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오라버니, 어디 계슈?
고대소설이나 야담에서 절개있는 기생 이름을 들자면, 북에는 평양의 계월향, 남으로 진주의 논개를 드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면 계월향, 그가 어떠한 행적을 남겼기에 그러는 것일까? 그는 임진왜란 때 평양의 기생으로 노류장화의 몸이라, 적의 선봉 소서행장 막하의 용맹한 장수로 평양성을 함락시켜 거드럭거리는 소서비에게 붙잡혀 그의 시중을 드는 신세가 되었다. 가만히만 있으면 호의호식하고 없는 것 없이 지내겠지만, 그는 의기있는 이 나라의 아가씨였다. 하루는 한껏 아양을 떨어 그의 환심을 사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장군님? 저는 이렇게 장군의 굄을 받아 행복하게 지냅니다만, 저의 가족들이 성밖 난민 중에 섞여 고생하고 있으니, 불러들여서 밥 한끼라도 배불리 먹여 주었으면 좋겠사와요. 예? 장군님.” “그러냐? 요 예쁜 것아! 그게 네 소원이라면 그리 하려무나.”
당시 김응서라고 무과에 장원급제한 용감한 청년이 조방장으로 기용되어, 어이없이 빼앗긴 평양성을 되찾으려고 동료들과 보통문 밖에 둔치고 있었는데, 구지레하게 민간인 차림을 하고 피난민들 틈에 끼어 성밖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입을 딱 벌린 채 병장기를 들고 성 위로 왔다갔다 하는 적군을 멍청히 바라보고 섰으니 누가 보아도 정신나간 사나이 같다. 그때 녹의홍상으로 화사하게 차린 젊은 여자가 적군 틈을 헤치고 성가퀴께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희들 수장의 애인이니 막을 놈도 없고, 우리 백성 중에선 이런 소리도 들렸다.
“저런 죽일 년이 있나? 아무리 천한 기생의 몸이기로 적에게 붙어 호강을 해?”
그러나 김군관만은 달랐다. 적이 부산포로 상륙하여 승승장구해 쳐 올라올 제, 둘이는 조용히 만나 얘기한 것이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됐는데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지 않아요? 고기값이라도 해야지!`
계집은 적병을 밀치고 성가퀴 위로 상반신을 드러내며 깁을 찢는 듯한 목소리로 거듭해 외쳤다.
“우리 오라버니, 어디 계슈?” “오! 월향이냐? 나, 예 있다.”
원래 목소리대로라면 천지가 진동하겠지만 맥빠진 목소리로 응답하자,
“오라버니, 얼마나 고생하셨소? 우리 장군께 얘기해서 같이 있자고 했으니 이걸 타고 올라오셔요.”
성 위에서 내려주는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양을 보고, 정체를 모르는 이는 아마 무척 욕했을 것이다.
“장군님! 저의 니이쌍이에요. 여러날 굶었다는군요. 내, 밥 먹여서 쉬게 하고 올라 올께요.” “오냐 오냐. 아암 그래야지.”
푸짐하게 차린 음식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 둘이는 의견을 모아 여자는 저녁식사 때 적장에게 술을 한껏 권해 먹였다. 잠시 후 적장은 의자에 벌렁 기대어 코를 드르렁 드르렁 고는데, 화경같은 두 눈깔을 부릅뜨고 양손에 칼을 뽑아 들었으니, 도무지 모를 일이다.
“버릇이 그래요, 자고 있는 것이니 자! 어서.”
김응서는 여자가 구해다 준 칼을 뽑아들고 살금살금 다가가 내리쳤다. 워낙 능숙한 솜씨라 목은 단칼에 떨어졌는데, 그래도 놈은 두 칼을 차례로 던져 하나는 천정에 꽂히고 나머지는 기둥에 깊이 박혔다고 기록에는 나 있다.
상투를 쳐들어 화롯재에 눌러 피를 멎게 해 허리에 차고, 그 곳을 떠나려니 여자가 매달린다.
“제발 나를 데리고 가 주셔요.”
혼자 몸도 안전하게 빠져나갈지 말지한데, 연약한 여자를 데리고? 두고 오면 영락없이 놈들 손에 죽을거고... 망설이는 양을 보자 여자는 눈을 꼭 감으며 부탁하는 것이다.
“놈들에게 당하느니 당신 손에 깨끗하게 죽겠어요.”
차마 못할 짓이건만 김응서는 아직 피가 뚝뚝 흐르는 그 칼을 휘둘렀고, 여인은 비명 한마디 없이 합장한 자세로 고꾸라졌다. 이리하여 평양 수복에 세운 공로로 김응서는 경상병사로 승진하였고, 난이 끝난 뒤 사명대사와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가 화의를 성립시켜, 선무일등공신에 올랐다. 계월향에 대하여는 달리 포상한 기록이 없으나, 논개의 그것처럼 평양의 기생들 사이에서 추모하는 행사가 있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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