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가 쏟아지는 우리 선인들 이야기 - 이훈종
사명당의 사처방인가?
임진왜란 하면 우리 민족사에 그런 비극이 없었다. 전국 구석구석에 있는 그 많은 사찰이 하나같이 임란에 불타 없어져 그 뒤에 재건한 것이라니, 전문적으로 절만 사르고 돌아다닌다 해도 힘들 노릇이다. 한일합방 후 한국의 전통문화를 찾아 문화재를 조사하러 건너온 저들 전문가들이 다 혀를 내두른다.
“어쩌면 이렇게도 깨끗하게 싹 쓸어 없앴을까?”
그러다가 지도를 펴 들고 경상북도 영주군의 부석사를 찾아나서며, `여기라면 혹시 무엇이?` 했다가, 무량수전의 아담한 모습을 발견하고 눈물이 나도록 고마워했던 감격을 그들은 기록해 놓고 있다. 그 왜란 중에 저들의 별동대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사산대사를 만나 뵙고는 그만 저도 모르게 합장하였다.
“난리가 난 것은 어쩔 수 없는 운세라지만 살생은 삼갈지니라.”
그들은 훈계를 듣고 돌아서며 너무나 의젓한 그 모습에 감탄하였다. 반야심경에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두려워 겁날 것도 없으며, 어떠한 사리에도 벗어나 망상도 버리게 된다`더니 저런 스님 목에는 칼을 겨눌 수도 없을 뿐더러, 그랬다고 눈 하나 깜짝할 스님도 아니다. 그 뒤 대사는 행재소로 선조대왕을 찾아 뵙고, 자신이 나서서 도와 드리는 것이 도리이나, 나이도 많고 근력이 부쳐, 대신 제자 유정을 보내오니 손발같이 부리시라고 유언같은 말을 남기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생을 마친다. 이 서산대사 휴정의 천거로 나라에 봉사한 이가 사명당 유정인데, 당당한 체구에 머리는 깎았으나 풍채좋은 수염은 그냥 기르고 지냈다.
“머리 깎은 것은 승려인 것을 나타냄이요, 수염을 남겨 둔 것은 대장부임을 보임이외다.”
그런데 두 분의 필적을 보면 서산대사는 아주 소탈하고 힘찬 필치에 획 하나하나가 모두 붙끝이 복판으로 지나가는 장봉이어서 남성적인데 비해, 사명당의 글씨는 그냥 틀에 박힌 얌전한 글씨여서 의외의 감마저 든다. 조정에서는 일본인들이 불교를 하 숭상하고, 승려를 정정히 대접하는 것을 알고 저들과의 외교 접촉에는 자주 사명당을 내세웠다. 그가 처음 왜장으로 용명을 떨치는 가토오를 만났을 때다. 첫 마디로 묘한 질문을 받았다.
“귀국에 보물이 있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일본에 있소이다.” “무슨 보물이기에 우리에게 있다고 하시지요?” “조선의 모든 사람이 당신의 모가지를 소원해, 모두가 갖고 싶어하니 그것이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래서 천군만마를 호령하던 사나운 장수건만 그만 기가 팍 죽었다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서 크게 차이가 난다. 서로 웃었다고 한 데도 있고, 가토오가 질려서 떨었다고 써 있는 데도 있다. 이 내용은 우리 외에도 저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어서, 대사가 뒷날 강화 교섭차 일본에 갔을 때, 행렬 가운데 그의 뛰어난 풍채를 보고는 모두들 “저 어른이 바로 설보화상(보물 얘기를 했다는 그 스님)이냐며 생불같이 합장해 우러러 뵈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기록이나, 왜란의 원한이 얼마나 깊었기에 뒷날 <임진록>이라는 소설책이 나왔고 그 가운데서 얼마나 일본을 욕했는지, 일제하에서는 인쇄, 구독이 금지되었었다. 그러나 백성 사이에 어찌나 많이 애독되었던지, <임진록> 가운데 몇 가지 기록은 마치 사실인양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인용되어서 `사명당의 사처방인가?`는 온돌방이 몹시 추울 때 향용 쓰는 말이다.
왜인들이 “조선의 생불이 온다 하니 반드시 묘계가 있으리니 어찌하리요?” 하고는, 여러 폭 병풍에 글을 써서 길가에 펴놓고 지나온 뒤에 외우겠냐고 한다. 이에 다 외우고 끝의 폭을 못외워 이상히 여겼더니, 그 폭만은 바람에 접히어서 눈에 띄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못물에 천근짜리 방석을 띄우고 선유하라 하는 것을 올라앉아 떠다니며 일본 왕더러 `친히 나와 춤추어 흥을 돋우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두 번의 묘계(?)를 모두 실패한 뒤에 그들이 낸 계교를 원문대로 옮겨본다.
“구리쇠로 집을 지어 사명의 처소로 정하고 문을 봉한 후, 숯을 쌓고 대풍구를 부치니, 사명이 구리방석에 얼음 빙자를 쓰고, 벽엔 눈 설을 쓰고 단정히 앉아 팔만대장경을 외우니 좌석이 서늘하더라. 이때 왜놈들이 대풍구로 밤낮 이틀을 부치니 구리 쇠기둥이 다 녹는지라. 왜왕 왈, `아무리 생불이라도 혼백이 다 녹으리라!` 하고 군사로 하여금 문을 열게 하니, 사명당이 가사의를 입고 완연히 앉아 호령 왈 `남방이 덥다 하더니 어찌 이리 추우뇨?` 자세히 보니 앉은 데 얼음이 얼고, 사방 벽에 눈이 뿌리거늘...” 했는데, 전하는 말에는 눈썹에 성에가 끼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렸더라고 해서 그쪽이 더 실감이 난다. 끝내 그들의 항복을 받고 “매년 인피 3백장과 동철 3천근, 모관 3천근, 왜물 3천근을 조공하라.” 하여 다짐을 받고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구두로 전해오는 말에는 총각의 불알 말린 것 서 말에, 처녀 인피로 3백장을 받기로 했다고 과장 윤색해서 전하고 있다.
얘기는 본론으로 들어가 그의 인품을 평할 때, 그가 언제나 당당할 수 있었고 범하지 못할 위엄이 넘쳤던 것은 그의 마음 가운데 한점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점으로 인해 어떠한 위력이나 유혹으로도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으니, 이 얘기의 초점은 여기에다 두고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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