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자식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홍순목
홍순목(1816~1884)의 본관은 남양이고 자는 희세, 호는 분계이다. 헌종 10년 1844)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6년(1869)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렀다. 항상 근신하는 자세로 자신의 지조를 지켜 고인의 풍도가 있었다. 그에게 영식이란 아들이 있었는데, 처음 태어날 적에 피가 묻어 있는 태를 얼굴에 뒤집어쓰고 태어났으므로 홍순목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그 아이를 키우지 않으려고 하자, 집안 사람들이 간곡히 만류하는 바람에 마음이 풀려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그는 고종 10년(1873)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규장각 직각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갑신정변을 주도하는 개화당의 핵심 인물이 되어 활약하던 중 실패로 돌아가 위병에게 살해되었다. 홍순목이 그 비보를 듣고 독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지만 곧바로 그의 관작도 삭탈되었다. 홍영식의 형 홍만식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생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살해당하였고 아버지마저 자결하였다. 그 자신도 자진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지만 폐인으로 자처하였는데, 갑오개혁 뒤에 모두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광무 9년(1905)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독을 마시고 자결하여 시호가 내려지고 벼슬이 추증되었다.
외국과의 개방과 통상 논의를 맨 먼저 꺼낸 박규수
박규수(1807~1876)의 본관은 반남이고 자는 환경, 호는 환재이다. 헌종 14년(1848)에 문과에 급제하고 고종 9년(1872)에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의 조부는 연암 박지원으로 문장과 재학이 한 시대에 칭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홍국영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피하여 금천에서 살았다. 얼마나 뒤에 홍국영이 패망하자 그제야 벼슬길에 나서기는 하였지만 천문, 지리, 병법, 농업 그리고 경제에 대한 학술과 서양의 학문까지 환하게 알았던 그의 지위는 군수에 그치고 말았다. 어쨌든 그런 연암의 손자 박규수도 소년 시절에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더욱 높아 계동에 살 적에 익종이 세자로 있으면서 변장을 한 차림으로 그를 찾아가자 그 일을 영광스럽게 여겼다. 그가 평안 감사로 있을 적에 미국의 배가 삼화항에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민심이 놀라 동요할까 겁이 나서 하루 종일 연광정에서 풍악을 울리게 하면서, 미국의 배를 얕은 여울로 유인하여 불태우게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 11년(1874) 이후에 이르러서는 박규수가 나라 안팎의 사정이 급변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외국과 문호를 개방하고 통상을 하여야 한다는 논의를 처음으로 제기하자, 조정의 많은 관원들이 떠들며 그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2년 뒤인 고종 13년(1876) 병자년 6월 20일에 이르러 일본의 전권대신 구로다, 부대신 이노우에와 조선 대신 신헌, 부대신 윤자승이 강화도에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박규수가 주선한 힘이었다. 그리고 또 일본에 통상사절을 보내도록 임금에게 주청하여 참판 김기수를 선발하여 보냈으며, 또 조선의 신진 문관으로 재능과 명망이 있는 18명을 뽑아 일본에 보내어 실정을 시찰하게 하였다.
그의 지위가 정승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계동에 있었는데, 가난한 선비의 생활과 같았으며, 뜰앞에 한 그루의 키가 작고 가지가 가로로 뻗어서 퍼진 소나무만 있어 박규수의 청렴한 풍채를 연상하게 하였다. 그가 평안 감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집안 사람이 절약해서 쓰고 남은 재물로 3백 석을 수확할 수 있는 정도의 토지를 사들였는데 박규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땅 주인의 마음이 고약하여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긴 토지를 이중으로 팔아먹은 셈이었다. 그렇게 되자 앞서 토지를 사들인 자가 박규수에게 호소하였더니, 박규수가 말하였다.
"일이 그렇게 되었는가? 이것은 그대의 전토인데 우리 집에서 잘못 사들인 것이네."
그 토지 문권을 가져오게 하여 불에 태워 버렸다. 집안 사람들이 몹시 놀라며 그 값을 토지 원주인에게서 받아내려 하자, 박규수가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말라. 감사로 있다가 내직으로 들어와 정승이 되고 토지를 사들였으니 이는 실제로 나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떻게 정승이 되어 백성과 송사로 다툼질을 할 수 있겠는가?"
일체 없었던 일로 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못하게 하였다.
