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옭아채서 당겨서는 퍽!
임진왜란 때 얘기다. 적은 오래전부터 침공을 준비해왔고, 더구나 그들은 저희끼리 자나깨나 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 직업군인이라기보다 전쟁버러지들이다. 조선조 개국이래 2백년간이나 평화에 젖어, 가뜩이나 착한 심성에 오손도손 자급자족으로 농사를 즐기며 살아오던 우리나라로선 그야말로 맑은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이 독한 종족들은 저희들 말마따나 거의 그냥 걷는 정도의 속도로, 큰 저항 받지 않고 소백산맥의 분수령인 조령을 넘어섰다. 유명한 신립 장군이 천험의 요새인 조령의 수비를 버리고,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항거하다가, 전멸을 당한데 대해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장수나 그의 측근 장교들이 제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훈련받지 못한 이 순하디 순한 백성으로 불시에 조직된 군대가 처음 듣고 보는 조총이 빵빵빵빵 울리면서 곁의 사람이 피흘려 쓰러지는 것을 보고 뿔뿔이 거미새끼 흩어지듯 하는 날이면 그나마 허사여서, 죽을 땅에 놓고라야 용기를 낼 수 있다는 원리를 좇아, 달천강을 등뒤로 두고 버텼던 것이라고, 그를 두호하는 측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사실로 수하 군대가 뜻대로 움직여 차츰 가다듬어져,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지역에서는 의병들이 벌떼같이 일어나고, 관군도 양주 게넘이고개에서 신각이 패잔병을 수습해 북진하는 적을 요격 전멸시켜 차츰 전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다만 신각은 상관인 도원수 김명원의 절제를 받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그의 승전보고가 정부에 도착하기 직전에 처형당하였다.
이 무렵 임중량이라는 분이, 조상은 울진사람이지만 평양 못미쳐 중화땅에 살았는데, 적이 평양을 포위하고 남은 병력으로 사방 노략질하고 다니는 꼴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침 부모님이 돌아가 복상중이었으나, 이런 난국에 사사로운 일에 얽매일 수 있겠느냐고 떨치고 일어나니, 그의 명성과 인품을 흠모해 따른 군정이 4백여 명이나 되었다. 때는 중화군수 김요신이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버려 백성들은 어쩔 줄 몰라 떨고 있는 터라, 곧장 그들을 독려하여 성을 수축해 탄탄히 쌓고 둘레로는 깊은 도랑을 파서 바닷물을 끌어 해자를 만들어 쉽사리 접근 못하게 해 놓고는, 기회를 보아서는 나아가 적을 괴롭혀대니 놈들은 배후에 이런 적을 두고 평양 공격에 전념할 수가 없어, 대거해서 이 조그만 성을 공격해 왔다. 임중량이 말을 타고 나와 대적해 몇합을 싸우다가 등을 돌려 성중으로 쫓겨 들어왔더니, 적은 우습게 여겨 겹겹이 둘러싸고 들이쳤다. 그런데 적들로서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져 많은 병력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무엇이든 유비무환이다. 미리미리 준비한 게 있으면 닥쳐올 근심이 없는 법이라지만,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새삼스레 어떻게 누구를 훈련해 낸단 말인가? 더구나 적은 역전의 용사요, 천하의 독종들이다. 그러나 그는 아주 느긋하게 성안의 백성들을 데리고 세상에도 묘한 것을 만들어 냈다.
진흙을 뭉쳐 가운데가 잘룩하게 주먹만한 덩어리를 지어 불에 구워냈더니 단단하기가 돌덩어리같다. 삼베로 꼰 튼튼한 밧줄 끝에다 그것을 달아메고 한 발이나 넘겨 되는 다른 끝을 작대기에다 동여맸다. 그리고는 주민들을 불러서 훈련하는 것이다. 마당 복판에다 굵은 말뚝을 박고, 작대기를 홰홰 돌려 세게 원심력이 생겼을 때 후리치니 끝에 추가 있어 무서운 힘으로 칭칭 감긴다.
"자! 그것을 힘껏 잡아당겨 봐라." "안 끌려요. 내 몸이 도리어 끌려 가는 걸요." "그래? 그럼 잘 됐다."
그는 주민들을 갈라 조를 짰는데, 그들 중의 하나는 도끼 자루를 갈아 끼워 아주 길게 해서 제일 무지한 놈이 들게 하고, 눈치 빠르고 머리가 잘 도는 사람이 새로 만든 신기한 무기를 들었으며, 몇 사람이 예비로 그의 등뒤에 섰다. 또한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안에서 자유로이 왕래하게 호를 파서 모두가 숨고, 집집마다 있는 가마솥을 떼어다 걸고, 일부는 줄을 서서 물을 길어다 붓고, 통장작을 길길이 쌓아 놓고 물을 끓이며, 한편으로는 바가지에다 긴 자루를 달아서 들고 줄로 늘어섰다.
"자아, 지금이다!"
나아가 싸움을 돋우고 임공은, 숨어 있는 여럿에게 손을 저어 군호하였다.
"이놈의 성이 왜 이렇게 죽은 것처럼 조용하다지?"
사다리를 놓고 기어오르는 적의 머리가 성곽위로 드러나자
“위~위~위잉."
채찍을 휘둘러서 맞추니 목과 어깨를 얼러 칭칭 감긴다.
"자아, 당겨라 당겨. 옳지 삼봉이 넌 찍어라." "퍽."
여기 저기서 놈들의 골통이 뻐개져 나뒹굴었다.
"자, 다음은 물 좀 먹여라."
방패를 머리에 이고 기어올라 마악 벗어버리는 찰나 끓는 물을 바가지로 퍼서 끼얹어댔다.
"퍽!" "야, 또하나 깼다."
이리하여 그의 지혜와 용기로 성은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백성들도 무사하였고, 감사는 신나게 그의 공을 조정에 보고해, 포상으로 그에 걸맞는 벼슬이 내려졌다. 그뒤 평양이 수복되고 왜병도 멀리 남으로 밀려난 뒤의 일이다. 거동행차가 그곳 시골길을 지나는데, 봄철이라 그랬든지, 임금님의 연을 맨 군정들의 일부가 수렁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게 돼 모두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때 나룻이 길게 나 풍신이 아주 좋은 건장한 군인 하나가 나타나더니 연 앞채를 선뜻 들어서, 모두 무사히 벗어나고 임금도 한숨을 쉬었다.
"저 장사는 어디 사는 누구인고?" 모시고 가던 선전관이 아뢰었다. "중화 의병장 임중량인 줄로 아옵니다." "오! 오! 그 채찍을 휘둘러 적을 옭아잡은 장수가 그대던가?"
임금님은 감격의 찬사를 내리고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자손들도 모두 능력을 따라 등용하여, 그의 공을 길이길이 칭송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