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4. 변란과 풍운의 국운
닥쳐 올 일을 미리 짐작하고 대처한 이서구
이서구(1754~1825)의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낙서, 호는 척재 또는 강산이다. 영조 50년(1774)에 문과에 급제하고, 순조 25년(1825)에 우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그가 정승에 임명되자 판서인 풍석 서유구가 좌객들에게 말하였다.
"강산이 정승이 되리라는 것은 그가 약관 때부터 우리 선친께서 이미 짐작하셨던 바다. 강산이 약관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우리 선친과 규장각의 관원으로 함께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고 계실 적에, 그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며 행동거지가 무게가 있어 사람들이 그를 대단한 인재로 지목하고 모두들 그가 삼공이나 보상의 지위에 오를 것을 예견했었다. 언젠가 우리 선친께서 혼자 남산 밑 조그마한 집에 살고 있는 강산을 찾아가신 적이 있었다. 인사가 끝나자 갑자기 행랑 아래서 떠들썩한 소리로 강산의 성명을 불러대며 욕설을 퍼붓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강산은 목소리며 얼굴 표정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하였다. '저 놈이 강상의 죄를 범하였는데 다시 그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으면 또다시 멋대로 못된 짓을 저지를 것이다. 저렇게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데도 만약 용서한다면 앞으로 법을 시행할 수 없게 되고 사회기강이 허물어질 터이니, 너는 저놈을 수구문 밖으로 끌고 가서 없애 버리고 오너라.' 그 종이 명을 받고 떠났는데, 우리 선친께서 그 일의 시종을 알아보려고 점심을 함께 하며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에 수구문으로 갔던 종이 돌아와 그 놈을 그만 죽였다고 고하자, 강상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 놈이 비록 큰죄를 범하여 법대로 죽이기는 하였지만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자이니 매장은 후하게 해주어라.' 종이 응답하고 나가므로, 우리 선친께서 그래도 미심쩍게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종이 다시 와서 고하기를, '형조의 서리가 뵙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강산이 서리를 불러들여 연유를 물었더니 서리가 대답하였다. '형조 판서 재감께서 지금 등청하여 계시면서 수구문 밖에 피와 살점이 난자한 시체 한 구가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는데, 바로 본댁의 종이었습니다. 관아에 통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람을 때려 죽였으니 이는 법을 벗어나 처벌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소인에게 탐지하여 보고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당시 형조 판서는 바로 채제공이었다. 강산이 조용히 서리에게 말했다. '그 자는 우리 집의 사노이며 강상의 죄를 범하였기에 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고 또 관아에 통고할 것 같으면 역시 수치스러운 일이 되겠기에 그리한 것이네.' 젊고 명망이 있는 인사로 목소리와 얼굴빛이 전혀 동요됨이 없이 차분하게 일을 처리하였느니 어찌 원대한 인물이 아니겠는가?"
이서구는 닥쳐 올 일을 미리 알아맞히는 때가 많았다. 순조 때 두번째로 전라 감사에 임명되어 적폐를 바로잡고 선정을 펴니 온 도가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임기가 끝나 서울로 돌아올 무렵에 호적을 가져다 여러 서리에게 나누어 주며 다시 베껴 오도록 하여 어느 창고에다 별도로 보관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호적 창고에 불이 나서 다른 장부는 하나도 남김 없이 모두 타버렸지만 새로 베껴다 따로 보관해 둔 호적은 아무런 탈이 없었다. 자기가 떠난 후 이러한 일이 저질러질 것을 짐작한 바 있었다. 또 다른 일로는 그가 전라 감사로 있을 때 어느 날, 하늘의 북두칠성이 나주지방에 광채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영에서 부리는 하인을 불러 단단히 일렀다.
"네가 지금 당장 나주의 아무개 집에 가면 그 집 며느리가 틀림없이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사내아이거든 반드시 죽여 버리고 계집아이거든 죽이지 말고 돌아오너라."
한참 뒤에 감영의 하인이 돌아와 이렇게 보고하였다.
"정말 계집아이를 낳았더이다." 이서구가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국가의 운명을 어지럽힐 존재였겠지만 하찮은 계집아이인데 무엇을 해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반드시 권세가의 첩실이 되어 그 세력이 한 시대를 기울일 것이다."
그 계집아이가 과연 커서 하옥 김좌근의 첩이 되었는데 바로 나합이었다.
장례 때 백학이 상여를 인도한 이제로
이제로(?~?)의 본관은 전주이다. 겨우 스무 살에 글 짓는 솜씨가 뛰어났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인 석견루 이복현의 꿈에, 붉은 색의 종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종이에 '이제로를 불러 들인다'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이복현이 꿈에서 깨어 매우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이제로 역시 아무 탈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이제로가 갑자기 그의 아버지 이복현 앞에 꿇어앉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소자의 운명이 이미 다하여 슬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나이다."
이어서 울먹이며 제 방으로 돌아가더니 조금 지나서 죽고 말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상한 향기가 그의 방에 가득하고 느닷없이 수백 마리의 백학이 그 집에 날아와 떼를 지어 쫓아도 떠나지 않았다. 발인하는 날이 되자 사방에 운무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더니만 백학이 상여에 모여 앞뒤에서 인도하기에 백학을 따라갔는데, 도착한 곳은 바로 제천 의림지 위의 모산리 뒷산 기슭이었다. 그 산 위에다 널을 멈추게 하였더니 갑자기 운무가 갈라지는 것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하기에 드디어 그 갈라지는 곳을 따라 묘자리를 파기 시작하였다. 파 들어가다보니 구덩이 가운데 경쇠돌이 있으므로 두드리자 '공공' 하는 소리가 나기에 일하던 사람이 이상하게 여겨 괭이로 조금 비집고 보니까 그 밑에 두 마리 백학이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날아가려고 하므로 엉겁결에 덮어 버렸는데 그 한 마리가 다친 듯이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마침내 그 위에다 장례를 지냈다. 그 뒤에 어느 중이 그 묘 아래를 지나다가 그곳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저기가 아주 좋은 묏자리다. 저 곳에 묻힌 이의 손자가 틀림없이 스무 살 전에 옥관자를 두르는 재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정기가 좀 새는 듯한데 꼭 들어 맞을는지?"
그 뒤에 정말로 손자 이인응이 태어나 열 아홉 살에 풍계군의 후사로 출계하여 경평군에 봉하여졌으므로 1품 관원이 되어 옥관자를 두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간에 당시 외척을 비난하였다 하여 작호를 삭탈당하고 먼 섬으로 귀양갔다가 돌아왔다. 이인응의 동생 이택응은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가 요절하였으니, 그 묘터의 운세와 그 중의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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