효성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초상화를 얻게 된 이희익
이희익(1844~?)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치용, 호는 경당이다. 고종 11년 (187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9년(189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그는 효도와 우애가 남달리 뛰어나 성균관 대사성 정기회가 그의 효행을 추천하였고, 김기수는 그의 학술을 추천하였다. 그의 아버지 이승우는 장악원정을 지냈는데, 호는 석운으로 매산 홍직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으며, "송서백선"을 편찬하여 세상에 펴냈다. 이승우가 세상을 떠났을 적에 아들 이희익이 그의 아버지 초상화를 그려 두지 못했던 것을 한탄하면서 어느 화가를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으나, 그 화가도 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하직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3일 만에 그 화가가 찾아와서 이희익에게 말하였다. "내가 집으로 돌아간 날 밤의 꿈에, 그대의 선공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말씀하기를, '자네가 특별히 내 모습을 그려주어 내 자식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정성을 저버리지 말기를 바라네' 하시면서 또렷하게 말씀하시기를 3일 밤을 잇달아 그렇게 하셨기에 그 모습이 내 눈에 완연히 남아 있다오." 그 자리에서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그림을 보더니 생전의 이승우의 모습과 조금도 틀리는 데가 없었으므로 모두들 효성에 감동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여겼다.
민 중전을 변장시켜 장호원까지 피신시킨 홍계훈
홍계훈(?~1895)의 본관은 남양이고 초명은 재희이며, 자는 성남, 호는 규산이다. 고종 19년(1882) 임오년 6월이 되어 훈련도감 군졸에게 여러 달 밀린 봉급미 가운데 겨우 한 달 치를 지급하면서 선혜청 산하의 창고 관리인이 교활하게 농간을 부려 수량도 기준치에 미달되고 품질마저 나쁜 대다 돌과 모래 등이 섞인 쌀을 지급하자, 군졸들이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창고 관리인을 때려 죽였는데, 그 창고 관리인은 바로 선혜청 당상인 민겸호가 사사로이 부리는 하인이었다. 몹시 화가 난 민겸호는 마침내 주모자 2명을 체포하여 아침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처형하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 난군이 큰 소리로 한 번 외치자 쌓였던 원한이 격렬하게 일어나 군영 안으로 마구 뛰어들어가 제각기 무기를 가지고, 한 부대는 먼저 민겸호와 영의정 이최응 그리고 경기 감사 김보현을 죽이고, 한 부대는 의금부의 감옥문을 마음대로 열어 죄수들을 내보냈다. 또 군졸을 서울 근처의 산으로 나누어 보내어 모든 절을 불태우게 하였는데, 그것은 대궐에서 절에다 공양을 드리며 치성을 드리느라 군졸과 백성을 돌보지 않아 창고의 곡식이 바닥이 났다고 여겨서다. 그리고 한 부대는 곧장 훈련도감의 본영인 하도감으로 가서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또를 찔러 죽이고, 한 부대는 줄곧 대궐 안으로 들어갔는데, 무기를 든 군졸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시에 많이 몰려들어 궁궐 안으로 화가 밀어닥칠 기색이 역력하였으며, 그들의 내심은 모두 중궁전인 내전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런 다급한 와중에 홍계훈이 무예별감으로 교묘히 변장한 중궁을 호위하여 세자 익위사 찬선 민응식의 장호원 고향집으로 피신하게 하였다. 그 뒤 중궁전의 신임을 얻어 동학농민운동 때는 장위영의 영관이 되어 전주성을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고종 32년(1895) 을미년 8월에 내각 안에서 시국 수습에 대한 국론이 나뉘고 정국이 혼란에 빠져들자 당시 집권세력에 밀려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이렇게 한탄하며 생각하였다.
"요즈음 임금의 권한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무리들이 있는데, 이것은 성상 혼자서 국정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고 중궁전에서 너무 지나치게 관여하여 개혁을 하려던 정치가 날마다 잘못되어 가고 있어 나라의 앞일이 큰일이다."
이런 와중에 백성들 상호간에 서로를 의심하여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크게 싹트고 있었는데, 특히 이 때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은 바로 흉도 가운데서도 더욱 사납게 날뛰는 자였다. 그는 이두황과 함께 못된 짓을 하면서 서로 도와 거느리고 있던 훈련대를 일본 자객의 앞잡이로 삼을 것을 모의하고, 이두황이 광화문을 따라 군사를 정돈하여 진격하려고 하였다. 이 때 홍계훈이 연대장으로 대궐 안에 있다가 한쪽 손으로 그들을 가로막으면서 말하였다.
