게 아냐! 먼젓건 고의로 그랬으니 소행이 발칙하고 이번거야 철모르는 아이들이 실수로 그런 거 아닌가베.”
그 정승에게 딸이 있어 걸맞는 감의 수재를 사위로 맞게 됐는데, 혼사에 쓸 부비를 부인과 의논하니, 혼수에 8백냥, 잔치비용에 4백냥의 예산을 가져야겠다고 한다. 그런데 혼인날이 다 되도록 피륙을 안 들여와 부인이 안절부절한다
“장사꾼이 가져오마고 하더니 웬 일인고? 할 수 있소? 입던 옷이나 빨아 입혀서 보낼밖에...”
또 잔칫거리를 들여오지 않아 성화를 하니까,
“가져오마더니 웬 일인고? 할 수 있소? 그냥 있는 것 가지고 치르지.”
그렇게 치뤄진 혼례이니 딸은 물론 사위도 은연중 불평이 컸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위가 처가에 와 밥먹고 묵는 것까지 용납않고 되쫓아 보내던 박정한 장인은 몇해만에 딸과 사위를 불렀다. 집 가까운 한 곳에 이르더니 보여주는데, 조촐한 집에 뜨락도 아늑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그야말로 분통같이 꾸며져 있다.
“네가 시집갈 때 네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천이백냥은 들거라고 하더구나. 그렇기로 그 많은 돈을 공연히 남의 눈이나 즐겁게 하려고 써 버릴 것이 뭐냐? 그래 그 돈을 따로 세워 가지고, 그 동안 늘렸느니라. 그 불어난 것으로 이 집도 지었고, 시골에 땅도 사서 계량할 만한 추수는 받게 해 놓았지. 이만하면 남의 집에 꾸우러 가지는 않을 것이니, 예 와 살도록 하여라. 그렇다고 추수나 받아먹고 편히 지내라는 얘가는 아니다. 후고의 염려없이 사나이답게 앞길을 열어가는 기본을 삼아라, 그런 얘기지, 하하하.“
한번을 그의 사는 집을 수리하는데 그 공임 몇 푼을 가지고 장색들과 다투는 것이었다. 자제들이 보기에 딱해서 조용한 시간을 타서 말씀드렸다.
“가난한 일꾼들의 수고비를 깎자고 하신다면 상신된 체면에 뭣하지 않습니까?”
“모르는 소리! 정승은 일국의 의표야. 나 편한 것만 취해서 품삯을 올려주면 곧장 선례가 돼서 많은 백성에게 누가 된다는 것은 왜 생각않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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