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3. 탕평과 선비들의 의리
"그와 우리 집안은 원수지간인 데 어찌하여 우리집에 오겠습니까?" "공사는 사적인 혐의를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이 온 까닭은 무엇이오?" "지금 변무사의 임무를 띠고 연경에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면 무함을 변명하겠소?"
그러자 이종성이 해결책을 일러주었다. 비록 당파는 다를망정 당시 국사의 비중을 쫓아 이종성은 모든 경륜과 지혜를 동원하여 변무사 유척기를 도와주었다.
사적으로 원수지간이나 공적으로는 도움을 준 이종성
이종성(1692~1759)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자고, 호는 오천이다. 숙종 37년 (1711)에 진사가 되고 영조 3년(1727)에 문과에 급제하고 영조 28년(1752)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상에 이르렀다.
영조가 만년에 정순왕후로부터 후사를 이으려는 희망이 간절하여 회임에 도움이 되는 보약을 정순왕후에게 자주 올리도록 하였다. 정순왕후는 성덕이 있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애기를 가지면 혹 세손(정조를 가리킴)이 임금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몰래 약을 다른 곳에 버리고 들지 않았는데 주상은 실로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영조가 문씨 성을 가진 후궁을 귀여워하고 있었는데 이 여자가 몰래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할 계략으로 옷으로 배에 덧붙여 마치 아기를 밴 것처럼 꾸미고 아기를 가졌다고 드러내 놓고 말하였다. 그 산월이 되어 몰래 친족에게 부탁하여 민간의 갓 태어난 아이를 구하여 궁중에 들여오게 해서 자기가 낳은 것으로 말하려 하였으니, 그 흉악한 음모는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한편 이종성이 고향인 장당의 오촌으로 가려 하다가 그 기미를 넌지시 살피고 대삿갓과 도롱이 차림으로 날마다 용산강가에 가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루는 석양 때 먼 시골의 무부가 이곳을 지나다가 이종성이 낚시를 드리우고 있는 것을 보고 옆에서 귀고 있는 것이었다. 이종성이 물었다.
"그대는 뉘시오?" 시골 무부가 대답하였다. "나는 아무 고을 사람인데, 무과에 급제한 시 10년이 되어도 아직까지 다리 뻗을 길이 없으므로 서울에 올라와서 벼슬을 구하려 합니다." 이종성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저동 이영부사가 나라의 공권을 장악하였고, 또 남을 구제하는 풍도가 있다 하니, 이번 걸음에 가거든 곧바로 그 집을 찾아가서 그 하인을 찾아 '용산강에서 고기 낚는 노인이 얘기해 보냈다'고 말하면 반드시 유숙시켜줄 것이고, 또 출세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그 사람이 기뻐하며 사례하고 곧바로 저동으로 들어가서, 그 노인의 말대로 전하니 모든 것이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해가 저문 뒤에 이종성이 집에 돌아와서 그 사람을 불러 만나 보았는데, 그 사람이 그제서야 이종성 대감인 줄을 알고 부복하며 황공하게 여겼다. 이종성이 좋은 말로 타이르고 수일 동안 유숙시킨 뒤에 통화문을 수문장을 시켰다.
하루는 이종성이 무장을 불러 신신당부하였다.
"오늘밤 누가 파하고 궁문을 열 적에 반드시 궁비(궁중의 여종)가 붉은 포대기로 함지를 싸서 음식물처럼 이고 들어올 것이다. 네가 곡직을 묻자 말고 수색해 보면 반드시 어린아이가 있을 터이니, 모진 마음을 먹고 손을 대어 한칼에 두 동강이를 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네가 죽게 될 것이다."
그 무장이 그날 밤에 명심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과연 이종성의 말대로 한 궁비가 함지를 이고 들어오므로 불문곡직하고 칼을 휘둘러 죽이니, 온 궁중이 놀라 동요하였다. 이튿날 아침 전정의 국문에 드디어 후궁 문씨의 간악한 계책이 발각되어 같이 모의한 문씨 집안의 족속을 모두 귀양 보내어 죽이고 세손의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다. 이종성이 죽은 뒤, 정조가 지어 내려 보낸 제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용산강가에 낚시 드리울 제 기다린 사람 누구였더뇨
또 이러한 구절이 있다.
오월 강가에서 누구를 위하여 지루하게 기다렸던가
이종성이 장단의 오촌에 물러나 있었는데 오촌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경유하는 곳이었다. 하루는 이종성이 정원을 청소하며 말하였다.