"한밤중에 대궐로 침범하여 장차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나를 죽이지 않고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흉도들의 탄환을 맞고 숨이 넘어갈 때까지 그들을 꾸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범선은 건청궁의 후문을 지키던 자들을 모두 베어 버리고 침입하여 군사를 진두 지휘하며 곤령각에 이르렀다. 칼을 빼들고 앞장 서서 계단을 지나 올라가니,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큰 소리로 물러나라고 꾸짖자, 우범선이 그 자리에서 그의 목을 베고 곧장 옥호루로 무단 침범하여 중궁전을 시해하는 데 적극 도왔다. 연기와 불꽃이 가득한 속에 중궁전은 옥체가 온전하지 못한 상태로 힘 없는 나라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피묻은 옷 곁에 대나무가 돋아났던 민영환
민영환(1861~1905)의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문약, 호는 계정이다. 호조 판서와 선혜청 당상이었던 민겸호의 아들이다. 고종 15년(1878)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돈령부사에 이르렀다. 고종 광무 9년(1905) 을사년 11월에 조선 정부와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때 민영환이 소를 올려 그 부당함을 간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곧바로 칼을 빼어 자결하였다. 10여 일이 지난 뒤에 그의 피묻은 옷을 간직해 둔 곳에서 푸른 대나무 몇 줄기가 난간 틈으로 돋아났는데, 그 기상이 하도 늠름하여 감히 범하지 못할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시호는 충정이고 정려되었다.
이 책을 읽고
"형님이 훗날 이 쥐구멍으로 나가려 하여도 잘 안 될 것이니 오늘 시험 삼아 나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은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을 모두 죽인 당대의 권신 심정의 아우 심의가, 권세에 눈이 어두워 날뛰는 형을 보고 바보로 자처하면서 쥐구멍을 가리키며 형에게 한 말이다. 그 뒤 심정이 복성군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기에 이르자 심의가 다시 통곡하며 말하였다.
"쥐구멍은 저기 있는데 형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러한 내용은 "대동기문"의 완역본인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상, 중, 하)에 소개되어 있는 내용이다.
"대동기문"은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에 당시 사학자요 문학가였던 금천자 강효석 선생의 저서이다. 그는 "자기 것은 업신여기고 남의 것만을 그렇게 부러워해도 되는 것이냐?"고 당시의 시대상을 혹평하면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의 내용들은 "국조방목", "문헌비고", "지봉유설", "목민심서", "명신록", "상신록", "명장전", "조야집요", "소대기년", "인물고", "향토지", "비명", "행장", "세보" 등 200여 종의 문헌과 출전에서 광범위하게 조사, 연구를 거듭한 끝에 꼭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한 얘기들을 골라 수록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 책의 서문을 쓴 번천 김영한 선생은, "오확(전국시대 진나라의 역사)은 무게 천 근을 드는 장사였지만 자신의 몸은 들지 못하였으니 어찌하여 남의 물건을 드는 데는 그렇게 강하고 자신에게는 그렇게도 약하였던가"하며,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 역사나 바다 멀리 남의 나라 역사보다도 우리나라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상, 중, 하)이 비록 우리 선조들의 선비정신과 나아가 우리 민족정신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체계적인 이론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유교를 국시로 삼아 500년 동안 한 왕조를 버티어 왔던 정신이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하는 데는 이 이상 훌륭한 저술과 자료는 없다고 믿는다.
이 책에는 대학자, 문무고관, 효자, 충신, 열녀 등이 등장하는가 하면 말단서리 , 상민, 천민, 노비, 기녀 그리고 역적들까지 등장하여 각자의 굽힐 줄 모르는 개성 있는 삶을 펼쳐 놓았다. 의리와 지조를 지킨 선비 이야기, 괴이하고 해학적인 이야기, 효도와 충절에 관한 이야기, 학문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국가와 사회를 귀한 큰 공과 업적에 관한 이야기들이 고루 담겨 있어 우선 흥미 진진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일상의 틈을 이용하여 가정에서, 직장에서 또는 출퇴근길에 읽기 알맞은 책이다. 각급 학교에서나 직장에서 훈화를 하여야 할 때나 교육적인 인용을 할 때,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 줄 때, 문중 모임에서 선조들의 일화를 얘기하여야 할 때, 나아가 학생들이 우리 역사와 선조들의 행적에 대한 이면을 깊이 이해하려 할 때 자료로 인용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무진장의 보고라 할 만하다. 특히 각급학교의 교장선생님이나 학생지도의 책임을 맡으신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지도할 때 우리의 정신을 찾고 그 뿌리를 이해시키는 데 꼭 활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미 많은 학자, 저술가, 칼럼니스트들이 이 책의 원전인 "대동기문"에서 그 내용을 많이 인용해 왔다.
우리 국민들의 큰 폐단은, 중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은 잘 알아도 우리나라 인물들이나 심지어 자기 집안 조상들의 행적조차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당연히 알아야 한다. 바야흐로 국제화다. 세계화다. 정보화다 하며 지구촌이 인터넷으로 연결되고 있는 시대 조류 속에, 자칫하면 우리 조상들이 그들의 삶을 통하여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물려준 민족정기 또는 우릴 민족 고유의 정신이 사라질 우려가 없지 않은 때다. 그러므로 "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상, 중, 하)은 현대 한국인의 한국인다운 삶의 모습을 알고 찾고 배우는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997년 정축년 원단에 김판영(전 문교부 차관-성균관 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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