"오늘은 유척기가 오게 될 것이다." 자질이 물었다. "그와 우리집안은 서로 원수지간인데 어찌하여 우리집에 오겠습니까?" 이종성이 대답하였다. "공사는 사적인 혐의를 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자 동구 밖에 벽제 소리가 들리더니, 유 정승이 과연 이르렀다. 이종성이 병풍으로 마루 사이에 가로막아서 서로 얼굴은 보지 않고 물었다.
"공이 온 까닭은 무엇이오?" 유척기가 대답하였다. "지금 변무사의 임무를 띠고 연경에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면 무함을 변명하겠소?" 그러자 이종성이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내가 항상 제삿밥을 좋아하고 있어 아는데, 이웃집에 재가한 여자가 있어 전 남편의 제사를 매우 정성스럽게 지내니 뒤에 얻은 남편이 시기하여 그것을 꾸짖었소. 그 여자가 말하기를, '당신의 말이 잘못되었소. 당신이 불행하게도 죽고 내가 생활이 어려워서 또 개가하면 당신의 제사를 이와 같이 지내지 않겠소'하니, 그 남편이 그 말을 그럴싸하게 여겨 전 남편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나에게 제삿밥 한 그릇을 주면서 그 사실을 모두 말하기에 나도 그 여자를 기특하게 여겼소."
이종성은 또 말하였다.
"내가 금관조복 한 벌을 새로 지은 것을 공에게 줄 터이니, 공은 그 뜻을 유의하기 바라오."
유척기가 그제서야 이종성의 뜻을 알아차리고 떠났다. 연경에 이르러 미리 금관조복으로 갈아입고 청나라 건륭제를 뵈니, 황제가 노하여 물었다.
"너희 나라가 대보단(조선시대에 명나라의 태조, 신종, 의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으로 숙종 31년 창덕궁에 설치하여 지금까지 전하고 있음) 을 세우고 공복을 아직도 명나라 조정을 잊지 못하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단 말이냐?"
유척기가 이종성의 말대로 비유하여 대답하고, 또 입고 간 금관조복을 가리키며 부복하여 말하였다.
"명제의 공복이 이와 같으며 또한 옛말 근본을 잊지 못하므로 폐하지 못합니다."
건륭제가 명제의 금관조복이 화려하고 정제하며 패옥이 쟁그랑쟁그랑 울리는 것을 보고 이어서 분부를 내렸다.
"너희 나라가 본디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서 옛 임금을 잊지 않으니 그 뜻이 가상하고 의관문물이 옛날부터 소중화라 일컬어 졌는데, 그 의복을 보니 참으로 거짓말이 아니로다."
건륭제가 특별히 상으로 천리나귀 한 필을 하사하였다. 유척기가 사신의 소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종성의 뜻에 감사하여 그 당나귀를 오촌 어귀에 매어놓고 알리지 않고 서울에 올라와서 복명하였다. 그 날 이종성은 하인에게 명하여 몇 시경에 동네 어귀에 가면 나귀 한 마리가 매어 있을 테니 끌고 오도록 일렀다. 이종성 대감의 신명함은 온 세상이 경탄하였다. 시호는 문충이다.
소를 타고 온 객을 보고 초헌에서 내린 윤급
윤급(1679~1770)의 본관은 해평이고 호는 근암이다. 오음 윤두수의 후손이며,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풍채가 좋고 문장을 잘하며 뜻이 또한 높아서 일찍이 남과 가벼이 사귄 적이 없었다.
그가 한성판윤으로 있을 때 한성부의 예하관속들이 모두 말하였다.
"오늘날의 세상에 처지나 풍채, 문장과 언론에 있어서 우리 대감보다 앞서는 이가 없다."
하루는 관아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해진 옷과 허름한 도포차림의 소를 탄 한 사람을 만났는데 두 사람이 서로 만나보게 되자, 한 사람은 초헌에서 내리고 한 사람은 소에서 내려 손을 잡고, 올라온 연유를 물으니 소를 탄 객이 말하였다.
"미중(정언 이언세의 자)이 끼니를 거른 지가 이미 사흘이 되었다 하여 어제 우리집에서 마침 환자 받은 쌀이 있으므로 싣고 와서 주었소."
격의없이 환담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하도 의연하여 한성부의 아전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그런데 소를 탄 객은 곧 부제학 윤심형이었다. 윤심형은 포음 윤봉조의 조카이고 호는 임연이다. 윤급은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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